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6/16 20:43:53
Name   멍청똑똑이
Subject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리뷰
https://kongcha.net/?b=31&n=182157

https://youtu.be/yGUwmU0Z95I

'뭐든지 잘 읽는 남자' 파란아게하님께서 게임을 시작하신 기념으로 짧게 리뷰를 써 볼까 합니다.



SF소재에서 인간과 인조인간을 다루는 소재는 흔합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노동자 대용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갈등을 그려낸 게임으로, 이 주제만 본다면 특별할 것 따윈 하나도 없는 게임입니다. 심지어, 이 소재는 이미 오랫동안 사골에 사골에 사골을 끓인, 35년간 불을 끄지 않았다는 족발집 엑기스마냥 우려져 왔기에 SF를 좀 좋아하는 양반들이라면 다들 쌍심지를 켜고 어디 얼만큼 잘하는 집인가 보자, 하는 마음으로 앉아있을만한 소재지요. 적어도 그런면에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스토리는 SF라는 장르의 내러티브에 있어서는 별 5개중 2개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게임이 소설과 영화와 같은 것과 다른 핵심적인 차이는 바로 상호작용입니다.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을 외부의 입장에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안에서 하나의 주체적 선택자로서 존재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특징을 살리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게임 역시 누군가가 세계를 만들고, 그 안의 분기와 선택들을 준비해 두며, 그 결과 역시도 정해져있기 때문이죠. 특히 과거의 게임은 비용과 자원의 한정 앞에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고, 1인 오프라인 플레이 게임에서 상호작용이란 일종의 꾸밈새에 불과했습니다. A부터 D까지의 선택이 있다고 해도, 결국 같은 결말로 나아가는 일이 많았죠.


그런면에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과거의 문법을 이용하되 비용과 자원의 한정을 뛰어 넘어 버립니다. 100개의 선택지에 4개의 갈림길만 있던 과거의 게임에서, 100개의 선택지라면 한 30개의 갈림길을 만들어 버리는거죠. 그것도 무척 질적으로 다른 형태의 경험을 주는. 따라서 숙달된 게이머일수록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낍니다. 뭐야, 이 선택 했는데 진짜 이렇게 된다고? 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선택은 게임 전체에 영향을 끼치며 그 선택 자체에 대해서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그저, 이전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앞으로의 선택으로 어떻게든 바꿔나갈 수 밖에 없는거죠.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것 역시 있고요. 마치 인간의 삶처럼.


영화나 소설을 수용하는 수용자들은 다양한 입장을 지닙니다. 그것은 그 이야기가 나의 것이 아니라 외부의 것이니까요. 감상을 하는 사람들은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어느정도의 거리감을 둡니다. 그것이 곧 평가를 할 수 있게 하고, 세계관을 외부에서 볼 수 있게 하죠. 게임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을 플레이 할 때, 개발사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방해합니다. 특정한 선택지가 놓여져 있는 상황에서 타임아웃이 빠르게 다가오고, 우리는 선택해야만 할 때. 혹은 선택하지 않았을 때에 대한 책임만이 존재합니다. 그 순간, 긴박해지는 긴장감과 고조되는 마음 앞에서 나는 쉽게 캐릭터에 빠져들고 동시에 '인간'인 나 자신과 '안드로이드'인 게임상의 주인공 사이에서 자아의 추가 기우는 것을 느끼며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은, 언제나 무척 갈등적이고 중요한 것들이죠. 삶과 죽음만큼이나. 모든 것을 얻을 수 없고, 무언가는 포기하며 게이머는 점점 더 게임 안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 게임을 보편적인 게임의 평가들, 이를테면 플레이에서의 조작에 따른 쾌감이나, 레벨디자인, 액션의 화려함, 여타 다른 장르적 기본에 기반한 비평에 대해 약간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이 게임은 근본적으로 게이머인 내가 밖에서 바라보는 경험이 아니라, 내가 이 게임 안에서 선택하는 것들에 몰입하는 것을 전제로 두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을 그저 관람석에 앉아, 다리를 꼬고, 고개를 끄덕이며 평가하는 자세로 한다면 그냥 안 하는게 나은 게임이죠. 그러나, 내가 게임 내의 내러티브 안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생각 할 시간은 줄어들고 무언가는 벌어지지만 예상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 우리가 이 게임 안에서 선택하는 선택지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쉽사리 알기 어려운 마음 깊은 곳의 바람을요.


