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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1/01 23:38:39
Name   WatasiwaGrass
Subject   밀 농사하는 사람들 - 2
우선 역 근처에 있는 구립 도서관으로 향하기로 했다. 건물크기가 그에 대변하는 위용을 과시하는 구청과 달리, 한없이 작게 보이는 문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문화관 좌측에 위치해 있는 도서관 입구가 보였다. 그 문으로 다가가자, 자동문이 열리면서 내부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 내부는 늘 변함없이 있었다. 도서관 출입구 우측에는 두 개의 일 인 소파 사이에 놓인 소탁도 변함이 없었고, 좌측에 놓여있는 검색대와 그 옆에 안내대도 마찬가지였다. 안내대에 있는 사서에게 귀찮게 할 필요 없이 검색대를 이용하는 편이 더 좋은 방법이다. 가급적이면 사서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일 그 위치에 당도하여 책을 찾으려 해도 못 찾게 된다면 사서에게 도움을 구할 도리밖에 없다. 그러고는 손쉽게 찾아낸 사서를 향해 민망한 표정을 내보이는 절차까지 거치게 되니, 할 수 있으면 자력으로 찾고 싶었다.

검색대 위에 놓여 있는 검색 컴퓨터를 통해 책을 찾아보니, 일 층 깊숙이 인류학 분야에 놓인 책이었다. 검색 모니터 옆에 배치된 팬과 쪽지함의 쪽지를 꺼내, 그 위치를 적었다.

나는 인류학 도서가 배치된 위치로 걸음을 옮겼다. 그 위치에 도착을 하여 보니, 도서관 내부 가장자리까지 이르게 됐다. 가장자리에는 위의 층처럼 열람대가 배치돼 있다. 열람대는 주로 책을 읽는데 주로 이용하는 가구이나, 자기만의 책을 가지고 독서를 하는 사람들은 소파에서 앉아 읽는다. 그러면 열람대의 주이용자는 누구이겠나, 설계가 독서실과 열람대와 딱히 다른 점이 없다.

내 학창 시절에도 여기 이 열람대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미숙한 정신을 소유하던 시절이던 만큼, 그때는 의문점이 많았고 여러 고민들이 즐비했다. 그중의 고민이면서도 알고 싶었던 게 왜 이 사람들은 공부를 하고 왜 그리 열심인 것일까. 만일 과거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다면, 나는 이러한 답변을 날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여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는 말과 함께 그 고민을 할 시간에 빨리 공부하라는 추신을 달아 놓았을 것이다.

여기 사람들 중, 전부는 아닐지 몰라도 대다수는 여유를 쟁취하기 위한 수행을 거두고 있다. 그 여유를 순조롭게 쟁취할 수 있는 자리를 가지기 위해서, 보다 안정적이고 여유 있는 삶을 위하여, 그렇기에 그들은 공부한다. 그러나 그러한 여유 있는 자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할지언정, 모든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한정된 자리에 앉기 위하여 결국에는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 본인이 투자한 (재원으로 통용되는)물질과 (시간으로 통용되는)비물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된다. 한정된 인원으로 고정된 자리이기에, 지원자가 많을수록 흔히들 비유하는 하늘의 별 따기로 더욱 심화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에 기꺼이 투자한다. 여유를 얻고 싶은 마음에 말이다. 실패자가 늘어남에도 그들은 바위에 계란을 계속 친다. 도전자는 늘어만 간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어디 여유가 흔한가. 하지만 더 이상 남는 계란이 없게 된다면, 계속해서 도전하다 실패를 하게 되어 영영 재도전할 기회조차 사라지게 되면, 그들은 어떠한 방도를 세워야 한다. 늘 도전한다고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왠지 모를 불쾌감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런 불쾌감을 잊으려 책을 찾는데 더욱 몰두했다. 아마 이쯤인 게 분명하다. 도서 위치 번호가 이를 방증함에도 금방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어느 부분에서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분을 발견했다. 책장 속에 나열된 책들 중에 공백이 있었다. 그 공백을 보아 나는 직감했다. 내가 찾고 있는 책이 어느 누군가가 이 도서관에서 읽고 있음을 말이다. 물론 대출 역시 염두해 둬야 할 사항이지만 지금 내 쪽지가 반증이다. 내가 찾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 빌려갔다는 기묘한 우연이 아닌 이상, 누군가 이 도서관 내에서 읽고 있음이 틀림없다. 단지,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부터가 신통치 않았다. 그러면서 책장을 빠져나올 때, 나는 이번에는 곤혹스러움을 마주했다.

내가 찾고 있는 책과 지금 그걸 읽는 인물을 찾기는 했지만, 잠깐 읽고 놓을 요량이 아니었다. 그 인물은 내가 들어서고 나서부터 계속 독서를 하고 있었다. 출입구 좌측에 놓여 있는 그 소파에 앉아서 말이다.

