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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11/18 21:37:08 |
Name | 삼공파일 |
Subject | 위플래쉬 잡담 |
작년에 가장 뜨거웠던 영화 2개를 꼽으라면 버드맨과 위플래쉬였을 겁니다. 당시에 버드맨은 영화관에서 봤는데 위플래쉬는 못봐서 최근에 컴퓨터로 봤습니다. 버드맨만 본 입장에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이 위플래쉬의 JK 시몬스에게 간 것이 이해가 안 갔는데 보고 나니 납득이 되더군요. 그러나 영화를 평론할 정도로 눈이 높지는 않지만 영화적으로 봤을 때 버드맨은 위플래쉬와 비교도 할 수 없이 훌륭한 작품입니다. 위플래쉬의 연출도 좋지만 음악이 중심이 되는 서사를 JK시몬스의 연기가 끌고 가는 기본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반면 버드맨의 연출은, 영화 속 연기와 서사 자체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그것을 담아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데 그 연출 자체로 혁명적입니다. 연기 자체로만 봤을 때 버드맨의 모든 배우의 연기가 아카데미급 레전드였지만 JK시몬스의 연기가 영화를 이끌어 간 힘을 생각해보면 남우조연상은 그에게 돌아간 게 맞아 보입니다. 버드맨과 위플래쉬 모두 드럼을 중심으로 하는 음악이 중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위플래쉬는 말그대로 드럼 영화인데 버드맨은 어떻게 보면 드럼 영화일 정도로 음악 역시 대단하게 어울립니다. 위플래쉬를 보고 버드맨 얘기를 하게 되네요. 그만큼 버드맨은 정말 대단한 작품입니다. 위플래쉬는 괴팍한 천재와 제자라는 영화에서 많이 쓰인 구도를 가지고 갑니다. 제자를 길러내는 고독한 천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서는 음악 밖에 모르는 교수가 제자를 극한으로 몰아 스트레스를 주면서 음악가로 키워낸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가 될 수도 있는데 스포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고 이미 위플래쉬를 보신 분이 더 많으리라 생각되니 그냥 씁니다. 결론적으로 이래 저래 얽혀서 교수는 학생을 괴롭힌 죄로 짤리고 학생도 학교를 때려칩니다. 후반부부터는 괴팍한 천재 서사가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허무맹랑한 지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음악만 하겠다고 여자친구랑 이별을 통보한 것을 후회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르죠. 또 교수가 마지막까지 학생의 뒷통수를 치면서 괴롭히는데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학생들을 괴롭혀왔다는 말이 전부 뻥이 되게 만드는 이 장면에서도 괴팍한 천재에 대한 환상을 깨버리죠. 버디 리치라는 전설적인 드러머가 계속 언급되는데 제2의 버디 리치를 만들겠다, 되겠다라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오고 그게 깨지면서 천재의 서사가 현대에서 얼마나 허무맹랑한 지 강조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마지막 씬에서 결국 음악에 미친 또라이들이기 때문에 음악으로 소통하게 됩니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면 커튼이 내려가고 둘은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헤어져서 다시는 안 만났으리라 생각됩니다. 버디 리치를 들으면서 꿈꾸던 학생처럼 무언가 되어 보겠다고 마음 속에 열망을 품고 재능을 발휘하겠다고 믿으면서 살아간 나날들이 있었던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예전에는 누구나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좀 지나자 나만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들었고 좀 더 지나자 그런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구나 알게 되었죠. 뭐 여튼 그런 서사는 저 영화처럼 함정입니다. 애초에 인생은 하루 하루 그냥 우연의 연속이지 서사가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오늘날에도 저런 또라이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저들을 제지했던 건 학교 상담실의 고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한국에 이런 시스템이 정착이 안되는 이유가 공무원들의 게으름과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이 아직까지 이런 천재 서사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이 되는 아이의 책장에 위인전 전집을 사주는 문화가 남아 있는 한 시스템이 또라이들을 제재하는 날은 요원할 겁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아이작 뉴턴 위인전을 읽는 비극이 없었더라면 시험 기간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비극도 없었을 겁니다. 생각해보니까 그 책은 서점에서 제가 엄마한테 사달라고 졸라서 읽었네요. 우리 모두 열심히 살지 맙시다. 열심히 살면 저런 친구 하나 없이 음악 같은 걸 말고는 다른 걸로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싫어하면서도 모여서 사는 슬픈 인생 밖에 못삽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버드맨과 위플래쉬를 패러디한 장면이 있었네요. 웃겨서 첨부합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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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깊게 보면서 해석하는 도구가 스포츠는 과학이고 음악은 인문학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깨 관절이 나가서 드럼을 못 치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성근식 어깨 드립과 비교할 정도로 허무맹랑한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신적 압박 때문에 미칠듯이 연습을 하면서 주인공의 실력은 계속 일취월장하는데 이건 주인공이 엄청난 팔을 타고나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중간에 JK시몬스가 설명하는 과거 학생의 이야기처럼 타고난 재능과 상관 없이 재능을 극대화가는 그런 과정이겠죠.
열심히 하면 잘해진다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열심해서 잘해져... 더 보기
열심히 하면 잘해진다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열심해서 잘해져... 더 보기
좀 깊게 보면서 해석하는 도구가 스포츠는 과학이고 음악은 인문학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깨 관절이 나가서 드럼을 못 치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성근식 어깨 드립과 비교할 정도로 허무맹랑한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신적 압박 때문에 미칠듯이 연습을 하면서 주인공의 실력은 계속 일취월장하는데 이건 주인공이 엄청난 팔을 타고나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중간에 JK시몬스가 설명하는 과거 학생의 이야기처럼 타고난 재능과 상관 없이 재능을 극대화가는 그런 과정이겠죠.
열심히 하면 잘해진다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열심해서 잘해져봤자 버디 리치는 안된다는 게 이야기의 중심이라고 봅니다. 버디 리치는 안되니까 조금 연습 덜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훨씬 중요한 것이죠.
그런데 조금 덜 행복하더라도 생각할 줄 아는 게 음악 밖에 없고 인간성도 쓰레기라서 음악 말고는 소통할 수 밖에 없는 고독한 인간들이 아름답기는 아름답다 그렇다고 미화하는 건 아니다 이런 애매모호한 주제인 거죠.
열심히 하면 잘해진다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열심해서 잘해져봤자 버디 리치는 안된다는 게 이야기의 중심이라고 봅니다. 버디 리치는 안되니까 조금 연습 덜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훨씬 중요한 것이죠.
그런데 조금 덜 행복하더라도 생각할 줄 아는 게 음악 밖에 없고 인간성도 쓰레기라서 음악 말고는 소통할 수 밖에 없는 고독한 인간들이 아름답기는 아름답다 그렇다고 미화하는 건 아니다 이런 애매모호한 주제인 거죠.
저는 이 영화를 연구하고 논문쓰라고 채찍질하지만 주제도 리뷰도 제대로 안해주는(오직 고와 스탑만 판별하는) 스탭과 레지던트의 관계로 좀 봤었는데(..) 그 맥락에서의 주제는 \'될 놈을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하며 얼마나 새디즘을 잘 포장해주는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놀런 라이언이 아니라 놀런 라이언의 팔이라는 이야기는 당장 굴리고 갈구는 상황에서는 단기적 성공을 거둘 수 있는, 하지만 그것이 커리큘럼 혹은 시스템과는 무관하며 최종적인 결과물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고요. 약간 리플의 의미가 잘못 전달된 것 같은데 저 드립의 의미는 \'노오오오력\'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결론은 같은 얘기(..)
음... 뭔가 저도 제 리플이 좀 잘못된 전달된 것 같은데 ㅠㅠ 말로만 갈구고 제대로 안 봐주는 스탭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싸이코패쓰도 아니고 실력은 부족한데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많은 그냥 오지라퍼이거나 꼰대일겁니다.
그런데 저기서 보여준 JK시몬스는 정말 훌륭한 연주자를 만들어냅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연결 지점이 되는 자살한 이전 제자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저런 방법으로 정말 훌륭한 연주자가 나오게 되는 것이고 주인공도 계속 일취월장하죠. 제가 생각한 부분은 그렇게 해서 정말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봤자 의미... 더 보기
그런데 저기서 보여준 JK시몬스는 정말 훌륭한 연주자를 만들어냅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연결 지점이 되는 자살한 이전 제자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저런 방법으로 정말 훌륭한 연주자가 나오게 되는 것이고 주인공도 계속 일취월장하죠. 제가 생각한 부분은 그렇게 해서 정말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봤자 의미... 더 보기
음... 뭔가 저도 제 리플이 좀 잘못된 전달된 것 같은데 ㅠㅠ 말로만 갈구고 제대로 안 봐주는 스탭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싸이코패쓰도 아니고 실력은 부족한데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많은 그냥 오지라퍼이거나 꼰대일겁니다.
그런데 저기서 보여준 JK시몬스는 정말 훌륭한 연주자를 만들어냅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연결 지점이 되는 자살한 이전 제자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저런 방법으로 정말 훌륭한 연주자가 나오게 되는 것이고 주인공도 계속 일취월장하죠. 제가 생각한 부분은 그렇게 해서 정말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의미가 없는 이유는 버디 리치 같은 전설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훌륭한 스탭을 만나서 식음을 전폐하고 훌륭한 연구자가 되어봤자 노벨상을 못 타면 아무 소용 없다는 그런 맥락인 것이죠.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음악이든 과학이든 그런 열정으로 살아가는 또라이들이 꽤 많죠.
물론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저런 좋은 음악 학교에 못 가니까 영화를 봅니다. 애초에 저런 일도 없죠.
그런데 저기서 보여준 JK시몬스는 정말 훌륭한 연주자를 만들어냅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연결 지점이 되는 자살한 이전 제자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저런 방법으로 정말 훌륭한 연주자가 나오게 되는 것이고 주인공도 계속 일취월장하죠. 제가 생각한 부분은 그렇게 해서 정말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의미가 없는 이유는 버디 리치 같은 전설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훌륭한 스탭을 만나서 식음을 전폐하고 훌륭한 연구자가 되어봤자 노벨상을 못 타면 아무 소용 없다는 그런 맥락인 것이죠.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음악이든 과학이든 그런 열정으로 살아가는 또라이들이 꽤 많죠.
물론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저런 좋은 음악 학교에 못 가니까 영화를 봅니다. 애초에 저런 일도 없죠.
재능과 예술의 영역과 일상과 대중의 영역의 화합불가능한 지점을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잘 제시했지요. 양 세계가 조화로이 병립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며, 평화공존조차도 쉽지 않다는 것이죠.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버지가 아닌 플레쳐를 선택하는 앤드류이며, 아버지의 절망이 그에 호응하고요. 가치판단의 여지는 다양합니다만, 그렇게 가치판단의 여지가 다양한 것 자체가 이 영화가 재능과 일상의 괴리 지점을 정확히 찔렀음을 의미하겠죠. 적어도 마치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천재들은 정서적 불안을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하고 ... 더 보기
재능과 예술의 영역과 일상과 대중의 영역의 화합불가능한 지점을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잘 제시했지요. 양 세계가 조화로이 병립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며, 평화공존조차도 쉽지 않다는 것이죠.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버지가 아닌 플레쳐를 선택하는 앤드류이며, 아버지의 절망이 그에 호응하고요. 가치판단의 여지는 다양합니다만, 그렇게 가치판단의 여지가 다양한 것 자체가 이 영화가 재능과 일상의 괴리 지점을 정확히 찔렀음을 의미하겠죠. 적어도 마치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천재들은 정서적 불안을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존재들이므로 제대로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인]들처럼 통속적이고 세속적인 윤리와 감정과 경험을 배워야만 한다는 대중주의적이고 인습주의적인 전제를 깔고 있으며 통속적 가치에 경배하는 <굿 윌 헌팅> 등의 천재 클리셰 영화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위플래쉬>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나이트 크롤러>가 되는 것인데, 적절히 선을 지켰지요.
여하간 한국 개봉 시점을 기준으로 올해 영화는 <버드맨>, <위플래쉬>, <매드맥스>로 정리된다고 보네요. 저 3대장에 대항할만한 영화가 남은 한 달 반 사이에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한국 개봉 시점을 기준으로 올해 영화는 <버드맨>, <위플래쉬>, <매드맥스>로 정리된다고 보네요. 저 3대장에 대항할만한 영화가 남은 한 달 반 사이에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플레쳐도 앤드류도 학교에서 짤리니까 별 볼 일 없어집니다. 마치 천재들의 이야기처럼 보여지다가 교통사고와 자살 사건으로 이야기가 반전되는데 결국 천재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죠. 천재와 평범한 사람의 영역의 중간 지점에서 조화를 이뤘다기 보다 음악을 잘하는데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내서 그런 경계 자체를 허물었다는 점에서 좋은 스토리 같습니다. 버디 리치 같은 천재들의 자서전이 되려는 영화가 아닐 뿐만 아니라 버디 리치보다 조금 부족한 천재들의 자서전이 되려는 영화도 아닌 것이죠. 그냥 또라이들이 말로는... 더 보기
플레쳐도 앤드류도 학교에서 짤리니까 별 볼 일 없어집니다. 마치 천재들의 이야기처럼 보여지다가 교통사고와 자살 사건으로 이야기가 반전되는데 결국 천재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죠. 천재와 평범한 사람의 영역의 중간 지점에서 조화를 이뤘다기 보다 음악을 잘하는데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내서 그런 경계 자체를 허물었다는 점에서 좋은 스토리 같습니다. 버디 리치 같은 천재들의 자서전이 되려는 영화가 아닐 뿐만 아니라 버디 리치보다 조금 부족한 천재들의 자서전이 되려는 영화도 아닌 것이죠. 그냥 또라이들이 말로는 안되니까 음악으로 소통하는 그런 이야기인 것이죠.
굳이 따지자면 일반인들과 또라이들의 괴리, 또라이들과 천재들의 괴리, 이런 갈등들을 하나씩 허무하게 무너뜨려 가면서 이야기하고 있죠. 애초에 뭔가 갈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환상이라고 지적해주는 거죠.
굳이 따지자면 일반인들과 또라이들의 괴리, 또라이들과 천재들의 괴리, 이런 갈등들을 하나씩 허무하게 무너뜨려 가면서 이야기하고 있죠. 애초에 뭔가 갈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환상이라고 지적해주는 거죠.
위플래쉬는 정말 흥미롭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영화인데, 인셉션처럼 양 극단의 해석들이 서로 충돌하는 경향을 보이죠. 그리고 사람들은 그 지점에서 어느 쪽을 선택합니다. 이건 마치 앤드류의 선택의 순간들과 맞물립니다. 음악을 계속 할까, 때려치울까 하는 지점들과 딱 겹쳐서 영화를 즐기고 결론을 내린다는 거죠.
가장 단순한 해석은 앤드류를 이 서사의 중심으로 두고, 영화의 러닝타임을 세계의 시작과 끝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한 소년의 성장기가 됩니다. 괴짜 스승을 만났고, 부침이 있었고, 강력한 경쟁자... 더 보기
가장 단순한 해석은 앤드류를 이 서사의 중심으로 두고, 영화의 러닝타임을 세계의 시작과 끝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한 소년의 성장기가 됩니다. 괴짜 스승을 만났고, 부침이 있었고, 강력한 경쟁자... 더 보기
위플래쉬는 정말 흥미롭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영화인데, 인셉션처럼 양 극단의 해석들이 서로 충돌하는 경향을 보이죠. 그리고 사람들은 그 지점에서 어느 쪽을 선택합니다. 이건 마치 앤드류의 선택의 순간들과 맞물립니다. 음악을 계속 할까, 때려치울까 하는 지점들과 딱 겹쳐서 영화를 즐기고 결론을 내린다는 거죠.