저는 게임을 하면서 무척 독특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많은 선택지 중에서 저는 주로 게임 내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 인정을 받는 것, 이길 수 있는 방법. 이 세 가지 욕구에 충실한 선택지를 찾더군요. 게임 내에서의 내 역할을 수행하려 하고, 게임 내에서 상호작용하는 npc들에게 인정받고자 하고, 게임 내에서의 갈등구조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싶은. 그러나 게임 내에서는 이러한 것들 이외에도 훨씬 많은 선택지가 있었고, 꼭 이러한 방식으로 선택하더라도 해피엔딩으로 도달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엔딩 중 하나를 보았고, 좀 허무했지만 그게 바로 제 선택이 쌓이고 쌓여 일어난 일이었죠.



PC버전으로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PS4가 있다면 꼭 플레이 해보시길 바랍니다. '보는 것'과 '하는 것'이 이렇게 크게 다른 게임은 오랜만이에요. 비주얼 노블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지만, 하나의 게임으로서 무척 훌륭한 완결성을 갖고 새로운 경험을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강하게 추천하고 싶은 게임입니다.






6
  • 춫천
  • 너무 감명깊게 한 게임입니다
  • 춫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967 정치홍대 조소과의 정치적 이중잣대? 8 당근매니아 16/06/08 4433 0
4876 게임EA 오리진 가입시 오리진 엑세스 7일 무료라고 합니다. 1 저퀴 17/02/15 4433 0
7938 오프모임네스프레소 캡슐 나눔입니다 33 CONTAXS2 18/07/25 4433 5
10954 일상/생각노르웨이 단어: 프리루프츠리브 - 야외생활의 문화 6 풀잎 20/09/14 4433 3
9714 오프모임10월 20일 오후 2시 걷기 좋아하는 부산러 있나요 15 아침 19/09/27 4433 3
4321 일상/생각게임회사 다닌지 7년째, 처음으로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6 arch 16/12/07 4434 7
4573 도서/문학댓글부대 10 알료사 17/01/08 4434 3
10900 문화/예술한복의 멋, 양복의 스타일 3 아침커피 20/08/30 4434 5
6208 스포츠국내 축구 이야기들 : 2017-3 (1) 13 별비 17/08/31 4435 3
7940 음악NEFFEX - Rumors 놀보 18/07/25 4435 1
9323 게임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리뷰 10 멍청똑똑이 19/06/16 4435 6
9402 게임TFT 5렙 리롤 조합 6 무니드 19/07/06 4435 0
5773 정치음주운전이야말로 살인미수와 마찬가지 행위이다. 8 Raute 17/06/11 4436 5
6110 음악[번외] 3 Divas of Swing Era - 1. Billie Holiday 2 Erzenico 17/08/16 4436 5
10730 IT/컴퓨터소비자시민모임에서 무선이어폰 17종을 조사했습니다 21 Leeka 20/06/30 4436 2
12184 꿀팁/강좌오픈마켓에서 판매자와 분쟁이 생겼을때 조언 한가지. 16 매뉴물있뉴 21/10/19 4436 2
3675 일상/생각하나님 한 번만 더 할아버지와 대화하게 해주세요. 7 Terminus Vagus 16/09/09 4437 10
4574 역사여요전쟁 - 3. 의군천병 2 눈시 17/01/08 4437 3
11881 생활체육골프입문기(3, 필드에서의 팁들) 6 danielbard 21/07/13 4437 4
6254 정치트럼프 정부에서 한.일 핵무장 허용검토 얘기가 나왔습니다. 13 empier 17/09/09 4437 0
8151 방송/연예시즌1 커트라인으로 보는 프듀 시즌3 표수.. 3 Leeka 18/09/01 4438 0
9705 일상/생각N은행 스펙타클 하네요.. 15 집에가고파요 19/09/25 4438 1
3053 꿀팁/강좌신박한 물건 : 전기를 생산하는 야외스토브 8 눈부심 16/06/17 4439 1
3275 게임뻘생각 7 소노다 우미 16/07/15 4440 0
8937 역사역사를 주제로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 30 droysen 19/03/06 4440 23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