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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2/29 22:52:12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17)
17.

"평양 점령 1회, 서울 점령 5회! 서울 침공 전문가 계엄군 물러나라!"

강주경 상사는 시위대 쪽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스피커 소리에 짜증이 났다. 난로를 켜놓은 대형 천막을 뚫고 오는 소리는 주변을 완벽히 지배하였다.
오전엔 다양한 민중 가요나 개사 가요여서 그나마 견딜 만했다. 하지만 점심 먹고는 저 한 마다를 계속해서 내보내는 게 딱 북 대남 방송 느낌이었다. 심지어 61년, 72년, 79년, 80년, 2025년 실제로 쿠데타가 일어났으니 반박거리가 없는 게 더 거슬렸다.  

'...하지만 소음 공해는 소음 공해지.'

현재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는 남북한 대치한 것처럼 100미터 정도 공백이 있었다.
돌과 쓰레기, 각목, 쇠파이프, 물 웅덩이가 바닥에 깔린 이 무인 지대를 사이에 둔 시위대는 이삿짐 센터에서 쓰는 높이 20미터 크레인을 두 대 끌고 왔다. 그리고 한 대는 자신들을 위해 쓰고, 다른 한 대는 이쪽으로 돌려 끝에 건 스피커에서 무한정 소음을 내보내는 중이었다.

'100미터 거리니 애들 시켜 쏴 버리면 될 텐데, 어젯밤에 사람이 죽었다고 크레인도 아니고 장비를 못 부수는 게 말이 돼?'

정치니 여론이니 주경에게는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런 것 신경쓰지 않고 남자답게 운동이나 열심히 하려고 온 군대, 어느새 운명은 그와 부하들을 정치의 중심에 두었다.
만약 윤석열이 계엄에 실패했다면. 그게 아니면 동원된 군인들이 태업할 명분이나 계기가 있었다면.

'또, 또 이런다!'

주경은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나약해진 게 틀림없었다.
만약이란 없다. 만약이란 말은 나약한 자들이나 되뇌이는 문구이다. 불만스럽더라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진정한 군인이다.
...물론 끝나고 술 한 잔은 필수이고.
요새 음주가 습관이 되어 버린 주경이 입맛을 다시는데 누군가 슬쩍 천막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보사 사이버 안보팀장 겸 현 스마트CCTV 정보 분석팀 팀장 김기환 소령이었다. 그는 어지간히 추운지 롱 패딩 차림이었다.

"아이고, 안녕들 하십니까."

플라스틱 간이 의자가 밀리는 소리, 방탄모 외 완전무장한 사람들의 장비가 철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경의 팀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주경은 평소 하듯 그냥 앉아서 대충 경례했다. 이 모습에 기환이 멈칫했지만 그대로 넘어갔다.

"미안하지만 긴히 할 말이 있으니 강주경 상사님 빼고 다른 분들은 좀 나가주실래요."

팀원들이 허락을 구하며 쳐다봤다. 주경이 손을 흔들었다.

"나가 있어. 담배나 피우고."

팀원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천막 안에는 주경과 기환만 남았다.
기환이 주경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안수진 중위 추적 건입니다."
"또요?"

주경이 난로에 손을 녹이며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확실한 정보 있으면 연락 주시라고."
"확실합니다. 광화문 광장에 있을 확률 81퍼센트예요."
"70에서 81로 올랐네요."

기환이 태블릿을 꺼내 주경 앞에 놓았다.

"보십시오. 광화문 일대 CCTV 통합 분석 결과입니다. 안수진 중위 체형과 81퍼센트, 김보민 중사와 75퍼센트 일치하는 개체가 오후 4시 17분 광장에 진입했습니다."

주경이 화면을 봤다. 둘 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었다.

"얼굴도 안 보이는데 81퍼센트가 어떻게 나옵니까. 보행 패턴, 어깨 각도, 골반 움직임 등을 종합 분석한다고 하셨죠. 시위대는 대부분 가만히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데 그새 데이터가 더 늘어났나요?"

기환이 한숨을 쉬었다.

"강주경 상사님. 지금 장난합니까."
"장난 아닙니다. 진지하게 묻는 겁니다."

주경이 난로에서 손을 떼고 기환을 봤다.

