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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08/20 20:16:28 |
Name | 구밀복검 |
File #1 | grace_kelly_jimmy_stewart_rear_window.png (2.39 MB), Download : 32 |
Subject | 그레이스 켈리를 찾아서 |
히치콕의 금발 미녀에 대한 집착은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편애를 받은 건 그레이스 켈리였죠. 54년에서 55년까지 약 1년 좀 넘는 기간 동안 <다이얼 M을 돌려라>, <이창異窓>, <나는 결백하다> 세 작품을 연속으로 찍었고 그 사이 다른 여배우는 기용하지 않았는데 이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즉 그레이스 켈리가 히치콕이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금발미녀였던 것이죠. 그러면서 히치콕 영화는 전미 박스오피스 탑을 다투고 그레이스 켈리도 당대 최고의 여우로 자리매김합니다. 양자의 도약이 당대에 띠었던 임팩트를 따져보면 아마 <아이언맨>과 로다주 이상일 거에요. 하지만 그레이스 켈리는 결혼하며 모나코로 떠나버렸고, 그녀의 '사본'으로 간택된 것은 베라 마일스였죠. 그러나 베라 마일스는 두 번째 협업인 <현기증>을 찍기 직전 임신으로 인해 이탈해버렸고, 히치콕의 본래 구상과는 무관하게 '사본의 사본'으로서 킴 노백이 투입됩니다. 즉 금발미녀라는 이데아-그레이스 켈리-베라 마일스-킴 노백 사이에 원본과 사본의 관계가 반복 성립되는 것이죠. 그리고 <현기증> 자체가 바로 이런 테마를 다루고 있는 영화고요. 극중의 남주인 스카티는 '마들레인'이라는 금발미녀를 흠모하게 되는데, 이 여자는 '카를로타'라는, 초상화에 모습이 남아 있는 금발미녀의 환생인 것처럼 묘사가 되죠. 이후 스카티는 마들레인을 잃게 되는데, 실의에 빠진 상황에서 그녀와 아주 똑 닮은 '주디'라는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집착으로부터 초연할 수 없던 스카티는 주디에게 마들레인처럼 치장할 것을 강요하죠. 마치 뭇 남성들이 첫사랑의 이미지를 이후의 파트너들에게 알게 모르게 덧씌우며 상대를 질리게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카를로타-마들레인-주디가 원본과 복제로서 기능하죠. 히치콕이 그레이스 켈리를 그리며 그녀의 사본들에게 독재를 휘두르듯, 스카티는 주디를 보며 이데아를 꿈꾸죠. 이런 원본과 복제, 본질과 실재, 실체와 현상, 고정과 운동, 정태와 동태 사이의 균열과 갈등과 긴장을 그리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스카티 및 히치콕이 자신이 갖고 있는 페티쉬로서의 '미'에 집착하고 사본을 원본에 일치시키려고 발버둥치는 행위 자체가 미를 추구하고 예술을 창작하는 과정이며 나아가 예술 그 자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죠. 여하튼 이렇게 히치콕에게 원본으로 여겨졌던 그레이스 켈리가 가장 빛난 작품이라면 아마 <이창>일 겁니다. 작품 평가든 캐릭터 평가든 세 작품 중 <이창>이 제일 높죠. 다리가 부러져서 불구 놀음하고 있으며 인격 자체도 어떤 면에서는 불구라고 할 수 있는 남주인 제프리스(게다가 연기자인 제임스 스튜어트가 불혹을 훌쩍 넘겼을 때라 더더욱...)와 대비되다보니 생생함과 발랄함과 진취성이 굉장히 돋보입니다. 의상이든 분장이든 외모든 54년이라기엔 꽤나 세련되어서 외관 자체로 인상이 강하기도 하고요. 뭐 21세기 한국의 평균미를 기준으로 하면 두드러지는 턱의 너비가 감점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서구에선 매력 포인트고. 슈퍼 울트라 익스트림 클로즈업..이게 히치콕의 시선이라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죠. 제프리스라는 인물의 '관음'에 대한 영화에서 그레이스 켈리에 대한 감독 본인의 관음증을 드러내고 있으니..다 알면서 일부러 너스레 떠는 거잖아요. 솔까 홍상수는 수줍은 소년으로 보일 정도로 낯가죽 두둑한 영감임...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9-04 07:57)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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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영상에서 드러나는 히치콕의 심사가 재밌는 건, 그게 일종의 컨셉질이요 노출증이라는 데에 있죠. 그레이스 켈리를 관음하는 자기 자신을 노출하는 아이러니인 것입니다. '야 내가 말이야 그레이스 켈리를 무지 애정하는데 말이야 ㅋㅋ 야 할배라고 이러면 안 되냐 존나 이쁜 걸 어캄 으허허'라고 마치 관객에게 일부러 자신의 변태성을 과장하면서 너스레 떨며 말을 거는 것마냥 샷을 찍은 것죠. 뭐 멀리서 예를 찾을 거 없이 우리도 탐라에서 이런 거 많이 하지요. 일부러 오버하고 일부러 헤프게 굴면서 다른 회원들에게 재롱을 떨고 애교 부리는 거죠.
