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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5/12/14 20:38:21 |
| Name | 트린 |
| Subject | 또 다른 2025년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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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보민이었다. 확실히 헤어졌던 전 남자친구였다. 짧은 머리, 강인해 보이는 잘생긴 얼굴, 특히 어깨가 넓은 큰 덩치가 특징인 보민이 겨울이라 의례 있을 법한 파카 없이 흰 스웨터 차림으로 사력을 다해 남과 맞섰다. '대체 어떻게?' 궁금증도 잠시, 보민의 등장도 큰일이 아닐 판이었다. 보민은 맨 처음 나타나 기습으로 그를 벽에 민 후로는 한번도 손을 대지 못했다. 키도 20센티미터 정도 작고, 체중도 절반밖에 안 나가 보이는 남은 보민을 일방적으로 때렸다. 남은 MMA(*종합격투기의 약자)를 꽤 오래 수련한 보민을 거의 가지고 놀았다. 흔히 권투의 약점인 다리를 노려 로우킥을 하는 순간 턱을 때렸다. 발차기를 하느라 동작이 커질 땐 앞으로 튀어나오며 배를, 태클을 하러 몸을 낮출 때는 귀신같이 뒤로 빠졌다가 자세가 무너졌을 때 얼굴을 걷어찼다. 실수 한 번 없이 정확히 자신의 장점인 속도와 반사 신경을 동원해 상대의 약점을 때리고, 재빨리 빠져나갔다. 저 정도 싸움 기술이 있는데 뭐하러 군인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보민은 한 눈이 감기고, 볼과 턱이 퉁퉁 부어 둥그래질 정도로 두들겨맞았다. 그의 흰 스웨터 여기저기에는 주먹 자국과 발자국이 선명했다. 이러다가는 남이 엄마를 죽인 것처럼 보민도 맞아죽을 것 같았다. '...엄마!' 정신이 흐렸을 땐 온통 자기 연민만 감돌았는데, 이제 정신이 맑아질 때가 되자 자기 혐오가 폭발했다. '3개월 동안 뭐한 거야? 엑셀 만들고, USB 숨기고, 혼자 똑똑한 척 겁쟁이가 용기 있는 척하다가 쓸데없는 논리 내세워 살인마 앞에 엄마를 노출하고. 뭐든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오판한 주제에 살인마가 예상을 벗어나 행동하니까 당황해서 말리지도 못하고 엄마 죽이고. 이제 남친도 죽이고?' 엄마를 생각하고, 토할 만큼 토하고, 숨이 되돌아오고, 자신의 헛짓과 바보 짓을 되짚자 수진의 눈에서 불이 솟았다. 저놈을 꼭 죽여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앞으로 하늘 아래 덜 울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수진은 옷소매로 입을 닦은 다음, 마루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의 싸움을 피해 부엌으로 달렸다. 남이 소리쳤다. "뭐, 뭐야!" 수진은 식탁의자를 보민 근처에 밀어줬다. "칼 든 사람처럼!" 칼 든 사람 상대하듯 접근을 막으라는 뜻이었다. 보민은 끄덕이더니 의자의 네 발을 앞세워 남을 뒤로 밀어붙였다. 그는 힘이 세서 목재 의자를 우산 정도로 가볍게 다뤘다. 요령도 있어 의자는 배꼽 정도 위치를 겨냥하였다. 시야도 확보하고 하체를 견제하기좋은 자세였다. 남은 히죽 웃으며 좌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페인트로 몸을 흔들어주고 실제로는 오른쪽으로 돌았다. 하지만 보민은 어차피 축인 하체를 노려 허벅지에 의자를 찔러넣었다. 의자 끝에 살짝 걸린 것만으로 남은 휘청거리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어어?" 남은 도구 앞에서 자신의 장기가 통하지 않자 주춤거렸다. 기회를 엿본 보민이 창처럼 또 한 번 찔렀다. "악!" 힘이 실린 찌르기에 남성기 주변과 허벅지가 찔리자 남은 아파하면서 크게 당황했다. 수진은 남이 정신이 빼앗긴 사이, 식탁을 넘어 식칼 두 자루를 집었다. 싸움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한 남은 도구의 왕, 폭력의 정점 총을 꺼냈다. 승부처라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었다. 거의 동시였지만 어쨌든 수진이 던진 식칼이 빨랐다. 아쉽게도 식칼은 날등 부분으로 때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남이 주춤하며 권총을 정확히 겨냥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보민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오른손 전체를 겨냥해 의자를 찔렀다. 몸통 전체의 힘이 실린 일격에 남이 뒤로 밀렸다. 네 개 중 두 개는 몸통, 두 개는 오른손 깊숙이 들어갔다. 남은 핀에 찍힌 곤충처럼 벽에 붙어 움직이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권총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남이 중얼거렸다. "그만, 그만." 