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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22 09:18:00수정됨 |
Name | 구밀복검 |
Subject | 돈으로 헌신에 감사 표하기 |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이야기하면 일정 레벨 이상 올라가면 도덕 = 돈이라 생각합니다. 돈 많으면 착하다 이재용 회장님 리스펙 이런 이야기는 아니고요. 남에게 도덕적 대가를 지불하는 방법은 결국 돈이 이찌방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가까운 사이, 작은 공동체, 대면하는 관계에서는 돈이 능사가 아니죠. 어지간하면 돈보다는 그래도 김장 김치 나눠주고 유아용 카시트를 주며 품앗이를 하는 게 더 가치 있고, 현금을 주더라도 봉투에 담아서 줘야 하고 대체로는 상품권이라는 형식을 취해서 주죠. 하지만 도덕적 대가가 오고 가는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단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런 공동체적 유대감에 기반하는 호혜적인 품앗이는 의미를 잃게 됩니다. 흔히 공정 무역 커피 이야기하면서 아프리카 커피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면서 피땀 흘려 채취한 커피콩으로 선진국 사람들이 아메리카노 좋아 좋아 좋아 한다고 비판을 합니다. 그게 윤리적인 껄끄러움을 제대로 짚는 건 맞아요. 하지만.. 다른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실상 그 사람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뭐 와닿는 게 있을 리가 없죠. 아예 다른 세계에 사는, 남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에일리언 사이에 호혜와 유대와 공감이라는 건 한정적이고 일회적일 수밖에 없죠. 결국 제도적인 형태의 거시적인 방식이 아니고서는 도덕적인 대가는 적절하게 지불될 수 없어요. 그게 곧 돈이고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커피를 안 마실 수가 있을까요. 어떤 계기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도껏 안 사먹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항구할 수는 없죠.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 만날 때마다 '커피 먹는 넌 세계 자본주의의 착취에 가담하고 있는 거야 어쩜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니'라고 몰아붙이는 게 능사도 아니거든요. 어쩌면 그거야말로 제3세계의 노동착취에 눈을 감고 커피 업체 매출을 늘려주는 것보다 더 부도덕한 행위일 수도 있죠. 주변 사람들의 감정과 삶과 일상을 헤아리지 않으며 '도덕적 자본'이라는 권위를 독점적으로 착취하려는 거니깐.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이란 것 자체가 이렇게 남의 수고에 돈으로 지불하는 것이 천한 짓이 아니라 올바른 겸허함이라는 것을 인정하고부터 시작된 거예요. 이걸 두 글자로 줄이면 '분업'이죠. 예컨대 짭스라는 사업가가 어느날 세계 인터넷 시장을 모바일 단위로 압축해버릴 수 있는 기똥찬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합시다. 근데 이걸 스스로 할 수 없거든요. 결국 다른 사람들의 힘을 빌려야합니다. 남들을 내 손발로 부려먹어 내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설계하고 실현하는 거죠. 이를 두고 손 안 대고 코 풀면서 돈이면 다냐고 항의할 여지가 분명 있지만, 딱히 돈 아니고는 못하는 것도 현실이지요. 그렇다고 우주니악 사장님 리스펙또 하고 끝낼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 약간은 불편하지만 비교적 산뜻한 방식으로 도덕적 부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면서 현대인의 특권인 풍요와 복락과 안정이 나타난 거죠. 이건 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비단 고용주와 고용인의 문제도 아니에요. 실상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죠. 아이뽄은 짭스의 아이디어로만 만든 게 아니라 서울 사는 복검이 같이 스스로는 돌도끼도 만들 줄 모르는 수백 수천 수억 소시민들의 축적된 니즈가 그걸 만들 역량 있는 생산자들을 산업적으로 소환하는 식으로 이 땅에 강림시켜 만든 거니까요. 사실은 우리 모두 짭스의 공범이고 남을 부려먹기는 매일반인데 그 죄책감을 돈으로나 간신히 메울 수 있다는 거예요. 고개를 돌려 보면 코로나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죠. 저 같은 사람이 의료 노동자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고 해도 그게 뭐 얼마나 와닿을지 의문이거든요. 온라인으로야 심리적으로 서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고 감사 인사 한 마디라도 나누는 게 정이니까 그럭저럭 온기가 전달 될 수 있지만 실생활에서 그러긴 겸연쩍은 거죠. 일개 킹반인 주제에 현장을 뭘 안다고 고맙다 만다 말하겠어요. 그런 면에서는 재난 지원금이든 뭐든 의료 노동자들에게 더 큰 치하가 세금을 탈탈 털어서라도 실물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물론 정책이란 게 뚝딱하면 뚝딱 되는 게 아니고 돈 몇 푼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겠지만 일단 마음은 그렇게 먹게 되는 거죠. 물론 이게 그렇다고 아 돈이면 다 되는구나 하는 분위기가 사회에 만연하면 곤란할 겁니다. 그것도 TPO를 고려하지 않으면 넌씨눈 되는 거죠. 얼마면 돼를 원빈이 하면 연기가 오그라들어도 아우라만 가지고도 명대사가 되지만 이놈이고 저놈이고 아 공치사보단 돈이 짱이구나 하고 흑화되어서 죄다 이젠 돈으로 사겠어 외치고 다니면 그저 인셀 풍조의 영향을 받은 매춘 구매자가 양산 되는 거죠. 그런 측면에서 제도적인 설계를 통해 이런 대가 지불의 영역을 미리 체계적으로 구비해 놓는 것이 중요한 거고요. 이젠 돈으로 사겠어-가 제도의 힘을 빌게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감사를 돈으로 표하고 수고를 물질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인격적인 잡음들을 그나마 탈인격적인 방식으로 처리해줍니다. 그렇게 돈 주고도 욕 먹는 일이나 물에서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깽판치는 일들이 줄어들면서 사람들 사이에 피로는 줄고 관용은 늘지요.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5-03 23:5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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