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26 23:17:07
Name   메아리
Subject   괴물이 되는데 걸리는 시간(1)
- 바야흐로 신춘문예의 시즌이 돌아왔습니다.
투고할 원고를 정리하다가
어디 보내기는 그렇고 버리기는 아까운 게 하나 있어 공유합니다.
재미있게 보셨으면 합니다.
PS> 코로나 와는 상관없습니다. 그 전에 썼거든요.


  피가 파랗게 됐다. 하늘보다 바다보다도 더. 마케팅 본부 전체를 대상으로 하반기 브랜드 마케팅 전략 초안을 발표하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하반기의 마케팅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가에 대해서 한창 열을 올리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코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시큰하더니 진한 잉크 같은 것이 얼굴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뚝뚝. 파란 그 불길함이 아침에 세탁소에서 갓 찾아온 하얀 와이셔츠에 궤적을 남기고 회의실 바닥의 우중충한 회색 카펫을 오염시키더니, 일주일 전에 새로 산 비싼 구두까지 더럽혔다. 조용했던 회의실이 순식간에 더 조용해졌다.

  청혈증이다.

  어색한 정적을 깨뜨리며 누군가의 비명이 날아와 박혔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불어오더니 얇디얇게 깔려있던 고요가 박살 나버렸다. 순간적으로 맨 앞에 앉아있던 본부장의 얼굴을 살폈다. 엊저녁 숙취가 가시지 않은, 퉁퉁 부은 그의 얼굴엔 복잡한 심경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파란색 피에 대한 두려움과 망쳐버린 회의에 대한 망연자실, 혀같이 부리던 부하직원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당혹감, 신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같은 소시민적 갈등까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레이저 포인터를 던져버리고 회의실을 나와 곧바로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짐을 싸거나 숨을 차분히 가다듬을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누군가 보건 경찰에 신고해 버린다면 그 시간부로 바로 격리조치 될 거다. 그 후로 어떤 삶이 기다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회의실에 남아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저들은, 내가 자신들과 관련된 삶에 머무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삶 속에 머물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본부장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하반기 마케팅 전략 따위야 이제 어찌 되는 내 알 바 아니었다.

  저 회의실은 당분간 폐쇄될 것이다. 그리고 같이 있던 이들은 격리된 채 일주일 동안 보건 경찰의 추적 관찰을 받을 것이다. 일주일 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풀려나겠지만, 다 의미 없는 일이다. 일주일로 알려진 잠복기는 꼭 맞는 게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유의미한 접촉 후 두 달, 석 달 있다가 발병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출현한 지 3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청혈증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언론과 정부는 계속해서 청혈증의 비밀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고 떠들어 댔지만, 피가 파랗게 변하고 발병 시 처음에 코피가 난다는 것 외에는, 어떻게 전염이 되고 구체적으로 무슨 증상이 있으며, 그리고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중에 한 달 전에 오피스텔로 찾아온 혜경이 떠올랐다. 그녀는 정확히 22개월 15일 만에 다시 그 방을 찾아왔다. 그 오피스텔은 그녀와 같이 살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지만, 그녀가 나간 후로 그녀의 방을 그대로 보존하지 않았다. 책상 같은 가구는 다 팔거나 버렸고, 자전거와 운동기구와 그 외, 쓸데없는 허섭스레기들로 가득 채워 놨다. 자기가 머물던 방의 상태를 확인한 그녀는 별수 없다는 듯이 거실 소파 위에 몸을 던졌다.

  

  “뭐야? 갑자기.”

  “나 며칠만. 갈 만한 곳이 구해지면 바로 갈 거야.”


  처음엔 짙은 화장 때문에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화장을 거의 하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거의 가부키 분장 수준의 화장으로 나타났기에 의아하긴 했다. 그래도 특별히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저 이사 날짜를 잘못 맞췄거나 아니면 그 비슷한 상황 때문에 며칠 묵을 곳이 필요했나 보다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다음 날 아침에 그녀의 얼굴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늦여름 아침 햇살 속에서 소파에 누워 있는 혜경의 얼굴을 보고 주저앉고 말았다. 화장이 지워진 그녀의 얼굴은 마치 누구한테 맞아 멍이라도 든 것처럼 푸르스름했다. 특히 입술은 검푸른 색이었다. 한눈에도 그녀가 청혈증에 걸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털썩 주저앉는 소리에 깨어난 그녀는 내 놀란 얼굴을 보더니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일찍 일어났네.”

  “, 이거.”

  “걱정하지 마. 전염되는 건 아냐.”

  청혈증이 전염되지 않는다니. 어떻게 전염되는 건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미 정부에선 1급 전염병으로 지정했고, 이 병을 막기 위해 보건 경찰이라는 해괴한 조직까지 만들었는데. 세계에서 발병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막아낸 나라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말투로 자근자근 말을 뱉었다.

