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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10/16 22:05:25수정됨 |
Name | 메존일각 |
File #1 | 1200px_나주향교_대성전_04.jpg (386.9 KB), Download : 41 |
Subject | 조선시대 향교의 교육적 위상이 서원보다 낮았던 이유? |
<나주향교 대성전 전경> 출처: 위키피디아 * 타임라인에 쓰려다 보니 내용이 약간 길어져서 자게로 옮깁니다. 조선시대에 향교가 서원에 비해 기피되는 교육기관으로 인식되었다는 얘기는 여기저기서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 들어보시거나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이 글에서 그 배경을 가볍게 언급해 볼까 합니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에 걸쳐있던, 지금의 국립 고등학교 수준의 중등교육기관이었습니다. 조선이 개창하며 유교적 소양을 가진 관리들이 많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성계는 즉위 원년에 고을마다 반드시 하나씩 향교를 두도록 명합니다.(一邑一校)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국 329개 고을 모두에 향교가 건립된 것으로 나옵니다. 또한, 각 도의 감사에게는 향교 교육을 감독할 의무가 있었고, 향교 교육의 성과를 고을 수령의 치적에 반영하였습니다. 향교는 기본적으로 과거를 준비하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각 향교에는 교관인 교도가 필요했는데요. 중앙에서는 큰 고을인 주(州)·부(府)에 종6품 교수를, 작은 고을인 군(郡)·현(縣)에는 종9품 훈도를 파견하였습니다. 이제 향교가 점차 위세를 잃는 과정은 간략히 두 가지 정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교도의 질적 저하입니다. 교도를 파견할 향교 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교도 중 교수는 주로 과거 급제자들에서 임명되었는데, 조선시대 과거는 3년에 한 번 치러졌고 대과 급제자 정원은 33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향교의 수는 전국에 300개가 넘었고 교수가 파견될 주(州)·부(府) 고을만도 조선 전기 기준 70개가 넘었습니다. 또한, 과거 급제자들은 가급적 중앙 관료로써 출세하고 싶었기 때문에 향촌 파견이 썩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관 확보가 여의치 않았고, 조정에서는 경범죄를 지은 관리들을 면책하는 대신 교도로 임명하는 수법도 사용하였습니다. 더 치명적인 것으로 방학 동안에는 녹봉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교도는 세종대에 벌써 소과에 급제한 생원과 진사 중 뽑기도 하였고, 관찰사가 지방유생 중 학식있는 자들을 학장으로 선발하기도 하였습니다. 참고로 이들은 정식 품계가 없으므로 봉록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육의 질이 보장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겠죠. 두 번째로는 계유정난입니다. 명분 없이 등극한 세조의 영향 탓에 낙향하는 관리들이 늘어, 학문보다 출세 지향적인 과거만을 위한 향교는 인기가 뚝 떨어졌습니다. 성균관과 향교는 정원을 채우지 못했고, 연산군 대에는 성균관을 연회장소로 사용할 정도로 격이 떨어졌습니다.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관찰사에게 수시로 향교를 감독하게 하였고 수령의 인사고과에 향교 교육의 성과를 반영케 하였지만, 나날이 교관 경시 풍조는 나날이 심해졌습니다. 결국 향교는 15세기 후반에 들어서며 교육 기능은 쇠퇴하고 문묘에 제사지내고 사회 교화를 담당하는 곳으로 역할이 바뀌게 됩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아예 교관 파견이 중단되고 그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교임을 뽑아 운영과 교육을 맡게 할 정도였습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16세기 중엽 들어, 명망있는 스승에게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설 교육기관 서원이 들어서자, 그 위세는 급격히 커지게 됩니다. 학자 연구에 따라 다르지만 전성기 서원의 수는 600여 개에서 900여 개로 향교의 2~3배였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서원이 붕당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음도 물론이고요.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10-29 14:0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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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처음 내려갔을 때는 회식할 일 있으면 고기 안 구울 경우 주로 한정식집(예*, 사*채)이나, 아주 가끔 보리굴비(!)라거나, 홍어 먹으러 영산포로 가기도 했었습니다만ㅋㅋㅋ 구도심 탐방이 끝나기도 전에 혁신도시에 식당들이 생기기 시작했죠.