"70퍼센트 때도 요청하셨잖아요. 그땐 더 황당했죠. '두 사람인지 확실치 않다. 그래도 지정한 위치에 내려서 일일이 검문해 달라.' 헬기에서 내리면요, 분노한 시위대에게 좀비 영화처럼 뜯길 겁니다. 설사 그러지 않는다 해도 저희가 10명인데 검문을 얼마나 하겠습니까."
"..."
"따로 말씀 안 한 속셈이 있는 건 아닙니까?"
"속셈요?"
"듣자 하니 이것저것 던져줘서 정보과 형사들이랑 친하시다고요. 아까도 소매치기나 추행 같은 잡범 확인해서 넘겨주셨다 들었습니다. 네. 프레스 센터 통해 단신 기사 나갔습니다. 시민을 위해 엄정한 가운데, 따뜻한 민사 활동도 병행한다 어쩌구 저쩌구.
근데 그 사람들 평소에도 시위 현장 들어가는 게 일 아닙니까. 정보과 형사들은 이미 침투해 있죠? 군인과 달리, 경찰관은 그냥 보면 운동 열심히 한 민간인 같으니 들키기 쉽지 않죠. 하지만 시위대가 많으니까 정체 드러내서 체포하면 두들겨 맞고 실패할 것 같고. 그런데 저희가 혼란을 일으키면 시위대가 흩어지면서 저항력을 잃겠죠. 그럼 그때 정보과 형사들을 통해 실제로는 위치가 완벽히 특정된 두 사람을 확보하겠다 그런 생각 같아요. 제 짐작이 틀렸나요?"

침묵이 길어졌다.
주경은 기환도 자신처럼 절박할 거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이 인간이 여인형에게 단독으로 잘 보이고 싶어서 이러나? 장관 직속 부대나 다름없는 우리를 허수아비 만들어서 칭찬받고 싶은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도 자랑은 아니지만 엄연한 실세야. 대통령 계란말이 김치찌개 다 먹어봤어. 너한테 체포의 공을 줄 때가 아니야. 내가 급해. 난 총으로 바로 죽일 거야. 껄쩍지근하지만 일을 묻으려면 그 수밖에 없어. 대통령은 강력 진압하라고 난리야. 오늘도 분명 혼란이 생길 거야. 그때를 이용하겠어.'

침묵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졌다. 기환의 얼굴도 하얘졌다. 원래 대기업 다니다가 특채로 들어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평소보다 두 배 많은 근무로 지친 탓 같았다.
주경은 쐐기를 박았다.  

"아무리 급해도 우리 애들 위험한 일은 안 하겠습니다. 정 시키시고 싶으시면 국방부 통해서 정식으로 절차 밟으세요."

기환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텐트 밖으로 나갔다. 주경은 혀를 차면서 팀원을 부르러 따라나섰다.
건물로 들어갈 것 같던 기환은 근처 119 응급차에 올라탔다. 군용 구급차가 아니라 희한하다 생각했던 그 차였다. 정보사에서 위장용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저 정도면 롱 패딩도 군복 대신 입은 오렌지 색 구급복을 가리려 입은 것 같았다.
주경은 혀를 찼다.

"하여간 별 요사스러운 짓은 다 해."

팀원들은 서울 광장과 건물들을 보면서 연기 속에서 시시덕대는 중이었다. 원래 이 구역은 전부 비 흡연 구역, 풍광 좋은 데에서 하는 끽연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추우면 들어오겠지.'

주경이 다시 난로 앞에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누군가 쭈뼛거리며 텐트 입구에 노크를 했다.

"들어와."

뿔테 안경에 핏기 없는 얼굴을 한 장교가 롱 패딩에 모자까지 걸치고 들어왔다. 계급장을 보니 중위였다. 군인보다는 회사원 이미지를 가진 남자였다.

'롱 패딩이 유행인가.'

장교 같지 않은 생김새에 김기환까지 생각나면서 말이 거칠어졌다.

"자넨 또 누구야?"

기세에 눌린 한영교는 경례까지 붙였다.

"통신보안... 아니, 정보사 사이버 안보팀 한영교 중위입니다."
"김기환 소령 부하가 여긴 웬일이야? 놓고 간 물건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소령님 지시로 온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한영교가 주경을 똑바로 봤다. 기가 약하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당당해졌다. 뭔가 제대로 결심한 사람 같은 결기가 보였다.

"안수진 중위는 저랑 같은 실에서 일했습니다.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령님이... 죽이려고 합니다."

주경의 표정이 굳었다.

"뭐?"
"살려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야?"
"소령님은 안수진 중위가 열람한 서버가 에러가 났다며 노후화된 하드를 교체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열람한 서버는 B-1 벙커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더 수상합니다. 소령님은 지금까지 총기 휴대를 하신 적 없고, 수준 유지 사격도 하기 싫어하신 분이었는데 K-5 권총과 실탄까지 지급받았습니다. 결론은 딱 하나입니다."
"김기환 소령이 안수진을 죽일 생각이라고?"
"그렇습니다. 전 그걸 막고 싶습니다. 그래서 강주경 상사님께 상의 드리러 왔습니다. 시키시는 일은 뭐든지 하겠습니다. 스마트 CCTV 열람이나 기지국 연결 등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안수진 중위를 체포만 해 주세요. 정보과 형사들이 소령님에게 인계하는 걸 막아주세요."

주경은 웃음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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