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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12/04 17:57:08 |
Name | 삼공파일 |
Subject | 정신분석학 관련 읽으면 재밌는 글 |
과학과 유사과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임상적 효과 같은 논쟁 같은 건 이미 다른 훌륭한 사람들이 책에서 해놨으니까 거기서 보시고 그런 것 말고 유용하고 재밌는 글이 있어서 2개 퍼옵니다. How to read Lacan 라캉이 한국에서 이렇게 유명해진 건 한국 라캉학회 때문이 아니라 슬라보예 지젝 때문입니다. 한국 인문학자 중에 말빨 좀 쓰는 사람들 중에 지젝빠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젝 자체가 스타성이 너무 강한 사람이고 좌파적 가치를 설파하는 연설 때문에 운동권에 얼빠(...?)가 많죠.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도 제대로 번역이 안되어 있는 철학의 불모지에 현대 프랑스철학이 이렇게나 많이 번역된 건 저주인지 축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초심자들에게 오해를 너무 불러 일으키는 저주라고 봅니다.) 반면에 학문적 업적이 오해로 묻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여튼 라캉 얘기할 때 지젝 빼면 안되는데 How to read라는 유명한 시리즈의 라캉 입문서를 지젝이 직접 썼습니다. 한국어판은 발번역이었던 기억이 나는데 영문판이 전문이 공개되어 있는 사이트입니다. 한 문단만 제가 직접 번역해봤는데 힘들어서 이어서 못하겠네요. 영어 되시는 분들을 서문만 읽어보세요. 서문만 읽으면 사실상 다 읽은 겁니다. (정신분석학으로 키보드배틀하려면 다들 이거 읽고 시작해서 중복된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ㅠㅠ)
두 번째도 꿀잼인데 다행히 한국어입니다. 그냥 한국어가 아니라 한국어 최고급 사용자 강준만 교수가 쓴 글입니다. 놀랍게도 강준만 교수가 네이버캐스트에 미국사 시리즈를 연재했던 적이 있습니다. 성(性)은 '마지막 프런티어'인가?
프로이트가 정신의학에 어떻게 이렇게 깊숙히 침투했는지 그리고 프로이트가 실제로 유럽의 이상한 형이상학적 철학의 대표주자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 미국 문화를 주도한 철저한 영미문화권적인 해석으로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인지과학에서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각종 심리발달 이론이 어떻게 프로이트 이론을 가져오게 되었는지 이어서 생각해보면 더 재밌겠습니다. 여기서 끝내려고 했는데 좋은 글은 없지만 토막상식으로 이거 하나 덧붙이려고 합니다. 위키백과 링크를 걸어놨는데, 아는 바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만 제가 아주 좋아하는 철학자 야스퍼스입니다. 야스퍼스는 원래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우리가 질병을 분류할 때 증상이 아니라 원인과 기전으로 분류하게 되는데 정신 질환은 그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정신 질환은 분류할 때 증상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 그런 어려움이 있는데 그 시스템을 창시하고 정립한 정신과 의사가 야스퍼스입니다. 이게 나중에 미국 사람들 위주로 바뀌면서 묻혀 버리고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몰라서 얘기를 안 한 업적입니다. 여튼 그런 큰 일을 하고 10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며 잠적하다가 [철학]이라는 책을 내고 위대한 철학자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사르트르와 대비되어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주자로 거론되는데 키에르키고르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야스퍼스의 개인적인 일화는 꽤 재밌는데 실존주의자치고 꽤 모범적으로 살았고 막스 베버와 아주 친했습니다. 막스 베버야말로 진정한 철학자라고 칭송하며 빈 대학에서 그와 깊게 교류했는데요 나중에 그가 죽자 추도사를 합니다. 또 한나 아렌트가 하이데거와 인연을 끊고 떠나 수학한 지도교수가 바로 야스퍼스입니다. 가끔 나중에 야스퍼스 같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상상하면서 위로 받습니다. 네... 재밌게 읽으려면 영어 독해 능력과 사전 지식이 좀 필요하지만, 여기는 홍차넷이니까 다들 재밌게 읽겠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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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프로이트 역시 narcissistic illnesses가 되었다는 게 재미난 일이죠. 이걸 다시 뇌과학이 깨부시고요. narcissistic illnesses이 따로 있다기보다 인간의 주관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이미 narcissistic하겠죠. 그렇다면 과학은 어디에 있을까요. 과학은 이미 세계 그 자체입니다. 세계에 대한 인간 의식의 재구성이라기보다는요. 그 재구성이 과학이라고 하기에 시간성의 지표 위에서 상정된 과학은 보다 용이한 재구성으로 자신을 투사하지 않죠. 도리어 인간이 과학에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자신의 주관을 재편성하는 것에 가깝죠(물론 같은 시공간 속에서도 개별 인간마다 심원한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런 점에서 바슐라르나 쿤이 인간 주관이 지닌 객관성의 연장선이 아니라 인간 주관의 터무니없음으로부터 과학의 구조를 밝히려 한 건 참으로 탁월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아... 하우투리드 라캉 서문은 한국어판으로 읽었는데 재미있어서 요약메모를 해두었었습니다 크 비교해 읽어보시면 괜찮을듯 싶어 옮겨 봅니다
