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3/07/06 00:45:57수정됨
Name   메존일각
Subject   사진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사진을 찍는 데 들여야 하는 정성에 대한 얘기를 써볼까 합니다. 당연히 저는 인물 사진이죠. :)

사진이 매우 흔해진 시대입니다. 예전처럼 잔뜩 준비해서 각 잡고 찍을 필요 없이, 모두의 손에 쥐어져 있는 스마트폰으로 바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찍자마자 즉시 확인한 뒤 지우고 다시 찍으면 되지요.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스튜디오 등에서 행해지는 '세팅된 환경'에 낯섭니다. 세팅된 환경이라는 건 결국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조명과 소품을 잔뜩 배치하여 연출을 얼마나 가미하느냐 하는 것인데, 어찌 보면 유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주머니 속 폰으로도 충분히 사진이 잘 나오는 걸 굳이 요란벅적하게?

하지만 사진에서 배경빨은 무시 못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사진을 찍을 때 얼마나 멋진 로케이션을 찾느냐, 그곳을 더 그럴 듯하게 꾸미기 위해 어떻게 오브제를 배치하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아니 가장 중요한 것은 빛입니다.

빛(phos)을 그린다(graphos)는 사진(photography)의 어원까지 따지고 들지 않더라도, 사진은 빛을 어떻게 두고 찍는가가 핵심이 됩니다. 실외에는 자연광이 있지만 그림자가 너무 짙기 때문에 그림자를 옅게 해줄 보조광이 필요하고, 실내에서는 처음부터 조명을 다 배치해서 원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실제로 업계인들이 많은 커뮤니티에는 초보임을 자처하며 일정한 예산으로 무슨 카메라나 무슨 렌즈를 사면 좋을까 물어보는 질문이 종종 올라오는데요. 이런 댓글이 답변으로 쉽게 달립니다. '조명 뭐 뭐 사세요. 카메라나 렌즈는 그 다음입니다.' 물론 수백~수천만원짜리 카메라라서 스마트폰보다 사진이 더 잘 나오는 건 사실인데, 그보다 가성비가 좋은 건 조명입니다. 조명 세팅을 잘 하면 스마트폰으로 찍어도 기본 환경만으로 찍는 어지간한 카메라보다 결과물이 잘 나올 수 있어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스마트폰으로 아무나 아무렇게 사진을 찍을 수[는] 있지만 그걸로는 절대 화보처럼 결과물이 나올 수 없습니다. 조명에 카메라빨까지 보태지면 아무렇게나 찍는 스마트폰보다 도드라지게 구분되는 결과물이 나오게 되는 거고요.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저 환경적인 조건을 맞춰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 한 가지가 남았죠. 피사체가 되는 모델이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헤어도 스타일링하고 메이크업도 하고 멋드러진 의상도 입어야죠.

혹자는 "그렇게 꾸미면 누가 사진이 못 나오겠냐 그냥 찍어도 잘 나오겠네, 뻔한 얘기 하고 있어." 하실 수도 있겠지요. 네 맞습니다. 근데 그렇게 잘 꾸민 모델에 잘 꾸며진 환경까지 곁들여지면 얼마나 좋은 사진이 나오게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냐, 요즘 세상에 언제든 바로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사진이지만, 좋은 술을 얻기 위해 오랜 숙성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사진에도 시간을 들이면 더욱 좋다는 겁니다. 사진을 찍는 데에 시간을 들이는 걸 답답히 생각 마시고 당연하게 여겨주십사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장소를 찾는 것도 시간이고, 오브제를 배치하는 것도 시간이고,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빛을 세팅하는 것도 시간이고, 테스트 촬영하며 세세하게 세팅을 고쳐가는 것도 시간이고, 모델에 더 맞는 빛을 찾아보는 것도 시간이고, 모델 역시 스스로를 꾸미고 치장하고, 매무새를 가다듬는 것도 시간이고, 더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사진사와 모델이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도 시간입니다.

2시간 사진 찍는데 1시간 반 세팅한다는 얘기가 괜한 게 아니란 말씀을... 제가 살짝 삐쭉해져서 이런 글을 쓰는 건 결코 아니...ㄹ 거고요.



13
  • 기다림이 길수록 좋은 사진이 나올 확률이 높은 법이지요. 추천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954 7
15155 일상/생각청춘을 주제로 한 중고생들의 창작 안무 뮤비를 촬영했습니다. 2 메존일각 24/12/24 407 6
15154 문화/예술한국-민족-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소고 meson 24/12/24 302 2
15152 정치이재명이 할 수 있을까요? 72 제그리드 24/12/23 1612 0
15151 도서/문학24년도 새로 본 만화책 모음 6 kaestro 24/12/23 371 5
15150 게임최근 해본 스팀 게임들 플레이 후기 1 손금불산입 24/12/23 285 5
15149 사회그래서 통상임금 판결이 대체 뭔데? 7 당근매니아 24/12/23 615 11
15148 정치윤석열이 극우 유튜버에 빠졌다? 8 토비 24/12/23 839 9
15147 정치전농에 트랙터 빌려줘본 썰푼다.txt 11 매뉴물있뉴 24/12/22 1076 3
15146 의료/건강일종의? 의료사기당해서 올려요 22 블리츠 24/12/21 988 0
15145 정치떡상중인 이재명 56 매뉴물있뉴 24/12/21 1856 15
15144 일상/생각떠나기전에 생각했던 것들-2 셀레네 24/12/19 575 9
15142 일상/생각플라이트 시뮬레이터로 열심히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7 큐리스 24/12/19 508 2
15140 정치이재명은 최선도, 차선도 아니고 차악인듯한데 43 매뉴물있뉴 24/12/19 1855 7
15139 정치야생의 코모도 랩틸리언이 나타났다! 호미밭의파스꾼 24/12/19 383 4
15138 스포츠[MLB] 코디 벨린저 양키스행 김치찌개 24/12/19 137 0
15137 정치천공선생님 꿀팁 강좌 - AI로 자막 따옴 28 매뉴물있뉴 24/12/18 748 1
15135 일상/생각생존신고입니다. 9 The xian 24/12/18 616 31
15134 일상/생각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5 Picard 24/12/18 444 7
15133 도서/문학소설 읽기의 체험 -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를 중심으로 1 yanaros 24/12/18 304 4
15132 정치역사는 반복되나 봅니다. 22 제그리드 24/12/18 759 2
15131 여행[2024 나의 이탈리아 여행기] 0. 준비 7 Omnic 24/12/17 369 7
15130 정치비논리적 일침 문화 7 명동의밤 24/12/16 878 7
15129 일상/생각마사지의 힘은 대단하네요 8 큐리스 24/12/16 798 7
15128 오프모임내란 수괴가 만든 오프모임(2) 50 삼유인생 24/12/14 1889 5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