이런 걸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게 홍상수입니다. 홍상수 작품... 더 보기
이런 걸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게 홍상수입니다. 홍상수 작품... 더 보기
위의 영상에서 드러나는 히치콕의 심사가 재밌는 건, 그게 일종의 컨셉질이요 노출증이라는 데에 있죠. 그레이스 켈리를 관음하는 자기 자신을 노출하는 아이러니인 것입니다. '야 내가 말이야 그레이스 켈리를 무지 애정하는데 말이야 ㅋㅋ 야 할배라고 이러면 안 되냐 존나 이쁜 걸 어캄 으허허'라고 마치 관객에게 일부러 자신의 변태성을 과장하면서 너스레 떨며 말을 거는 것마냥 샷을 찍은 것죠. 뭐 멀리서 예를 찾을 거 없이 우리도 탐라에서 이런 거 많이 하지요. 일부러 오버하고 일부러 헤프게 굴면서 다른 회원들에게 재롱을 떨고 애교 부리는 거죠.
이런 걸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게 홍상수입니다. 홍상수 작품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이들이 대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자기 이야기 맨날 하면서 저질스러운 본성 내보이는 게 역겹다' 이건데, 홍상수는 그렇게 자기 자신의 페르소나 같은 캐릭터들을 영화에 등장시켜서 웃음거리로 만들고 머저리로 만들어버리는 걸 즐기거든요. 근데 홍상수는 노골적인 모양새를 띠며 그걸 굉장히 직설적으로 떠드는 반면 히치콕은 더 은밀하고 강박적이라는 점에서 히치콕이 훨씬 음흉하고 되려 홍상수 쪽이 좀 더 쾌활하고 산뜻하고 뒤끝없다고 볼 수 있는 거고요. 제가 홍차넷에 홍상수 관련 포스팅을 쓴 건 두 개가 있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http://redtea.kr/?b=3&n=5398
http://redtea.kr/?b=31&n=44812
홍상수 특유의 관음-노출증이 굉장히 잘 드러나죠. 정유미와 통화하고 있는 게 홍상수고, 권해효가 홍상수라고 가정하면, 이 장면을 찍고 있는 홍상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상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질색 섞인 웃음이 절로 나오죠. '어우~저질 ㅋㅋ' 그러니까 윤여정도 '아우~ 디스 코리안 맨' 이러는 거겠죠.
이런 식으로 카메라 뒤에 숨은 감독, 스크린 앞에 서 있는 관객의 존재를 상기하면서 지금 그 순간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과 역동성,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재의 생생함을 작품에서 매끄럽게 소화해내는 게 현대 영화, 현대 예술의 미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게 홍상수라는 점에서 한국에서 가장 예술적인 영화감독이라고 할 수 있고요. 쉽게 말해 홍상수가 관객하고 지금 가면 쓰고 진실 게임 노가리 까고 있는 거거든요. 그걸 본인이 알고 하는 거고 관객도 알아주길 원하는 거고요. 위에서 한 표현을 빌리자면 탐라질처럼 영화를 만들고 관객과 컨셉놀음 하고 있는 거죠. 이와는 반대로, 여기서 그 사이의 다이나믹한 감흥을 죄다 배제해버리고, 특정한 실체나 본질이나 핵심, 이데아, 이념형, 시의적인 요소나 현재의 분위기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가치를 추출하고자 하는 것을 예술과 대립하는 도그마나 형이상학이나 철학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걸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게 홍상수입니다. 홍상수 작품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이들이 대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자기 이야기 맨날 하면서 저질스러운 본성 내보이는 게 역겹다' 이건데, 홍상수는 그렇게 자기 자신의 페르소나 같은 캐릭터들을 영화에 등장시켜서 웃음거리로 만들고 머저리로 만들어버리는 걸 즐기거든요. 근데 홍상수는 노골적인 모양새를 띠며 그걸 굉장히 직설적으로 떠드는 반면 히치콕은 더 은밀하고 강박적이라는 점에서 히치콕이 훨씬 음흉하고 되려 홍상수 쪽이 좀 더 쾌활하고 산뜻하고 뒤끝없다고 볼 수 있는 거고요. 제가 홍차넷에 홍상수 관련 포스팅을 쓴 건 두 개가 있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http://redtea.kr/?b=3&n=5398
http://redtea.kr/?b=31&n=44812
홍상수 특유의 관음-노출증이 굉장히 잘 드러나죠. 정유미와 통화하고 있는 게 홍상수고, 권해효가 홍상수라고 가정하면, 이 장면을 찍고 있는 홍상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상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질색 섞인 웃음이 절로 나오죠. '어우~저질 ㅋㅋ' 그러니까 윤여정도 '아우~ 디스 코리안 맨' 이러는 거겠죠.