** ** **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우주의 중심 위치를 박탈했다.
다윈은 진화를 통한 인간의 기원을 설명해서 인간에게 특권적인 생명의 지위를 박탈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 활동에서 무의식이 차지하는 지배적인 영역을 밝히면서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훨씬 급진... 더 보기
** ** **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우주의 중심 위치를 박탈했다.
다윈은 진화를 통한 인간의 기원을 설명해서 인간에게 특권적인 생명의 지위를 박탈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 활동에서 무의식이 차지하는 지배적인 영역을 밝히면서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훨씬 급진... 더 보기
아... 하우투리드 라캉 서문은 한국어판으로 읽었는데 재미있어서 요약메모를 해두었었습니다 크 비교해 읽어보시면 괜찮을듯 싶어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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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우주의 중심 위치를 박탈했다.
다윈은 진화를 통한 인간의 기원을 설명해서 인간에게 특권적인 생명의 지위를 박탈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 활동에서 무의식이 차지하는 지배적인 영역을 밝히면서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훨씬 급진적인 인간 모욕이 출현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은 데이터 처리 과정의 연산 기계에 불과하며 자유와 자율에 대한 감각도 기계사용자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뇌과학에 비하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전복적이기는 커녕 인간주의적 전통으로 보일 정도다.
그럼 정신분석학은 왜 시대에 뒤떨어졌나?
과학 지식의 차원에서 인지심리학자들의 신경 생물학 모델이 프로이트의 모델을 대체하고 있고
정신의학적 임상 치료의 차원에서 약물치료와 행동치료가 정신분석치료를 밀어냈고
사회적 환경의 차원에서 개인의 성 충동을 억압하는 사회규범의 이미지는 오늘날 압도적인 쾌락주의적 환경을 고려하면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프로이트 자신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그의 이론의 혁명성이 있다.
이성적 자아가 그보다 훨씬 큰 영역의 맹목적인 본능의 영역에 종속되어 있다는게 아니라
무의식 자체가 오직 자신의 문법과 논리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자아가 정복해야 할 야생적인 충동의 저장고가 아니라
외상을 가진 진실이 말을 하는 장소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내가 동화시켜야 할 심오한 진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참을 수 없는 진실이다.
현실이란 처음부터 구성된 어떤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억압된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보다
진실의 차원이 인간의 현실 속에 어떻게 출현하는가 하는 문제다.
** ** **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우주의 중심 위치를 박탈했다.
다윈은 진화를 통한 인간의 기원을 설명해서 인간에게 특권적인 생명의 지위를 박탈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 활동에서 무의식이 차지하는 지배적인 영역을 밝히면서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훨씬 급진적인 인간 모욕이 출현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은 데이터 처리 과정의 연산 기계에 불과하며 자유와 자율에 대한 감각도 기계사용자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뇌과학에 비하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전복적이기는 커녕 인간주의적 전통으로 보일 정도다.
그럼 정신분석학은 왜 시대에 뒤떨어졌나?