수진은 말을 하든 말든 2격을 준비하던 식칼을 내던지고, 두 사람 사이로 얼른 달려가 총을 집었다. 수진은 활짝 웃으며 떨림없이 남을 겨눴다. 그녀에게서 보이는 명백한 살의에 보민과 남 모두 크게 놀랐다. 남이 외쳤다. "살려줘, 죽이지 마!" 시간이 갑자기 극적으로 느려졌다. 시럽 안에 든 물방울처럼, 젤리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초파리처럼 모든 사물과 사고가 굼뜨게 움직이면서 수진에게 와닿았다. 보민도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무어라 입을 열었다. 너무 느려 들리지는 않았으나 내용은 알 만 했다. 그녀의 마음도 가만 있지 않았다. 순간 가슴속 어딘가 남과 보민의 하소연에 호응하면서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건 교육의 결과가 잔존한 무의식일 수도, 아니면 원래 보통의 인간에게는 있는 표준이요 양심일 수도 있었다. 가냘픈 그 소리는 사람은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수진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권총 사격 시간에 얼핏 배웠던 대로 머리보단 가슴이 빗나갈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 그리고 세게 쥐어짜면 총구가 흔들린다는 내용을 떠올리며 글록 17의 방아쇠를 당겼다. 얼굴을 때리는 맹렬한 가스압과 함께 9밀리 탄 두 발이 굉음을 내며 남의 가슴을 꿰뚫었다. 남은 입을 달싹이다가 제자리에 주저앉았고, 그러다 앞으로 미끄러지듯 넘어졌다. 뒤로 튀었던 대량의 핏방울에 이어 바닥에 흥건한 피웅덩이가 생겼다. 남의 숨이 멈췄다. 영원할 것 같은 시간, 끊임없이 분절되던 1초가 갑자기 정상적으로 되돌아왔다. 수진이 외쳤다. "꼴 좋다!" 해냈다.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다. 괜히 공리주의니 뭐니 머리로 따져서 세 명이 무고하게 죽을 것 같으니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요소를 활용하여 최대한 자신이 막아볼 수 있는 홈그라운드로 끌고 간다 뭐한다 복잡한 계획 세우지 말고 총 빼앗고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하! 하하하!" 어쨌든 과거든 미래든 일단 미뤄놓고, 복수는 확실히 했다는 기쁨에 머리가 뜨거워지며 현재에 완전히 멈춰 버렸다. 엄마도 만족하실 것이다. 수진은 기분이 좋아 실실 웃으며 보민을 바라보았다. "보민 씨, 우리가 해냈어. 우린 살았어!" 수진이 두 팔을 활짝 벌렸으나 그저 반겨줄 것 같던 보민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왜지? 총소리에 놀랐나? 아님 간만에 만났는데 내가 많이 변했나?' 수진은 이유가 뭐든 자신의 영웅을 꼭 껴안아주었다. 그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수진은 꼼짝없이 엄마 뒤를 따라 죽었을 것이다. 잠시 얼어붙어 있던 보민은 마치 곰처럼 그녀를 크게 안고, 팔을 등 뒤로 돌려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의 온기와 그의 근육, 체취가 한꺼번에 느껴져 수진은 황홀할 지경이었다. 헤어진 기간은 짧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길었다. 강제로 헤어진 것이라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곧 수진은 궁금증을 품었다. 지금 이 손길은 그동안 연인으로서 나눈 경험으로 보건대, 그가 지금 재회의 기쁨보다는 자신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 없이 전하였다. '위로? 뭘?' 의문은 금세 풀렸다. 바깥에서 전자 도어 번호를 맞추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쓰레기 버리러 가끔 마주친 이웃들이 말리는데도 엄마가 안으로 뛰어들어와, 신발장과 화분을 지나치며 소리쳤다. "수진아!" 엄마는 코에 핏자국은 완전히 닦지는 못한 채 턱이 붓고, 사이즈가 너무 안 맞아서 마치 반 코트처럼 보이는 검은 파카를 망토처럼 어깨에 걸친 모습이었지만 어쨌든 살아 있었다. 엄마는 피, 죽은 남, 가볍게 목례하는 보민, 얼어붙은 딸을 바라보며 바로 사태를 파악했다. "아이고, 아이고." 텅 비기 시작한 수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보민은 수진을 엄마에게 양보했다. 엄마가 그녀를 으스러져라 껴안으며 계속해서 속삭였다. "내 딸. 장하고, 불쌍한 내 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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