이런 식으로 카메라 뒤에 숨은 감독, 스크린 앞에 서 있는 관객의 존재를 상기하면서 지금 그 순간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과 역동성,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재의 생생함을 작품에서 매끄럽게 소화해내는 게 현대 영화, 현대 예술의 미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게 홍상수라는 점에서 한국에서 가장 예술적인 영화감독이라고 할 수 있고요. 쉽게 말해 홍상수가 관객하고 지금 가면 쓰고 진실 게임 노가리 까고 있는 거거든요. 그걸 본인이 알고 하는 거고 관객도 알아주길 원하는 거고요. 위에서 한 표현을 빌리자면 탐라질처럼 영화를 만들고 관객과 컨셉놀음 하고 있는 거죠. 이와는 반대로, 여기서 그 사이의 다이나믹한 감흥을 죄다 배제해버리고, 특정한 실체나 본질이나 핵심, 이데아, 이념형, 시의적인 요소나 현재의 분위기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가치를 추출하고자 하는 것을 예술과 대립하는 도그마나 형이상학이나 철학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겁니다.
저렇게 극의 내용과 구조가 일치할 때 가져다 주는 미학이 잘 드러났던 게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영화 말고. 원작에서는 페르마의 원리를 가져다가 빛이 자신이 갈 곳을 알면서 간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곳에서 사용하는 공기에서 물로 입사하며 굴절한 빛이라는 그림이 전체 구조와 딱 맞거든요. 아직 공기이지만 물 속에서 꺾일 자신의 모든 것들을 전부 다 긍정하고 있죠. 그래서 실제로 딸 때문에 바뀔 자신의 모든 인생에 대해, 딸을 잉태하는 그날 밤에-여기가 바로 그녀의 인생이 꺾이는 지점이겠죠-자신이 앞으로 겪을 일들에 대해 털어놓는 게 소설의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네 그게 바로 결정론이고 완결성이죠. 테드 창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모성애 서사를 썼지만 - 사실 구성에 잘 부합되는 소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여하간 -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테마에 잘 부합하는 일상 대상이라면 애완동물의 사육입니다. 대개의 경우 부모들은 자식보다 먼저 죽기도 하고, 자식이란 것 자체가 생물학적 자기 확장 그 자체를 의미하며 실제로 그에 대한 기대에서 잉태되는 것이다보니 자식이 자기보다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자식이란 존재로부터 죽음을 떠올리는 자체가 숫제 심리적 금기에 가깝고 정... 더 보기
네 그게 바로 결정론이고 완결성이죠. 테드 창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모성애 서사를 썼지만 - 사실 구성에 잘 부합되는 소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여하간 -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테마에 잘 부합하는 일상 대상이라면 애완동물의 사육입니다. 대개의 경우 부모들은 자식보다 먼저 죽기도 하고, 자식이란 것 자체가 생물학적 자기 확장 그 자체를 의미하며 실제로 그에 대한 기대에서 잉태되는 것이다보니 자식이 자기보다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자식이란 존재로부터 죽음을 떠올리는 자체가 숫제 심리적 금기에 가깝고 정서적 자살에 가깝죠. 그에 반해 애완동물이란 녀석들은 대개 우리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수명이 짧기에, 사육주는 이 녀석들이 태어나거나 입양되는 그 순간부터 이 녀석들의 종언을 이미 예지하고 언제나 염두에 둘 수밖에 없죠. 애완동물의 뜀박질과 재간을 보면서 사랑스러움을 느끼지만 그 녀석의 이면에서 선명하게 그 녀석의 죽음이 보이죠. 하지만 그렇게 결말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비관하거나 패배감에 젖진 않죠. 사육주의 입장에선 이미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통합된 것이니까요. 시공을 초월하여 알파이자 오메가로 존재하는 야훼의 관점에서 인간의 순차적인 시간 인식이 무의미하듯, 80년을 살아가는 인간의 관점에서 애완동물의 10년생은 일점과 같은 것이죠.
