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12/25 05:45:35수정됨
Name   은머리
Subject   HBO의 2021년 시리즈 <The White Lotus>
[The White Lotus]는 현재 두 시즌이 있으며 시즌 당 6개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현재 시즌 1을 마치자마자 불같이 화가 났는데 리뷰를 뒤져보니 저만 화가 난 모양입니다.

일단 이 드라마는 음향효과, 영상미, 연기, 시나리오 모든 면에서 탁월한 수작입니다. 스포일러가 잔뜩 나오니 피하고 싶은 분들은 이 글을 읽으시면 안됩니다.

상류 백인 부자들이 배를 타고 하와이의 고급휴양지에 도착하면 다양한 인종의 호텔직원들이 나와서 손을 흔드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요. 급하게 훑어본 리뷰는 미국의 계급주의와 wokism을 풍자한 블랙코미디라고 하는데 이 드라마는 그 이상의 매우 불쾌한 스토리를 담고 있어요.

미국은 자본주의 끝판왕의 나라이고 계급이 인종별로 확연히 나뉘어져 있어서 인종차별적 구조가 공고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BLM, 트랜스젠더 이슈 등을 필두로 정치적 올바름이, 시간이 지나면서 도착증세를 보이더니 일부 피곤한 내로남불 캔슬문화로 변질된 것도 역시 사실이에요. 일례로 BLM이 한창이었을 때 평화로운 시위가 정책개선에 더 효과적이라는 논문언급에 '좋아요'를 눌렀다고 해고된 데이타 사이언티스트 일화는 그 자체로 병적이죠. 정치적 올바름의 병적인 변질을 wokism이라고 조롱하기도 하는데 이 드라마는 일단 wokism을 비웃는 블랙코미디입니다. wokism을 풍자하는 자체는 좋아요. 저도 정체성정치에 대한 피로감을 꽤나 느껴서 NPR이나 The New York Times 같은 리버럴 언론을 그닥 신뢰하지 않게 됐기도 하고요.  

여튼 그래서 이 드라마에는 colonialism, white male dominance, 반동성애 혐오 코드가 훅 하고 등장해요. 이 프로가 wokism을 조롱하는 방식은 위선의 끝판왕인 Gen Z 딸과 그 친구의 등장으로 이루어지죠. 부자백인 가족의 여대생딸과 이들 가족여행에 꼽사리 껴 따라간 하와이안 인종의 딸친구는 둘 다 인스타형 가식을 뒤집어 쓰고 위의 colonialism, white male dominance, 반동성애 혐오 코드를 비판하는데 가족과 주변인들에게는 세상 못된 기집애에, 마약을 일삼고 백인딸의 경우 절친의 남친도 취미로 유혹하는 인간말종 bitch예요. 이 부분은 유쾌한 풍자로 봤어요.

문제는, 이 백인딸의 유색인종 친구(Paula)를 백인작가가 창조해 드라마에 써먹는 방식이에요. 부자백인가족들과 같이 야외에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무대에서는 하와이언 전통춤을 시전하고 있었죠. 싸가지 없기로는 친구 못지 않은 유색인종 Paula가 원래 하와이땅이었던 이곳에 백인들이 원주민의 터전을 빼앗아 기득권을 차지하고 지금 하와이언들은 백인주인의 호텔에서 일하며 광대처럼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화가 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어이가 좀 상실했지만 이건 그닥 분노의 촉발점이 아니에요.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잠시 다른 인물들을 살펴보자면, 백인등장인물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냥 돈 많고 무탈하게 사는 사람들이라 그들의 불안증은 고작 결과를 알기 전까지의 암조직검사에 대한 두려움, 이미 돌아가셨지만 집안의 기둥이었던 상남자 아버지가 실은 게이임을 알게 된 백인아빠가장의 멘붕, 유수한 회사를 경영하는 백인아내의 일중독, 다정다감하지 않았던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으나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를 갉아 먹는 돈 많은 어떤 백인아줌마 등 무해한 일상에 더해 돈이 엄청 많은 팔자 좋은 사람들이죠.  

그런 그들도 나름대로의 희노애락이 있어서 한때 외도했던 남편에 대한 기억이 상기되는 바람에 기분이 틀어진 백인아내가 보트여행을 거부하고 호텔로 혼자 돌아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가족갈등의 클라이막스였죠.

다시 유색인종 딸친구 Paula로 돌아와서 그녀는 호텔에서 일하는 하와이언 젊은이 Kai와 눈이 맞게 됩니다. 이 성실해 보이는 젊은이는 백인 호텔주인이 가족의 땅을 훔친 주범이지만 가족의 반대를 무릎쓰고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그 호텔에서 일을 하는데요. 돈만 있으면 변호사를 고용해 부동산을 되찾고 싶어하죠. 아마도 역사적인 분쟁을 내포하고 있는 듯했어요.

드디어 문제의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요. Paula가 Kai에게 친구 호텔방 금고에 7만 5천불짜리 팔찌가 있다며 자기가 알아낸 비밀번호를 전해줍니다. 그 돈으로 변호사를 사서 땅을 되찾으란 얘기죠. 이에 Kai는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더니 이내 수긍하고 갖고 있던 매스터키를 가지고 침입해 들어가 보석을 훔쳐요. 마침 일정을 취소해 버리고 방으로 돌아온 백인아줌마의 등장에 당황한 Kai는 그녀를 뒤에서 덮쳐 소리만 안 지르면 무사할 것이라며 아둥바둥하다가 때마침 아내를 뒤따라온 백인남편이 달려들자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곤 달아나죠.