가장 단순한 해석은 앤드류를 이 서사의 중심으로 두고, 영화의 러닝타임을 세계의 시작과 끝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한 소년의 성장기가 됩니다. 괴짜 스승을 만났고, 부침이 있었고, 강력한 경쟁자들이 있었지만 물리치고, 또 한번 큰 사고가 있지만 주인공은 이를 멋지게 극복합니다. 미친 스승도 마침내 인정했습니다. 주인공은 웃습니다. 해피 엔딩!! 이야기는 교훈극이 됩니다. \"노오오오오오오력을 하란 말이야\" 여기서 중요한 가치관은 딱 하나입니다. 음악적 성취를 하느냐 마느냐 가 되지요.
여기서 무게 중심을 플레처 교수에게 나눠줘봅시다. 이 세계는 두 개의 축이 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던 세계에 갑자기 거대한 축이 꽈광 하고 떨어집니다. 이 두 축, 두 요소가 격렬하게 부딪힙니다. 자극을 주고, 자극을 받고, 폭력과 음악, 폭력과 폭력, 폭력과 음악, 음악과 음악의 상호 자극이 오고갑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통쾌하면서도 찡한 교훈극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투극입니다. 한대 맞고, 한대 치고, 어떻게든 상대방을 한 방 먹여야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직도 이 영화를 후련하게 받아들일 여지는 충분합니다. 마지막에는 기어이 한방 먹였으니까요. 좋가!!!를 날린 다음 드럼채로 거의 두들겨 패버리고 실신시켜버렸습니다. 적어도 영화의 러닝타임 안에서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은, 플레쳐란 축이 하나 떨어지면서 이 세계의 규칙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나의 \"노력\"과 \"재능\"이 결정하는 곳이었지만 여기에 \"폭력\"이라는 요소가 끼어들어야 완성될 수 있습니다. 노력과 재능만으로는 그만하면 잘했어 소리나 듣는 별 볼 일 없는 놈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앤드류 중심의 이야기에서는 플레쳐의 괴상한 교수법이 \"넘어야 할 장애물\" 정도 였지만 여기서는 꼭 필요한 그 무엇이 된 겁니다. 위대한 음악을 이루려면 원래 재능이 있는 놈이, 노력을 하는데, 거기에 뺨 처맞고 욕설을 당하고 별의별 모욕을 다 당해야 합니다. 여기서 관객은 엔딩에 짜릿해하면서도 그 과정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음악적 성취를 하느냐 마느냐 는 더이상 절대적 진리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온전한 내가 평화롭고 건강하게 살아갈\" 또 다른 진리가 있습니다. 모진 수난의 시간은 위대한 성취를 위한 하나의 발판, 완성을 위한 조각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진리를 택할 수가 있습니다. 잠깐 잠깐 찾아오는 성취의 순간을 위해 폭력을 끼고 살든가, 별 볼일 없더라도 여자친구 만나고 아버지랑 극장 다니면서 성취의 순간 없이 연속되는 안정을 위해 살든가. 관객에게 \"폭력\"이라는 새로운 기준점이 생긴 것입니다. 이 \"승부\"를 받아들이고 \"폭력\"을 견딘 뒤에 얻어낸 \"승리\"로 이 영화를 해석할 수도 있고, \"폭력\" 자체를 피하는 법도 있습니다. 서로는 서로를 \"그래봤자 아티스트 병에 걸린 쌩또라이\", \"평생 삼류 리그에서 친구놀이로 정신승리하는 나부랭이\"로 바라보겠죠.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이 아무래도 조금 더 안전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정신을 날려버릴 만큼의 강렬한 엔딩에 도취되어 있다가 되짚어보니,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거든요. 우리 대부분은 저렇게 미친 듯이 뭔가에 몰두하고 열정을 불태우지 못합니다.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큰 고통 없이, 소소한 행복을 조금조금 주워담으며 살면 되니까요. 주인공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아득하기만 하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너무나 혹독합니다. 비록 엔딩이 엄청난 감각적 파동을 일으키지만, 관념적으로는 일상의 행복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사랑이라는 가치관을 향해서는 간 쓸개 다 빼주고 피눈물 흘리는 과정을 기꺼이 감내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즐기면서도, 예술적 성취라는 가치관에서는 일상의 안락함을 더 크게 친다는 건 뭔가 좀 재미있어요) 저 놈(들)은 미친 놈이다, 이렇게 해석을 내려야 현재 나의 적당한 노력과 적당한 행복을 변호하기도 쉽겠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시간축을 영화의 러닝 타임밖으로 연장합니다. 저렇게 미친 놈(들)이 계속 저렇게 살아서, 뭐 얼마나 대단한 행복을 얻겠어? 여기에서 우리는 앤드류의 인생을 낙하운동으로 이해합니다. 영화의 엔딩이 그 정점이고, 이제는 그 마약 같은 순간을 찾으면서 슬슬 몸도 정신도 망가져 가는걸로요. 마침 영화상에서는 강력한 힌트가 나옵니다. 찰리 파커의 비참한 죽음, 플레쳐가 인정했던 제자의 자살. 아마 앤드류도 딱 저 전철을 밟아갈 겁니다. 마지막의 미친 연주를 펼칠 때 앤드류의 아버지는 정말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이런 예감을 했기 때문일 겁니다. 자식이 마침내 발을 들여서는 안될 어떤 영역에 들어가버린 것처럼.
전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한 개인의 행복, 그 행복에 필연적인 내부의 자극(노력, 재능)과 외부의 자극(폭력)을 계량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방식이 아닌거죠. 앤드류의 이야기, 앤드류 대 플레쳐의 이야기가 아니라 앤드류 대 음악의 이야기로 보는 겁니다. 여기서 플레쳐 교수는 육신을 빌린 예술의 신 그 자체일 수도 있고(이것은 두번째 해석에서 그 무게중심을 플레쳐에게 다 안겨주는 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술을 만나는 하나의 필수 요소일 수도 있습니다. 어쨋건, 이 이야기에서 \"음악적 성취\"가 다시 절대적인 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첫번째 해석과 다른 부분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앤드류 개인의 욕망, 즉 우리 모두가 그 어떤 노력과 목표의 상관관계로 대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앤드류의 노력이나 재능, 독기 같은 부분은 이 세계에서 아주 자그만한 요소에 불과합니다. (음악 엘리트들이 모인 그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이라고 노력이 모자라고 재능이 모자랄 것 같진 않아요) 이것은 인과 관계보다는, 운명적인 것에 가깝습니다. 그 희열을 체험하느냐 마느냐, 그냥 이 두가지 밖에 없어요. 그리고 거기서 그 운명적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영화 속에서 딱 하나밖에 제시되지 않습니다. 욕처먹고, 개처맞고 그 다음에 아트뽕에 취할 것이냐 아니면 아트뽕 안맞고 살 것이냐. 그런데 후자는 불행한 길이죠. 왜냐면 아트뽕을 못맞으니까. 진리와 구도자의 관계로 놓고 본다면, 이 영화는 다시 해피엔딩이 됩니다. 그 모든 과정을 포함해서요. 다른 사람들은 불행한 줄도 모르고 사는 것이고.
여기서 시간축을 늘여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다 죽었다면, 이는 결국 순교자가 됩니다. 삼공파일님의 추측과 달리, 저는 앤드류가 플레쳐와 함께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함께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문제일 거에요. 플레쳐의 교수법을 자신의 진리로 받아들였냐 안 받아들였냐가 중요하니까요. 어떤 형태로든 플레쳐는 앤드류와 함께 할 겁니다. 결과적으로, 앤드류는 예술적 경지에 도달하는 길을 체득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엔딩을 그렇게 싹둑 끊어버린 게 이런 의도에서라고 생각합니다. 구도자가, 험난한 길을 걷고, 마침내 진리를 맛봤습니다. 엔딩 크레딧에서 다시 한번 영화 초반의 앤드류가 플레쳐를 막 만난 직후의 음악이 반복됩니다. 구도자는 다시 그렇게 가장 진실되고 위대한 순간을 찾아 살아갈 겁니다. 그 과정이 있기에 그가 다시 한번 맞이할 그 사이클의 마지막은 위대하고 아름다워지겠지요. 앤드류의 인생 사이클은 일직선으로 상승과 추락 두 방향에서 오락가락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순환할 겁니다. 그리고 그 순환을 끝마칠 수록 원운동의 궤적은 커지겠지요. 그만큼 앤드류가 느끼는 희열도 커질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끝까지 따라갔다면, 그 감상 역시도 끝까지 따라가는 게 보다 온전한 감상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액션 영화를 감상할 때 으, 주인공이 너무 고생한다, 얼마나 아프고 외로울까, 그러니까 아예 주인공이 안싸우는 걸로 쳐버리자, 주인공이 적을 물리치는 게 의미가 없다고 쳐버리자, 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위플래쉬에서는 그 절정의 순간이 가지는 의미를 지나치게 희석해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 모든 과정이 있기 때문에 마지막 연주가 그렇게 황홀하고 짜릿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까지 영화를 즐기고 나서, 영화의 해석은 일부러 앤드류가 플레처를 만나기 전, 플레처를 만나고 학교에서 짤린 직후에 멈추는 게 과연 온당한 해석일지 잘 모르겠습니다.(개인적으로는 좀 치사하다는 생각도?? ^^;;) 오히려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과정 때문에 마지막 순간을 맛볼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앤드류가 뺨을 맞을 떄, 서러워서 울 때의 그 고통을 다 무의식적으로 리플레이 하고 있는 셈이죠.
앤드류를 반드시 자신과 동일시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 위험한 길에 매혹당해 기어이 다음 한 박자를 연주하고 마는 인간을 동정하면서도 동경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와 다르지만 내가 갈 수 없는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요.
가장 단순한 해석은 앤드류를 이 서사의 중심으로 두고, 영화의 러닝타임을 세계의 시작과 끝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한 소년의 성장기가 됩니다. 괴짜 스승을 만났고, 부침이 있었고, 강력한 경쟁자들이 있었지만 물리치고, 또 한번 큰 사고가 있지만 주인공은 이를 멋지게 극복합니다. 미친 스승도 마침내 인정했습니다. 주인공은 웃습니다. 해피 엔딩!! 이야기는 교훈극이 됩니다. \"노오오오오오오력을 하란 말이야\" 여기서 중요한 가치관은 딱 하나입니다. 음악적 성취를 하느냐 마느냐 가 되지요.
여기서 무게 중심을 플레처 교수에게 나눠줘봅시다. 이 세계는 두 개의 축이 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던 세계에 갑자기 거대한 축이 꽈광 하고 떨어집니다. 이 두 축, 두 요소가 격렬하게 부딪힙니다. 자극을 주고, 자극을 받고, 폭력과 음악, 폭력과 폭력, 폭력과 음악, 음악과 음악의 상호 자극이 오고갑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통쾌하면서도 찡한 교훈극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투극입니다. 한대 맞고, 한대 치고, 어떻게든 상대방을 한 방 먹여야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직도 이 영화를 후련하게 받아들일 여지는 충분합니다. 마지막에는 기어이 한방 먹였으니까요. 좋가!!!를 날린 다음 드럼채로 거의 두들겨 패버리고 실신시켜버렸습니다. 적어도 영화의 러닝타임 안에서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은, 플레쳐란 축이 하나 떨어지면서 이 세계의 규칙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나의 \"노력\"과 \"재능\"이 결정하는 곳이었지만 여기에 \"폭력\"이라는 요소가 끼어들어야 완성될 수 있습니다. 노력과 재능만으로는 그만하면 잘했어 소리나 듣는 별 볼 일 없는 놈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앤드류 중심의 이야기에서는 플레쳐의 괴상한 교수법이 \"넘어야 할 장애물\" 정도 였지만 여기서는 꼭 필요한 그 무엇이 된 겁니다. 위대한 음악을 이루려면 원래 재능이 있는 놈이, 노력을 하는데, 거기에 뺨 처맞고 욕설을 당하고 별의별 모욕을 다 당해야 합니다. 여기서 관객은 엔딩에 짜릿해하면서도 그 과정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음악적 성취를 하느냐 마느냐 는 더이상 절대적 진리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온전한 내가 평화롭고 건강하게 살아갈\" 또 다른 진리가 있습니다. 모진 수난의 시간은 위대한 성취를 위한 하나의 발판, 완성을 위한 조각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진리를 택할 수가 있습니다. 잠깐 잠깐 찾아오는 성취의 순간을 위해 폭력을 끼고 살든가, 별 볼일 없더라도 여자친구 만나고 아버지랑 극장 다니면서 성취의 순간 없이 연속되는 안정을 위해 살든가. 관객에게 \"폭력\"이라는 새로운 기준점이 생긴 것입니다. 이 \"승부\"를 받아들이고 \"폭력\"을 견딘 뒤에 얻어낸 \"승리\"로 이 영화를 해석할 수도 있고, \"폭력\" 자체를 피하는 법도 있습니다. 서로는 서로를 \"그래봤자 아티스트 병에 걸린 쌩또라이\", \"평생 삼류 리그에서 친구놀이로 정신승리하는 나부랭이\"로 바라보겠죠.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이 아무래도 조금 더 안전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정신을 날려버릴 만큼의 강렬한 엔딩에 도취되어 있다가 되짚어보니,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거든요. 우리 대부분은 저렇게 미친 듯이 뭔가에 몰두하고 열정을 불태우지 못합니다.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큰 고통 없이, 소소한 행복을 조금조금 주워담으며 살면 되니까요. 주인공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아득하기만 하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너무나 혹독합니다. 비록 엔딩이 엄청난 감각적 파동을 일으키지만, 관념적으로는 일상의 행복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사랑이라는 가치관을 향해서는 간 쓸개 다 빼주고 피눈물 흘리는 과정을 기꺼이 감내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즐기면서도, 예술적 성취라는 가치관에서는 일상의 안락함을 더 크게 친다는 건 뭔가 좀 재미있어요) 저 놈(들)은 미친 놈이다, 이렇게 해석을 내려야 현재 나의 적당한 노력과 적당한 행복을 변호하기도 쉽겠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시간축을 영화의 러닝 타임밖으로 연장합니다. 저렇게 미친 놈(들)이 계속 저렇게 살아서, 뭐 얼마나 대단한 행복을 얻겠어? 여기에서 우리는 앤드류의 인생을 낙하운동으로 이해합니다. 영화의 엔딩이 그 정점이고, 이제는 그 마약 같은 순간을 찾으면서 슬슬 몸도 정신도 망가져 가는걸로요. 마침 영화상에서는 강력한 힌트가 나옵니다. 찰리 파커의 비참한 죽음, 플레쳐가 인정했던 제자의 자살. 아마 앤드류도 딱 저 전철을 밟아갈 겁니다. 마지막의 미친 연주를 펼칠 때 앤드류의 아버지는 정말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이런 예감을 했기 때문일 겁니다. 자식이 마침내 발을 들여서는 안될 어떤 영역에 들어가버린 것처럼.
전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한 개인의 행복, 그 행복에 필연적인 내부의 자극(노력, 재능)과 외부의 자극(폭력)을 계량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방식이 아닌거죠. 앤드류의 이야기, 앤드류 대 플레쳐의 이야기가 아니라 앤드류 대 음악의 이야기로 보는 겁니다. 여기서 플레쳐 교수는 육신을 빌린 예술의 신 그 자체일 수도 있고(이것은 두번째 해석에서 그 무게중심을 플레쳐에게 다 안겨주는 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술을 만나는 하나의 필수 요소일 수도 있습니다. 어쨋건, 이 이야기에서 \"음악적 성취\"가 다시 절대적인 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첫번째 해석과 다른 부분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앤드류 개인의 욕망, 즉 우리 모두가 그 어떤 노력과 목표의 상관관계로 대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앤드류의 노력이나 재능, 독기 같은 부분은 이 세계에서 아주 자그만한 요소에 불과합니다. (음악 엘리트들이 모인 그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이라고 노력이 모자라고 재능이 모자랄 것 같진 않아요) 이것은 인과 관계보다는, 운명적인 것에 가깝습니다. 그 희열을 체험하느냐 마느냐, 그냥 이 두가지 밖에 없어요. 그리고 거기서 그 운명적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영화 속에서 딱 하나밖에 제시되지 않습니다. 욕처먹고, 개처맞고 그 다음에 아트뽕에 취할 것이냐 아니면 아트뽕 안맞고 살 것이냐. 그런데 후자는 불행한 길이죠. 왜냐면 아트뽕을 못맞으니까. 진리와 구도자의 관계로 놓고 본다면, 이 영화는 다시 해피엔딩이 됩니다. 그 모든 과정을 포함해서요. 다른 사람들은 불행한 줄도 모르고 사는 것이고.