그렇게 다른 시간축이 일원적으로 통합되듯, 극의 개별적인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미세한 위화감과 괴리감도 없이 정확하게 맞물리고 한 몸처럼 딱 달라붙어 있는 작품들이 주는, 조금의 낭비 없는 효율미가 가지는 쾌감은 형통하기가 이를 데가 없죠. 이걸 통속적으로는 핍진성이나 개연성이라고 부를 테고요. 다만...이런 결정론적 완결성이 가지는 제약 내지 위험도 있죠. 소재와 주제와 사건과 인물과 배경과 문체 기타 등등이 모두 딱 달라붙어 일체를 이룬다는 건, 결국 첫 문장이 쓰여지는 순간 마지막 문장까지의 모든 과정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러면서 작품의 형식은 단순히 특정한 서사나 주제나 교훈을 전달하는 그릇으로 전락하게 될 수 있고요. 그럴 수밖에 없죠. 형식이 내용과 긴장을 이루지 못하면 형식은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테크닉이나 스타일로서의 도구가 될 뿐이니까요. 우리는 이런 작품에서 애완동물 이상을 읽어내지 못할 겁니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그게 한계가 아니란 걸 우리는 자연스레 체득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완동물의 수명이 무한히 늘어나기를 원하기도 하죠.
그래서 정밀하게 일관성을 이루고 있던 극의 구성을 예기치 못한 시점에 깨뜨려버리면서 극이 소재/주제/서사의 일체(결정론적인 극에서 소재와 서사는 다른 것이 아니죠. 소재가 선택되는 순간 그 자체로 필연적인 서사 전개가 결정되니까)로서의 '이야기'가 일정한 한계선 안에 머무르지 않고 되려 작품 안과 작품 밖의 경계를 허무는 식의 창작물들이 현대로 오면 올수록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근년에 나온 영화들 중에서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나 <헤일 시저> 같은 코언 형제의 작품들, 혹은 작년에 찬사 받은 <토니 에드만> 같은 게 그런 작품이라고 보고요. 소설 중에서는 <한밤의 아이들> 같은 게 있겠죠. 이 작품들을 보면, 정말 완벽하게 일점을 향해서 극의 모든 구성 요소가 달려가는 그런 작품처럼 보이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익숙한 이야기처럼 흘러가는데, 갑자기 엔딩에서 뒤통수를 쳐버리는 식이죠. 도대체 우리가 뭘 본 건가 싶게 되고. 작품 안의 구성요소들의 완전한 통합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 전까지 작품 안으로 향했던 시선을 작품 바깥으로 돌려보며 이면과 컨텍스트를 살펴보게 되고요.
그렇게 다른 시간축이 일원적으로 통합되듯, 극의 개별적인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미세한 위화감과 괴리감도 없이 정확하게 맞물리고 한 몸처럼 딱 달라붙어 있는 작품들이 주는, 조금의 낭비 없는 효율미가 가지는 쾌감은 형통하기가 이를 데가 없죠. 이걸 통속적으로는 핍진성이나 개연성이라고 부를 테고요. 다만...이런 결정론적 완결성이 가지는 제약 내지 위험도 있죠. 소재와 주제와 사건과 인물과 배경과 문체 기타 등등이 모두 딱 달라붙어 일체를 이룬다는 건, 결국 첫 문장이 쓰여지는 순간 마지막 문장까지의 모든 과정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러면서 작품의 형식은 단순히 특정한 서사나 주제나 교훈을 전달하는 그릇으로 전락하게 될 수 있고요. 그럴 수밖에 없죠. 형식이 내용과 긴장을 이루지 못하면 형식은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테크닉이나 스타일로서의 도구가 될 뿐이니까요. 우리는 이런 작품에서 애완동물 이상을 읽어내지 못할 겁니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그게 한계가 아니란 걸 우리는 자연스레 체득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완동물의 수명이 무한히 늘어나기를 원하기도 하죠.
그래서 정밀하게 일관성을 이루고 있던 극의 구성을 예기치 못한 시점에 깨뜨려버리면서 극이 소재/주제/서사의 일체(결정론적인 극에서 소재와 서사는 다른 것이 아니죠. 소재가 선택되는 순간 그 자체로 필연적인 서사 전개가 결정되니까)로서의 '이야기'가 일정한 한계선 안에 머무르지 않고 되려 작품 안과 작품 밖의 경계를 허무는 식의 창작물들이 현대로 오면 올수록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근년에 나온 영화들 중에서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나 <헤일 시저> 같은 코언 형제의 작품들, 혹은 작년에 찬사 받은 <토니 에드만> 같은 게 그런 작품이라고 보고요. 소설 중에서는 <한밤의 아이들> 같은 게 있겠죠. 이 작품들을 보면, 정말 완벽하게 일점을 향해서 극의 모든 구성 요소가 달려가는 그런 작품처럼 보이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익숙한 이야기처럼 흘러가는데, 갑자기 엔딩에서 뒤통수를 쳐버리는 식이죠. 도대체 우리가 뭘 본 건가 싶게 되고. 작품 안의 구성요소들의 완전한 통합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 전까지 작품 안으로 향했던 시선을 작품 바깥으로 돌려보며 이면과 컨텍스트를 살펴보게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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