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3/12 23:33:08
Name   선비
Subject   피스 카페 (2)
- 삼부작으로 마무리짓고 싶습니다...


*피스 카페(1) - https://kongcha.net/?b=3&n=5141


“맥주를 시키더군요?” 내가 말했다.
“네?”
“러시아 사람들은 보드카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요.”
“모든 러시아 사람들이 보드카를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이리나가 말했다.
“물론 저는 좋아하지만요.” 그녀가 보드카 한 잔을 자기 앞으로 가져가면서 말했다. 몸을 뻗는 그녀의 허리선에 눈길이 갔다. 나는 변명이라도 하듯 보드카를 단숨에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몇 해 전 겨울에 바이칼 호에 간 적이 있습니다.”
“겨울이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탔죠.”
“대단히 추울 거예요.” 우리가 지금 바이칼 호에 있기라도 한 듯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독주를 좋아하나 봐요.”
우리는 보드카를 한 잔씩 더 시켰다. 취기가 얼큰하게 올랐다. 그러나 금방 증발할 것 같이 아쉬운 취기였다. 손님들은 이제 모두 자리를 비우고 바에는 바텐더와 우리 둘만이 남았다. 마지막 남은 담배를 비벼 끄자 바텐더가 다가와 이리나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다.
“이제 문을 닫을 시간이래요.” 그녀가 말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였다.

나는 무료한, 표정이 읽히지 않는 바텐더의 큰 손에 현금을 쥐여주었다. 이리나는 취기가 도는지 일어나면서 몸을 조금 휘청했다. 나는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감싸며 익숙한 새벽의 골목으로 나왔다. 언제 개었는지 비는 그쳤고 공기에서는 신선한 흙냄새가 났다. 골목을 돌자 불이 켜져 있는 편의점이 하나 보였다.
“혹시 소주 좋아하십니까?”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소주 이야기를 했다.
“한 번도 마셔보지 못했어요.”
우리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소주와 종이컵, 담배 따위를 샀다. 가게 앞의 테이블에 앉아서 그것들을 뜯으려고 하는데 기침이 나왔다.
“홀라드나(холодно)?” 이리나가 물었다.
“뭐라고요?”
그녀가 웃었다. “저는 추워요.”

정든 복도식 아파트에 들어가 아파트 문을 열었다. 다행히 죽은 쥐는 보이지 않았다. 빨래가 걸린 건조대를 그대로 접어 세탁기 옆에 기대놓고는 침대 옆 작은 탁자에 술을 놓고 식기 건조대로 가 샷 글라스 두 개를 집어왔다.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난방 때문인지 밤이 내렸는데도 방은 더웠다.
“여긴 따뜻하네요.” 다소 풀어진 눈으로 이야기하며 이리나는 겉옷을 벗었다. 코트를 벗는 그녀의 도담한 가슴이 스웨터 위로 솟았다가 이내 옷 속으로 숨었다. 그녀는 머리끈을 풀고는 손으로 머리를 빗어 귀 뒤로 넘겼다.
“중앙난방에 감사하긴 처음이군.”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침대에 걸터앉아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반병 정도 비울 때쯤 이리나가 말했다.
“한국은 처음 와봤지만, 왠지 고향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렇게 싫습니까?”
“하하, 아니요. 그렇지만 여행이 정말 좋은 것도 아니에요. 그렇지만....... 러시아로 돌아가기는 싫어요.”
“게으르시군.”
“그럴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침대에 상체를 눕혔다. 검은 머리칼이 침대 위로 어지러졌다.
“제가 바이칼 호에 여행 갔을 때도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어요. 바이칼 호를 건너던 러시아 백군들처럼 얼어서 호수에 빠지려고 했었죠.”
“왜요?”
“실연당했거든요.” 그녀는 둥근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런데 왜 돌아왔어요.”
“너무 춥더라고요.”
“정말이에요?” 그녀가 킥킥 웃었다.
“물론 거짓말이죠. 그렇지만 정말 추웠습니다.” 나는 소주를 한 잔 더 따라서 마셨다. 병이 벌써 바닥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저도 결국 돌아가게 될까요?” 이리나가 말했다.
“저는 모릅니다.”
“저는 정말 돌아가기 싫어요.” 그녀는 내가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라도 된다는 듯이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누운 채로 내 얼굴을 향해 오른 손을 뻗었다.
“날 잡아 줄래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스웨터 위의 팔을 따라 손을 미끄러뜨리듯 움직여 이리나의 작은 얼굴을 감쌌다.
“그렇게 하죠.”
나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소주 향이 났다. 긴 키스였다.



3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425 7
    14950 스포츠[MLB] 김하성 시즌아웃 김치찌개 24/09/30 113 0
    14949 게임[LOL] 9월 29일 일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9 133 0
    14948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11 + 나루 24/09/28 441 15
    14947 게임[LOL] 9월 28일 토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7 126 0
    14946 게임[LOL] 9월 27일 금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7 160 0
    14945 일상/생각와이프한테 혼났습니다. 3 큐리스 24/09/26 740 0
    14944 게임[LOL] 9월 26일 목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5 164 0
    14943 게임[LOL] 9월 25일 수요일 오늘의 일정 1 발그레 아이네꼬 24/09/25 123 0
    14942 일상/생각마무리를 통해 남기는 내 삶의 흔적 kaestro 24/09/25 560 2
    14941 기타2002년에도 홍명보는 지금과 같았다? 4 Groot 24/09/24 672 1
    14940 일상/생각 귤을 익혀 묵는 세가지 방법 11 발그레 아이네꼬 24/09/24 558 6
    14939 일상/생각문득 리더십에 대해 드는 생각 13 JJA 24/09/24 626 1
    14938 일상/생각딸내미가 그려준 가족툰(?) 입니다~~ 22 큐리스 24/09/24 588 14
    14937 오프모임아지트 멤버 모집등의 건 26 김비버 24/09/23 1228 21
    14936 문화/예술눈마새의 '다섯번째 선민종족'은 작중에 이미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6 당근매니아 24/09/22 580 0
    14935 육아/가정패밀리카에 대한 생각의 흐름(1)-국산차 중심 28 방사능홍차 24/09/21 916 0
    14934 도서/문학이영훈 『한국경제사 1,2』 서평 - 식근론과 뉴라이트 핵심 이영훈의 의의와 한계 6 카르스 24/09/19 834 15
    14932 일상/생각와이프한테 충격적인 멘트를 들었네요 ㅎㅎ 9 큐리스 24/09/19 1417 5
    14931 일상/생각추석 연휴를 마치며 쓰는 회고록 4 비사금 24/09/18 593 9
    14930 방송/연예(불판)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감상 나누기 68 호빵맨 24/09/18 1313 0
    14929 음악[팝송] 혼네 새 앨범 "OUCH" 김치찌개 24/09/18 190 1
    14928 일상/생각급발진 무서워요 1 후니112 24/09/17 563 0
    14927 일상/생각오늘은 다이어트를 1 후니112 24/09/16 358 0
    14926 게임세키로의 메트로배니아적 해석 - 나인 솔즈 kaestro 24/09/15 311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