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2/30 03:33:05
Name   삼공파일
Subject   恥不脩 不恥見汙
공자孔子가 유교를 집대성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연구하여 주석을 달고 해석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사람은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입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전개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 마음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네 가지 덕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하고 인간 관계에 대한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정리했습니다. 순자는 선배인 맹자를 비판하며 인간은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열심히 배우고 수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흔히 오해하듯이 영유아의 심리적 발달에 관한 이론이 아닙니다. 공자의 인仁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그 근원에 대한 상반되는 두 가지 해석인 것이죠. 맹자는 그것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고 생각했고, 순자는 인간의 마음 바깥에서 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순자도 맹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감정을 누구나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맹자와 다르게, 인간도 노력하지 않으면 짐승과 다름 없기 때문에 짐승과 같은 상태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타고난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순자에 인상 깊은 구절이 있어서 인용해봅니다.

士君子之所能爲不能爲 사군자지소능위불능위
사군자는 능한 것과 능하지 못한 것이 있다.  

君子能爲可貴 不能使人必貴己 군자능위가귀 불능사인필귀기
군자는 도덕을 귀하게 여기는데 능하고, 사람을 시켜서 자신을 귀하게 만드는 데는 능하지 못하다.

能爲可信 不能使人必信己 능위가신 불능사인필신기
군자는 자신을 성실하게 만드는 일에는 능하고, 사람을 시켜서 반드시 자신을 믿게 하는 데는 능하지 못하다.

能爲可用 不能使人必用己 능위가용 불능사인필용기
군자는 재능을 쓰임새 있게 만드는 데 능하고, 사람을 시켜서 반드시 자신을 쓰게 하는 데는 능하지 못하다.

故君子恥不脩 不恥見汙 고군자치불수 불치견오
그러므로 군자는 자신을 닦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더럽게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恥不信 不恥不見信 치불신 불치불견신
성실하지 않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믿음을 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恥不能 不恥不見用 치불능 불치불견용
능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쓰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是以不誘於譽 不恐於誹 시이불유어예 불공어비
이로써 명예에 유혹되지 않고, 비방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寧道而行 端然正己 不爲物傾側 영도이행 단연정기 불위물경측
도를 따라서 행동하고, 단정히 몸을 바르게 하여, 물욕에 기울어 지지 않게 하는데,

夫是之謂誠君子 부시지위성군자
이러한 사람을 ‘진실한 군자’라고 이르는 것이다.

詩云 溫溫恭人 維德之基 此之謂也 시운 온온공인 유덕지기 차지위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온순하고 공손한 사람은, 오직 덕의 터전"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군자를 두고 말한 것이다.

훗날 유교의 또다른 유명한 주해가인 주자朱子에 의해 이단으로 여겨진 순자는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인정 받았습니다. 순자의 학문적 가치 중 하나는 주로 문답이나 우화 형식으로 쓰여져 모호했던 이전의 저술 방식에서 벗어나서, 마치 논문처럼 비교적 명확하게 자기 주장을 펼쳤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순자를 인용했으니, 하고자 하는 말을 스트레이트하게 해보겠습니다.

질문게시판에서 의도하지 않은 사건으로 정말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습니다. 홍차넷에서 사람들이 "저것 봐라, 저럴 줄 알았어" 비웃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생각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상황 자체가 부끄럽더군요. 恥不脩하지 못하고, 恥見汙한 것입니다. 사실, 그 전에 홍차넷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시는 의사 선배님들과 논쟁을 벌이다 감정이 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닥 첨예한 주제도 아닌데 말이죠. 불편한 마음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저를 좋게 보는 사람들과 얘기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편을 가르게 되었습니다. 좋은 가치를 貴하게 여기지 못하고, 使人必貴己하여서 인정 받으려고만 한 것이죠. 그 후에는 공교롭게도 문재인과 안철수가 갈라서는 일이 발생했고 저는 문재인을 비판하는 논조로 몇 번 글을 썼습니다. 객관적으로 글을 쓴다고 자신에게 되뇌이면서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했습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아 不信한 것에는 개의치 않고, 不見信한 것에만 신경을 써서 그럴 법하게 보이려고만 한 것입니다.

