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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6/11 02:37:37
Name   No.42
Subject   호이는 둘리나 줘버려야지...
[꿀꿀한 이야기라서 평어체로 적어봅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5월 말의 어느 날.

압구정에서 상암동까지 바이크를 타고 길을 나섰다. 삼각지에서 효창공원을 넘어가는 고가도로는 이른 퇴근시간에
이미 주차장으로 태세변환을 한 터였다. 늦봄의 태양은 업무시간 종료를 앞두고 재고를 마구 쏟아내고 있었고,
퍽 후덥지근했다. 헬멧에 프로텍터에 중세 기사처럼 완전무장을 한 터라 더욱 그랬다. 왕복 2차선짜리 좁은 길이니
앞차가 서면 그 미등을 노려보며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뒤에 짐을 실은 바이크들이 노견을 타고 아슬아슬
나아가는 모습이 몇 차례나 보였지만, 그 뒤를 따라가고 싶진 않았다. 같잖은 엘리트 의식이라 해도 할 말이 없지만
내 멋들어진 바이크를 타고서 차 사이를 누벼가며 시간과 싸우는 배달 차량 흉내를 내고픈 맘은 없는 것이다.
대체 이 줄은 움직이긴 할까 싶은 생각이 들 때였다. 어디선가 '억'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비명을 지른 것이
나라는 사실이 로딩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나름 메모리는 빵빵한 편이라 생각했는데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나도 옆으로 길게 누워있다. 사실 그건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는데, 눈 앞에서 내 멋들어진 바이크가 옆으로 누워서
으르렁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서둘러 시동을 껐다. 뒷바퀴 휠과 암에 은색 페인트가 뭉개져있고, 번호판이
종이처럼 구겨져 있다. 어떤 빌어먹으실 양반이 시속 0km로 주행중이던 날 피하지 못하고 추돌해버리신 상황이
명확했다. 뒷차의 운전자는 환갑쯤 되어 보이는 이였다. 벌개진 얼굴로 내게 다가온다. 대체 왜 그러셨냐고 묻는
내 목소리에 원망이 하나 가득 담겼다. 헬멧 바이저를 올리는데, 어랍쇼? 진한 알코올의 향기가 후각을 확 파고
든다. 1차로 짜리 고가를 막아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일단 차들을 고가 건너로 옮겼다. 다리와 팔이 아프다.

상대방은 만취 직전 정도로 술을 퍼마신 상황. 지체없이 보험사와 경찰을 호출하려는 나의 바짓가랑이에
강력한 그랩을 시전한다. 돈이 얼마가 됐든 자력으로 보상할테니 음주로 처벌받는 것만 면하게 해달란다. 성당에서
봉사활동하다가 한 잔 한 것이 이렇게 되었다며 자기는 좋은 사람이란다. 속으로는 별 육두문자가 다 떠오른다.
약 30분에 걸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는 정말 여러차례에 걸쳐서 다음과 같은 요점을 반복하여 전달했다.

1. 지금은 두려움과 술기운에 호기롭게 보상 운운하시지만, 바이크가 고가라 견적이 얼마가 나올 지 모른다.
2. 중간에 보험사와 같은 중개인이 없으면 사고처리가 매우 골치아파진다.
3. 지금 당장 다친 나는 병원으로 가야하니 서둘러 사고를 처리하고 싶다.
(4. 술을 쳐드시고 운전대를 잡으셨으면 조용히 닥치시고 처벌을 받는 것이 정의다.)

물론 4번은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버지뻘 비스무리한 양반한테 -비록 음주운전한 망나니라도- 막말을
퍼부을 만큼 예의 없는 자식은 아니다, 난. 계속 예의를 갖춰가며 그를 설득했으나 그는 음주 처벌만은
안된다며 막는다. 이 이후로 벌어진 3시간 여의 실랑이는 너무나 짜증이 나서 구구절절 적고싶지가 않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1. 상대 운전자의 판단력이 의심스러워 집에 있는 가족을 호출하도록 부탁, 그 딸과 사위가 현장에 옴.
2. 세 명의 가족에게 현재는 자력 보상을 하겠다고 하나, 보상의 액수가 천만 단위로 올라갈 테니 보험 처리가
   합리적이라고 설득.
3. 상대 운전자는 딸과 사위의 설득에도 장판파 시전.
4.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여 음주사실 인정, 사고과실 100% 인정, 정식 정비소에서 발행하는 수리비 전액,
   감가상각 보상비용, 치료비, 각종 장구 및 의류 보상비용을 전액 자력 보상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딸이
   친필로 작성 후, 상대 운전자 본인과 연대보증인인 딸의 자필서명과 지장 날인을 받고 마무리.

오후 6시 40분 경에 사고를 당했는데, 내가 병원에서 간단한 진료를 마치고 나온 시각은 익일 오전 2시였다. 보호자
격으로 늦은시간에 걸음해준 선배가 자초지종을 듣더니 어이를 잃어버렸다. 내 것도 없어진 상황이라 뭐 도와주진
못했다. 무릎과 아킬레스 건 근처에 부상을 확인하고 약봉지 받아들고 어기적어기적 귀가하여 잠을 청했다.