쓰다 보니 점점 더 나주 놀러가고 싶어지네요 흑. 저는 아무래도 나주곰탕이 좋아요(그 중에서도 노*집). 그리고 사실 제일 가고 싶은 곳은... 나주역 근처의 황태설렁탕집ㅠㅠㅠㅠ 제 인생맛집인데ㅠㅠㅠㅠ
너무 주절주절 썼는데, 메존일각님의 추천 맛집도 알려주세요! ㅋㅋㅋ
쓰다 보니 점점 더 나주 놀러가고 싶어지네요 흑. 저는 아무래도 나주곰탕이 좋아요(그 중에서도 노*집). 그리고 사실 제일 가고 싶은 곳은... 나주역 근처의 황태설렁탕집ㅠㅠㅠㅠ 제 인생맛집인데ㅠㅠㅠㅠ
너무 주절주절 썼는데, 메존일각님의 추천 맛집도 알려주세요! ㅋㅋㅋ
아 볼테기집 하나 있었죠! 어르신 한 분이 좋아하셔서 두어 번 갔던... 그러고 보니 장어도 한 번 먹으러 간 기억이 나요. 되게 맛있었는데 사진 찾아보니 저 집 맞는 것 같네요!
나주시청 근처는 물회집 생각나고, 게장집도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금성산 위 포차도 생각나는군요ㅋㅋㅋ 참 회식 잘 따라다니고 맛있는 거 많이 먹던 시절... 떠올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ㅋㅋㅋㅋㅋ 정작 써주신 향교 얘기는 안 하고 먹는 얘기만 해서 죄송합니다ㅠㅠ
나주시청 근처는 물회집 생각나고, 게장집도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금성산 위 포차도 생각나는군요ㅋㅋㅋ 참 회식 잘 따라다니고 맛있는 거 많이 먹던 시절... 떠올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ㅋㅋㅋㅋㅋ 정작 써주신 향교 얘기는 안 하고 먹는 얘기만 해서 죄송합니다ㅠㅠ
동신대 근처면, 송현불고기 한번은 드실만 하구요... 예전에는 쓰러져가는 집이라고 불렀는데, 건물 올리고 맛이 좀 변한듯도 하지만, 학생때 먹었던 기억이 좀 미화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학군단 뒤쪽 산길을 올라가면 숲속의 작은 농장이라고 있었는데, 지금도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비빔밥에 된장찌개 많이 먹었었죠. 굳이 찾아갈 정도는 아닌듯 하지만, 가볍게 비빔밥에 된장찌개 먹고 금성산 한바퀴 돌고 오면 좋았습니다.
사실, 그 부근 전통 맛집은 주유소 옆에 있는 손짜장일번가입니다. 98년쯤인가 개업해서 동신대 앞 상가가 2번은 천지개벽을했는데 지금까지 쭈욱 버티고 있죠. 살아남은 자가 강자인 법입니다.
사실, 그 부근 전통 맛집은 주유소 옆에 있는 손짜장일번가입니다. 98년쯤인가 개업해서 동신대 앞 상가가 2번은 천지개벽을했는데 지금까지 쭈욱 버티고 있죠. 살아남은 자가 강자인 법입니다.
아, 여쭤보고 싶었던 것은 서원 > 향교인 이유 중 계유정난이 일시적인 충격이자 향교의 기존 가치를 저하시킨 요인이라 하더라도, 교도의 질적 저하가 장기적으로는 더 크지 않았을까 해서요. 교도의 질적 문제가 계속 유지되었으면 계유정난 없이도 서원이 향교를 추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것이요 ㅎㅎ 거기서 자연스레 향교 교도의 질을 유지할 방안이 있었으면 (ex: 월급 인상 + 방학 동안 월급 보장) 어땠을까 하는 if 질문으로 나왔어요. 답변해주신 바를 보니 그게 안 되었을 거라는 뜻이신 듯한데... 그러면 서원이 어떤 식으로 재정을 충당하고, 교도의 질을 유지했는지도 궁금하네용
서원에는 치트키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사액이었습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에 명종이 소수서원 현판을 사액한 것이 그 시작인데, 당연하겠지만 국왕이 친필로 사액해주면 면세, 면역 등 특전도 특전이거니와 서원의 격이 확 오르게 되죠. 이는 서원에 배향된 선현의 명성이 오르게 되는 것이기도 해서 지방 양반 자제들이 사액사원으로 몰리고, 양민들도 사액서원에 의탁하고 등등... 경제적 기반이 확 커지게 됩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향교에는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데 반해, 서원들은 선현의 초상화를 보관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는 이 영향도 크다고 생각해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위패와 보이는 초상화.
이건 제 생각인데, 향교에는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데 반해, 서원들은 선현의 초상화를 보관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는 이 영향도 크다고 생각해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위패와 보이는 초상화.
또,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 공무원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파견을 나가느냐 자발적으로 설립했느냐의 차이도 있는 것 같아요. 서원이 학덕과 명망이 높은 대학자를 배향인으로 모시려고 노력했던 것도 학맥의 정통성을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문중에서 사사로이 자기 선조를 높이려고 서원을 짓는 것 때문에 서원의 격이 점차 떨어지기는 했지만 이 역시도 자발적인 것이었고, 나름 지방에서 자기 문중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던 것도 있어서 결국 서원의 위세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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