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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8/11 00:11:00
Name   선비
Subject   [36주차] 늙지 않을 약속
주제
피서지에서 생긴 일

권장과제
필사

합평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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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평 받고 싶은 부분
글은 짜임새 있는지, 표현은 알맞은지, 올해는 왜이렇게 더운지...

하고싶은 말
대류...... 조각글이 최고다. 홍차넷에서 본문 폭을 조절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엉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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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해 전의 인도여행에서 겪은 이야기다. 자이살메르에서 사막 낙타 사파리 투어를 할 때였다. 낙타를 타고 2박을 사막에서 야영하는 코스였는데, 우리 팀에는 지금은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 낙타 몰이꾼 아저씨와 폴과 누리아라는 카탈루냐에서 온 커플, 그리고 J라는 동갑의 한국인 여자가 있었다.

낙타 등에 올라타고 고작 몇 시간 후에 우리는 낙타 사파리는 낙타를 타는 게 아니라 낙타를 데리고 걷는 투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흔들리는 안장 위로 아픔이 기어오르기 시작하면서 일행은 하나 둘 낙타에서 내렸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까지 낙타 등위에 있기를 고집했는데, 아마 낙타 사파리는 낙타로 완주해야 한다는 스물한 살 특유의 고집이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가랑이가 너무 아파 며칠 동안 고생하긴 했지만.

낙타 몰이꾼 아저씨의 일가는 조상 대대로 사막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그는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익숙한 솜씨로 마른 장작들을 조금씩 모아 불판 위에다 알루 커리와 짜파티(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식사 메뉴였다)를 뚝딱 만들어내곤 했다. 황량한 사막에서 그건 일류 요리사의 정찬 못지않았다. 밤이 오면 모닥불을 모여 앉아 우리는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폴의 하모니카 연주 솜씨는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사막의 별 밤 아래에서는 누구나 관대해지기 마련이다.

그때에는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나는 주로 J와 이야기했다. J는 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우울한 청년이었던 나와 달리 사회경험도 많고, 영어에도 능숙했다. 그녀와 나의 공통점은 수업을 잘 안 나간다는 점뿐이었다. 첫 번째 밤에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담배를 말아서 나에게 건네며 물었다.

"혹시, 대마 해요?"

대마라고? 말아 피우는 담배 이름인가? 나는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소한 냄새가 나는 말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날 밤 태어나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나는 나의 과장 섞인 고등학교 생활 이야기와 수능 일주일 전 가출했던 이야기, 그리고 과 OT 때 응급실에 실려 갔던 이야기를 무슨 영웅담처럼 이야기했다. 그녀는 레게 머리를 했다가 삭발한 사연, 버스 정류장의 신문지를 깐 가판에서 등에 타투를 받은 이야기, 학교를 휴학하고 아르바이트와 여행을 반복하는 삶에 대해 말했다.

"학교를 쉬고 여행만 다니면 미래가 불안하진 않아?" 내가 물었다.

"미래라고? 나는 절대로 늙지는 않을 거야." J가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로 대답했다.

"누구나 나이가 들지 않나?"

"육체의 나이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마찬가지 이야기야."

"그러니까 난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살다 죽을 거야."

그러니까 사막의 밤에서 대마를 나눠피운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우리는 꽤나 가까워졌던 것 같다. 술잔과 온기와 서로의 속마음을 나누며.

마지막 날 우리는 각자의 숙소로 흩어졌다. 그때만 해도 아직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이메일 주소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우다이뿌르로 J는 디우로 향했으므로 우리는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너랑은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나게 될 거야." 그녀는 이메일 주소 대신, 류시화 책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자신 있는 어투로 남기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가 흘렀다. 그녀의 말이 이루어진 것은 고아행 기차 안에서였다. 나는 슬리퍼 칸의 좁은 3층짜리 침대 겸 의자 위에서 털털거리는 선풍기 소리를 들으며 불안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J를 봤다. 우리는 작은 나무 욕조에서 함께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등 뒤에 새긴 작은 나뭇잎 모양 타투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쁘지?"

"응."

"나뭇잎은 이쁘지만, 잎이 떨어지면 쓰레기가 될 뿐이야."

"그건 좀 슬픈데."

"나는 낙엽이 되고 싶지 않아."

그러나 털털거리는 선풍기 바람에 그녀의 등에 있던 나뭇잎이 후드득거리면서 떨어졌다. 바람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 등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나 지갑이 있는 주머니를 더듬었다. 주머니도 지갑도 제자리에 있었다. 여전히 누군가 등을 두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밑을 내려다보니 J가 까치발을 들고 서 있었다.

"안녕, 인연?"인연. 아니, 연인이었어도 좋았으리라.

"기차표가 매진돼 버려서 그냥 올라탔어.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고아에서 보내야지." J는 기착지에서 올라탄 모양이었다.

