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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3/15 01:17:14
Name   샨르우르파
Subject   대학원생으로서의 나, 현대의 사제로서의 나
몇 년 전 학부 시절, 한 전문 연구자의 트위터 계정에서 대학원생이 될 나에게 조언해줄 수 있냐는 질문글을 보게 되었다.
정확한 레토릭은 기억 안나지만, 그의 답변의 뉘앙스는 대충 이랬다.
"학자는 현대판 사제고, 학계는 현대판 수도원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임하세요"


몇년 후, 나는 어쩌다보니 대학원에 입학했다.
어쩌다가 그때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아, 나는 진짜 수도원에 종사하는 사제같은 인생을 살 운명이구나.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적 호기심이 굉장히 강했다.
어렸을 때부터 모범생처럼 행동했고, 교수되면 잘 되겠네 하는 소리를 어른들에게 굉장히 많이 들었다.
친구들 집을 돌아다니면 만화책이든 교양만화든 책부터 찾아다니던 부류의 책벌레였다.
지금도 한달에 여러권의 책을 읽는다.
코로나로 옛날만큼은 못하지만 예전엔 심심하면 학교나 교육청 도서관을 찾아다녔다.  
쉬는 시간에도 툭하면 사회과학 쪽 통계와 연구자료를 찾아다닌다.
일때문에 쫓기면서 하는 게 아니면 오히려 이게 취미, 휴식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렇게 나는 연구/학문이라는 본업은 물론이고 취미도 학구적인 걸 많이 포함한다.
위에 언급한 독서와 자료찾기 이외에도,
클래식과 피아노, 자전거 타기, (대부분이 예술/독립영화인) 영화감상처럼 탐구하고 수련하는 취미가 많다.

그렇게 나는 본업도 취미도 모두 수련하는 사제에 수렴한다.  


이렇게 사제같은 성격을 지닌 나는 학벌, 소득, 자산, 명예, 좋은 배우자와 같은 세속적인 성공에 대해 초연하다.
위의 것들이 너무 없으면 행복에 마이너스겠지만, 크게 나쁘지 않은 수준만 되면 큰 상관은 없다. 진심이다.
내가 원하는 본업과 취미생활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면 된다. 
내 취미가 돈 많이 깨지는 거였다면 세속적인 성공이 중요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생활수준이 일정 이상 되면 생활수준 향상이 행복도의 극적인 상승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 이스털린의 역설의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나다.

그래서인지 나는 주식도 가상화폐도 투자하질 않는다.
자본금도 별로 없는데, 수익률 1% 2% 올리려고 혈안인 게 무슨 의미인가.
차라리 그시간에 공부해서 미래를 더 밝게 하는게 맞지.   

실제로 나는 사소한 일에도 행복을 느낀다.
가족의 집안일을 도와줄 때,
개운하게 일어날 때, 
목욕을 해서 땀기운을 다 뺄 때, 
괜찮은 영화나 게임의 엔딩을 볼 때,
검색하다가 우연히 내 관심분야의 재밌는 정보를 얻을 때,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먹으며 책을 읽을 때, 

나한테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는 필요하지 않다. 
물론 있는 게 더 좋다. 하지만 없다고 크게 아쉬울 것도 없다.

물론 돈과 명예는 현실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며, 그걸 중시하는 사람들을 뭐라 할 생각은 없다.
특히, 돈 문제는 빈곤층에게는 100% 절실하다.
위에서 말한 이스털린의 역설도 낮은 단계에서는 부가 늘어날수록 행복도가 높아짐을 인정하며,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다는 맹자의 유명한 격언도 있지 않은가.

다행히 나는 그 레벨은 넘어섰다. 장학금 혜택을 제법 받는지라, 큰 돈 걱정은 안해도 된다. 오히려 소액의 용돈을 받으면서 다니고 있다.  
조교치곤 일이 적은 편이라, 당분간은 일 많아 힘들어질 일도 없다.
그렇게 학문에 열중하면 된다. 시간이 날 때 취미도 즐기면 더 좋고.



여기까지만 해도 나는 반박할 수 없는 수도원의 사제다.
하지만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친구, 연인, 동료, 부부, 부모-자식관계 등 인간관계다.
나느 그렇게 개인의 내적 성취를 넘어 외부적 관계까지 모든 게 사제스럽게 되었다. 

나는 위에서 말한 파고드는걸 좋아하는 성격때문에 심하게 내성적이고, 사교성이 많이 떨어진다.
아싸 중에서도 심한 편이었다.  
헤어나 패션스타일 수준은 인터넷의 "패션고자 특"따위 글에 묘사될만한 레벨이었고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서로 욕도 박으면서 노는 진짜 친구는 없거나 있어도 한두명이다.  
대화도 내 관심분야만 신나서 줄줄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너드였다.

그러다 재작년 봄 무렵,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인간관계의 한 형태인 연애를 하고싶다는 욕망이 확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애를 하려면 기본적인 외양은 물론이고 마음가짐, 매력, 사회성 전반이 필요하는 것도 곧 알게 되었다.
대학원 생활에 필수적인 자질이기도 하고.