  “전염되는 게 아냐.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많은 제약회사와 연구소들이 청혈증에 대해서 연구 중이었다. 혜경은 그런 메이저 제약사 중 한 군데인 H제약의 신약 연구소 병리학 연구원이었다. 사실상, 그녀는 지구상에서 이 병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무슨 소리야?”

  “이건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냐. 병이 아니니까. 하지만 피가 파랗게 변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날 거야.”

  “병이 아닌데 왜 늘어난다는 거야?”

  그녀의 말이 어쩌다 사타구니에 들어간 모래처럼 까슬거렸다. 주방으로 간 혜경은 커피를 컵에 따르며 말을 이었다. 어제 사 온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원두를 베이스로 나름대로 블랜딩한 커피를 지금 막 내린 상태였다.

  “아직도 이렇게 마시는구나. 이 집 나가고 제일 아쉬웠던 게 이 커피였는데.”

  “아니, 병이 아닌데 왜 피가 파랗게 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거야?”

  “그거야.”

  살짝 열린 커튼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 속에서 얼굴이, 특히 입술이 퍼런 반라의 여자가 빨간 컵에 담긴 검은 색 커피를 홀짝홀짝 음미하며 마시고 있었다. 거실의 풍경은 형편없이 물감이 번진 낡은 그림처럼 충분히 괴기스러웠다.

  “그 사람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으니까. 병에 걸린 게 아니라 유전자에 잠복하고 있던 성질이 발현된 것뿐이야. , 그때 말도 없이 가서 미안.”

  2년 전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떠났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편지 한 장만 냉장고에 붙여 두고 사라졌다. 아니, 그건 편지라고 할 수도 없는, 달랑 미안해,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써진 종이 쪼가리였었다.

  허무맹랑한 그녀의 이야기를 언제까지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캐리어와 그녀를 문밖으로 내몰고 그대로 이별을 고하려 했다. 아무리 한때 사랑했던 사이라지만, 그리고 아직 마음이 남아 있기도 했지만 이렇게 되어 버린 그녀와 같이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전염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기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컸다. 하지만 이후 겪게 될 여러 가지 일들이 너무 성가시기에 신고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마지막 부탁은 중고차 시장까지 태워달라는 것이었다. 태워다 줬을 뿐 아니라 그녀가 탈 만한 차도 물색해 계약까지 해줬다. 차에서 내리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키스를 하려 했지만, 나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녀의 입술을 감싸고 있는 빨간 색은 오히려 그녀를 더 무섭게 만들었다. 그녀의 입술은 마치 차갑고 가늘고 붉은 뱀의 혀 같았다. 그녀는 한층 깊어진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뺨을 톡톡 두들기고는, 중고차를 몰고 사라졌다. 여전히 마지막 인사 따윈 남기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 사흘 후에 낯선 이들을 맞이해야 했다. 그들은 집 앞에서 바퀴벌레 떼 마냥 우글우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오 씨죠?”

  “, 그런데요.”

  “보건 경찰입니다. 문 여세요.”

  짜증 담뿍 담긴 말투로 영장을 들이 밀은 그의 얼굴엔 방독면 수준의 검은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이미 CCTV를 통해 그녀가 내 집에 머물렀던 것을 확인한 그들은 집을 샅샅이 뒤져 그녀가 남긴 흔적을 찾아냈다. 잠을 잤던 소파는 물론이고 코를 풀고 버린 휴지까지 수거해갔다. 보건소로 끌려간 나는 24시간 동안 각종 검사와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잠복기로 알려진 일주일 동안 집에 갇혀 지내며 매일 혈액 채취를 당했다. 일주일이 지나서도 여전히 피가 빨갛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철수했다.

  보건 경찰, 그러니까 국민 건강 특별사법경찰이 출범한 건 대략 2년 전이다. 그들은 청혈증에 대한 초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영장 없이 바로 임의 혈액 검사를 할 수 있었으며, 혈액 검사 결과 증상이 보이면 즉시 체포하여 격리조치 할 수 있다. 비슷한 조직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걸 보면 국가들끼리 서로 협의해서 만든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사복 차림으로 다니긴 했지만, 누구나 한눈에 그들이 보건 경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착용하고 다니는 검은색 특수 마스크는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 오직 보건 경찰에게만 지급되는 마스크여서 그것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차라리 제복을 입고 다니든가, 제각각의 사복을 입고 같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쓸데없이 눈에 띄었다. 공기 중으로 전파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도대체 저 시커먼 마스크는 왜 쓰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었다. 반가운 일 때문에 돌아다니는 이들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의 초법적인 권한 때문에 여기저기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기본적인 인권은 무시되기 일쑤였고, 청혈자들을 범죄자처럼 연행하여 격리시켰다. 피가 파란 이들이 어디에 어떻게 격리되는지 아는 이들은 아주 극소수였다. 어디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아니 심지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소문만 무성했다. 어떤 소문은 그들이 인간 이하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그들이 모두 죽었다고도 말했다. 어떤 이들은 호텔급의 격리병원에서 안전하게 잘 치료받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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