다음날 사고난 바이크를 견인 보내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했다. 이 와중에 가해자는 연락두절이다. 그 연락두절이
실로 가증스러운 것이, 그냥 전화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가 아니라 통화중-소리샘-통화중-소리샘의 반복이었다.
아, 이 작자가 화장실을 다녀와서 마음이 변했구먼...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내 전화가 울렸다. 낯선 번호인데
전화를 받아보니 LIG보험사란다. 결국 나는 그 사람의 보험사와 사고 상황에 대해서 지루하고 짜증나는 대화를
다시 겪어야 했다. 그 쪽에서는 심지어 과실이 100:0이 맞냐는 의심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받아둔 각서의
사본을 날려줬다. 수리 견적이 나오자 그에 대해서도 태클이 들어온다. 화가 치밀어서 수리기간 동안 동급의
바이크 렌트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수리기간 약 30일. 1일 렌트비 약 30만원. 9백만원 렌트비 내시라, 짜잔.
보험사 직원이 부리나케 달려온다. 인간들 진짜 간사하다. 가해자와 통화가 됐다. 견적이나 이런게 자신이
배상하기 큰 액수니까 보험처리 하겠단다. 앞으론 자기한테 연락말고 보험사와 처리하라며 띡 끊는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인간들 정말 간사하다. 사고 당일 내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코로 땅이라도 팔 것처럼 빌던 인간이
음주운전 현행범 체포를 면하자 느닷없이 나이 먹은 어르신이 된 모양이다. 경찰서에서 사고접수를 했다. 이미
음주운전 처벌은 힘든 상황이라며 교통사고 조사관이 쓴입맛을 다신다. 조사관에게는 현장에서 작성한 각서의 사본과
현장에서의 대화 약 30분 분량의 녹음파일을 전달했다. 혀가 꼬부라진 채 음주만은 봐달라고 비는 그의 음성에
조사관도 적지 않게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다. 병원에 가능한 한 자주 방문하여 진단서를 제대로 받아오라고 한다.

교통사고라는 것이 당하면 100% 피해자라도 적지 않게 손해를 입는다. 보험사는 결코 사고 전의 상황을 완벽하게
복구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헬멧은 1회용이다. 넘어지면서 땅에 부딪힌 헬멧은 안전기능이 소실된다. 따라서 다시
사야 한다. 하지만 내가 쓰고 있던 헬멧은 중고이므로, 보험사는 그 전액을 보상해주지 않는다. 차량도 마찬가지다.
이제 갓 1600km를 탄, 번쩍번쩍하던 신차인 내 바이크는 이제 사고차량이 되었다. 그에 대해서 보험사가 책정한
경락비용은? 100만원 근처다. 신차 가격이 3천 근처인데. 그걸 알고도 난 보험처리를 주장했다. 자력보상이라는 걸
그렇게 말처럼 쉽게 해줄 리 없다는 의심이 있었다. 그때문에 자력 보상을 강력히 주장하는 그에게 내가 요구한
각서에는 모든 용품의 재구입비용과 감가상각 보상액에 대한 명확한 조건이 붙어있었다. 각서를 작성해준 변호사는
보험사에서 배상받는 액수만큼을 제외하고, 각서에서 보장한 금액만큼 추가로 청구해서 받아낼 수 있다고 한다.
태세전환이 우디르급인 이 가해자가 괘씸해서, 그렇게 해보려 한다. 보험사와의 절차가 마무리되면 액수를 산정해서
내용증명으로 청구, 씹으면 소송. 변호사는 승률 95% 이상을 장담하며, 본인이 겸손해서 95%란다.

사고 현장에서 난 그가 좀 불쌍했다. 죄로 인해서 아들뻘 되는 내게 굽신대는 그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다. 그리고
현장에 달려온 그의 딸과 사위는 -적어도 겉으로는- 매우 경우가 바른 이들이었다. 동정심 + 딸 부부에 대한 호감으로
난 그가 처벌받지 않도록 배려했다. 음, 적어도 나는 그게 배려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다음날부터 싹 달라진
태도와 보험처리라는 형식으로 날 대했다. 조사관, 변호사, 가족과 친구의 의견을 종합하자면, 그쪽은 참 영리하게
플레이했고, 나는 보살노릇을 한 셈이란다. 다행히 보살 코스프레 와중에 악마처럼 집요하게 작성된 각서와 녹음자료가
있어서 적성에 안맞는 보살노릇은 청구서 날리기 전까지만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일
어떤 음주운전자가 또 나를 들이받으면, 그 작자는 현장에서 인생에 줄을 지익 그어줄 셈이다. 역시 타인에 대한 호의란,
적어도 내가 사는 이 땅에서는 도에 넘치는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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