결국 나는 스스로를 사제가 수양하듯 다 때려고쳐야 한다는 결론에 다달랐고,
가족과 지인,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인간성을 어마어마하게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7kg 정도의 다이어트.
코로나19 전까지 두어달 한 헬스.
공통의 공감대를 위한 영화라는 새로운 취미 탐색. 
친구 조언 들어가면서 헤어스타일과 패션 탈바꾸기.
이상하지 않게 채팅하고 말하는 요령 익히기.
몇 안되는 지인들과 연락하고 약속 만들기. 
여러 취미모임에 참여해서 사람 만나기. 
여러 나쁜 습관 고치기. 
본업이 있는 대학원이라는 새 환경에서 인간관계 만드는 시도 해보기. 

그리고 2년이 지났다.
과거 사진과 생활루틴을 보면 내가 저랬단 말야? 싶을정도로 나는 바뀌었다. 
완벽하지 않고 고쳐야 할 게 몇 개 더 있지만, 꽤 눈부신 성과를 내놨다. 
아직 연애는 못 해봤지만, 인간관계가 확실히 좀 생겼고 여러모로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했다. 
운 좋아야 한다는 전제가 따르지만, 곧 미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한텐 자연스레 따라다니는 사회성을 수련하듯 길러야 한다는 현실이 서러울 때도 있었다.
뭐 어쩌겠나. 내성적인 장점이 강한 것에 대한 밸런스 패치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단점을 수련하듯 극복해나가는 건 내 사제스러운 장점이기도 하고. 


물론 여기 끝이 아니다.

인간관계는 (적어도 나에겐) 맺기도 어렵지만, 맺고 유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인간관계에 대한 환상이 다 깨질 것이다.
아니 아예 주변이든 책이든 논문이든 듣고 봐온 게 많다보니 환상이랄 것도 없다. 

30대 이후로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급속도로 줄어든다는 팩트라던가, 
호르몬 분비에 따른 연애의 생리적 평균수명은 2-3년에 불과하다는 팩트라던가, 
첫연애나 첫경험은 미화가 될 뿐 따져보면 엉망진창이라는 속설이라던가,
교수의 대학원생을 향한 갑질이라는 사회문제라던가. 
 

하지만 친구가 됐든, 연인이나 배우자가 됐든, 부모가 됐든, 자식이 됐든, 대학원이나 직장동료가 됐든, 교수가 됐든 간에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면서 생기는 기쁨은 대체하기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게 아니었으면 코로나시국에 외향적인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심리적 고통을 받지 않았겠지.
또 기쁨을 넘어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보편적인 추억과 통찰력이라는 게 있기도 하고.
나는 그걸 모르다보니, 해당 부분을 다루는 문화 컨텐츠를 볼때마다 늘 위화감에 시달렸다. 

나는 그런 기쁨과 추억과 통찰력을 갖고 싶다.  
지금은 없으니 노력해서라도 가질 생각이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기쁨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도록 상대에게 노력하는 것.  
이게 내 현재 인간관계의 목표다.

급기야는 결혼과 출산도 가능하다면 하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정 안에서 불편하더라도 서로서로 맞춰 살아가고, 인격체로서의 자녀를 키워나간다는 의미를 느껴보고 싶다.  
그게 어렵다면 좋은 상대를 만나도록 노력한다는 것도 목표가 되고.

물론 상대를 내 욕망을 해결할 도구로 여기는 건 자제해야겠지만,
도구처럼 여긴다면 위와 같은 기쁨은 얻을 수 없다. 
스스로 서로에 맞춰나가려 충분히 노력할거라고 믿는다.




이렇게 나는 완전한 수도원의 사제가 되고 말았다.

어찌보면 고리타분한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쓸데없이 비장한 진지병 환자의 기질일지도 모른다.
듣기 좋기만 할 뿐 비현실적인 가치관일지도 모른다.
골방학자스러운 소리라는 빈정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취향이 이상하다보니 연애나 결혼에 큰 지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고달픈 길이라 인생 때려치우고 싶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가톨릭의 사제는 몇년간의 긴 수련을 거치면서 중간에 떨어지거나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대학원도 완전히 비슷하다. 
박사 퀄 있는 대학들은 강제로 탈락시키기도 하고, 그게 아니어도 꽤 큰 스트레스를 받거나 금전 문제로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이 내 인격의 본성이고,
대학원을 통해 학문을 닦아야 할 사람의 운명이라면, 나는 고난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어쩔 수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이 정도의 댓가는 치러야지. 

요즘같은 혼란의 시대를 헤쳐 나가려면,
굳이 학계에 있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태도를 가져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미래를 알 수 없어 불안한 나는,
그저 유명한 라틴어 명구를 주문처럼 읊을 뿐이다. 

Quaerendo, invenietis! (구하십시오. 그러면 찾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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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이 발전하는 과정을 되짚어 보는건 즐거운 소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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