여기서 시간축을 늘여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다 죽었다면, 이는 결국 순교자가 됩니다. 삼공파일님의 추측과 달리, 저는 앤드류가 플레쳐와 함께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함께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문제일 거에요. 플레쳐의 교수법을 자신의 진리로 받아들였냐 안 받아들였냐가 중요하니까요. 어떤 형태로든 플레쳐는 앤드류와 함께 할 겁니다. 결과적으로, 앤드류는 예술적 경지에 도달하는 길을 체득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엔딩을 그렇게 싹둑 끊어버린 게 이런 의도에서라고 생각합니다. 구도자가, 험난한 길을 걷고, 마침내 진리를 맛봤습니다. 엔딩 크레딧에서 다시 한번 영화 초반의 앤드류가 플레쳐를 막 만난 직후의 음악이 반복됩니다. 구도자는 다시 그렇게 가장 진실되고 위대한 순간을 찾아 살아갈 겁니다. 그 과정이 있기에 그가 다시 한번 맞이할 그 사이클의 마지막은 위대하고 아름다워지겠지요. 앤드류의 인생 사이클은 일직선으로 상승과 추락 두 방향에서 오락가락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순환할 겁니다. 그리고 그 순환을 끝마칠 수록 원운동의 궤적은 커지겠지요. 그만큼 앤드류가 느끼는 희열도 커질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끝까지 따라갔다면, 그 감상 역시도 끝까지 따라가는 게 보다 온전한 감상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액션 영화를 감상할 때 으, 주인공이 너무 고생한다, 얼마나 아프고 외로울까, 그러니까 아예 주인공이 안싸우는 걸로 쳐버리자, 주인공이 적을 물리치는 게 의미가 없다고 쳐버리자, 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위플래쉬에서는 그 절정의 순간이 가지는 의미를 지나치게 희석해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 모든 과정이 있기 때문에 마지막 연주가 그렇게 황홀하고 짜릿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까지 영화를 즐기고 나서, 영화의 해석은 일부러 앤드류가 플레처를 만나기 전, 플레처를 만나고 학교에서 짤린 직후에 멈추는 게 과연 온당한 해석일지 잘 모르겠습니다.(개인적으로는 좀 치사하다는 생각도?? ^^;;) 오히려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과정 때문에 마지막 순간을 맛볼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앤드류가 뺨을 맞을 떄, 서러워서 울 때의 그 고통을 다 무의식적으로 리플레이 하고 있는 셈이죠.
앤드류를 반드시 자신과 동일시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 위험한 길에 매혹당해 기어이 다음 한 박자를 연주하고 마는 인간을 동정하면서도 동경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와 다르지만 내가 갈 수 없는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요.
근데 앤드류나 플레쳐나 학교를 짤리고 둘 다 이미 음악적으로는 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후에 음악적으로 커리어를 이어나간다는 식의 생각은 하기 어렵게 이야기가 짜여져 있죠. 플레쳐를 받아들였냐 안 받아들였냐의 문제로 가면 이미 플레쳐가 연주 시작 직전에 앤드류한테 널 속인 것이라고 밝히면서 그 전에 이야기했던 제2의 버디 리치를 만들려고 그랬다는 이야기가 다 거짓말이 되어 버린 겁니다. 앤드류가 플레쳐를 극복하고 밀쳐내면서 앤드류가 자기 연주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 안에서 둘은 그제서야 소통합니다. 음악으로 밖에 이야기... 더 보기
근데 앤드류나 플레쳐나 학교를 짤리고 둘 다 이미 음악적으로는 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후에 음악적으로 커리어를 이어나간다는 식의 생각은 하기 어렵게 이야기가 짜여져 있죠. 플레쳐를 받아들였냐 안 받아들였냐의 문제로 가면 이미 플레쳐가 연주 시작 직전에 앤드류한테 널 속인 것이라고 밝히면서 그 전에 이야기했던 제2의 버디 리치를 만들려고 그랬다는 이야기가 다 거짓말이 되어 버린 겁니다. 앤드류가 플레쳐를 극복하고 밀쳐내면서 앤드류가 자기 연주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 안에서 둘은 그제서야 소통합니다. 음악으로 밖에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도 뭔가 음악의 경지를 쫓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음악으로 밖에 소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음악으로서야 소통하는 그런 결말의 장면으로 생각됩니다.
앤드류가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 일반적인 천재의 스토리라면 이걸 극복하고 다시 연주를 해서 뭔가 성취를 이뤄야 되는데 뜬금없이 학교 상담실이 나와서 플레쳐를 짤라버리고 앤드류도 학교를 포기합니다. 여기서 둘의 음악적 커리어는 끝난 것이죠. 마지막에서도 연주 직전에 플레쳐가 모든 걸 거부하면서 또 끝내버립니다. 결국 이 영화는 계속적으로 천재 서사나 구도자, 경지에 이르는 그런 서사를 통째로 날려 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음악으로 밖에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죠. 인간적인 화해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다른 걸로는 말할 줄 모르는 것뿐이죠.
예술적 성취와 일상의 갈등에서 손쉬운 편인 일상 쪽으로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는 게 아니라, 영화 전체 서사 자체가 이런 갈등은 애초부터 전부 뻥이고 플레쳐는 그냥 아주 못된 싸이코패쓰에 불과하고 앤드류도 또라이다 이렇게 되고 있는 것 같네요. 천재는 그냥 천재로 태어나서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다가 죽습니다. 일반인이 노력해서 천재가 된다는 얘기 자체가 플레쳐 같은 또라이들이 즐겁게 살 수 있는 핑곗거리였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죠. 제2의 버디 리치 같은 건 없는 거죠. 그냥 버디 리치만 그대로 있는 것뿐이고요. 버디 리치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일상적인 소통이 아니라 음악으로 밖에 소통할 수 없는 이레귤러들이 비극적이긴 해도 꽤나 아름답다는 장면을 마지막에 보여주면서 적당히 끝내는 그런 이야기인 듯합니다.
뭐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는데 여튼 이 이야기는 진리와 구도자나 음악적 성취 같은 것을 전형적으로 풀어내는 것처럼 보여주다가 현실적이고 심리적인 장치를 도입하면서 철저히 무효화시키는 그런 내용입니다. 영화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해보아도 개연성이나 흐름에서 그렇게 이해하는 게 자연스럽겠죠.
저도 어렸을 때부터 과학을 좋아해서 과학자가 되보자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고 나름 엘리트 집단에서만 살아오면서 과학이라는 진리를 추구해보자고 생각해왔는데 그런 서사는 다 뻥입니다. 아이작 뉴턴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공부 열심히 해서 극복해서 훌륭한 과학자가 된 게 아니죠. 그냥 천재로 태어나서 천재로 죽은 겁니다. 아인슈타인이 딴 생각하지 말라고 꾸지람하는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다가 창의력 대장이라서 용기를 잃지 않고 과학을 계속해서 상대성 이론을 쓴 게 아닙니다. 그냥 천재라서 상대성 이론을 안 겁니다. 물론 다 열심히 살았지만 열심히 산 건 천재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죠. 버디 리치도 그 누구보다 드럼을 열심히 쳤겠지만 버디 리치가 열심히 쳐서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 앤드류가 손에서 피나게 친 건 별로 의미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도 그냥 과학이 좋아서 과학을 계속 하거나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계속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레귤러로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게 꼭 뭔가 성취를 이루지 않더라도 그 나름의 이야기가 있고 아름다운 모습들인 거죠. 그런데 그 안에서 천재가 되겠다고 혹은 천재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함정에 빠지면 커리어 작살나거나 우울증 걸리는 그런 상황이 되버리고 마는 것이고요.
앤드류가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 일반적인 천재의 스토리라면 이걸 극복하고 다시 연주를 해서 뭔가 성취를 이뤄야 되는데 뜬금없이 학교 상담실이 나와서 플레쳐를 짤라버리고 앤드류도 학교를 포기합니다. 여기서 둘의 음악적 커리어는 끝난 것이죠. 마지막에서도 연주 직전에 플레쳐가 모든 걸 거부하면서 또 끝내버립니다. 결국 이 영화는 계속적으로 천재 서사나 구도자, 경지에 이르는 그런 서사를 통째로 날려 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음악으로 밖에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죠. 인간적인 화해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다른 걸로는 말할 줄 모르는 것뿐이죠.
예술적 성취와 일상의 갈등에서 손쉬운 편인 일상 쪽으로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는 게 아니라, 영화 전체 서사 자체가 이런 갈등은 애초부터 전부 뻥이고 플레쳐는 그냥 아주 못된 싸이코패쓰에 불과하고 앤드류도 또라이다 이렇게 되고 있는 것 같네요. 천재는 그냥 천재로 태어나서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다가 죽습니다. 일반인이 노력해서 천재가 된다는 얘기 자체가 플레쳐 같은 또라이들이 즐겁게 살 수 있는 핑곗거리였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죠. 제2의 버디 리치 같은 건 없는 거죠. 그냥 버디 리치만 그대로 있는 것뿐이고요. 버디 리치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일상적인 소통이 아니라 음악으로 밖에 소통할 수 없는 이레귤러들이 비극적이긴 해도 꽤나 아름답다는 장면을 마지막에 보여주면서 적당히 끝내는 그런 이야기인 듯합니다.
뭐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는데 여튼 이 이야기는 진리와 구도자나 음악적 성취 같은 것을 전형적으로 풀어내는 것처럼 보여주다가 현실적이고 심리적인 장치를 도입하면서 철저히 무효화시키는 그런 내용입니다. 영화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해보아도 개연성이나 흐름에서 그렇게 이해하는 게 자연스럽겠죠.
저도 어렸을 때부터 과학을 좋아해서 과학자가 되보자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고 나름 엘리트 집단에서만 살아오면서 과학이라는 진리를 추구해보자고 생각해왔는데 그런 서사는 다 뻥입니다. 아이작 뉴턴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공부 열심히 해서 극복해서 훌륭한 과학자가 된 게 아니죠. 그냥 천재로 태어나서 천재로 죽은 겁니다. 아인슈타인이 딴 생각하지 말라고 꾸지람하는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다가 창의력 대장이라서 용기를 잃지 않고 과학을 계속해서 상대성 이론을 쓴 게 아닙니다. 그냥 천재라서 상대성 이론을 안 겁니다. 물론 다 열심히 살았지만 열심히 산 건 천재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죠. 버디 리치도 그 누구보다 드럼을 열심히 쳤겠지만 버디 리치가 열심히 쳐서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 앤드류가 손에서 피나게 친 건 별로 의미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도 그냥 과학이 좋아서 과학을 계속 하거나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계속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레귤러로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게 꼭 뭔가 성취를 이루지 않더라도 그 나름의 이야기가 있고 아름다운 모습들인 거죠. 그런데 그 안에서 천재가 되겠다고 혹은 천재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함정에 빠지면 커리어 작살나거나 우울증 걸리는 그런 상황이 되버리고 마는 것이고요.
http://pgr21.com/?b=8&n=57074&c=2151113
이 댓글이 제가 하려는 말과 비슷한데 약간 다른 점은 이 영화에서 굳이 천재라는 말을 쓰지 않고 버디 리치를 대신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앤드류도 버디 리치가 되려고 하고 플레쳐도 구라였지만 버디 리치를 만든다고 합니다. 버디 리치가 아니어도 드럼은 칠 수 있지만 드럼을 친다는 그것은 버디 리치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버디 리치 그 자체입니다. 미친듯이 쳐서 플레쳐의 템포를 따라갈 수... 더 보기
이 댓글이 제가 하려는 말과 비슷한데 약간 다른 점은 이 영화에서 굳이 천재라는 말을 쓰지 않고 버디 리치를 대신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앤드류도 버디 리치가 되려고 하고 플레쳐도 구라였지만 버디 리치를 만든다고 합니다. 버디 리치가 아니어도 드럼은 칠 수 있지만 드럼을 친다는 그것은 버디 리치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버디 리치 그 자체입니다. 미친듯이 쳐서 플레쳐의 템포를 따라갈 수...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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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댓글이 제가 하려는 말과 비슷한데 약간 다른 점은 이 영화에서 굳이 천재라는 말을 쓰지 않고 버디 리치를 대신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앤드류도 버디 리치가 되려고 하고 플레쳐도 구라였지만 버디 리치를 만든다고 합니다. 버디 리치가 아니어도 드럼은 칠 수 있지만 드럼을 친다는 그것은 버디 리치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버디 리치 그 자체입니다. 미친듯이 쳐서 플레쳐의 템포를 따라갈 수 있어도 버디 리치는 될 수 없습니다. 버디 리치는 여자친구나 가족과의 갈등 같은 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버디 리치니까요. 실제로 버디 리치가 무슨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버디 리치는 드럼 연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 외의 것은 버디 리치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버디 리치가 되려고 나머지를 다 버렸는데 돌아오는 건 현실에서 학교 짤리고 왕따되어서 사는 것뿐이죠. 그렇지만 앤드류에게 있었던 재능은 결국 이런 재능이 있다는 자체도 노력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죠, 이 재능이 노력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재능 때문에 음악으로 밖에 소통할 수가 없거든요. 이런 재능도 없는 사람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처럼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고요. 재능은 버디 리치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 능력과 같은 것이지 버디 리치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건 아닌 것이죠.
이 댓글이 제가 하려는 말과 비슷한데 약간 다른 점은 이 영화에서 굳이 천재라는 말을 쓰지 않고 버디 리치를 대신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앤드류도 버디 리치가 되려고 하고 플레쳐도 구라였지만 버디 리치를 만든다고 합니다. 버디 리치가 아니어도 드럼은 칠 수 있지만 드럼을 친다는 그것은 버디 리치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버디 리치 그 자체입니다. 미친듯이 쳐서 플레쳐의 템포를 따라갈 수 있어도 버디 리치는 될 수 없습니다. 버디 리치는 여자친구나 가족과의 갈등 같은 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버디 리치니까요. 실제로 버디 리치가 무슨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버디 리치는 드럼 연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 외의 것은 버디 리치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버디 리치가 되려고 나머지를 다 버렸는데 돌아오는 건 현실에서 학교 짤리고 왕따되어서 사는 것뿐이죠. 그렇지만 앤드류에게 있었던 재능은 결국 이런 재능이 있다는 자체도 노력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죠, 이 재능이 노력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재능 때문에 음악으로 밖에 소통할 수가 없거든요. 이런 재능도 없는 사람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처럼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고요. 재능은 버디 리치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 능력과 같은 것이지 버디 리치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건 아닌 것이죠.
플레쳐도 앤드류도 당연히 천재는 아니겠죠. 그저 재능의 길을 추구하는 루저들입니다. 그리고 굳이 음악이나 예술이 아니더라도 어떤 영역에서든 통속과 세파를 초극하고 자유로워져 신이 되고 싶은 것은 범부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만인의 욕망이지요. 그런 욕망을 그저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타작하기 좋은 인물 데려다놓고 훈장질과 설교로 깔아뭉개며 고담준론 설파하는 것이 이른바 천재 클리셰 영화들이라는 의미고...
위플래쉬에서는 그렇게 진부하게 휴먼 드라마를 강설하며 욕망과 고민을 짓누르지 않지요. 그저 위대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왜 ... 더 보기
위플래쉬에서는 그렇게 진부하게 휴먼 드라마를 강설하며 욕망과 고민을 짓누르지 않지요. 그저 위대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왜 ... 더 보기
플레쳐도 앤드류도 당연히 천재는 아니겠죠. 그저 재능의 길을 추구하는 루저들입니다. 그리고 굳이 음악이나 예술이 아니더라도 어떤 영역에서든 통속과 세파를 초극하고 자유로워져 신이 되고 싶은 것은 범부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만인의 욕망이지요. 그런 욕망을 그저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타작하기 좋은 인물 데려다놓고 훈장질과 설교로 깔아뭉개며 고담준론 설파하는 것이 이른바 천재 클리셰 영화들이라는 의미고...