이런 태도로 홍차넷을 하다가 우발적인 사고와 비슷한 갈등을 겪으니, 순자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恥見汙하고 不恥不脩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홍차넷에서 계속 똑똑하고 글도 잘 쓰는데다가 다방면에 아는 것도 많은 사람으로 인정 받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저를 좋아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정 받고 싶어서 誘於譽하고 사랑 받고 싶어서 恐於誹했습니다. 이렇게 순자를 이용하여 글을 쓰는 것은 저의 성찰을 위해서 제가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인데, 아마 속내로는 잘못된 태도를 떨치지 못한 연장선에서 잘난척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꾸 부끄러워 해야할 것을 부끄러워 하지 못하고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부끄러워 하는 제 자신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불안감을 떨쳐내고 평상심을 찾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 안에서 딱 하나 온전히 찾아볼 수 있었던 군자의 마음이 있었으니, 恥不脩였습니다. 제 자신을 이토록 자만하게 방치하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 不恥見汙할 때까지 시간을 좀 가져볼까 합니다. 수양修養은 제 자신의 인간적인 면을 되돌아 보는 것이 주력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여러모로 부족해진 학과 공부에 힘쓰는 것도 포함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치 있고 좋은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다시 채우기 전에 아무래도 그릇을 좀 닦는 시간도 있어야 겠죠. 그리하여, 많이 고민하였는데 수양이 끝날 때까지 당분간 홍차넷 활동을 좀 중단하려고 합니다. 수양은 당장 내일 끝날 수도 있고, 평생 걸려도 못 끝낼 수도 있겠죠. 그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저에게 특별히 마음 써주시고 잘 대해주시고 교감해주신 분들에 대해서 저 역시 그렇게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정에 목말라서 더 특별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따로 말씀 드리면 깊게 생각한 결정을 시행에 옮기지 못할 것 같아 그런 것이니, 서운해 하시진 마시길요.



8
  • 좋은 글들 감사했습니다. 삼공파일님의 글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가입인사 어케 하시나 봐야지~ 공부 열심히 하셈.
  • 부끄러움을 기회 삼아 성찰의 시간 듬뿍 갖고 훌륭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시길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661 7
15040 오프모임11/27(수) 성북 벙개 19 + dolmusa 24/11/13 308 1
15039 요리/음식칵테일 덕후 사이트 홍보합니다~ 2탄 6 Iowa 24/11/12 277 7
15022 기타[긴급이벤트] 티타임 따봉 대작전 (종료) 19 dolmusa 24/11/05 977 31
15038 정치머스크가 트럼프로 돌아서게 된 계기로 불리는 사건 3 Leeka 24/11/11 884 0
15037 일상/생각와이프와 함께 수락산 다녀왔습니다. 10 큐리스 24/11/11 427 4
15036 일상/생각과자를 주세요 10 하마소 24/11/11 464 17
15035 일상/생각화 덜 내게 된 방법 똘빼 24/11/11 332 13
15034 일상/생각긴장을 어떻게 푸나 3 골든햄스 24/11/09 548 9
15033 일상/생각잡상 : 21세기 자본, 트럼프, 자산 격차 37 당근매니아 24/11/09 1604 42
15032 IT/컴퓨터추천 버튼을 누르면 어떻게 되나 13 토비 24/11/08 661 35
15030 정치 2기 트럼프 행정부를 두려워하며 13 코리몬테아스 24/11/07 1396 28
15029 오프모임[9인 목표 / 현재 4인] 23일 토요일 14시 보드게임 모임 하실 분? 14 트린 24/11/07 479 1
15028 도서/문학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6 다람쥐 24/11/07 686 31
15027 일상/생각그냥 법 공부가 힘든 이야기 2 골든햄스 24/11/06 639 16
15025 생활체육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539 31
15024 정치2024 미국 대선 불판 57 코리몬테아스 24/11/05 2204 6
15023 일상/생각마흔 직전에 발견한 인생의 평온 10 아재 24/11/05 755 24
15021 생활체육요즘 개나 소나 러닝한다고 하더라구요 10 손금불산입 24/11/05 528 13
15020 문화/예술2024 걸그룹 5/6 8 헬리제의우울 24/11/04 481 11
15019 일상/생각인터넷 속도 업그레이드 대작전 31 Mandarin 24/11/02 1035 8
15017 게임[LOL]11월 2일 토요일 오늘의 일정 5 발그레 아이네꼬 24/11/01 275 0
15016 생활체육탐라를 보고 생각한 골프 오케이(컨시드)에 대한 생각 12 괄하이드 24/11/01 516 1
15015 기타[불판] 빅스마일데이 쓱데이 쵸이스데이 그랜드십일절 행사 17 swear 24/11/01 949 3
15014 일상/생각요즘은요 1 다른동기 24/10/31 372 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