과학 지식의 차원에서 인지심리학자들의 신경 생물학 모델이 프로이트의 모델을 대체하고 있고
정신의학적 임상 치료의 차원에서 약물치료와 행동치료가 정신분석치료를 밀어냈고
사회적 환경의 차원에서 개인의 성 충동을 억압하는 사회규범의 이미지는 오늘날 압도적인 쾌락주의적 환경을 고려하면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프로이트 자신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그의 이론의 혁명성이 있다.
이성적 자아가 그보다 훨씬 큰 영역의 맹목적인 본능의 영역에 종속되어 있다는게 아니라
무의식 자체가 오직 자신의 문법과 논리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자아가 정복해야 할 야생적인 충동의 저장고가 아니라
외상을 가진 진실이 말을 하는 장소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내가 동화시켜야 할 심오한 진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참을 수 없는 진실이다.
현실이란 처음부터 구성된 어떤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억압된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보다
진실의 차원이 인간의 현실 속에 어떻게 출현하는가 하는 문제다.
쉬어갈겸 윗댓글의 맥락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프로이트 관련 썰을 소개합니다. 원문은 천개의 고원이고요. 그냥 킬킬거리며 읽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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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신경증으로 선언한 첫 번째 에피소드를 보자. 늑대인간은 한 그루의 나무 위에 있는 예닐곱 마리의 늑대를 꿈꾸었고, 그중 다섯 마리를 그렸다. 당연한 일이다. 원래 늑대들은 무리지어 움직이니까.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을 프로이트는 알지 못한다. 얼라들도 아는 걸 오직 그 홀로 모를 뿐이다. 프로이트는 주저하며 묻는다. \"꿈속의 여러 마리의 늑대들을 어떻게 설...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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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신경증으로 선언한 첫 번째 에피소드를 보자. 늑대인간은 한 그루의 나무 위에 있는 예닐곱 마리의 늑대를 꿈꾸었고, 그중 다섯 마리를 그렸다. 당연한 일이다. 원래 늑대들은 무리지어 움직이니까.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을 프로이트는 알지 못한다. 얼라들도 아는 걸 오직 그 홀로 모를 뿐이다. 프로이트는 주저하며 묻는다. \"꿈속의 여러 마리의 늑대들을 어떻게 설... 더 보기
쉬어갈겸 윗댓글의 맥락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프로이트 관련 썰을 소개합니다. 원문은 천개의 고원이고요. 그냥 킬킬거리며 읽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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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신경증으로 선언한 첫 번째 에피소드를 보자. 늑대인간은 한 그루의 나무 위에 있는 예닐곱 마리의 늑대를 꿈꾸었고, 그중 다섯 마리를 그렸다. 당연한 일이다. 원래 늑대들은 무리지어 움직이니까.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을 프로이트는 알지 못한다. 얼라들도 아는 걸 오직 그 홀로 모를 뿐이다. 프로이트는 주저하며 묻는다. \"꿈속의 여러 마리의 늑대들을 어떻게 설명하지?\" 이야기는 이미 신경증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좀 다른 환원 절차를 동원한다: 말들의 표상 수준에서의 언어적인 포섭이 아닌 사물들의 표상 수준에서의 자유연상. 그러나 결과는 동일하다. 항상 사람 혹은 상실된 것으로 간주되는 대상의 동일성, 통일성으로 회귀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늑대들의 복수성/다양성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대여섯마리 늑대의 꿈\'이 늑대와 일곱 마리의 아기 염소(이중 여섯마리가 잡아먹힌다.) 이야기로 치환되고, 꿈은 조작된다.