위플래쉬에서는 그렇게 진부하게 휴먼 드라마를 강설하며 욕망과 고민을 짓누르지 않지요. 그저 위대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왜 경도되는지를 충분히 묘사하고, 동시에 그들이 잃는 것은 무엇인지를 대조해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주제는 극단까지 나아갑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 사이에는 일반인들이 꼰대질할 여지는 없죠. 백부와 사촌들이 겐세이 하기는 하지만 하잘 것 없이 그려질 뿐이고, 여자친구는 떨어져나가며, 아버지는 마지막 연주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두 세계의 타협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죠. 이후 플레쳐고 앤드류고 개똥밭을 굴러다니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그네들이 욕망에 솔직했기 때문에 뒤따라왔을 따름이지, 킹콩의 주먹질에 나가 떨어질 야만스러운 도시 소시민들의 얄팍한 중산층부심에 휘둘린 결과는 아닐 것입니다.
아마 그네들은 그러다 죽겠죠. 하지만 달리 살았다고 해도 뭐 그리 다를까요?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고 해도 어차피 여자친구와는 금방 깨졌을 테고(딱 봐도 연애 경험치가 양쪽 모두 후달리니까요. 오래 갈 사이가 못 되죠.), 아버지가 존경스러운 인물이라한들 그의 세계와 안목은 너무 협소해서 아마 앤드류와 서로 이해하는 수준이라고 해봐야 효/가족/아버지 클리셰를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마저도 앤드류가 자기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 실패한 루저로서의 삶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전까지의 내 삶은 모두 헛것이었고 나는 착각에 빠졌었고 진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런 식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식의 자기기만을 취하고, 가족이나 친지나 연인 같이 좁은 울타리로 돌아와 패배감을 공동체주의로 위장하고 변이시켜 위로와 협력과 하나됨을 구하지 않는다면 이뤄내기 힘든 판타지고요. 우리가 친절해지고 희생적인 자세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때는, 대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때이고, 이 과정에서 나와 남의 구분을 두지 않는 공동체 마인드를 스스로에게 내면화하는 식으로 생존을 위한 자기기만이 동원되죠. 한때 뜨겁고 열렬했다가 이후 자연스럽게 소원해지는 (하지만 필요에 따라 무의식적인 과정을 거쳐 다시 돈독해질 수도 있는) 관계들은 대개 이러한 자기기만의 부산물이고...
여하간 어차피 앤드류가 이미 천상의 위대함에 눈을 떠버린 이상, 재능의 미와 향을 알아버린 이상, 어떤 식으로든 비애감은 느낄 수밖에 없으며 회피할 수 없는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는 버드맨과도 주제의식은 통하죠. 그나마 앤드류는 플레쳐라는 자신과 재능과 비극을 이해해줄 누군가를 그나마 찾았지, 리건은 머릿속의 버드맨과 자승자박하고 있는 형국이니 더 심하죠.
위플래쉬에서는 그렇게 진부하게 휴먼 드라마를 강설하며 욕망과 고민을 짓누르지 않지요. 그저 위대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왜 경도되는지를 충분히 묘사하고, 동시에 그들이 잃는 것은 무엇인지를 대조해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주제는 극단까지 나아갑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 사이에는 일반인들이 꼰대질할 여지는 없죠. 백부와 사촌들이 겐세이 하기는 하지만 하잘 것 없이 그려질 뿐이고, 여자친구는 떨어져나가며, 아버지는 마지막 연주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두 세계의 타협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죠. 이후 플레쳐고 앤드류고 개똥밭을 굴러다니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그네들이 욕망에 솔직했기 때문에 뒤따라왔을 따름이지, 킹콩의 주먹질에 나가 떨어질 야만스러운 도시 소시민들의 얄팍한 중산층부심에 휘둘린 결과는 아닐 것입니다.
아마 그네들은 그러다 죽겠죠. 하지만 달리 살았다고 해도 뭐 그리 다를까요?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고 해도 어차피 여자친구와는 금방 깨졌을 테고(딱 봐도 연애 경험치가 양쪽 모두 후달리니까요. 오래 갈 사이가 못 되죠.), 아버지가 존경스러운 인물이라한들 그의 세계와 안목은 너무 협소해서 아마 앤드류와 서로 이해하는 수준이라고 해봐야 효/가족/아버지 클리셰를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마저도 앤드류가 자기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 실패한 루저로서의 삶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전까지의 내 삶은 모두 헛것이었고 나는 착각에 빠졌었고 진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런 식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식의 자기기만을 취하고, 가족이나 친지나 연인 같이 좁은 울타리로 돌아와 패배감을 공동체주의로 위장하고 변이시켜 위로와 협력과 하나됨을 구하지 않는다면 이뤄내기 힘든 판타지고요. 우리가 친절해지고 희생적인 자세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때는, 대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때이고, 이 과정에서 나와 남의 구분을 두지 않는 공동체 마인드를 스스로에게 내면화하는 식으로 생존을 위한 자기기만이 동원되죠. 한때 뜨겁고 열렬했다가 이후 자연스럽게 소원해지는 (하지만 필요에 따라 무의식적인 과정을 거쳐 다시 돈독해질 수도 있는) 관계들은 대개 이러한 자기기만의 부산물이고...
여하간 어차피 앤드류가 이미 천상의 위대함에 눈을 떠버린 이상, 재능의 미와 향을 알아버린 이상, 어떤 식으로든 비애감은 느낄 수밖에 없으며 회피할 수 없는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는 버드맨과도 주제의식은 통하죠. 그나마 앤드류는 플레쳐라는 자신과 재능과 비극을 이해해줄 누군가를 그나마 찾았지, 리건은 머릿속의 버드맨과 자승자박하고 있는 형국이니 더 심하죠.
거의 다 비슷한데 끝에서 조금 차이가 나네요. 여자친구에게 연주 전에 전화를 거는 장면이 있죠. 그 장면이 연주 시작 직전의 장면입니다. 여자친구와 관계를 회복해보려고 하다가 다른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에 실패해버립니다. 근데 웃긴 건 기껏 그 용기가 생긴 이유가 연주를 다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앤드류는 평범한 사람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드럼을 쳤던 동영상이나 학교에 들어와서도 정예 밴드에서 그만큼 활약하는 걸 보면 엄청난 재능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죠. 이미 처음부터 음악으로 밖에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 더 보기
거의 다 비슷한데 끝에서 조금 차이가 나네요. 여자친구에게 연주 전에 전화를 거는 장면이 있죠. 그 장면이 연주 시작 직전의 장면입니다. 여자친구와 관계를 회복해보려고 하다가 다른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에 실패해버립니다. 근데 웃긴 건 기껏 그 용기가 생긴 이유가 연주를 다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앤드류는 평범한 사람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드럼을 쳤던 동영상이나 학교에 들어와서도 정예 밴드에서 그만큼 활약하는 걸 보면 엄청난 재능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죠. 이미 처음부터 음악으로 밖에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여자친구를 만나더라도 내 연주를 듣고 기뻐해주지 않으면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운 그런 사람입니다. 마지막 연주 같은 엄청난 경험이 없었어도 비록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음악을 안 하면 행복할 수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문제는 그겁니다. 버디 리치가 아니라는 것. 앤드류는 손가락이 부러질 때까지 드럼을 쳐도 천상의 위대함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천상의 위대함에 눈은 떴다고 해도 그건 이미 떠있었던 눈입니다. 버디 리치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이미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앤드류가 무언가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그런 사람들이 만나서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꾸려난 것이죠. 마지막 연주가 음악으로서의 길에 새롭게 눈을 뜨는 그런 계기는 아닐 겁니다. 플레쳐라는 못된 인간을 극복하면서 그와 소통할 수 있게 된 그런 장면이지요.
우리 주변에 버디 리치는 없어도 앤드류나 플레쳐는 좀 열심히 살아서 상위 클래스에서 살다 보면 확률이 높아지겠지만 어쨌든 만날 수 있어요. 정말 친구도 없고 그것 밖에 모르는데 그렇다고 행복하거나 위대해지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죠. 만날 수도 없는 천재들이 우리처럼 갈등하는 존재였다고 맘대로 상상하면서 끌어내리는 이상한 천재 영화들보다 훨씬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인 이유겠죠.
우리 주변에 버디 리치는 없어도 앤드류나 플레쳐는 좀 열심히 살아서 상위 클래스에서 살다 보면 확률이 높아지겠지만 어쨌든 만날 수 있어요. 정말 친구도 없고 그것 밖에 모르는데 그렇다고 행복하거나 위대해지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죠. 만날 수도 없는 천재들이 우리처럼 갈등하는 존재였다고 맘대로 상상하면서 끌어내리는 이상한 천재 영화들보다 훨씬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인 이유겠죠.
네. 말씀대로 일상적인 문제와 인물을 다루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소시민들을 모조리 객석으로 추방시키면서 극 자체가 청량하고 산뜻해졌지요. 그 점에서 이 영화가 교육 윤리를 주제로 소비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운 아이러니고. 재능을 추구하는 이들과 더불어 그들을 경/원시 하는 관객들의 태도까지 고찰해볼 수 있지요. 이런 문제의식은 이미 버드맨에서 다 보여줬으니 더 할 말이 없고... 이래서 한 단계 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농구의 PER 식으로 말하자면 위플래쉬는 Strong MVP Candidate고 버드맨은 A Year For the Ages 쯤 되겠죠.
저는 위플래쉬를 보면서 플레쳐에겐 오로지 음악 실력만이 가치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음악 미만 잡]이라고 표현하면 될까요?
플레쳐는 \"학생들에게 쌍욕을 하고 두들겨 패서라도 음악만 잘하게 하면 장땡이며, 궁극적으로 음악 실력을 증진시켜 줄 테니 이것은 옳은 방법이다.\"라는 식의 태도를 보입니다. 죄책감을 못느끼는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뜻을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그리고 다른 장면에서도 플레쳐의 [음악 미만 잡]을 느꼈... 더 보기
플레쳐는 \"학생들에게 쌍욕을 하고 두들겨 패서라도 음악만 잘하게 하면 장땡이며, 궁극적으로 음악 실력을 증진시켜 줄 테니 이것은 옳은 방법이다.\"라는 식의 태도를 보입니다. 죄책감을 못느끼는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뜻을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그리고 다른 장면에서도 플레쳐의 [음악 미만 잡]을 느꼈... 더 보기
저는 위플래쉬를 보면서 플레쳐에겐 오로지 음악 실력만이 가치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음악 미만 잡]이라고 표현하면 될까요?
플레쳐는 \"학생들에게 쌍욕을 하고 두들겨 패서라도 음악만 잘하게 하면 장땡이며, 궁극적으로 음악 실력을 증진시켜 줄 테니 이것은 옳은 방법이다.\"라는 식의 태도를 보입니다. 죄책감을 못느끼는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뜻을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그리고 다른 장면에서도 플레쳐의 [음악 미만 잡]을 느꼈습니다. 교수 재직 당시 플레쳐는 학생들과 함께 오디션 무대에 서기 전에 \"나는 내 명성 더럽혀지기 싫으니까 똑바로 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플레쳐는 자신의 실력과 명성에 흠집이 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플레쳐는 교수에서 짤리자 네이먼에게 뒷통수를 칠 계획을 짜고, 결국 네이먼이 카네기홀 무대에서 똥을 싸게 만듭니다(...) 근데 팀의 멤버가 박자를 절거나 미스노트가 있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혼자서 782차원에 가서 연주하는 듯 한 연주를 해버리는데, 멤버가 이 정도로 심각한 연주를 해버리면 저런 수준의 드러머를 동네 클럽도 아니고 카네기홀 무대에 세운 지휘자의 자질을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관객들은 \"저사람 교수에서 짤리는걸로 모잘라 카네기홀에 저딴 드러머를 세우네? 저거 완전 퇴물 다됐네?\"라는 생각을 하겠죠. 플레쳐는 원래 자기 명성이 더럽혀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네이먼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감정이 그것을 넘어선 것이죠. 그런데 더 웃긴건, 네이먼이 완전 쥑이는 연주를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지휘에 집중하고, 네이먼의 드럼 솔로때는 네이먼 앞으로 다가가서 강약조절까지 지휘해주죠. 이것은 플레쳐에게 그 무엇보다 음악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네이먼도 [음악 미만 잡]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반의 네이먼은 \"나도 언젠가는 뛰어난 드러머가 될 수 있겠지 헤헤\"하면서 행복한 꿈을 꾸던 소년이었는데, 플레쳐를 만난 이후부터는 자신의 실력에 분노하며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고 정신을 학대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친구가 있는 삶이 중요하다. 마약중독으로 젊은 나이에 죽는건 나에게 성공이 아님\"이라고 말하는데, 네이먼은 거기에다가 \"친구 있으면 뭐해요 쟤는 3부리거인데. 나는 90살까지 평범하게 사는 인생 싫음. 일찍 죽더라도 겁나 뛰어난 사람 되는게 나음\"이라고 말하고 있죠. 여기서 네이먼의 가치관이 플레쳐스럽게 바뀌어감을 느꼈습니다.
애인에게 이별 통보하는 씬도 마찬가진데, \"나는 음악에 몰빵할거야 그래서 너랑 더이상 못사귐. 나는 음악을 잘하고 싶은데 그러면 너에게 쓸 시간은 없어지고 음악만 신경쓰느라 너에게 신경쓰지도 못할거임. 너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화를 낼거고. 그러니까 우린 헤어지는게 맞음. 나는 위대해지고 싶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자친구는 \"너는 위대해지고 싶은데, 내가 방해가 될거라는 소리임?\"하고 묻고, 네이먼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네이먼은 이미 [음악 미만 잡]이라는 생각에 완전히 잠식당한 거죠.
후반부에서도 마찬가진데, 네이먼이 무대로 다시 돌아와서 연주를 시작할 때 까지만 해도 플레쳐한테 매우 빡친 상태입니다. 플레쳐에게 욕을 하고, 플레쳐가 자신에게 다가와 욕을 하자 심벌을 쳐서 플레쳐의 얼굴을 심벌로 맞추려고 했죠. 그런데 음악이 진행되자 네이먼은 플레쳐의 지휘를 따릅니다.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강약조절을 해주는 플레쳐의 지휘에 순응합니다. 이것은 아까 느낀 분노보다, 음악의 완성도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죠. 플레쳐와 네이먼은 서로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둘에겐 공통된 가치관이 있었으니 바로 [음악 미만 잡]입니다. 서로를 향한 적대감도 음악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위플래쉬를 보면서 \"플레쳐는 음악 외에는 전부다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고, 그런 플레쳐의 가치관이 네이먼에게 주입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로 위플래쉬의 장르는 [미소년 육성 시뮬레이션]입니다. (진지)
플레쳐는 \"학생들에게 쌍욕을 하고 두들겨 패서라도 음악만 잘하게 하면 장땡이며, 궁극적으로 음악 실력을 증진시켜 줄 테니 이것은 옳은 방법이다.\"라는 식의 태도를 보입니다. 죄책감을 못느끼는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뜻을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그리고 다른 장면에서도 플레쳐의 [음악 미만 잡]을 느꼈습니다. 교수 재직 당시 플레쳐는 학생들과 함께 오디션 무대에 서기 전에 \"나는 내 명성 더럽혀지기 싫으니까 똑바로 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플레쳐는 자신의 실력과 명성에 흠집이 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플레쳐는 교수에서 짤리자 네이먼에게 뒷통수를 칠 계획을 짜고, 결국 네이먼이 카네기홀 무대에서 똥을 싸게 만듭니다(...) 근데 팀의 멤버가 박자를 절거나 미스노트가 있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혼자서 782차원에 가서 연주하는 듯 한 연주를 해버리는데, 멤버가 이 정도로 심각한 연주를 해버리면 저런 수준의 드러머를 동네 클럽도 아니고 카네기홀 무대에 세운 지휘자의 자질을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관객들은 \"저사람 교수에서 짤리는걸로 모잘라 카네기홀에 저딴 드러머를 세우네? 저거 완전 퇴물 다됐네?\"라는 생각을 하겠죠. 플레쳐는 원래 자기 명성이 더럽혀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네이먼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감정이 그것을 넘어선 것이죠. 그런데 더 웃긴건, 네이먼이 완전 쥑이는 연주를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지휘에 집중하고, 네이먼의 드럼 솔로때는 네이먼 앞으로 다가가서 강약조절까지 지휘해주죠. 이것은 플레쳐에게 그 무엇보다 음악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네이먼도 [음악 미만 잡]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반의 네이먼은 \"나도 언젠가는 뛰어난 드러머가 될 수 있겠지 헤헤\"하면서 행복한 꿈을 꾸던 소년이었는데, 플레쳐를 만난 이후부터는 자신의 실력에 분노하며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고 정신을 학대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친구가 있는 삶이 중요하다. 마약중독으로 젊은 나이에 죽는건 나에게 성공이 아님\"이라고 말하는데, 네이먼은 거기에다가 \"친구 있으면 뭐해요 쟤는 3부리거인데. 나는 90살까지 평범하게 사는 인생 싫음. 일찍 죽더라도 겁나 뛰어난 사람 되는게 나음\"이라고 말하고 있죠. 여기서 네이먼의 가치관이 플레쳐스럽게 바뀌어감을 느꼈습니다.
