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9/29 04:15:05
Name   tannenbaum
Subject   은사님은 뉴라이트
나의 은사님은 뉴라이트

나름 지역 명문 국립대를 다녔어요. 그 동네에선 인정 받는대학이었고 저도 나름 1그람 정도 기대를 했었어요.

하지만 그 기대는 1학년 1학기에 무너졌죠.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한숨 나오는 수업 퀄리티 때문이었어요. 통계학은 어디 고딩들이나 배울 확률, 집합, 정규분포 이따위나 가르치고 있고, 만화로배우는 초등학교 경제학, 회계!! 일주일이면 전유성만큼 한다... 딱 이수준.

70년대 마지막 업데이트 된 교수, 의욕 제로 교수, 무성의1등 꼰대력 1등 교수, 족보만 있으면 A+받는 교수... 똑똑한 아이들은 1학년때부터 사시, 회계사, 세무사, 관세사 알아서 몰빵하고 수업은 빵꾸 안날 정도로만 챙겼죠.

그러다 3학년 때 모 교수님을 만났어요. 경영통계학/계량경영 쪽 국내에서 알아주는 분이시죠. 이분이 절대평가와 오픈북으로 악명이 높으셨는데 60명중 52명을 F 때린 레전드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수강인원이 정원 100명에 18명... 20명 이하는 폐강이었지만 학장이랑 한판 뜨고 수업을 강행하셨습니다.

인상적이었던 첫수업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난 여러분 하나하나 맞출 수 없다. 강의소개에서 보았던 그대로 진행할 것이다. 학부 수준을 절대 넘지 않을것을 약속하지만(가끔 넘으셨지만...) 성과는 여러분이 만드는 것, 난 조력자로서 최선을 다할것이다.

전 좀 상스런 말로 뻑이 가 침을 질질 흘렸어요. 얼마나 섹시했는지 모릅니다. 수업은 명성대로 쩔었습니다. 이론 소개 - 설명 - 예제 - 케이스연구 - 모형제시 이 과정을 1주일 단위로 반복했습니다. 학기 끝날 때까지... 물론 돌이켜보면 학부 수준은 맞았어요. 당시엔 속도에 정신 못차린 고문이었지만요.

출석 레포트 중간 따위는 없었고 대망의 기말. 오픈북에 시간 무제한, 무감독 시험으로 다 푸는대로 교수실에 올려 놓고 가는 방식이었어요. 칠판에 적힌 단 한줄의 문제. 한학기 동안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배포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효율적인 모형을 제시하고 그 의의를 논하시오. 와... 바로 이게 오픈북의 명성이구나 싶었죠.

하지만 제게 은사님이신 이유는 빡쎈 커리큘럼 보단 교수님 자체였습니다.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학생들의 사소한 뻘소리 하나도 무시하지 않고 함께 토론하며 스스로 방향을 찾게 만드셨습니다. 무엇보다 그 야만의 시절에 늘 학생들을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하셨죠. 심지어 술자리에서도 단한번의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마지막까지 품위와 권위란 이런것이다를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고고한 한마리 학 같은 선비랄까요.

8년간 48명의 교수님을 만났지만 제가 인정하는 유일한 은사님이셨습니다. 졸업 후 매년은 아니지만 가끔 술 한병 좋은 놈 들고 찾아 뵈었어요. 마지막으로 뵌게 8년 전이네요. 한번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못가던 어느날이었어요.

박근혜 탄핵요구로 전국이 촛불을 들던 어느날 신문기사에서 교수님을 보았습니다. 박근혜 탄핵반대 전국국립대교수 시국선언문에 교수님 이름이 있더군요. 보는 순간 스턴 걸린것처럼 한동안 멍 하더군요. 내가 알고 있던 교수님 모습과 괴리가 너무 심해서요. 그러고 보니 교수님은 정치나 종교 관련 이야기는 한번도 안하셨어요. 전두환 견자놈 빼고... 졸업 이후에도 찾아가면 지금 사는 이야기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만 하셨었네요.

헌데 말입니다. 당시엔 상당히 충격이었지만 몇년이 지난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분이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계신다 한들 남에게 강요한 적 없고 공/사적인 자리에서 설파하신 적도 없으시죠. 또한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을 이름을 걸고 표현하는 행위 자체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할 행위죠.

생각해보면 단순해요. 아직도 은사님인가? 예스! 교수님을 존경하는가? 예스! 교수님 의견에 동의하는가? 놉!! 연을 끊을것인가? 당연히 놉!!! 혹시 애정을 품었나? 미쳤어욧!!!!

또 드문일도 아니죠. 모태개신교 부랄친구도 있고 정치성향 완전 다른 여사친도 있고요. 또 꽤 다른 가치관의 좋은 홍차클러분들도 많이 계시고요.

먼말이 하고 싶냐고요? 몰라요. 그냥 잠이 안와서... 탐라에 썼는데 여기로 가래요.
ㅜㅜ



24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19 일상/생각[펌글] 좋은게 좋은거라는 분위기가 세상을 망쳐왔다 15 Groot 19/12/27 5850 5
    10102 일상/생각환상의 나라에 대한 환상 3 소고 19/12/22 6397 6
    10092 일상/생각서울, 강남 입성이 목표일까.. 10 Picard 19/12/18 5677 19
    10084 일상/생각여기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5 우럭광어 19/12/15 5506 13
    10075 일상/생각겨울 밤 길가에 내려놓기 2 거소 19/12/13 6326 7
    10074 일상/생각아픈 것은 죄가 아닙니다. 27 해유 19/12/13 5727 29
    10071 일상/생각충치 18 알료사 19/12/11 6148 9
    10067 일상/생각도미노 인생 4 사이시옷 19/12/10 5837 21
    10066 일상/생각먼지 쌓인 단어 6 무더니 19/12/10 6693 13
    10062 일상/생각집문제로 스트레스 받아서 넋두리 남깁니다. 35 미스터주 19/12/09 7379 18
    10056 일상/생각그땐 정말 무서웠지 4 19/12/06 7013 34
    10050 일상/생각[사고영상][약혐...]교통사고 처리 힘드네요... 7 No.42 19/12/05 6603 3
    10048 일상/생각관점의 전복 - 약자의 강함 16 necessary evil 19/12/03 7637 19
    10044 일상/생각내가 이러려고 결혼하나 자괴감이 들어.. 32 염깨비 19/12/02 7778 0
    10042 일상/생각빼빼로 배달부 24 Jace.WoM 19/12/01 6457 10
    10038 일상/생각깨끗한 성욕이라는게 존재하는가? 26 타키투스 19/11/28 8651 5
    10032 일상/생각나의 남혐 7 알료사 19/11/27 7932 28
    10031 일상/생각하루 삼십 분 지각의 효과 13 소고 19/11/26 7031 24
    10030 일상/생각나는 다시 살을 뺄 수 있을까?? 29 원스 19/11/26 6120 0
    10027 일상/생각홍콩 소식을 들으면서 하는 생각(+기사와 의견 추가) 33 흑마법사 19/11/25 7465 17
    10026 일상/생각조롱만은 아니 보았으면 45 호타루 19/11/25 7254 9
    10013 일상/생각아빠 직업은 무역업.. 근데 제 직업은 아닌데요.. 38 집에가고파요 19/11/22 7257 6
    10012 일상/생각거지같은 인간은 거지같은 인간일 뿐 9 necessary evil 19/11/22 7647 7
    10009 일상/생각미국이 더 이상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 20 MANAGYST 19/11/22 8117 11
    10007 일상/생각나이 9 사이시옷 19/11/20 5326 5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