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9/02 14:53:24
Name   순수한글닉
Subject   골 때리는 그녀들에 대한 생각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이직 면접 전에 써야 했던 리뷰입니다.
그때 도움을 구하는 글을 탐라에 올렸었죠.
이직이 요원하게 된 가운데, 쓴 글을 묵혀 두고만 있기 싫어서 올려봅니다.
탐라에서 다양한 시각을 제시해 주신 분들께 보내는 답장이기도 하고요.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에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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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때리는 그녀들〉, 축덕의 절절한 러브레터

가장 좋은 사랑 고백법은 무엇일까? 진지한 태도로 꾸밈없이 진심을 전하는 정공법이 성공 확률이 높지 않을까?
장담컨대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 제작진은 이 정공법으로 축구를 ‘영업’하는 ‘축덕’이 분명하다.

〈골때녀〉는 축구 외에 다른 것은 관심이 없다. 몸 풀기 게임도 현란한 자기소개도 없이 방송 시작 2분 안에 본격적인 경기를 시작한다.
경기 시작 전 영상도 지난 방송의 요약본이니 사실상 시작부터 끝까지 축구만 중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골때녀〉에게 1시간 30분은 축구가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알리기에 빠듯한 시간이다.

〈골때녀〉는 경기 순간순간, 모든 앵글을 다 보여 줘야 직성이 풀리는 듯 출연진의 발재간을 다각도로 리플레이하기 바쁘다.
리플레이가 너무 잦다는 피드백에 횟수를 줄이긴 했으나 삼 세 번은 꼭 채운다.
출연진이 세계 유수 프로 리그에서 나올 법한 현란한 발놀림을 구사했다면, 이건 못 참는다. 세 번 이상, 전부 다른 앵글에서 봐야 하는 거다.
그것이 설사 의도치 않은 결과여도 상관없다. 여기서 해설진의 환호성은 적절한 양념이다. 발재간만큼 출연진의 축구 기술도 놓칠 수 없다.
노출로 드러낸 상체보다 트래핑하는 상체가, 매끈한 각선미보다 테이핑한 다리가 더 중요하다.
여기에 아래에서 위로 몸을 훑는 카메라 워킹이나 미모를 과시하는 클로즈업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골때녀〉는 공을 다루는 솜씨보다 공을 대하는 진심에 주목한다. 기존 스포츠 예능에서 ‘못하는 것’은 웃음 소재였다.
그러나 감히 축구를 희화화하다니, 축덕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파일럿 편에서 꼴찌를 했던 FC구척장신의 공식 구멍 이현이. 하지만 마흔 명이 넘는 출연진 중 그 누구도 그녀를 비웃지 않았다.
제작진은 이현이의 실력을 웃음 소재로 삼는 대신 그녀가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연습량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그녀의 말에 주목한다. 진지한 축덕은 진지한 선수를 키워 냈다.

원 톱 스트라이커 박선영이 유난히 빛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여섯 팀의 전력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손에 땀을 쥐게 된다. 응원하는 팀이라도 생겼다면 긴장감은 배가 된다.
이런 몰입을 위해 제작진은 경기만 보여 주기도 빠듯한 시간에 락커 룸을 조명하고 연습 영상을 끼워 넣는다.
연습 끝에 차 올린 킥, 세트 플레이를 완성하기 위한 땀방울에 초점을 맞춰 팀의 드라마를 쌓는다.
한혜진이 패배의 쓴맛을 곱씹고 연습장에서 발톱 빠진 발로 축구공을 굴리는 모습, 자신의 발톱 빠진 발보다 동료의 멍든 다리와 팔에 울컥하는 모습이 몇 화에 걸쳐 조명된다. 이 덕분에 그녀가 FC구척장신의 첫 골을 넣으려는 순간 숨을 참게 된다.
이어 ‘Goal’이라는 자막을 보고 환호한다.

락커 룸에서 바지런히 경기를 복기하고 경기 전 인터뷰할 시간도 아까워하는 신봉선, 벤치에서 울음을 누르며 컨디션을 조절하는 오나미를 봐 왔기에 FC개벤져스가 복수전에 성공했을 때 왠지 모를 통쾌함을 느낀다.

스포츠의 드라마는 실력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축구를 모르는 사람도 팀의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을 축덕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입덕’의 시작이라는 것도.

최고 시청률 7.5%(출처: AGB 닐슨 코리아), 유튜브 클립 최고 조회 수 10만 뷰는 축덕의 영업 러브레터에 응한 이들의 규모다.
더욱 놀라운 점은 온라인 축구 커뮤니티와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동시에 화제를 모은다는 것이다.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난생 처음으로 축구하는 여성 선수들의 진지함과 성장’에, 여성 커뮤니티에서는 ‘멍이 지든 발톱이 빠지든 괘념치 않고 몸을 불사르는 선수들’에 열광한다.
젠더별 계층별 문화가 세분화되고 서로의 금기가 나날이 쌓여 가는 지금, 경계를 가로질러 모두에게 호응받을 수 있는 건
‘축구를 웃음의 도구로 삼지 않겠다, 대단한 메시지를 전하는 데 쓰지도 않겠다, 축구는 축구다. 축구의 진한 매력을 당신도 알아볼 것이다.’는 축덕의 우직하고 간단한 메시지 덕분이 아닐까?

〈골때녀〉의 시청자들은 축덕의 러브레터를 오래 받고 싶은 모양이다.
경기의 배경이 풋살 경기장에서 정식 경기장으로 성장하길 바라고 선수들의 부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파울 규정이 더 촘촘해지길 원한다.
시즌제 도입을 적극 주장하는 목소리도 크다. 여
기에 희망 하나를 더 얹어도 될까? 골 때리는 그녀들이 더 이상 골 때리지 않는 그날까지 축덕의 진지한 러브레터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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