애인에게 이별 통보하는 씬도 마찬가진데, \"나는 음악에 몰빵할거야 그래서 너랑 더이상 못사귐. 나는 음악을 잘하고 싶은데 그러면 너에게 쓸 시간은 없어지고 음악만 신경쓰느라 너에게 신경쓰지도 못할거임. 너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화를 낼거고. 그러니까 우린 헤어지는게 맞음. 나는 위대해지고 싶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자친구는 \"너는 위대해지고 싶은데, 내가 방해가 될거라는 소리임?\"하고 묻고, 네이먼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네이먼은 이미 [음악 미만 잡]이라는 생각에 완전히 잠식당한 거죠.
후반부에서도 마찬가진데, 네이먼이 무대로 다시 돌아와서 연주를 시작할 때 까지만 해도 플레쳐한테 매우 빡친 상태입니다. 플레쳐에게 욕을 하고, 플레쳐가 자신에게 다가와 욕을 하자 심벌을 쳐서 플레쳐의 얼굴을 심벌로 맞추려고 했죠. 그런데 음악이 진행되자 네이먼은 플레쳐의 지휘를 따릅니다.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강약조절을 해주는 플레쳐의 지휘에 순응합니다. 이것은 아까 느낀 분노보다, 음악의 완성도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죠. 플레쳐와 네이먼은 서로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둘에겐 공통된 가치관이 있었으니 바로 [음악 미만 잡]입니다. 서로를 향한 적대감도 음악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위플래쉬를 보면서 \"플레쳐는 음악 외에는 전부다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고, 그런 플레쳐의 가치관이 네이먼에게 주입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로 위플래쉬의 장르는 [미소년 육성 시뮬레이션]입니다. (진지)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 위의 덧글에서 삼공파일님이 [음악을 해석하는 도구는 인문학]이라고 하셨는데, 저도 여기 동의합니다. 좀 길게 풀어쓰자면 예술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명이야말로 \'단순한 유희\'라는 시무룩한 정의 앞에서 멈추어 설 수 밖에 없는 예술의 운명을 구원하지요. 그런 차원에서 [위플레쉬]를 읽어보겠습니다.
일단, 이 영화를 읽는데 교육학적 윤리를 불러내는 것은 부당합니다. 플레쳐는 이미 자신의 영역에 대한,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대... 더 보기
일단, 이 영화를 읽는데 교육학적 윤리를 불러내는 것은 부당합니다. 플레쳐는 이미 자신의 영역에 대한,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대... 더 보기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 위의 덧글에서 삼공파일님이 [음악을 해석하는 도구는 인문학]이라고 하셨는데, 저도 여기 동의합니다. 좀 길게 풀어쓰자면 예술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명이야말로 \'단순한 유희\'라는 시무룩한 정의 앞에서 멈추어 설 수 밖에 없는 예술의 운명을 구원하지요. 그런 차원에서 [위플레쉬]를 읽어보겠습니다.
일단, 이 영화를 읽는데 교육학적 윤리를 불러내는 것은 부당합니다. 플레쳐는 이미 자신의 영역에 대한,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대한 인식이 확고했지요. 플레쳐가 지향햐는 예술의 세계는 원인과 결과가 완전히 분리된 세계입니다. 고흐의 그림과 고흐의 생애를 아무리 연결시켜보았자 호사가의 말잔치일 뿐, 고흐의 작품의 가치가 변질되지 않는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도 플라톤을 잠시 불러낼 수 밖에 없는 것이, 플레쳐가 지향하는 [음악적 이데아]의 세계는 그 누구도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또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도 모르기에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지요. 그가 학생들을 대할 때 비인간적인 것은 이로서 해명이 되는 셈입니다. 학생들이 바보라서 플레쳐의 비인간적인 교수법을 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어렴풋이나마 자신들이 발담근 영역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 겁니다.
앤드류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한 대가의 이야기를 했지요. 만약 앤드류가 완벽하게 대가를 따라하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플래쳐는 귀싸대기를 날렸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고 키치]이기 때문이죠. 음악이 드러내고자하는 세계의 이데아를 그 누가 알고 있습니까? 플레쳐도 모릅니다. 이 사실은 마지막 무대에서 보여준 플레쳐의 행동으로 충분히 증명이 되는 셈입니다. 앤드류가 만든 무대는 플레쳐에게도 새로운 것이었죠. 그가 당황하면서도 앤드류에게 바통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플레쳐도 모르는 길을 플레쳐가 인도해서 가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배움의 와중에 플레쳐가 이렇게 해도 귀싸대기, 저렇게 해도 귀싸대기를 때렸던 이유도 대해서도 그저 \'학생에게 가혹하는 구는 것으로 자신의 위상을 만드는 선생\'이라는 해석은 일차원적인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플레쳐의 귀싸대기는 \'네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네가 하는 것은 결국 키치에 지나지 않아!\'라는 경고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겠죠. 앞선 대가와의 싱크로율이 100%라고 하더라도, 그가 키치인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죠. 이 영화에서 천재를 읽고자 한다면, 일반적으로 \'아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천재와 구분되어서 쓰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마도 이 영화속의 천재는 \'예술가\'라는 단어로 교체되었을 때 그 의미의 자장이 가장 많이 겹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단, 이 영화를 읽는데 교육학적 윤리를 불러내는 것은 부당합니다. 플레쳐는 이미 자신의 영역에 대한,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대한 인식이 확고했지요. 플레쳐가 지향햐는 예술의 세계는 원인과 결과가 완전히 분리된 세계입니다. 고흐의 그림과 고흐의 생애를 아무리 연결시켜보았자 호사가의 말잔치일 뿐, 고흐의 작품의 가치가 변질되지 않는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도 플라톤을 잠시 불러낼 수 밖에 없는 것이, 플레쳐가 지향하는 [음악적 이데아]의 세계는 그 누구도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또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도 모르기에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지요. 그가 학생들을 대할 때 비인간적인 것은 이로서 해명이 되는 셈입니다. 학생들이 바보라서 플레쳐의 비인간적인 교수법을 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어렴풋이나마 자신들이 발담근 영역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 겁니다.
앤드류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한 대가의 이야기를 했지요. 만약 앤드류가 완벽하게 대가를 따라하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플래쳐는 귀싸대기를 날렸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고 키치]이기 때문이죠. 음악이 드러내고자하는 세계의 이데아를 그 누가 알고 있습니까? 플레쳐도 모릅니다. 이 사실은 마지막 무대에서 보여준 플레쳐의 행동으로 충분히 증명이 되는 셈입니다. 앤드류가 만든 무대는 플레쳐에게도 새로운 것이었죠. 그가 당황하면서도 앤드류에게 바통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플레쳐도 모르는 길을 플레쳐가 인도해서 가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배움의 와중에 플레쳐가 이렇게 해도 귀싸대기, 저렇게 해도 귀싸대기를 때렸던 이유도 대해서도 그저 \'학생에게 가혹하는 구는 것으로 자신의 위상을 만드는 선생\'이라는 해석은 일차원적인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플레쳐의 귀싸대기는 \'네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네가 하는 것은 결국 키치에 지나지 않아!\'라는 경고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겠죠. 앞선 대가와의 싱크로율이 100%라고 하더라도, 그가 키치인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죠. 이 영화에서 천재를 읽고자 한다면, 일반적으로 \'아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천재와 구분되어서 쓰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마도 이 영화속의 천재는 \'예술가\'라는 단어로 교체되었을 때 그 의미의 자장이 가장 많이 겹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삼공파일님께서 저랑 비슷하게 생각하시네요 전체적으로. 본문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뒤의 이야기를 굳이 상상하자면 그냥 끄덕 후 다시는 안만났을 것이다 에서 완전히 저랑 같은 생각이셔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 봤자 개뿔이고 좀 덜 해도 행복하게 사는게 낫지 않냐 라는 부분에도 동의하구요. (야호, 내가 삼공파일님과 비슷한 눈높이를 갖고 있어!)
다만, 위플래쉬를 보고 예술(정확하게는 피아노)쪽 일하는 녀석 하나가 \'조금 덜 하고 행복한 인생이 어디있어? 남들이 다 실패한 인생 망가진 인생 ... 더 보기
그리고 그렇게 해서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 봤자 개뿔이고 좀 덜 해도 행복하게 사는게 낫지 않냐 라는 부분에도 동의하구요. (야호, 내가 삼공파일님과 비슷한 눈높이를 갖고 있어!)
다만, 위플래쉬를 보고 예술(정확하게는 피아노)쪽 일하는 녀석 하나가 \'조금 덜 하고 행복한 인생이 어디있어? 남들이 다 실패한 인생 망가진 인생 ... 더 보기
삼공파일님께서 저랑 비슷하게 생각하시네요 전체적으로. 본문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뒤의 이야기를 굳이 상상하자면 그냥 끄덕 후 다시는 안만났을 것이다 에서 완전히 저랑 같은 생각이셔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 봤자 개뿔이고 좀 덜 해도 행복하게 사는게 낫지 않냐 라는 부분에도 동의하구요. (야호, 내가 삼공파일님과 비슷한 눈높이를 갖고 있어!)
다만, 위플래쉬를 보고 예술(정확하게는 피아노)쪽 일하는 녀석 하나가 \'조금 덜 하고 행복한 인생이 어디있어? 남들이 다 실패한 인생 망가진 인생 개또라이 같은 인생 쓰레기 같은 삶이라 해도 실력의 끝에 도달하고 욕 처먹는 게 훨씬 훨씬 더 행복한 일이야!\' 라고 취해서 외칠 때는 참 미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나는 이래서 일반인인건가... 싶기도 하고요.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그래도 버드맨은 보세요. 저같은 영알못 무지렁이가 봐도 그냥 우와 이건 뭐 와 이거 뭐 와 그냥 와 뭐...
밖에 안나오는 영화였습니다. 위플래시에서는 끝까지 달려가는 그 에너지에 취했다면, 버드맨은 그냥 압도당해서 지렸습니다. 과장이 아니에요. 정말이라니까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무슨 판타스틱 포 보라고 약파는 사람 글 같은 느낌이 들지만 진짜 오해입니다 필력이 딸려서 그래요 ㅠㅠ)
그리고 그렇게 해서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 봤자 개뿔이고 좀 덜 해도 행복하게 사는게 낫지 않냐 라는 부분에도 동의하구요. (야호, 내가 삼공파일님과 비슷한 눈높이를 갖고 있어!)
다만, 위플래쉬를 보고 예술(정확하게는 피아노)쪽 일하는 녀석 하나가 \'조금 덜 하고 행복한 인생이 어디있어? 남들이 다 실패한 인생 망가진 인생 개또라이 같은 인생 쓰레기 같은 삶이라 해도 실력의 끝에 도달하고 욕 처먹는 게 훨씬 훨씬 더 행복한 일이야!\' 라고 취해서 외칠 때는 참 미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나는 이래서 일반인인건가... 싶기도 하고요.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그래도 버드맨은 보세요. 저같은 영알못 무지렁이가 봐도 그냥 우와 이건 뭐 와 이거 뭐 와 그냥 와 뭐...
밖에 안나오는 영화였습니다. 위플래시에서는 끝까지 달려가는 그 에너지에 취했다면, 버드맨은 그냥 압도당해서 지렸습니다. 과장이 아니에요. 정말이라니까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무슨 판타스틱 포 보라고 약파는 사람 글 같은 느낌이 들지만 진짜 오해입니다 필력이 딸려서 그래요 ㅠㅠ)
성공적인 음악가로 가는 길이 어느 정도 막혀버린 건 분명한데, 그것이 \"음악과의 단절\"을 뜻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들은 심지어 학교를 짤리고 나서도 음악을 계속 하게 됩니다. 앤드류도 드럼에 손을 놓고 있다가 플레쳐를 재즈바에서 만난 후 다시 음악을 하게 되죠. 일종의 순환 구도라고 할까요. 음악을 열심히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거야!! 라는 1단계 상태로 돌아온거죠. 플레쳐도 딱 1단계 상태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런 인상의 선지자가 됩니다. 아, 저 사람이 저렇게 갈궈대는 건 다 뭔가 뜻이 있구나....
이번에도 역시 ... 더 보기
이번에도 역시 ... 더 보기
성공적인 음악가로 가는 길이 어느 정도 막혀버린 건 분명한데, 그것이 \"음악과의 단절\"을 뜻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들은 심지어 학교를 짤리고 나서도 음악을 계속 하게 됩니다. 앤드류도 드럼에 손을 놓고 있다가 플레쳐를 재즈바에서 만난 후 다시 음악을 하게 되죠. 일종의 순환 구도라고 할까요. 음악을 열심히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거야!! 라는 1단계 상태로 돌아온거죠. 플레쳐도 딱 1단계 상태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런 인상의 선지자가 됩니다. 아, 저 사람이 저렇게 갈궈대는 건 다 뭔가 뜻이 있구나....
이번에도 역시 뺨 맞고, 욕 먹던 수준의, 어쩌면 더한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앤드류가 최초로 플레쳐 교수의 반에 합류해 연습했던, 위플래쉬란 곡의 합주 장면과 흡사한 장면이죠. 철썩같이 믿고 있는데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받습니다. 만약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플레쳐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버디 리치 이야기도 허세 섞인 신화로 남았을 겁니다. 그런데, 앤드류가 정말로 버디 리치 수준의 경지에 도달해버립니다. \"자극이 있어야 각성한다\"는 명제를 자기가 완성시켜버린거죠.
앤드류가 플레쳐를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어디 너도 한번 망해봐라, 그게 아니면 본 때를 보여주마, 라고 했을 텐데 앤드류의 속마음이 어쨋건 간에 이것은 플레쳐가 내세우는 \"자극-각성\"의 프레임 안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거죠. 이 명제를 반박하는 길은 딱 두개입니다. 우선 자극을 미친 듯이 받지만 각성을 안하는 길이 있죠. 그런데 플레쳐는 여기에 교활한 함정을 쳐놓았습니다. \"버디 리치라면, 각성을 안할리가 없어\" 만일 자극을 받아도 각성을 안하면 플레쳐가 \"넌 아니었나보네\" 라고 둘러대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결과 대신 원인을 바꿔서 반증해야 합니다. 자극 없이도, 각성 하면 되죠. 그런데 죽자 살자 노력해도 될까 말까 한데, 갑자기 이런 순간이 찾아올리가 만무합니다. 플레쳐의 저 프레임은 깨부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딱 하나의 길만 제시하고 있는거죠. 자극받고, 각성하고. (자극 없으면, 각성 안하고) 그래서 삼공파일님이 반론으로 내세우는 \"완성되어있는 천재의 서사\", 즉 될놈될의 논리는 오히려 플레쳐의 프레임 안에 갇혀버립니다. 이 서사를 가장 강력하게 증명하는 요인이 되어버리죠. 아마 플레쳐라면 이렇게 말했을 지도 모릅니다.