이후 Paula는 정황을 눈치 챈 백인친구에게 결계를 치고 우울해 있는데 남의 귀금속을 훔치거나 폭행이 일어난 모든 정황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하나도 안 느껴요. 왜 그랬냐는 백인친구말에 너는 이해 못할 거란 말만 하죠. 가관인 건 Paula의 우울감에 백인친구는 속죄하듯 친구를 꼭 안아줍니다.

결국 시리즈 종반부의 모양새는 용맹스럽게 자신을 구해준 백인남편에 울분이 눈녹듯 사라져 금슬을 되찾은 백인부부, 경찰에 체포된 유색인종 Kai, 제국주의 역사를 핑계로 자신의 온갖 더러운 비윤리적 행위는 가벼이 합리화하는 게 당연한 유색인종 Paula, 게다가 이 Paula는 예민하기는 극도로 예민해서 벼라별 유난스러운 병명과 알러지를 달고 삽니다. 이런 '피억압자' 친구를 눈물로 안아 주는 '역사적 억압자' 백인친구.

다 보고 나니까 욕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wokism은 백인리버럴주류가 주도한 거였어요. 지네들이 역사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속죄를 패션으로 두르고 다니며 결벽증적 난리부르스를 피웠으면서 감히 entitled minority(피해자라고 유세부리는 마이너리티)를 등장시켜 백인커플이 공격당해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연출하다니, 저는 이 부분에서 너무 화가 났어요.

NPR, The New York Times, The New Yorker 모두 이 드라마를 소개하며 칭찬이 자자한데 위선을 주도하던 미디어당사자들이 정작 마이너리티 캐릭터 욕먹이는 이딴 드라마를 보도하는 행태를 보니까 더 화가 나더라고요. 이들은 백인들이 얼마나 가진 것에 익숙해 있는지를 꼬집는 계급주의 비판드라마라고 소개를 하는데 제게는 마이너리티 욕먹이는 드라마였네요. 저게 어째서 계급주의 비판이 목적이에요? 마이너리티라고 다 착한 거 아니지만 Paula나 Kai같은 캐릭터로 유색인종 욕먹여 백인커플 금슬이 돈독해지는 결과라니 이게 도대체 누구 엿먹이는 이야기지 칭찬할 건덕지가 있는 건가요?

Paula는 유색인종이 아니었어야 했어요. 시즌 1을 시청한 소감은 백인들의 오만함을 뼛속깊이 느꼈다는 것인데요. 그게 영화의 메세지인 것이 아니라 마이너리티캐릭터를, 같잖은 풍자에 당치 않게 이용해 대상화밖에 할 줄 모르는 백인놈의 작품이 좋다고 헤헤거리는 리버럴 언론의 반응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완성되는 소감이 저렇다는 거예요.



5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661 7
    15040 오프모임11/27(수) 성북 벙개 23 + dolmusa 24/11/13 346 1
    15039 요리/음식칵테일 덕후 사이트 홍보합니다~ 2탄 6 Iowa 24/11/12 283 7
    15022 기타[긴급이벤트] 티타임 따봉 대작전 (종료) 19 dolmusa 24/11/05 978 31
    15038 정치머스크가 트럼프로 돌아서게 된 계기로 불리는 사건 3 Leeka 24/11/11 892 0
    15037 일상/생각와이프와 함께 수락산 다녀왔습니다. 10 큐리스 24/11/11 434 4
    15036 일상/생각과자를 주세요 10 하마소 24/11/11 466 17
    15035 일상/생각화 덜 내게 된 방법 똘빼 24/11/11 334 14
    15034 일상/생각긴장을 어떻게 푸나 3 골든햄스 24/11/09 550 10
    15033 일상/생각잡상 : 21세기 자본, 트럼프, 자산 격차 37 당근매니아 24/11/09 1607 42
    15032 IT/컴퓨터추천 버튼을 누르면 어떻게 되나 13 토비 24/11/08 663 35
    15030 정치 2기 트럼프 행정부를 두려워하며 13 코리몬테아스 24/11/07 1396 28
    15029 오프모임[9인 목표 / 현재 4인] 23일 토요일 14시 보드게임 모임 하실 분? 14 트린 24/11/07 481 1
    15028 도서/문학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6 다람쥐 24/11/07 688 31
    15027 일상/생각그냥 법 공부가 힘든 이야기 2 골든햄스 24/11/06 640 16
    15025 생활체육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540 31
    15024 정치2024 미국 대선 불판 57 코리몬테아스 24/11/05 2204 6
    15023 일상/생각마흔 직전에 발견한 인생의 평온 10 아재 24/11/05 755 24
    15021 생활체육요즘 개나 소나 러닝한다고 하더라구요 10 손금불산입 24/11/05 531 13
    15020 문화/예술2024 걸그룹 5/6 8 헬리제의우울 24/11/04 481 11
    15019 일상/생각인터넷 속도 업그레이드 대작전 31 Mandarin 24/11/02 1035 8
    15017 게임[LOL]11월 2일 토요일 오늘의 일정 5 발그레 아이네꼬 24/11/01 275 0
    15016 생활체육탐라를 보고 생각한 골프 오케이(컨시드)에 대한 생각 12 괄하이드 24/11/01 517 1
    15015 기타[불판] 빅스마일데이 쓱데이 쵸이스데이 그랜드십일절 행사 17 swear 24/11/01 950 3
    15014 일상/생각요즘은요 1 다른동기 24/10/31 372 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