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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11/07 06:16:38
Name   와인하우스
Subject   사랑의 방식


8년째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뉜다. '너 의외로 순정파구나', '네가 아직 여러 사람을 못 만나봐서 그래', 혹은 '왜 말도 못하고 속앓이만 하니 찐따야'. 어쩌면 좋게 말할 뿐 본심은 다들 세번째 것일 지도 모른다. 특히 소위 '철든 현실주의자'들에게 이러한 고백은 미숙함을 드러내는, (자신과 달리) 미성년에 머물러 있는 태도로 보일 터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모르고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힌 자들은 누구인지. 그러나 이에 대해 말을 꺼내면 꺼낼수록 피상적인 증명 요구에 내몰리는 것은 나이기에, 현실의 나는 다만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다.


그들은 짝사랑은 자아도취에 불과하며, 결국 비참한 끝을 맞게 될 것이라고들 한다. 그럴 것이다. 누군가를 '소유'하지 못해 열병을 앓는 이들에게는.
나는 그를 늘 그리워했지만, 그렇다고 열병 따위를 앓아본 적은 단 하루도 없다. 오히려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긴 시간 동안 마음을 초연히 갈고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피그말리온이 아니다. 나는 그 무엇에도 갈망에 휩싸이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태양과도 같은 존재기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에는 태양이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현상이나 인물을 똑바로 마주하는 대신 온갖 미사여구를 담아 스스로를 그 앞에 제물로 바치고, 오직 자기(부족) 만이 (태양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 여긴다. 그러나 자연 현상은, 일개인은 결코 그 자체로 위대하다 볼 수 없다. 진정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태양이 선사하는 빛으로 인해 성장하는 자연이며, 어떤 인간의 본받을 만한 성정으로 인해 고양되는 나 자신인 것이다. 즉 아름다운 태양이 미미한 나를 감히 바라봐주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태양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내게는 두 이성(혹은 동성)이 서로 교류하고 맞춰가는 통상의 연애보다 이렇게 오롯이 나에게 충실하는 감정이 더 어울린다.


그는 어둡고 음울했던 나에게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햇볕을 쬐어주었다. 진심어린 당신의 따스한 말로 내 마음도 함께 밝고 따뜻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긴 시간 동안 나 또한 소유의 열병은 아니지만 (숭배자적인) 자아도취라는 함정에 빠져있었고, 그렇기에 긴 시간동안 연락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과도한 선망을 걷어내고 당신이란 개인을,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자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렸다. 몇년 전 그가 내게 그토록 열어주고 싶어했던 그 길이.


그렇다.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나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에서야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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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은 아이돌에게 유사연애를 한다는데 셋째문단을 보면 이는 거꾸로 짝사랑-연심이라기보다는 '성숙한 팬심'같은 느낌이네요.
    Jannabi
    사랑의 방식.
    제목 선정이 참 좋네요. 많은 생각을 하고 갑니다.
    메타장판
    짝사랑을 사실 지나치게 오래 하면 짝사랑하는 상태 자체에 매몰되어버린다고들 해요. 짝사랑하는 상태가 고착화되어 놓지 못한다는 것이죠. 저도 상당히 오래(오래 살지 않았지만... 1/5쯤?)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어쩔 때는 내가 이 사람을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삶의 목표라든가 나의 이상향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죄다 때려박아서 만든 괴물한테 끌려다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어요. 갈망하지 않으신다는 부분에서 이런 딜레마를 잘 극복하신 거 같아 부러워요. 결국 '내가 짝사랑하는 그대'가 아니라 '그대'를 바라보고, 그 '그대'를 ... 더 보기
    짝사랑을 사실 지나치게 오래 하면 짝사랑하는 상태 자체에 매몰되어버린다고들 해요. 짝사랑하는 상태가 고착화되어 놓지 못한다는 것이죠. 저도 상당히 오래(오래 살지 않았지만... 1/5쯤?)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어쩔 때는 내가 이 사람을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삶의 목표라든가 나의 이상향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죄다 때려박아서 만든 괴물한테 끌려다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어요. 갈망하지 않으신다는 부분에서 이런 딜레마를 잘 극복하신 거 같아 부러워요. 결국 '내가 짝사랑하는 그대'가 아니라 '그대'를 바라보고, 그 '그대'를 인간적으로 직면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래서 모든 상황이 마무리된 후 꽤 긴 시간이 지나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마다 참 많이 괴로웠던 기억이 나요. 내가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 환상에 그 사람을 끼워맞췄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걸로 넘길 수 있는데, 제가 건너들었던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다 좋아했던 그 모습들이라, 내가 헛된 것들 좇던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났거든요. 글을 읽으면서 그 당시 저를 많이 되돌아보게 되어요. 짝사랑은 제가 행복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거 같아요! '너'를 좋아하는 나가 아니라 너를 좋아하는 '나'. 그렇게 따지면 짝사랑만큼 행복한 사랑도 없지요.
    2
    알료사
    그런 방식의 사랑 저도 많이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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