\"천재로 태어나서 천재로 죽는대메? 너가 천재면, 내가 아무리 갈구고 괴롭혀도 천재로 각성하겠네?\"
플레쳐는 영화 끝나기 전에 또 갈궜죠. 앤드류는 각성했습니다. 플레쳐는 아마 그래서 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거봐라!!\"
말씀하신 것처럼 일반적인 천재의 스토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세워진 \"자극-각성\"이라는 천재의 공식은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천재의 서사, 구도자의 서사를 유지하고 있는 거죠. 천재라면 이게 필요하다, 천재라면, 이걸 못이겨낼리 없다. 그리고 앤드류는 저 공식을 증명해버렸습니다.
천재 = 각성 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에서는 딱 두가지 길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레귤러의 아름다움 같은 건 이 영화속에서 존재하지 않죠. 각성하지 못하고 불행하거나, 각성하고 행복하거나. 그래서 제가 위의 분석을 제시했던 거죠. 이 영화의 서사를 \"뻥\"이라고 친다면, 그러니까 각성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부정하려면 이 영화의 엔딩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모든 아름다움은 엔딩에 몰려있습니다. 보는 사람 누구라도 마지막에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게끔요. 심지어 영화는 에필로그 같은 것도 없습니다. (삼공파일님이 말씀하신 대로의 가치관을 담은 영화를 제가 만든다고 치면, 저는 뒷부분에 반드시 에필로그를 넣었을 겁니다. 그 흥분을 죽여버려야죠. 그렇게 해서 그 허무함이나 선택지 바깥에 있는 이레귤러의 아름다움이 전달될 수 있을 겁니다.) 이 영화는 아예 그걸 고민할 여지도 주지 않아요. 그래서 관객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죠. 마지막에 다 터트려버린 그 환희와 경탄을 스스로 부정해야만 합니다. 이 영화의 구성 자체가 이런 혼란에서 \"그런데, 그런거 다 뻥이야\" 하고 답을 내리게끔 하는 구조는 아닌거죠. 이것을 뻥이라고 해석하려면 마지막에 얻은 감동을 부정하고, 영화의 중반에 몰려있는 \"고통\"으로 감상을 되돌려야 하는데 저는 이게 과연 이 영화에 대한 감상으로서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선택과 의지의 영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신내림 같은 이야기라고 봅니다. 플레쳐에게 신내림 굿을 받고, 여기서 \"신을 거부한다\" 는 선택지는 없는거죠. 저는 삼공파일님이 \"저 무당들은 한번 망했고 이제 점집도 못차리고 굿장사도 못한다\"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걸로 해석했는데, 제가 여기서 중점을 두는 것은 이들이 그 \"신내림\"의 본질에 얼마나 집착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을 받느냐 안받느냐, 이것만이 이들에게는 중요한 거라고 보고 있어요.
이번에도 역시 뺨 맞고, 욕 먹던 수준의, 어쩌면 더한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앤드류가 최초로 플레쳐 교수의 반에 합류해 연습했던, 위플래쉬란 곡의 합주 장면과 흡사한 장면이죠. 철썩같이 믿고 있는데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받습니다. 만약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플레쳐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버디 리치 이야기도 허세 섞인 신화로 남았을 겁니다. 그런데, 앤드류가 정말로 버디 리치 수준의 경지에 도달해버립니다. \"자극이 있어야 각성한다\"는 명제를 자기가 완성시켜버린거죠.
앤드류가 플레쳐를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어디 너도 한번 망해봐라, 그게 아니면 본 때를 보여주마, 라고 했을 텐데 앤드류의 속마음이 어쨋건 간에 이것은 플레쳐가 내세우는 \"자극-각성\"의 프레임 안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거죠. 이 명제를 반박하는 길은 딱 두개입니다. 우선 자극을 미친 듯이 받지만 각성을 안하는 길이 있죠. 그런데 플레쳐는 여기에 교활한 함정을 쳐놓았습니다. \"버디 리치라면, 각성을 안할리가 없어\" 만일 자극을 받아도 각성을 안하면 플레쳐가 \"넌 아니었나보네\" 라고 둘러대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결과 대신 원인을 바꿔서 반증해야 합니다. 자극 없이도, 각성 하면 되죠. 그런데 죽자 살자 노력해도 될까 말까 한데, 갑자기 이런 순간이 찾아올리가 만무합니다. 플레쳐의 저 프레임은 깨부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딱 하나의 길만 제시하고 있는거죠. 자극받고, 각성하고. (자극 없으면, 각성 안하고) 그래서 삼공파일님이 반론으로 내세우는 \"완성되어있는 천재의 서사\", 즉 될놈될의 논리는 오히려 플레쳐의 프레임 안에 갇혀버립니다. 이 서사를 가장 강력하게 증명하는 요인이 되어버리죠. 아마 플레쳐라면 이렇게 말했을 지도 모릅니다.
\"천재로 태어나서 천재로 죽는대메? 너가 천재면, 내가 아무리 갈구고 괴롭혀도 천재로 각성하겠네?\"
플레쳐는 영화 끝나기 전에 또 갈궜죠. 앤드류는 각성했습니다. 플레쳐는 아마 그래서 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거봐라!!\"
말씀하신 것처럼 일반적인 천재의 스토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세워진 \"자극-각성\"이라는 천재의 공식은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천재의 서사, 구도자의 서사를 유지하고 있는 거죠. 천재라면 이게 필요하다, 천재라면, 이걸 못이겨낼리 없다. 그리고 앤드류는 저 공식을 증명해버렸습니다.
천재 = 각성 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에서는 딱 두가지 길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레귤러의 아름다움 같은 건 이 영화속에서 존재하지 않죠. 각성하지 못하고 불행하거나, 각성하고 행복하거나. 그래서 제가 위의 분석을 제시했던 거죠. 이 영화의 서사를 \"뻥\"이라고 친다면, 그러니까 각성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부정하려면 이 영화의 엔딩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모든 아름다움은 엔딩에 몰려있습니다. 보는 사람 누구라도 마지막에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게끔요. 심지어 영화는 에필로그 같은 것도 없습니다. (삼공파일님이 말씀하신 대로의 가치관을 담은 영화를 제가 만든다고 치면, 저는 뒷부분에 반드시 에필로그를 넣었을 겁니다. 그 흥분을 죽여버려야죠. 그렇게 해서 그 허무함이나 선택지 바깥에 있는 이레귤러의 아름다움이 전달될 수 있을 겁니다.) 이 영화는 아예 그걸 고민할 여지도 주지 않아요. 그래서 관객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죠. 마지막에 다 터트려버린 그 환희와 경탄을 스스로 부정해야만 합니다. 이 영화의 구성 자체가 이런 혼란에서 \"그런데, 그런거 다 뻥이야\" 하고 답을 내리게끔 하는 구조는 아닌거죠. 이것을 뻥이라고 해석하려면 마지막에 얻은 감동을 부정하고, 영화의 중반에 몰려있는 \"고통\"으로 감상을 되돌려야 하는데 저는 이게 과연 이 영화에 대한 감상으로서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선택과 의지의 영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신내림 같은 이야기라고 봅니다. 플레쳐에게 신내림 굿을 받고, 여기서 \"신을 거부한다\" 는 선택지는 없는거죠. 저는 삼공파일님이 \"저 무당들은 한번 망했고 이제 점집도 못차리고 굿장사도 못한다\"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걸로 해석했는데, 제가 여기서 중점을 두는 것은 이들이 그 \"신내림\"의 본질에 얼마나 집착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을 받느냐 안받느냐, 이것만이 이들에게는 중요한 거라고 보고 있어요.
음... 글쎄요. 마지막 장면을 앤드류가 버디 리치에 도달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이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를 완전 정반대로 이해하는 게 되는 것 같은데요. 이 영화의 이야기의 중심은 클리셰적인 천재 서사나 자극과 각정, 진리와 구도자 이런 프레임을 깨는데 있습니다. 여기나 옛날 피지알 댓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이 부분에 대한 이견은 거의 없습니다.
영화의 서사가 뻥이라는 게 아니라 플레쳐가 버디 리치를 만들겠다는 이야기가 거짓말이었다는 것이죠.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게 영화에서 중요한 설정이고 그런 플레쳐를 이겨내고 ... 더 보기
영화의 서사가 뻥이라는 게 아니라 플레쳐가 버디 리치를 만들겠다는 이야기가 거짓말이었다는 것이죠.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게 영화에서 중요한 설정이고 그런 플레쳐를 이겨내고 ... 더 보기
음... 글쎄요. 마지막 장면을 앤드류가 버디 리치에 도달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이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를 완전 정반대로 이해하는 게 되는 것 같은데요. 이 영화의 이야기의 중심은 클리셰적인 천재 서사나 자극과 각정, 진리와 구도자 이런 프레임을 깨는데 있습니다. 여기나 옛날 피지알 댓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이 부분에 대한 이견은 거의 없습니다.
영화의 서사가 뻥이라는 게 아니라 플레쳐가 버디 리치를 만들겠다는 이야기가 거짓말이었다는 것이죠.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게 영화에서 중요한 설정이고 그런 플레쳐를 이겨내고 연주를 했다는 게 중요한 사실입니다. 앤드류를 다시 무대에 서게 한 게 버디 리치를 만들려고 한 게 아니라 속이려고 했던 것이고 앤드류는 자기 스스로 그런 플레쳐의 함정을 극복한 겁니다. 이걸 플레쳐가 어떤 자극이나 계시를 준 것으로 이해하면 이야기가 완전 거꾸로 갑니다.
고통으로 감상을 되돌리는 게 아니라 플레쳐를 극복하고 그와 음악으로 소통했다는 게 마지막 장면에서 주는 감동이죠. 플레쳐 같은 사람이 열정적으로 지도하면 버디 리치가 될 수 있다는 그런 환상을 깨는 것이 내용이고 주로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의 갈등은 그래서 그것보다 일상적인 삶이 더 소중하냐 아니냐에 방점이 놓여 있습니다. 이 기회에 영화를 다시 보심이...
영화의 서사가 뻥이라는 게 아니라 플레쳐가 버디 리치를 만들겠다는 이야기가 거짓말이었다는 것이죠.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게 영화에서 중요한 설정이고 그런 플레쳐를 이겨내고 연주를 했다는 게 중요한 사실입니다. 앤드류를 다시 무대에 서게 한 게 버디 리치를 만들려고 한 게 아니라 속이려고 했던 것이고 앤드류는 자기 스스로 그런 플레쳐의 함정을 극복한 겁니다. 이걸 플레쳐가 어떤 자극이나 계시를 준 것으로 이해하면 이야기가 완전 거꾸로 갑니다.
고통으로 감상을 되돌리는 게 아니라 플레쳐를 극복하고 그와 음악으로 소통했다는 게 마지막 장면에서 주는 감동이죠. 플레쳐 같은 사람이 열정적으로 지도하면 버디 리치가 될 수 있다는 그런 환상을 깨는 것이 내용이고 주로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의 갈등은 그래서 그것보다 일상적인 삶이 더 소중하냐 아니냐에 방점이 놓여 있습니다. 이 기회에 영화를 다시 보심이...
[저도 어렸을 때부터 과학을 좋아해서 과학자가 되보자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고 나름 엘리트 집단에서만 살아오면서 과학이라는 진리를 추구해보자고 생각해왔는데 그런 서사는 다 뻥입니다.] 라고 하셔서요.
그리고 삼공파일님 말씀대로 영화를 해석하면, 마지막 엔딩에서의 그 장렬한 연주 장면은 별로 필요가 없을 겁니다. 플레쳐가 뻥을 쳤다고 이야기를 하려면 뻥을 치고, 속은 사람을 보여주고 끝내면 되지요. 여기서 플레쳐가 진짜로 어떤 속마음을 품고 있느냐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짜 그... 더 보기
그리고 삼공파일님 말씀대로 영화를 해석하면, 마지막 엔딩에서의 그 장렬한 연주 장면은 별로 필요가 없을 겁니다. 플레쳐가 뻥을 쳤다고 이야기를 하려면 뻥을 치고, 속은 사람을 보여주고 끝내면 되지요. 여기서 플레쳐가 진짜로 어떤 속마음을 품고 있느냐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짜 그... 더 보기
[저도 어렸을 때부터 과학을 좋아해서 과학자가 되보자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고 나름 엘리트 집단에서만 살아오면서 과학이라는 진리를 추구해보자고 생각해왔는데 그런 서사는 다 뻥입니다.] 라고 하셔서요.
그리고 삼공파일님 말씀대로 영화를 해석하면, 마지막 엔딩에서의 그 장렬한 연주 장면은 별로 필요가 없을 겁니다. 플레쳐가 뻥을 쳤다고 이야기를 하려면 뻥을 치고, 속은 사람을 보여주고 끝내면 되지요. 여기서 플레쳐가 진짜로 어떤 속마음을 품고 있느냐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짜 그냥 엿을 먹일려고 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의 지론을 믿고 있었을 수도 있죠. 플레쳐가 거짓말을 했건 안했건, 그것이 함정이었건 아니건, 플레쳐가 늘 이야기했던 버디 리치 신화, 자극-천재 의 공식을 \"앤드류가 증명\"했다는 게 이 영화의 역설을 이뤄냅니다.
만일 이 영화를 천재의 신화에 대한 이야기로 본다면, 앤드류가 천재의 신화를 완성했냐 안했냐가 중요해 질 겁니다. 이것은 앤드류의 입장에서 봐야 하는 이야기죠. 플레쳐의 의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플레쳐는 다른 누가 말한 것처럼 예술적 완성을 고집하는 앤드류 내면의 광기의 표출일 수도 있고, 진짜 사람일 수도 있죠. 앤드류 안에서 범인-천재 이 두 길이 계속 서로 충돌하는데 이 영화를 보는 두번째 해석을 저는 그래서 제시했던 겁니다. 저렇게 혹독한 길을 가서 천재가 되느니, 안 혹독한 길을 가서 천재로 안 살면 되지. 저는 삼공파일님의 해석이 이 영역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보는 거죠.
삼공파일님은 제 해석을 첫번째 해석, 그러니까 노오오오력 끝에 모두 행복! 이라는 거라 주장한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 저는 그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번째 해석을 제시하는 거고, 이것은 구밀복검님의 해석이나 리오넬 메시님의 해석, 뤼야 님의 해석과 다르지 않습니다. 앤드류가 버디 리치에 도전하는 그 길은 필연적이고, 운명적이며, 이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에 다른 선택지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 즉 이레귤러로서 살면서 소소한 행복을 바라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거지요.
제가 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영화를 해석하는 데 있어 삼공파일님이 앤드류의 드럼 연주를 마지막에만 \"소통\"으로 바라보냐는 것이죠. 애초에 앤드류는 드럼으로 소통 같은 걸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자기가 좋아서 음악 한거죠.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집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중요한 주제가 되려면 그것은 인간의 외로움, 교감, 인간 관계가 중점이 되는 스토리에서 그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내면의 예술을 어떻게 완성하느냐, 이것만이 중요한 주제에요. 그래서 삼공파일님의 도식에 동감하기가 어려워요. 소통이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고, 플레쳐는 소통의 가치가 있는 대상도 아니었는데, 그걸 굳이 \"음악\"으로 소통하면서 끝난다고 읽어야 하니까요.