우리의 프로이트가 느낄 환원적 환희를 더듬어보자; 단지 아기 염소일 뿐인 일곱 마리의 늑대들. 여섯 마리의 늑대라면, 일곱 번째 늑대(늑대인간 자신)는 시계 속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다섯 마리의 늑대라면, 늑대인간이 그의 부모가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본 것은 다섯시였을지도 모르는 동시에, 로마자 숫자 V가 쭉 뻗어있는 에로틱한 여자의 다리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 마리의 늑대라면, 부모가 세 번 사랑을 나누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늑대라면, 아이가 맨처음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본 것은 계간(鷄姦)하는 양친이었거나 혹은 두 마리의 개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마리의 늑대만 남는데, 우리가 처음부터 이미 알고 있었듯이, 그 늑대는 아버지기 때문이다. 마침내 영(零, zero) 마리의 늑대가 되는데, 꼬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거세하는 동시에 거세당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대체 누굴 놀리고 있나? 늑대들은 결코 자신들의 \'무리\'에 사로잡히거나 벗어날 어떤 기회도 갖지 못한다. 정신분석에서 동물들은 부모의 성교를 표상하거나 반대로 그런 성교에 의해서 표상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프로이트는 늑대들이 발휘하는 매혹에 대해서, 그들의 소리없는 외침에 대해서, 늑대가 되려는(à devenir-loup) 외침의 의미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다. 늑대들은 꿈꾸는 아이를 응시하고 지켜본다....... 프로이트는 단지 오이디푸스화된 늑대 혹은 개, 거세당한 거세자인 아버지-늑대만을 알 뿐이다. 개집 속에 있는 개만을 알 뿐이며, 정신분석가의 개소리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개별적인 언표는 없다. 단지 언표를 생산하는 기계적 배치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늑대인간에 대해서도 정확히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프로이트가 강박적 신경증에 부여한 종교적-군사적 기계; 프로이트가 히스테릭한 특성을 부여하는 무리나 늑대-되기 혹은 말벌-되기, 나비-되기 등의 항문 기계; 프로이트가 유일한 동력으로 간주하는, 어디에서나 재발견되어져야 하는 부동(不動)의 동자(動子)(moteur immobile)[팟저 주 : 유일한 변수 정도로 읽으면 될 겁니다.]로서 오이디푸스 장치; 그리고 반-오이디푸스적 장치(누이와의 근친상간, 분열적 근친상간, “열등한 조건에 있는 사람”과의 사랑; 그리고 항문성, 동성애?). 이 모두를 프로이트는 오직 오이디푸스의 대체물과 퇴행, 파생물로만 본다. 프로이트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며,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오이디푸스적 언표들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부동의 동자와 같은 맥락을 가질 수 있는]개별적인 언표란 없으며, 그런 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언표는 특정한 기계적 배치/구조의 생산물이다. 달리 말해 언표행위(énonciation)를 대행하는 이\'들\'(agents)이 만들어내는 생산물이다. 헌데 고유한 이름(nom propre)은 개인을 지시하지 않는다. 탈인격화를 좀더 엄격히 실행한 결과 복수성이 개인을 이리저리 횡단하는 것은, 그리고 진정으로 개인에게 고유한 이름을 획득하도록 만드는 건, 반대로 개인들이 복수성 속에서 펼쳐지는 때다. 고유한 이름은 복수성의 즉각적 포착이다. 고유한 이름은 강도들의 장(場)에서 그 자체로 포착된 순수한 무한자의 주체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에 대해 오직 오이디푸스적 언표만을 선택했는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표란 어떤 지점에선 여전히 기계적 배치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며, 이와 연관해 자신의 오류를 측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정의 지표로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환자들로 하여금 인격화되고 개별적인 언표들을 취하도록,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의 이름을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이디푸스적 언표들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모든 게 처음부터 함정이다. 늑대인간은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늑대에 대해서 말해봐야, 그리고 아무리 늑대처럼 울어봐야 프로이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며 그 개를 쳐다보며 말할 것이다. “그건 아버지야”라고. 