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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6/16 18:05:39
Name   구밀복검
File #1   KCI_FI001905561.pdf (829.5 KB), Download : 17
Subject   빨강머리 앤 : 캐나다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일전에 탐라에서 '빨강머리 앤 번역과 수용의 문화 동력학'이란 논문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꽤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그냥 언급만 하고 넘기기 아쉬워서 내용 요약을 해봅니다. 원래 탐라에 쓰려던 건데 길어져서 티타임으로 넘긴 거다보니 말투가 좀 장난스러워요 ㅋㅋ 양해바랍니다. 논문은 상단 링크에서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 빨강머리 앤 연구는 영미권과 일본에서 열심히 함 특히 일본애들이 열심히 함
- 한국의 빨강머리 앤 번역은 60년대 초에 이루어졌는데, 이건 일본 최초의 번역본인 무라오카 하나코의 1952년 본을 중역한 것. 애초에 원제도 빨강머리 앤이 아니라 '그린 게이블즈의 앤'인 것을 하나코가 '빨강머리 앤'이라 명명하면서 이게 동아시아 표준이 됨.
- 이후 약 50년 간 40번 가량 한역본이 나옴 ㅎㄷㄷ 매 년 한 번 수준. 전 시리즈 완역본도 5회 이상이라 10년에 한 번은 업데이트.
- 625 직후에 나오다보니 베이비부머 세대가 특히 감정이입 많이 했음. 우리도 고아인데 얘도 고아야 ㅜㅠ
- 번역자들은 대부분 창작을 겸하던 여성 교양층. 여성 주인공을 다룬 여성 작가의 작품을 여성 번역가들이 여성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구조였던 거임 프린스는 필요 없심
- 그중에서도 여고생들의 수용을 주목할 만함. 여대생들과 여류문단이 고오급 레스토랑에서 불문학 야설 덕질하고 있을 때 여고생들은 분식집에서 빨강머리 앤 앓이.. 특히 이화여고에서 이런 문학소녀들을 많이 낳음
-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일본 번역의 모체가 된 하나코 같은 경우에는 이전의 이런저런 여캐들이 병약 자살 우울 엄살 모에로 어필했던 것과 달리 앤은 풋내기 감성에 취해 있다가 점차 깡다구와 근성 있는 당당한 여성으로 성장하는 건강성과 계몽성이 있다고 보고 이걸 번역에서도 반영. 그에 반해 한국에서는 번역 과정에서 앤을 순정캐로 보았고 그 결과 앤은 순정물의 아이콘이 됨
- 여튼 70-90엔 빨강머리 앤이 한국에서 아동소설로는 넘사벽 ㄷㄷ 성경 수준
- 마케팅 대상은 아동 한정이 아니었고 성인들에게도 강력히 어필. 왜냐면 다들 어릴 때 빨강머리 앤 읽으며 자랐던 사람들이라.. 기혼 여성들에게는 교양으로 여겨질 정도. 무려 다이애나 비도 읽었다는데여 안 읽으실 건가여!
- 이 타이밍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또 똻..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머리 앤
- 그렇게 빨강머리 앤은 세대와 계층을 막론하고 전 여성을 아우르는 정전의 지위에 올라감. 초딩도 교수도 할매도 손녀도 판자촌 주부도 부잣집 사모님도 모두 읽는 여자의 소설이다 이긔.
- 특히 빨강머리 앤의 건전성이 주효했음. 불문학 마냥 도발적이지도 않고 일탈적이지도 않고 프리섹스스럽지도 않고 건전 건전.. 남캐와의 젠더투쟁이라는 긴장감이 있으면서도 결국은 정분나는 경사로움도 있고

- But! '그린 게이블즈의 앤'에는 몇 가지 전복성이 있음. 첫째는 생산적인 노동력으로서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면 상상력이고 문학 감성이고 뭐고 사회적으로 승인 받을 수 없으며, 특히 소녀는 소년에 비해 일반적으로 노동력이 딸리기 마련이라 이 과정이 더 폭력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임. 실제로 마리라 아줌마는 나름 이해심 있는 아짐이긴 하지만 앤의 감수성과 상상력이 집안 거덜낼 때쯤 되면 멘탈 나갈 정도로 작살냄. 왜냐하면 노동력으로서 쓸모 없는 짓거리니까.
- 둘째는 내부자에게는 나남의 구분이 없는 목가성이 있으면서도 외부자에게는 배타적인 스코틀랜드계 캐나다 시골 마을의 문화에서 이민자의 처지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임. 예나 지금이나 농촌 사람들이 텃세가 심햐.. 누가 수꼴틀딱랜드 아니랄까봐.
- 즉 '그린 게이블즈의 앤'은 마을 공동체에게 쓸모 있는 내부자라는 승인을 받기 위한 앤의 대자적인 인정 투쟁을 그리고 있으며, 나아가 '예술'과 '생산성'의 대립이 부각되고 있다는 것을 짚어야 함. 음악하면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딴따라 될 생각말고 빨랑 나가서 알바비라도 받아왓!
- 근데 이런 문제의식이 일본을 한 번 거치고 한국에서 또 굴절을 겪어 '빨강머리 앤'이 되면서 모두 휘발되어버리고 순정스러운 서정적 감성만 남음 ㅋ 이건 번역자들 잘못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온건한 감성이 당시 한국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한계이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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