이 영화에서 \"소통\"이란 오히려 버려내야 할 것에 불과합니다. 영화 속에서 앤드류한테 소통이란 점점 의미가 없어지죠. 아버지의 전화를 무시하고, 악단 전체와 멀어지고,(악보를 훔친걸로 오해받아서), 친지들과도 멀어지고, 여자친구와 사귀다가 이별을 선언하고. 그렇게 앤드류한테는 오로지 \"음악\"밖에 안남게 됩니다. 그러다가 일상으로 돌아와요. 영화에서 앤드류의 일상은 한적하지만 초라하고 씁쓸합니다. 이것은 완벽한 실패자의 모습이죠. 아버지랑 영화도 보고, 전 여자친구한테 전화도 걸어보고, 그렇게 인간관계를 다시 만들어보려고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실패합니다. 그리고 다시 음악으로 돌아가요. 여기에서 앤드류는 뒤통수를 맞았다가 다시 연주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연주를 하는데, 여기서 앤드류의 아버지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이는 아마 앤드류의 마지막 둥지인 아버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삼공파일님의 도식대로 읽으면 앤드류의 아버지가 왜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설명하기가 어렵지요. 어차피 돌아올 거라면, 플레쳐의 거짓말을 극복하는 과정이라면 흐뭇한 표정을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대외적으로 그렇잖아요. 개망신을 당한 아들이 저렇게 연주로 멋진 설욕을 딱!! 해내고 있는데.
구밀복검님의 댓글을 복붙합니다. [그마저도 앤드류가 자기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 실패한 루저로서의 삶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전까지의 내 삶은 모두 헛것이었고 나는 착각에 빠졌었고 진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런 식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식의 자기기만을 취하고, 가족이나 친지나 연인 같이 좁은 울타리로 돌아와 패배감을 공동체주의로 위장하고 변이시켜 위로와 협력과 하나됨을 구하지 않는다면 이뤄내기 힘든 판타지고요. 우리가 친절해지고 희생적인 자세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때는, 대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때이고, 이 과정에서 나와 남의 구분을 두지 않는 공동체 마인드를 스스로에게 내면화하는 식으로 생존을 위한 자기기만이 동원되죠. 한때 뜨겁고 열렬했다가 이후 자연스럽게 소원해지는 (하지만 필요에 따라 무의식적인 과정을 거쳐 다시 돈독해질 수도 있는) 관계들은 대개 이러한 자기기만의 부산물이고... ]
플레쳐랑 소통한다는 해석이 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겠어요. [앤드류가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 일반적인 천재의 스토리라면 이걸 극복하고 다시 연주를 해서 뭔가 성취를 이뤄야 되는데 ] 라고 하셨는데, 엔딩의 연주가 바로 그 [다시 연주를 하고 성취를 이뤄내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관객들의 호응은 중요하지 않지요. 이 음악을 인정해주는 가장 큰 요소, 바로 플레쳐가 인정을 했다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 앤드류와 플레쳐는 더 내밀한 일대일 관계가 형성이 되죠. 콩쿨이나 악단 전체의 수준 유지 같은 외부적 요소가 없어졌으니까요) 그래서 영화는 객석 반응 같은 걸 보여주지 않습니다. 인중 바로 위까지의 플레쳐의 만족스런 표정과, 앤드류의 환한 미소만 보여주죠. 그리고 관객들은 여기서 감동을 받습니다. 아, 마침내 해냈어!! 하고 말이죠. 어차피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면 굳이 저 장면에서 그 더러운 꼴을 당하고서 굳이 플레쳐가 원하는 방식으로 소통할 필요가 없습니다.(그래서 이 전에는 학교를 그만두게 만들었죠) 아예 저런 밴드 지휘도 못할 만큼 더 박살내버리는 게 순리에 맞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엿을 먹인 사람한테, 이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엿을 먹일 필요가 없지요. 교통사고 직후에서처럼, 플레쳐가 원하는 소통 방식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게 가장 극대화된게 밴드 후보의 3인 경합이죠. 플레쳐가 원하는 대로 음악으로 계속 소통하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것이죠) 달라들어서 때려눕히고, 학교를 짤리게 하고, 이게 더 쉽고 직접적인 방법이죠. 자신을 엿먹였을 때 앤드류도 똑같이 엿을 먹입니다. 이게 가장 간단한 복수의 원리이구요. 그런데 왜 마지막에서 정말 정말 커다란 엿을 먹었을 때는, 이걸 \"음악\"으로 고귀하고 고상하게 극복할까요. 거짓말쟁이가 가장 악독하고 악랄한 거짓말을 했으니, 자신도 가장 악랄하게 되갚아줘야 할 텐데요. 일반적으로 \"못하지? 못하지? 등신~\" 이라고 놀리면 우리는 그 판 자체를 뒤엎잖아요. 그래서 말싸움을 하다가 못이기겠으니까 주먹싸움으로 가고, 주먹싸움으로 못이기니까 엄마아빠 불러오고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마지막에 앤드류가 대응하는 방식은 철저히 그 판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못하지? 못하지? \" 라는 질문에 \"잘하는데? 잘할 수 있는데?\" 라고 상대방의 도발에 응하는거죠. 심지어 그 판을 뒤엎고 쓴맛을 보여준 적도 있는데도 말이죠.
삼공파일님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이 영화의 진실은 앤드류의 연주 직전에 모두 밝혀집니다. 플레쳐의 버디 리치 이야기는 구라였고, 관객들은 진실에 도달한거죠. 그런데 이걸 극복할 필요가 있을까요? 혹은, 거짓말쟁이와 소통을 해서 더 이상의 어떤 진실을 얻을 수 있겠냐는 의문이 남는다는 거죠. 플레쳐 같은 사람이 열정적으로 지도하면 버디 리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증명하는데, 이 엔딩은 이를 부정합니다. 아, 플레쳐의 지도 방식이 결국 맞을 수도 있구나, 라는 여지를 남기고 말죠. [ 그것보다 일상적인 삶이 더 소중하냐 아니냐에 방점이 놓여 있습니다. ] 라는 부분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네요. 이것은 제가 제기한 \"두번째 해석\"에 정확히 부합되는 주장인데, 그렇게 보는 것이 틀리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마지막에 얻은 그 감동과 전율을 다 부정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것이죠. 이건 마치 다크나이트를 보면서 조커를 마지막으로 붙잡았지만, 그 전까지 브루스 웨인이 잃은 게 너무나도 많으니까 결국 이 영화는 영웅물의 고뇌를 부정하고 고든 같은 일반 시민으로 정의를 집행하는 게 나은거다 라는 해석처럼도 보인다는 이야기인거지요. 삼공파일님의 해석에 제가 제기하는 가장 큰 반론이라면, 위플래쉬에서 음악은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에요. 삼공파일님은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으로서 \"음악\" 혹은 \"천재가 되는 것\"의 선택지를 양분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이 영화가 그런 선택지를 아예 주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거지요. \"음악\"이 목적이고 그 음악에서 행복하려면 \"천재\"가 되는 길밖에 없는데, 영화가 제시하지 않는 길을 가면서, 영화가 주는 모든 감동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니까요. 만약 제가 감독이었고 삼공파일님이 의도한 대로의 내용을 말하고 싶었다면 최소한 마지막 연주 이후에 에필로그로서 이레귤러로서 소통하고 고만고만하게 연주하며 행복을 느끼는 장면을 넣었을 것 같습니다. 미친듯이 연주 연습하는 다른 누군가를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미소 지으면서 자리를 떠나거나, 아니면 어딘가에서 누구를 갈구는 플레쳐를 보면서 경쾌하게 지나간다거나. 그런데 이 영화는 앤드류가 연주 끝에, 플레쳐의 교수법에 적응한 뒤에 얻는 행복 말고는 그 어떤 행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극장에서 두번 봤고 집에서도 한 열번은 봐서 딱히 다시 보고 싶지는 않네요....^^;; 말씀하신 천재와 광기의 클리셰를 부수는 작품이라면 오히려 <프랭크>가 더 적절한 사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공파일님 말씀대로 영화를 해석하면, 마지막 엔딩에서의 그 장렬한 연주 장면은 별로 필요가 없을 겁니다. 플레쳐가 뻥을 쳤다고 이야기를 하려면 뻥을 치고, 속은 사람을 보여주고 끝내면 되지요. 여기서 플레쳐가 진짜로 어떤 속마음을 품고 있느냐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짜 그냥 엿을 먹일려고 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의 지론을 믿고 있었을 수도 있죠. 플레쳐가 거짓말을 했건 안했건, 그것이 함정이었건 아니건, 플레쳐가 늘 이야기했던 버디 리치 신화, 자극-천재 의 공식을 \"앤드류가 증명\"했다는 게 이 영화의 역설을 이뤄냅니다.
만일 이 영화를 천재의 신화에 대한 이야기로 본다면, 앤드류가 천재의 신화를 완성했냐 안했냐가 중요해 질 겁니다. 이것은 앤드류의 입장에서 봐야 하는 이야기죠. 플레쳐의 의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플레쳐는 다른 누가 말한 것처럼 예술적 완성을 고집하는 앤드류 내면의 광기의 표출일 수도 있고, 진짜 사람일 수도 있죠. 앤드류 안에서 범인-천재 이 두 길이 계속 서로 충돌하는데 이 영화를 보는 두번째 해석을 저는 그래서 제시했던 겁니다. 저렇게 혹독한 길을 가서 천재가 되느니, 안 혹독한 길을 가서 천재로 안 살면 되지. 저는 삼공파일님의 해석이 이 영역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보는 거죠.
삼공파일님은 제 해석을 첫번째 해석, 그러니까 노오오오력 끝에 모두 행복! 이라는 거라 주장한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 저는 그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번째 해석을 제시하는 거고, 이것은 구밀복검님의 해석이나 리오넬 메시님의 해석, 뤼야 님의 해석과 다르지 않습니다. 앤드류가 버디 리치에 도전하는 그 길은 필연적이고, 운명적이며, 이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에 다른 선택지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 즉 이레귤러로서 살면서 소소한 행복을 바라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거지요.
제가 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영화를 해석하는 데 있어 삼공파일님이 앤드류의 드럼 연주를 마지막에만 \"소통\"으로 바라보냐는 것이죠. 애초에 앤드류는 드럼으로 소통 같은 걸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자기가 좋아서 음악 한거죠.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집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중요한 주제가 되려면 그것은 인간의 외로움, 교감, 인간 관계가 중점이 되는 스토리에서 그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내면의 예술을 어떻게 완성하느냐, 이것만이 중요한 주제에요. 그래서 삼공파일님의 도식에 동감하기가 어려워요. 소통이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고, 플레쳐는 소통의 가치가 있는 대상도 아니었는데, 그걸 굳이 \"음악\"으로 소통하면서 끝난다고 읽어야 하니까요.
이 영화에서 \"소통\"이란 오히려 버려내야 할 것에 불과합니다. 영화 속에서 앤드류한테 소통이란 점점 의미가 없어지죠. 아버지의 전화를 무시하고, 악단 전체와 멀어지고,(악보를 훔친걸로 오해받아서), 친지들과도 멀어지고, 여자친구와 사귀다가 이별을 선언하고. 그렇게 앤드류한테는 오로지 \"음악\"밖에 안남게 됩니다. 그러다가 일상으로 돌아와요. 영화에서 앤드류의 일상은 한적하지만 초라하고 씁쓸합니다. 이것은 완벽한 실패자의 모습이죠. 아버지랑 영화도 보고, 전 여자친구한테 전화도 걸어보고, 그렇게 인간관계를 다시 만들어보려고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실패합니다. 그리고 다시 음악으로 돌아가요. 여기에서 앤드류는 뒤통수를 맞았다가 다시 연주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연주를 하는데, 여기서 앤드류의 아버지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이는 아마 앤드류의 마지막 둥지인 아버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삼공파일님의 도식대로 읽으면 앤드류의 아버지가 왜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설명하기가 어렵지요. 어차피 돌아올 거라면, 플레쳐의 거짓말을 극복하는 과정이라면 흐뭇한 표정을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대외적으로 그렇잖아요. 개망신을 당한 아들이 저렇게 연주로 멋진 설욕을 딱!! 해내고 있는데.
구밀복검님의 댓글을 복붙합니다. [그마저도 앤드류가 자기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 실패한 루저로서의 삶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전까지의 내 삶은 모두 헛것이었고 나는 착각에 빠졌었고 진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런 식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식의 자기기만을 취하고, 가족이나 친지나 연인 같이 좁은 울타리로 돌아와 패배감을 공동체주의로 위장하고 변이시켜 위로와 협력과 하나됨을 구하지 않는다면 이뤄내기 힘든 판타지고요. 우리가 친절해지고 희생적인 자세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때는, 대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때이고, 이 과정에서 나와 남의 구분을 두지 않는 공동체 마인드를 스스로에게 내면화하는 식으로 생존을 위한 자기기만이 동원되죠. 한때 뜨겁고 열렬했다가 이후 자연스럽게 소원해지는 (하지만 필요에 따라 무의식적인 과정을 거쳐 다시 돈독해질 수도 있는) 관계들은 대개 이러한 자기기만의 부산물이고... ]
플레쳐랑 소통한다는 해석이 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겠어요. [앤드류가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 일반적인 천재의 스토리라면 이걸 극복하고 다시 연주를 해서 뭔가 성취를 이뤄야 되는데 ] 라고 하셨는데, 엔딩의 연주가 바로 그 [다시 연주를 하고 성취를 이뤄내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관객들의 호응은 중요하지 않지요. 이 음악을 인정해주는 가장 큰 요소, 바로 플레쳐가 인정을 했다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 앤드류와 플레쳐는 더 내밀한 일대일 관계가 형성이 되죠. 콩쿨이나 악단 전체의 수준 유지 같은 외부적 요소가 없어졌으니까요) 그래서 영화는 객석 반응 같은 걸 보여주지 않습니다. 인중 바로 위까지의 플레쳐의 만족스런 표정과, 앤드류의 환한 미소만 보여주죠. 그리고 관객들은 여기서 감동을 받습니다. 아, 마침내 해냈어!! 하고 말이죠. 어차피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면 굳이 저 장면에서 그 더러운 꼴을 당하고서 굳이 플레쳐가 원하는 방식으로 소통할 필요가 없습니다.(그래서 이 전에는 학교를 그만두게 만들었죠) 아예 저런 밴드 지휘도 못할 만큼 더 박살내버리는 게 순리에 맞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엿을 먹인 사람한테, 이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엿을 먹일 필요가 없지요. 교통사고 직후에서처럼, 플레쳐가 원하는 소통 방식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게 가장 극대화된게 밴드 후보의 3인 경합이죠. 플레쳐가 원하는 대로 음악으로 계속 소통하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것이죠) 달라들어서 때려눕히고, 학교를 짤리게 하고, 이게 더 쉽고 직접적인 방법이죠. 자신을 엿먹였을 때 앤드류도 똑같이 엿을 먹입니다. 이게 가장 간단한 복수의 원리이구요. 그런데 왜 마지막에서 정말 정말 커다란 엿을 먹었을 때는, 이걸 \"음악\"으로 고귀하고 고상하게 극복할까요. 거짓말쟁이가 가장 악독하고 악랄한 거짓말을 했으니, 자신도 가장 악랄하게 되갚아줘야 할 텐데요. 일반적으로 \"못하지? 못하지? 등신~\" 이라고 놀리면 우리는 그 판 자체를 뒤엎잖아요. 그래서 말싸움을 하다가 못이기겠으니까 주먹싸움으로 가고, 주먹싸움으로 못이기니까 엄마아빠 불러오고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마지막에 앤드류가 대응하는 방식은 철저히 그 판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못하지? 못하지? \" 라는 질문에 \"잘하는데? 잘할 수 있는데?\" 라고 상대방의 도발에 응하는거죠. 심지어 그 판을 뒤엎고 쓴맛을 보여준 적도 있는데도 말이죠.