같은 소리가 반복된다면 프로이트는 이를 신경증이라고 말할 것이며, 그게 파열된다면 정신병이라고 부를 것이다. 늑대인간은 [아버지라는] 원인을 상기시킨 공로로 정신분석학에서 메달을 받을 것이며, 고대의 상이용사들에게 주어진 것마냥 부양연금을 받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언표들을 생산하는 기계적 배치를 작동시키는 경우가 아니라면 늑대인간은 결코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런 건 문제가 되지 못한다. 그들이 주체로 하여금 그의 가장 개별적인 언표들을 증식토록 했던 바로 그 때, 그들은 늑대인간으로부터 모든 언표행위의 조건을 박탈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정신분석적 중립성이다. 늑대인간은 계속해서 운다. “여서일곱마리의 늑대라고!” 프로이트는 대답한다. \"아기 염소들이 아니라고? 아주 흥미롭군. 내가 아기 염소들을 데려가지. 그러면 늑대 한 마리가 남을텐데, 그건 바로 아버지야...\" 바로 이것이 늑대인간을 그토록 피곤하게 했던 것이다. 늑대인간은 자신의 동료 늑대들과 더불어 길게 늘어진 채 목구멍 속에 남아 있으며....... 그 모든 리비도적 가치는 기관없는 신체 상에 남아 있다. 전쟁이 닥칠 것이며, 늑대들은 볼셰비키로 바뀌어, 인간(l\'Homme)은 그가 말했어야 했던, 그러나 하지 못했던 모든 걸로 질식해있다. 사람들은 우릴 향해 오직 선언하리니, 늑대인간은 매우 고상하고 얌전하며 체념적인 상태로 훌륭하게 원상으로 복귀되었다 - “정직하고 양심적이게” 된 것이다. 요컨대 그는 치료된 것이다. 그러나 늑대인간은 정신분석학이 진정 동물학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고 외침으로써 복수할 것이다. “젊은 사람에게 자연에 대한 사랑과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 특히 동물학에 대한 이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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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신경증으로 선언한 첫 번째 에피소드를 보자. 늑대인간은 한 그루의 나무 위에 있는 예닐곱 마리의 늑대를 꿈꾸었고, 그중 다섯 마리를 그렸다. 당연한 일이다. 원래 늑대들은 무리지어 움직이니까.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을 프로이트는 알지 못한다. 얼라들도 아는 걸 오직 그 홀로 모를 뿐이다. 프로이트는 주저하며 묻는다. \"꿈속의 여러 마리의 늑대들을 어떻게 설명하지?\" 이야기는 이미 신경증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좀 다른 환원 절차를 동원한다: 말들의 표상 수준에서의 언어적인 포섭이 아닌 사물들의 표상 수준에서의 자유연상. 그러나 결과는 동일하다. 항상 사람 혹은 상실된 것으로 간주되는 대상의 동일성, 통일성으로 회귀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늑대들의 복수성/다양성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대여섯마리 늑대의 꿈\'이 늑대와 일곱 마리의 아기 염소(이중 여섯마리가 잡아먹힌다.) 이야기로 치환되고, 꿈은 조작된다.
우리의 프로이트가 느낄 환원적 환희를 더듬어보자; 단지 아기 염소일 뿐인 일곱 마리의 늑대들. 여섯 마리의 늑대라면, 일곱 번째 늑대(늑대인간 자신)는 시계 속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다섯 마리의 늑대라면, 늑대인간이 그의 부모가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본 것은 다섯시였을지도 모르는 동시에, 로마자 숫자 V가 쭉 뻗어있는 에로틱한 여자의 다리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 마리의 늑대라면, 부모가 세 번 사랑을 나누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늑대라면, 아이가 맨처음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본 것은 계간(鷄姦)하는 양친이었거나 혹은 두 마리의 개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마리의 늑대만 남는데, 우리가 처음부터 이미 알고 있었듯이, 그 늑대는 아버지기 때문이다. 마침내 영(零, zero) 마리의 늑대가 되는데, 꼬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거세하는 동시에 거세당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대체 누굴 놀리고 있나? 늑대들은 결코 자신들의 \'무리\'에 사로잡히거나 벗어날 어떤 기회도 갖지 못한다. 정신분석에서 동물들은 부모의 성교를 표상하거나 반대로 그런 성교에 의해서 표상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프로이트는 늑대들이 발휘하는 매혹에 대해서, 그들의 소리없는 외침에 대해서, 늑대가 되려는(à devenir-loup) 외침의 의미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다. 늑대들은 꿈꾸는 아이를 응시하고 지켜본다....... 프로이트는 단지 오이디푸스화된 늑대 혹은 개, 거세당한 거세자인 아버지-늑대만을 알 뿐이다. 