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8/17 04:09:24
Name   구밀복검
File #1   978_93_5102_490_3.jpg (39.1 KB), Download : 10
Subject   전갈과 개구리


이솝 우화 중에 '전갈과 개구리'라는 우화가 있죠.

전갈이 강을 건너기 위해 개구리에게 승차를 부탁합니다. 개구리는 '얌마 너 독침으로 나 찌를 거 잖아 나 안함'이라고 거부하죠. 그러자 전갈은 '이 시키 빡대가리네 야 강 건너는 도중에 내가 널 찌르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데 내가 그런 짓을 왜함 좀 태워주셈 우야노 예까지 왔는데'라고 설득합니다. 그 말이 타당하다고 여긴 개구리는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하며 전갈을 등에 태우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죠. 그런데 강 중간 즈음에 도달하자 예기치 않게 전갈이 개구리를 독침으로 쏘아버립니다. 개구리는 죽어가면서 '미친 놈아 여기서 날 찌르면 어캄'이라고 따지는데, 전갈의 대답이 걸작이죠.
"I couldn’t help it Mr. Frog. It’s my [character]."


저는 이 이야기가 극작에 있어서 캐릭터의 본질을 지적하는 모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캐릭터, 즉 본능과 인격과 고유성, '원래부터 그런 면'이 없다면, 극의 전개는 모두 사전에 결정됩니다. 각 개인에게 외부 사건과 배경과 타인의 개입을 필터링할 내재적인 자아가 없으니, 자신에게 투입되는대로 산출하고 자극하는대로 반응할 것이고, 그러면 객관적 세계의 작용이 각자의 개성적인 반응에 따라 '굴절'되는 일이 없겠지요. 발단부터 결말까지, 기승부터 전결까지 모든 사건들이 논리정연하게 일자진행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연히 선택과 결단은 사라지고 합리적 소거와 선별만이 남고요. 그리하여 오로지 필연이 지배할 뿐입니다. 모든 사건들이 '프로그래밍'된 대로 진행되겠죠. 마치 실험실에서 완벽하게 통제되는 물리화학적 현상마냥 결과가 원인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도출되는 것이죠. 따라서 극이 시작될 때 이미 극이 끝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고, 서사는 부재하게 됩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1억 마리의 전갈이 1억 마리의 개구리의 등을 타고 강을 건널 것이고, 익사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논리적으로는 그래야 마땅하니까요. 그러니 어떤 이야깃거리도 있을 수가 없지요. 뒤집어 말하면, 논리적으로 해명불가능한 '캐릭터'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기에, 합리적인 인과의 연쇄인 결정론적 세계가 뒤흔들리고 그러면서 서사가 비로소 전개되는 것이죠.

이 점에서 캐릭터가 극에서 가지는 의미는 핀볼에서 '레버'나 '범퍼' 같은 장치들이 수행하는 기능과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장치들이 없다면 볼은 똑같은 궤도로 쏘아 올려져서 똑같은 궤도로 떨어질 것이고 똑같은 타임에 게임은 끝나겠죠.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레버를 걷어올리는 타이밍과 강도를 정확히 통제할 수 없기에, 우리의 손가락은 '원래부터 돼먹지 않았기에', 볼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그것이 게임 양상의 무한함으로 이어지지요.



6
  • 추천은 마이 캐릭터
  • 세상사 모두다
  • 티타임은 좋아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149 문화/예술한국어 교육 논문 관련 설문조사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19 klimp 17/08/22 4890 1
6141 문화/예술브로드웨이와 인종주의 - 흑인 배우가 앙졸라스를 할 때 16 코리몬테아스 17/08/22 7839 7
6119 문화/예술전갈과 개구리 15 구밀복검 17/08/17 8604 6
6057 문화/예술세일러문 뮤지컬 a shooting star light 이야기 4 코리몬테아스 17/08/03 5092 1
5971 문화/예술전인권씨의 표절 의혹에 대한 실망스러운 발언 31 레지엔 17/07/18 6264 2
5782 문화/예술일본의 댄서 코하루 스가와라 4 싸펑피펑 17/06/13 9248 1
5751 문화/예술Shaka, bruh! 14 elanor 17/06/06 4957 7
5666 문화/예술[사진]레닌그라드 광학기기 조합의 카메라(feat.홀가) 13 사슴도치 17/05/18 6535 3
5647 문화/예술예전에 재미있게 봤던 웹툰, '소소한가' 4 벤젠 C6H6 17/05/16 3572 0
5517 문화/예술일본 애니송 스트리밍 : 아니우타 소노다 우미 17/04/25 10740 1
5501 문화/예술[연극 후기] 쉬어매드니스 4 와이 17/04/23 4292 2
5461 문화/예술[사진] Lara Jade와 호빵맨 카메라. 14 사슴도치 17/04/17 5889 3
5416 문화/예술스윗소로우 이야기 11 우롱버블티 17/04/11 4475 5
5274 문화/예술지금까지 써본 카메라 이야기(#02) – Konica-Minolta Dynax 7D 23 *alchemist* 17/03/23 10247 4
5189 문화/예술대통령 탄핵 선고문을 소장용(출력용)으로 편집했습니다. 17 곰곰이 17/03/15 5553 13
5162 문화/예술지금까지 써본 카메라 이야기(#01) - CLE 19 *alchemist* 17/03/12 13125 8
5156 문화/예술배우 마이클 쉐넌이 말하는 베드씬 28 은머리 17/03/12 6552 2
5110 문화/예술필기구 원정대 : 수험생의 천로역정 40 사슴도치 17/03/08 8091 2
5106 문화/예술오늘은 여성의 날입니다. 6 Beer Inside 17/03/08 4162 2
5071 문화/예술대영박물관 습격기 31 기아트윈스 17/03/04 5672 10
4839 문화/예술제가 좋아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들 (약간 19금) 6 ffs 17/02/11 5622 2
4774 문화/예술몇몇 작품들 24 은머리 17/02/05 6235 1
4631 문화/예술중력 따위 거부하는 아트 17 은머리 17/01/16 4450 0
4599 문화/예술[15금] 고대 그리스 남성의 이상적인 모양 19 moira 17/01/11 10923 13
4562 문화/예술[불판] 홍차넷 신년회 정모 138 Toby 17/01/07 7561 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