삼공파일님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이 영화의 진실은 앤드류의 연주 직전에 모두 밝혀집니다. 플레쳐의 버디 리치 이야기는 구라였고, 관객들은 진실에 도달한거죠. 그런데 이걸 극복할 필요가 있을까요? 혹은, 거짓말쟁이와 소통을 해서 더 이상의 어떤 진실을 얻을 수 있겠냐는 의문이 남는다는 거죠. 플레쳐 같은 사람이 열정적으로 지도하면 버디 리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증명하는데, 이 엔딩은 이를 부정합니다. 아, 플레쳐의 지도 방식이 결국 맞을 수도 있구나, 라는 여지를 남기고 말죠. [ 그것보다 일상적인 삶이 더 소중하냐 아니냐에 방점이 놓여 있습니다. ] 라는 부분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네요. 이것은 제가 제기한 \"두번째 해석\"에 정확히 부합되는 주장인데, 그렇게 보는 것이 틀리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마지막에 얻은 그 감동과 전율을 다 부정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것이죠. 이건 마치 다크나이트를 보면서 조커를 마지막으로 붙잡았지만, 그 전까지 브루스 웨인이 잃은 게 너무나도 많으니까 결국 이 영화는 영웅물의 고뇌를 부정하고 고든 같은 일반 시민으로 정의를 집행하는 게 나은거다 라는 해석처럼도 보인다는 이야기인거지요. 삼공파일님의 해석에 제가 제기하는 가장 큰 반론이라면, 위플래쉬에서 음악은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에요. 삼공파일님은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으로서 \"음악\" 혹은 \"천재가 되는 것\"의 선택지를 양분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이 영화가 그런 선택지를 아예 주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거지요. \"음악\"이 목적이고 그 음악에서 행복하려면 \"천재\"가 되는 길밖에 없는데, 영화가 제시하지 않는 길을 가면서, 영화가 주는 모든 감동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니까요. 만약 제가 감독이었고 삼공파일님이 의도한 대로의 내용을 말하고 싶었다면 최소한 마지막 연주 이후에 에필로그로서 이레귤러로서 소통하고 고만고만하게 연주하며 행복을 느끼는 장면을 넣었을 것 같습니다. 미친듯이 연주 연습하는 다른 누군가를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미소 지으면서 자리를 떠나거나, 아니면 어딘가에서 누구를 갈구는 플레쳐를 보면서 경쾌하게 지나간다거나. 그런데 이 영화는 앤드류가 연주 끝에, 플레쳐의 교수법에 적응한 뒤에 얻는 행복 말고는 그 어떤 행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극장에서 두번 봤고 집에서도 한 열번은 봐서 딱히 다시 보고 싶지는 않네요....^^;; 말씀하신 천재와 광기의 클리셰를 부수는 작품이라면 오히려 <프랭크>가 더 적절한 사례인 것 같습니다.
영화 해석으로 맞냐 틀리냐 따지는 게 웃기긴 한데,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마지막 연주가 버디 리치가 된 것이냐 안된 것이냐만 따져본다면 버디 리치가 안됐다는 것입니다. 버디 리치는 안된다는 게 영화의 핵심 주제입니다.
버디 리치가 안됐어도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지적하신대로 아버지도 관객도 다 안 나오고 플레쳐와 앤드류만 나오면서 마지막 연주가 끝나는 겁니다. 둘 다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라서 음악으로 끝나는 거죠. 중간 중간 해석은 비슷합니다. 제가 음악이 수단이라고 해석... 더 보기
버디 리치가 안됐어도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지적하신대로 아버지도 관객도 다 안 나오고 플레쳐와 앤드류만 나오면서 마지막 연주가 끝나는 겁니다. 둘 다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라서 음악으로 끝나는 거죠. 중간 중간 해석은 비슷합니다. 제가 음악이 수단이라고 해석... 더 보기
영화 해석으로 맞냐 틀리냐 따지는 게 웃기긴 한데,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마지막 연주가 버디 리치가 된 것이냐 안된 것이냐만 따져본다면 버디 리치가 안됐다는 것입니다. 버디 리치는 안된다는 게 영화의 핵심 주제입니다.
버디 리치가 안됐어도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지적하신대로 아버지도 관객도 다 안 나오고 플레쳐와 앤드류만 나오면서 마지막 연주가 끝나는 겁니다. 둘 다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라서 음악으로 끝나는 거죠. 중간 중간 해석은 비슷합니다. 제가 음악이 수단이라고 해석한 적도 없고 [그것보다 일상적인 삶이 더 소중하냐 아니냐에 방점이 놓여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런 주제로 토론이 주로 이뤄진다는 뜻으로 쓴 겁니다. 저도 일상적인 삶이 더 소중하다는 쪽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천재가 아닌데도 일상적인 삶으로 소통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플레쳐와 앤드류이며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인정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런 재능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삶을 쫓아갈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처음에 인용하신 문장을 쓴 거고요.
어쨌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버디 리치가 안됐다는 건데 버디 리치가 됐다고 해석을 해버리면 이야기가 전부 다 거꾸로 가버립니다. 앤드류가 버디 리치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플레쳐가 보여준 복잡한 내면이나 광기 어린 모습들이 모두 그냥 그 과정에 흡수되어 버려서 희석되거나 미화되어 버립니다. 이 영화를 사람을 주어로 요약하면 앤드류랑 플레쳐가 싸우는 영화에요. 앤드류가 버디 리치가 되는 영화라면 플레쳐가 그냥 쌩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복수를 하려고 저런 싸이코짓을 하는 걸 되지도 않은 버디 리치가 되는 과정으로 그냥 넘어가 버리면 플레쳐의 내면이나 앤드류와의 오랜 갈등이 서사에서 아무 역할도 못하는 거죠.
물론 이걸 다 무시하고 앤드류가 마지막에 음악의 신과 조우하면서 광명을 찾는 해피 엔딩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야기가 정말 있을 수 있는 이야기며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천재가 아니어도 그것 밖에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일반인도 아니지만 천재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인데 일반인이 천재가 되는 이야기로 보는 게 아닙니다.
버디 리치가 안됐어도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지적하신대로 아버지도 관객도 다 안 나오고 플레쳐와 앤드류만 나오면서 마지막 연주가 끝나는 겁니다. 둘 다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라서 음악으로 끝나는 거죠. 중간 중간 해석은 비슷합니다. 제가 음악이 수단이라고 해석한 적도 없고 [그것보다 일상적인 삶이 더 소중하냐 아니냐에 방점이 놓여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런 주제로 토론이 주로 이뤄진다는 뜻으로 쓴 겁니다. 저도 일상적인 삶이 더 소중하다는 쪽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천재가 아닌데도 일상적인 삶으로 소통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플레쳐와 앤드류이며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인정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런 재능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삶을 쫓아갈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처음에 인용하신 문장을 쓴 거고요.
어쨌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버디 리치가 안됐다는 건데 버디 리치가 됐다고 해석을 해버리면 이야기가 전부 다 거꾸로 가버립니다. 앤드류가 버디 리치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플레쳐가 보여준 복잡한 내면이나 광기 어린 모습들이 모두 그냥 그 과정에 흡수되어 버려서 희석되거나 미화되어 버립니다. 이 영화를 사람을 주어로 요약하면 앤드류랑 플레쳐가 싸우는 영화에요. 앤드류가 버디 리치가 되는 영화라면 플레쳐가 그냥 쌩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복수를 하려고 저런 싸이코짓을 하는 걸 되지도 않은 버디 리치가 되는 과정으로 그냥 넘어가 버리면 플레쳐의 내면이나 앤드류와의 오랜 갈등이 서사에서 아무 역할도 못하는 거죠.
물론 이걸 다 무시하고 앤드류가 마지막에 음악의 신과 조우하면서 광명을 찾는 해피 엔딩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야기가 정말 있을 수 있는 이야기며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천재가 아니어도 그것 밖에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일반인도 아니지만 천재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인데 일반인이 천재가 되는 이야기로 보는 게 아닙니다.
첫째딸아이가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생각하고 시작한지 2년 좀 안되었는데, 위플래시 개봉했을 때 이걸 보고 싶다고 하는 겁니다.
다른거 다 떠나서 일단 플레쳐의 또라이같은 대사가 초등 3학년이 보기에는 좀 무리다 싶어서 좀 더 크면 보자고 하기는 했는데...
아이에게 클리셰로서의 천재의 모습을 롤모델로 따라가게 하는게 좋을지, 위플래시같은 천재와 일상의 괴리를 산산조각내는 영화를 보여주는게 좋을지 아직 판단이 잘 안서더라구요. 솔직히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하기는 했는데 절대음감같은거 쥐뿔도 없고 음악적 재능도 크게 있어보이지는... 더 보기
다른거 다 떠나서 일단 플레쳐의 또라이같은 대사가 초등 3학년이 보기에는 좀 무리다 싶어서 좀 더 크면 보자고 하기는 했는데...
아이에게 클리셰로서의 천재의 모습을 롤모델로 따라가게 하는게 좋을지, 위플래시같은 천재와 일상의 괴리를 산산조각내는 영화를 보여주는게 좋을지 아직 판단이 잘 안서더라구요. 솔직히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하기는 했는데 절대음감같은거 쥐뿔도 없고 음악적 재능도 크게 있어보이지는... 더 보기
첫째딸아이가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생각하고 시작한지 2년 좀 안되었는데, 위플래시 개봉했을 때 이걸 보고 싶다고 하는 겁니다.
다른거 다 떠나서 일단 플레쳐의 또라이같은 대사가 초등 3학년이 보기에는 좀 무리다 싶어서 좀 더 크면 보자고 하기는 했는데...
아이에게 클리셰로서의 천재의 모습을 롤모델로 따라가게 하는게 좋을지, 위플래시같은 천재와 일상의 괴리를 산산조각내는 영화를 보여주는게 좋을지 아직 판단이 잘 안서더라구요. 솔직히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하기는 했는데 절대음감같은거 쥐뿔도 없고 음악적 재능도 크게 있어보이지는 않지만, 하루에 많게는 4시간 이상 진행되는 바이올린 연습을 싫증 안내고 잘 따라가고 얼마전 했던 지역방송국 예술제에서 입상도 하고 무엇보다도 공부를 안하려고 해서...;;; 하여튼, 이제 막 음악을 시작하는 아이한테 좋을지 어쩔지 모르겠는데, 같이 음악하는 언니가 컴퓨터로 보여줘서 조금 봤다는 겁니다.
어땠냐고 물어보니까, 플레처는 완전히 미쳤고, 주인공 오빠는 미쳐가고 있는거 같다고...;;;
근데, 욕하고 때리고 의자 던지고 하는거 빼면 자기 바이올린 선생님도 플레쳐에 비해 만만치 않다고 하네요. 크크크...
다른거 다 떠나서 일단 플레쳐의 또라이같은 대사가 초등 3학년이 보기에는 좀 무리다 싶어서 좀 더 크면 보자고 하기는 했는데...
아이에게 클리셰로서의 천재의 모습을 롤모델로 따라가게 하는게 좋을지, 위플래시같은 천재와 일상의 괴리를 산산조각내는 영화를 보여주는게 좋을지 아직 판단이 잘 안서더라구요. 솔직히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하기는 했는데 절대음감같은거 쥐뿔도 없고 음악적 재능도 크게 있어보이지는 않지만, 하루에 많게는 4시간 이상 진행되는 바이올린 연습을 싫증 안내고 잘 따라가고 얼마전 했던 지역방송국 예술제에서 입상도 하고 무엇보다도 공부를 안하려고 해서...;;; 하여튼, 이제 막 음악을 시작하는 아이한테 좋을지 어쩔지 모르겠는데, 같이 음악하는 언니가 컴퓨터로 보여줘서 조금 봤다는 겁니다.
어땠냐고 물어보니까, 플레처는 완전히 미쳤고, 주인공 오빠는 미쳐가고 있는거 같다고...;;;
근데, 욕하고 때리고 의자 던지고 하는거 빼면 자기 바이올린 선생님도 플레쳐에 비해 만만치 않다고 하네요. 크크크...
글쎄요. 저는 위플래시의 엔딩이 \'버디리치가 되지 못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 장면을 위대한 각성의 장면으로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죠.
저는 삼공파일님께서 플레쳐가 복수하려고, 엿먹이려고 앤드류를 그 자리에 불렀으므로 (참)
플레쳐가 그 전에 했던 말과 행동은 모조리 헛짓이고 싸이코짓이다 라는 해석이 비약이라고 봅니다.
플레쳐는 과거 진심으로 그런 행동들을 해왔고, 앤드류를 그 자리에 부른 것은 그런 호의나 신념에서 한 것은 아니지만,
행위 자체는 압력과 극한상황으로 몰아넣어 잠재력을 ... 더 보기
그 장면을 위대한 각성의 장면으로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죠.
저는 삼공파일님께서 플레쳐가 복수하려고, 엿먹이려고 앤드류를 그 자리에 불렀으므로 (참)
플레쳐가 그 전에 했던 말과 행동은 모조리 헛짓이고 싸이코짓이다 라는 해석이 비약이라고 봅니다.
플레쳐는 과거 진심으로 그런 행동들을 해왔고, 앤드류를 그 자리에 부른 것은 그런 호의나 신념에서 한 것은 아니지만,
행위 자체는 압력과 극한상황으로 몰아넣어 잠재력을 ... 더 보기
글쎄요. 저는 위플래시의 엔딩이 \'버디리치가 되지 못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 장면을 위대한 각성의 장면으로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죠.
저는 삼공파일님께서 플레쳐가 복수하려고, 엿먹이려고 앤드류를 그 자리에 불렀으므로 (참)
플레쳐가 그 전에 했던 말과 행동은 모조리 헛짓이고 싸이코짓이다 라는 해석이 비약이라고 봅니다.
플레쳐는 과거 진심으로 그런 행동들을 해왔고, 앤드류를 그 자리에 부른 것은 그런 호의나 신념에서 한 것은 아니지만,
행위 자체는 압력과 극한상황으로 몰아넣어 잠재력을 깨운다 라는 그전의 자기 행동과 다른게 없습니다. 의도만 다르죠.
그래서 앤드류가 명연주를 펼치는 순간 웃을 수 있었던거죠. 내방식은 틀리지 않았어. 정신승리..?-_-;
이놈은 그 재목은 못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틀렸군. 그래도 내 방식은 틀리지 않았어. 라는 기쁨의 웃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앤드류가 그 후로 성공했냐 안했냐는 영화에서 그릴 필요가 없죠. 플레처식으로 보자면,
천재였다면 그후 성공했을 것이고 아니었으면 실패했겠죠. 그러나 적어도 영화의 엔딩무대는 성공이었습니다.
그걸 천재가 되려는 길은 끊어진 두사람의 소통자위신이라고 보는 것보다는, 적어도 그 길은 이어지는 장면으로 보는 게 더 온당한 해석일 겁니다.
* 번외로 버드맨은 정말 쩔더군요.. 마블 시리즈 같은 건 줄 알고 패스했었는데 와 진짜 장면장면에 계속 집중해야 되서
영화보고 몹시 피곤했던 영화였습니다..
그 장면을 위대한 각성의 장면으로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죠.
저는 삼공파일님께서 플레쳐가 복수하려고, 엿먹이려고 앤드류를 그 자리에 불렀으므로 (참)
플레쳐가 그 전에 했던 말과 행동은 모조리 헛짓이고 싸이코짓이다 라는 해석이 비약이라고 봅니다.
플레쳐는 과거 진심으로 그런 행동들을 해왔고, 앤드류를 그 자리에 부른 것은 그런 호의나 신념에서 한 것은 아니지만,
행위 자체는 압력과 극한상황으로 몰아넣어 잠재력을 깨운다 라는 그전의 자기 행동과 다른게 없습니다. 의도만 다르죠.
그래서 앤드류가 명연주를 펼치는 순간 웃을 수 있었던거죠. 내방식은 틀리지 않았어. 정신승리..?-_-;
이놈은 그 재목은 못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틀렸군. 그래도 내 방식은 틀리지 않았어. 라는 기쁨의 웃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앤드류가 그 후로 성공했냐 안했냐는 영화에서 그릴 필요가 없죠. 플레처식으로 보자면,
천재였다면 그후 성공했을 것이고 아니었으면 실패했겠죠. 그러나 적어도 영화의 엔딩무대는 성공이었습니다.
그걸 천재가 되려는 길은 끊어진 두사람의 소통자위신이라고 보는 것보다는, 적어도 그 길은 이어지는 장면으로 보는 게 더 온당한 해석일 겁니다.
* 번외로 버드맨은 정말 쩔더군요.. 마블 시리즈 같은 건 줄 알고 패스했었는데 와 진짜 장면장면에 계속 집중해야 되서
영화보고 몹시 피곤했던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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