개집 속에 있는 개만을 알 뿐이며, 정신분석가의 개소리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개별적인 언표는 없다. 단지 언표를 생산하는 기계적 배치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늑대인간에 대해서도 정확히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프로이트가 강박적 신경증에 부여한 종교적-군사적 기계; 프로이트가 히스테릭한 특성을 부여하는 무리나 늑대-되기 혹은 말벌-되기, 나비-되기 등의 항문 기계; 프로이트가 유일한 동력으로 간주하는, 어디에서나 재발견되어져야 하는 부동(不動)의 동자(動子)(moteur immobile)[팟저 주 : 유일한 변수 정도로 읽으면 될 겁니다.]로서 오이디푸스 장치; 그리고 반-오이디푸스적 장치(누이와의 근친상간, 분열적 근친상간, “열등한 조건에 있는 사람”과의 사랑; 그리고 항문성, 동성애?). 이 모두를 프로이트는 오직 오이디푸스의 대체물과 퇴행, 파생물로만 본다. 프로이트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며,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오이디푸스적 언표들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부동의 동자와 같은 맥락을 가질 수 있는]개별적인 언표란 없으며, 그런 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언표는 특정한 기계적 배치/구조의 생산물이다. 달리 말해 언표행위(énonciation)를 대행하는 이\'들\'(agents)이 만들어내는 생산물이다. 헌데 고유한 이름(nom propre)은 개인을 지시하지 않는다. 탈인격화를 좀더 엄격히 실행한 결과 복수성이 개인을 이리저리 횡단하는 것은, 그리고 진정으로 개인에게 고유한 이름을 획득하도록 만드는 건, 반대로 개인들이 복수성 속에서 펼쳐지는 때다. 고유한 이름은 복수성의 즉각적 포착이다. 고유한 이름은 강도들의 장(場)에서 그 자체로 포착된 순수한 무한자의 주체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에 대해 오직 오이디푸스적 언표만을 선택했는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표란 어떤 지점에선 여전히 기계적 배치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며, 이와 연관해 자신의 오류를 측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정의 지표로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환자들로 하여금 인격화되고 개별적인 언표들을 취하도록,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의 이름을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이디푸스적 언표들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모든 게 처음부터 함정이다. 늑대인간은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늑대에 대해서 말해봐야, 그리고 아무리 늑대처럼 울어봐야 프로이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며 그 개를 쳐다보며 말할 것이다. “그건 아버지야”라고. 같은 소리가 반복된다면 프로이트는 이를 신경증이라고 말할 것이며, 그게 파열된다면 정신병이라고 부를 것이다. 늑대인간은 [아버지라는] 원인을 상기시킨 공로로 정신분석학에서 메달을 받을 것이며, 고대의 상이용사들에게 주어진 것마냥 부양연금을 받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언표들을 생산하는 기계적 배치를 작동시키는 경우가 아니라면 늑대인간은 결코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런 건 문제가 되지 못한다. 그들이 주체로 하여금 그의 가장 개별적인 언표들을 증식토록 했던 바로 그 때, 그들은 늑대인간으로부터 모든 언표행위의 조건을 박탈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정신분석적 중립성이다. 늑대인간은 계속해서 운다. “여서일곱마리의 늑대라고!” 프로이트는 대답한다. \"아기 염소들이 아니라고? 아주 흥미롭군. 내가 아기 염소들을 데려가지. 그러면 늑대 한 마리가 남을텐데, 그건 바로 아버지야...\" 바로 이것이 늑대인간을 그토록 피곤하게 했던 것이다. 늑대인간은 자신의 동료 늑대들과 더불어 길게 늘어진 채 목구멍 속에 남아 있으며....... 그 모든 리비도적 가치는 기관없는 신체 상에 남아 있다. 전쟁이 닥칠 것이며, 늑대들은 볼셰비키로 바뀌어, 인간(l\'Homme)은 그가 말했어야 했던, 그러나 하지 못했던 모든 걸로 질식해있다. 사람들은 우릴 향해 오직 선언하리니, 늑대인간은 매우 고상하고 얌전하며 체념적인 상태로 훌륭하게 원상으로 복귀되었다 - “정직하고 양심적이게” 된 것이다. 요컨대 그는 치료된 것이다. 그러나 늑대인간은 정신분석학이 진정 동물학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고 외침으로써 복수할 것이다. “젊은 사람에게 자연에 대한 사랑과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 특히 동물학에 대한 이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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