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5/17 19:44:02수정됨
Name   Cascade
Subject   당신은 사과할 자격이 없다.
1.

늙었다는 것은 감정을 숨기는 걸 더 잘하게 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귀가 잘 안 들린다. 불편하지는 않다. 어차피 듣고 싶은 것보단 듣고 싶지 않는 소리가 더 많은 나이다.

하지만 그렇게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너무 잘 들릴 때가 있다.

"아니 아빠는 화도 안 나?"

누구지? 아마도 손자 목소리인 듯 하다. 이름이... 뭐였더라.

"그런 걸로 화 낼 필요 없다."

아, 이 목소리는 안다. 막내다.

나이 먹어서 아들이 아들이랑 싸우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귀가 안 들리는 척 하는 게 편하다.

아내가 죽은 뒤로는 내가 정말 안 들리는 건지, 안 들리는 척 하는 건지 맞추는 사람이 없다.

TV를 켠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들린다. 아니 너무 익숙한 단어들이 들린다.

누군가가 사과를 한다고 한다.

사과를 했다고 한다.

뭣하러 사과를 하나 어차피 사과할 이유도 없구만.


2.

아들이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더니 나갔다.

해 주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 걸 어쩌리.

아직 아들은 모른다. 그게 화 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나는 병신새끼라는 욕을 듣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죽을 때까지 싸웠다. 미친 척 하고 싸웠다.

엄마-이제 죽어서 없지만-는 그렇게 싸우고 온 아들을 대신해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내게 뭐라고 하진 않으셨다. 그 때가 몇 살이였더라.


아버지-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버지는 옷을 혼자 입지도 못했고,
신발도 혼자서 신을 수 없었고,
밥도 혼자서 해 드실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나는 몰랐다. 큰 형은 알고 있었다. 누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집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딱 두 명이였다.

그 사실을 40대가 되서야 알았다. 아니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어느정도 머리가 커진 후에는 정확한 사실은 아니여도 아버지가 부끄럽다는 건 알았다.

나는 입대하던 날 아침 일찍 대문을 나섰다.

부모님 보고는 절대 따라오지 말라고 얘기한 뒤에 기차에 올랐다.

부끄러운 아버지 따위는 필요없다고 생각하며 연병장을 뒤돌아본 순간, 거기에 아부지가 있었다.

자식이 아비를 창피해 하니, 아비는 가장 끝가에서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아부지를 봤다. 아부지는 나를 봤을까.

그렇게 아버지는 명절에만 뵙는 사람이 되었다.



3.

때로는 진실을 아는 게 딱히 좋은 것만은 아니다.

왜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손톱깎이 근처에도 못 가게 했는지, 왜 할아버지는 손가락이 없는지.

그 이유를 물어본 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그 진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던 순간에, 나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술에 취해 있었다. 울고 있었다.

아빠가 연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아빠는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했다.

입대하는 이야기는 열번도 넘게 들은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아빠는 할아버지가 '한센병'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걸 자식들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절대로. 자식들에게는 그 굴레를 씌우고 싶지 않았기에.

본인이 숨을 다할 때까지도....



아 생각해보니 그 전에는 그렇게 고상한 단어로 부르지도 않았다.

문둥이라고 불렀지.

아 그러고보면 세상이 나아졌네. 최소한 문둥이라고는 안 했으니.




4.

"아부지, 뭐하러 나오셨우?"

아부지가 편의점엘 다 오고.

"담배 한 갑만 줘바라"

금연한 지가 10년이 다 되가시는 분이 웬 담배를.

"아부지, 여기는 담배 못 펴. 흡연장 가야지"



5.

아니 이놈의 아파트는 담배도 맘대로 못 피게 하는구만.

"야 넌 왜 여기 있냐. 제발 담배 좀 끊어라"

"그러는 아빠는 왜 왔는데?"

"할아버지가 피신다 그래서 왔다. 왜?"

"할아버지 담배 끊으신 거 아니에요?"

"몰라, 한 대 피고 싶으신가보지."

거 참 불이나 붙일 것이지 말만 많네.

"아부지 불"



6.

삼 부자가 담배를 핀다.

그렇게 말 없이 들어간다.



7.

똑같은 일을 보고도 셋의 반응이 모두 다른 것은

그러한 상처는 그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포기했다.

그러한 모욕은 그에게는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그런 말에 분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악담은 그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화를 냈던 것이다.





---------------------------------------------------------------------------------------------------------




픽션일 겁니다. 아마도.



6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534 창작6개월 정도 유튜브 영상을 만들고 느낀 점들 13 droysen 19/08/10 4674 17
    9320 창작순록과 함께 용을 공격하는 남자 2 바나나코우 19/06/15 4810 7
    9206 창작당신은 사과할 자격이 없다. 1 Cascade 19/05/17 5123 6
    8418 창작야구장 로망스 6 하쿠 18/10/25 3695 8
    8344 창작존재와 무국 7 quip 18/10/09 4787 13
    8307 창작아기 돼지 삼형제 3 아침 18/10/01 5033 6
    8264 창작상도동 秘史-하이웨이 민치까스 5 quip 18/09/22 5702 7
    8188 창작고백합니다 42 파란아게하 18/09/09 7207 82
    8084 창작(그래픽 노블)[Absolutely bizarre] 10화 늪 이야기 4 태양연어 18/08/20 4624 3
    8053 창작(그래픽 노블)[Absolutely bizarre] 9화 하늘나라 이야기 4 태양연어 18/08/14 4000 2
    8009 창작(그래픽 노블)[Absolutely bizarre] 8화 벤 이야기 태양연어 18/08/07 4609 2
    7992 창작(그래픽 노블)[Absolutely bizarre] 7화 퍼프 이야기 4 태양연어 18/08/02 4308 3
    7924 창작(그래픽 노블)[Absolutely Bizarre] 5화 자기애 1 태양연어 18/07/23 4124 2
    7874 창작(그래픽 노블)[Absolutely Bizarre] 3화 그림자 이야기, 4화 이상한 통조림 2 태양연어 18/07/17 4388 1
    7833 창작(그래픽 노블)[Absolutely Bizarre] 3화 알벤다졸 5 태양연어 18/07/12 4008 2
    7573 창작커피에서는 견딜 만한 향이 났다. 3 quip 18/05/23 3980 8
    7516 창작남해 4 탐닉 18/05/13 4230 3
    7510 창작Full Flavor 2 quip 18/05/12 4041 14
    7505 창작냄새 - 단편 소설 10 메아리 18/05/10 4674 6
    6937 창작돌아본 나 28 Erzenico 18/01/13 3928 6
    6874 창작밀 농사하는 사람들 - 3, 후기 2 WatasiwaGrass 18/01/01 3357 6
    6873 창작밀 농사하는 사람들 - 2 WatasiwaGrass 18/01/01 3139 2
    6872 창작신춘문예 미역국 먹은 기념으로 올리는 소설(밀 농사하는 사람들) - 1 WatasiwaGrass 18/01/01 3886 5
    6793 창작[소설] 검고 깊은 목성의 목소리 - 완결 2 드라카 17/12/20 4906 2
    6792 창작[소설] 검고 깊은 목성의 목소리 - 2 1 드라카 17/12/20 3522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