"네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녀는 잠깐 미간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네가 꾸는 꿈이면 분명 야한 꿈이었겠지."


성수기의 고아는 소문대로 비쌌다. 우리는 조금 괜찮은 방 하나를 골라 같이 묵기로 했다. 판자와 신문지로 만든 침대였지만, 루프탑에 침낭을 펴고 모기에 시달리는 것보다야 훨씬 만족스러웠다. 그날 밤 잠든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녀의 등에 있다는 타투가 정말 꿈에서처럼 나뭇잎 모양일 거라는 바보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냥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나는 J의 벗은 등에서 그걸 실제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오토바이를 빌리러 나가고 그녀는 손재주가 없는 나를 대신해서 카페에서 담배를 말았다. 느긋한 시절이었다. 우리는 낮이면 오토바이를 같이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돌다가, 밤이 되면 이야기와 대마를 나눠 피우고 해변 클럽에서 술을 마셨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그녀가 고아를 떠날 날이 다가왔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등에 있을 나뭇잎이 궁금했다.

J가 떠나기 전날 우리는 여행 중인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한국인 그룹을 만나 저녁을 얻어먹었다. 10대에서 40대까지 모두 여행지에서 만나 같이 다니는 유쾌한 그룹이었다. 우리는 밤늦게까지 버번 콕을 만들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가장 연장자인 40대 아주머니가 J에게 물었다.

"근데, 자기네 둘은 연인이에요?"

"연인은요… 그냥 여행지 인연이죠." J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맘때쯤 나는 인연을 믿고 있었다.

그룹의 한국인들과 우리는 밤늦게까지 버번 콕을 만들어 마시고, 노래(애니메이션 주제가에서 민중가요까지!)를 함께 불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돼서야 우리는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녀를 오토바이 뒷좌석에 태우고 숙소로 향했다. 조금 비틀거렸고, 몇 마린가의 소를 칠 뻔했지만, 숙소에는 무사히 도착했다. 우리는 지나치게 취해 있었고, 바로 그 이유로 그녀가 말아놓은 대마를 나눠 피웠다.  

지금도 나는 그날 밤 숙소에 돌아와 J와 나눈 이야기가 정말 있었던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알코올과 대마가 만들어 낸 꿈이었던 것도 같다.

그날, 내뿜은 담배 연기로 가득 찬 방에서, 나는 그녀의 등에 새겨진 나뭇잎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던 것 같다. 침묵이 흘렀고, 나는 침묵이 싫고, J가 옷을 벗었고, 내가 그날따라 가녀려 보이던 그녀의 등 위에서 본 것은…… 나뭇잎이 아니었다. 그녀가 조금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타투 이야긴 거짓말이야…… 그때 새겼던 건 헤나였어."

그녀의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에 나는 평소처럼 습관인양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다녔어. 그냥 뻔한 방황을 하고 싶진 않았어. 그렇게 늙고 싶지 않았어. 알바로 모은 돈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 인도로 온 거야. 그렇지만 정말로, 다른 삶을 시작하는 일은 할 수 없었어. 겁이 났어…"

그녀의 등이 작게 떨렸다. J가 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돌아가긴 싫지만, 돌아가겠지… 다들 그렇게 사는 거니까." J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한국에 돌아간다 해도......." 나는 잠시 멈추다 다시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늙지 않을 거야."

"정말이야?" 그녀가 물었다.

"그럴걸."

"절대로?"

"절대."

"약속해줘."

"응, 약속할게."

다음날 정오가 지나서야 나는 침대에서 깨어났다. 속옷 차림이었다. 입안에서 까끌까끌한 느낌이 들었다. J는 온대 간 데 보이지 않았다.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말아진 담배 하나와 종이쪽지 하나가 보였다. 쪽지에는 J의 예의 자신감이 담긴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안녕, 우리에게 인연이 있으면 또 보게 될 거야! 그때까지.'


인연이 없었는지 어쨌는지 그 후 J를 본 일은 없다. 나는 얼마 후 집에 돌아왔고, 군대를 다녀오고, 몇해 후에는 어찌어찌 기대하지 않은 졸업장도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몇차례의 이력서 끝에 붙은 회사에서 신입 사원으로 겨우 회사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중이다. 그 후로도 몇 번 인도에 갔지만, J의 소식을 접하진 못했다.

요즘도 나는 종종 J와의 마지막 밤을 떠올린다. 그것은 아마도 취중에 꿨던 꿈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마 지금도 그때처럼 어딘가를 떠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처럼 술과 함께 밤이 깊어지는 날이면, 나는 그녀의 등에 새겨져 있을 타투를 그려보곤 한다. 그것은 꼭 나뭇잎 모양일 필요는 없지만, 아마 나뭇잎 모양일 것이다. 만약 J의 말대로 인연이란 게 있다면 언젠간 정말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까진 늙지 않을 생각이다. 혹시, 우리가 벌써 늙어버린 게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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