그 인물의 외모는 조금 연륜이 묻어 있다고 할 수 있었으나, 차림새는 그에 따르지는 못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오히려 알아차리기도 힘들었다. 등산복 바지의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며, 상의는 회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좀 격하하게 표현을 하자면 그냥 노숙자였다. 그런데 그 노숙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그 책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저 노숙자의 손으로부터 떨어지기까지 기다리기, 그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느 것이 손해를 덜 볼까. 기껏 마련한 금 같은 시간을 허투루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난 내가 노력한 만큼 거기에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 책은 내가 한번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여러 곳에서 베스트 셀러로 정평이 난 책이었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시간을 가까스로 내놓으며 하는 것이 독서인데, 나는 그 시간을 슬기롭게 이용하고 싶었다. 나는 홀과 책장 사이에 있는 원형 의자에 앉아, 근처에 배치된 신문 중 손이 가는 대로 골라 읽는 시늉을 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할까. 저 책이 과연 노숙자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까. 가늠을 해 보면 최대 십 분 정도만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예측은 내 희망 사항 정도에 그쳤다. 시간은 좀 더 걸렸다. 체감상 십 분은 가볍게 지나갔으며, 이로 인해 안달이 나 나는 발을 떨게 되었다. 그러면서 잠시 신문을 내려 슬쩍 보았고, 그와 동시에 그 노숙자의 인상도 재확인했다. 저 노숙자 참 끈질기다. 생김새로는 정말 무료 급식 쏘다니며 하루를 마감하게 생겼는데, 그런 노숙자가 학자마냥 진지하게 독서를 하고 있다. 진기한 풍경이라면 진기한 풍경이지만, 나는 미술품 전시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하더라도 쉽게 지나치는 사람이다. 얼른 책을 안내대 옆에 있는 반납 카트에 넣고 유유히 떠나가는 뒷모습만을 고대했다.

슬슬 실증이 날 즈음에, 갑자기 그 노숙자가 책을 들고 일어났다.

이제 그 책을 카트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노숙자는 입을 열었다. 사서에게 하는 말인 것으로 보인다.

“저 대출을 하려고 하는데, 미리 기간 연장을 해도 되겠습니까?”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내가 투자한 것들이 날아가는 걸 넘어, 아예 일말의 기회조차 빼앗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쥐고 있는 신문이 조금 구겨졌다.
대출로는 부족했는지, 그에 한술 더 떠 미리 기간 연장을 신청하여 내 바람을 완전히 짓뭉갠다.

노숙자가 유유히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져 간다. 책을 가지고 말이다.

나는 저 노숙자 때문에 결국 성취할 수 없었다. 내가 노력한 산물들은 무의미한 처사로 돌아갔다. 왜 내게 하필 이런 일이 발생한 걸까. 나는 노숙자가 싫다. 인상이 좋은 나쁘든 그저 싫다. 그런 하는 일 없이 놈팡이처럼, 때때로 사람에게 민폐나 끼치는 파락호가 도서관에 기어들어 왔다. 한량하기 그지없는 무뢰한에게 동정을 하는 이가 있지만, 나는 아니다. 우선 무얼 하러 이 도서관에 기어들어 왔는지 그 연유를 알고 싶다. 내 친절히 노숙자 쉼터를 알아 내 길을 안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저 노숙자는 대체 왜.

계속 이렇게 노숙자의 험담을 하여봤자 의미 없고 부질없는 짓이라 깨닫게 될 적에, 막상 이런 꼴을 겪게 되니 허탈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집에서 쉬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지금 내가 이리 피로한 상태로 저 책을 기다렸다니, 내 자신이 한탄스럽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어째서 그깟 책 하나에 시간을 투자한 것일까. 제대로 읽지 못할지도 모르는 현태다. 결국 쓸데없는 데에 시간 낭비를 했다는 결론밖에 남지 않았다. 자괴감이 들었다. 나 자신이 한심하다. 좀 시간을 융통성 있게 사용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나는 왜 이런 걸까.

나는 신문을 원래 자리에 두고 옆에 두었던 가방을 매었다. 집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 책이 아니면 여기에는 볼 일이 없었거니와, 딱히 다른 책을 읽고 싶은 의향이 없었다. 침울하게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이봐, 학생!”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생애를 통틀어서 그 목소리에 대해 반추를 해보니, 불과 들은 지 몇 분 안 된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예의 주시했던 그 노숙자가 나타났다.

“보아하니, 이 책 빌리려고 읽는 시늉을 한 모양이던데, 거 좀 발 떠는 거 줄이지 그랬어?    자 여기 이 받아가. 책은 내 대출 카드로 빌렸으니까. 가급적 반납할 거면 반납함에 넣어.”

노숙자는 그 책을 내게 넘겼다. 나는 그 책을 받들면서, 놀란 기색을 감추는데 여념이 없었다. 나는 물어보려 했다. 왜 본인의 대출 카드로 책을 넘기냐는 질문을 하려 했다. 나는 어떻게든 실언을 하지 않으려 입에 집중을 하고 열려 했지만, 그 노숙자는 문화관 출입문을 향하면서 인사 대신에 이리 말했다.

“요즘 대학생들 바쁘잖아, 어디 책 읽을 시간이 남아도나. 나중에 예약을 해서 빌리면 최대   사 주 정도는 읽을 수 있으니, 여유롭게 독서를 했으면 좋겠어. 이만 가보겠네.”

그러면서 그 노숙자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쁨이었다. 결국에는 얻을 수 있었다. 내 투자는 헛되지 않았다는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이 생겼다. 어느 친절한 노숙자 덕분에 기간 연장을 하여 최대 사 주씩이나 읽을 수 있게 됐다. 헛되지 않았다. 그것만이면 충분히 희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기묘한 상황은 여간한 게 아니었다. 저 노숙자는 내가 대학생인 걸 어떻게 알아냈을까. 요즘 도서관을 들르다 보니, 얼굴을 익히게 될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저 노숙자는 자주 도서관에 나오는 사람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아니면 내 행색을 보아 대학생이란 걸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선의를 베풀어 주게 되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전 대학 관련 종사자일 수도 있겠다. 진위는 알 수 없으나, 나중에 재회를 하게 된다면 그때 한번 물어보기로 계획했다.

<밀 농사하는 사람들 - 3, 후기>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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