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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2/13 23:19:48
Name   nickyo
Subject   정체성의 정치
제게 있어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하는 두 화두가 있다면 노동자 중심주의와 여성주의일 것입니다. 물론 제가 남성이다 보니 후자보다 전자에 좀 더 무게감을 두는 (그리고 취준생의 입장에서도) 이기적인 사람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오늘 이야기 해 보고 싶은 것은 '정체성의 정치'입니다. 정체성의 정치란, 내가 가진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발화하고, 드러냄으로서 나의 정체성이 갖는 특질들을 사회적 공론의 장에 놓고 정치적 주장을 하는 과정입니다. '노동자'라는 정체성과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1800년대 마르크스와 1900년대 초기 여성참정권 운동을 필두로 그 스스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하고 규명하며 정치적 개념으로서 확립하기에 이릅니다. 현대의 포스트 주의보다는 모던한 방식의 개념화이며, 여전히 유효한 부분이 상당히 많기에 일선 정치에서 많이 활용됩니다. 가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전 대표,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안철수 후보, 박근혜 대통령 등은 선거에서 '정체성'으로 크게 이득을 보아 온 사람들입니다. 인권/민주투사 출신, 기업가 출신, 여성..

그러나 정체성은 다양한 이면을 갖고 있고, 그들의 행동과 위치는 중층적 결정들과 여러가지 심급을 동시에 지닌다는 점이 1960~70년대 이후 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강조됩니다. 최종 심급에 있는 어떠한 모순들이 꼭 그 정체성과 일치하여 그대로 내/외면화 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개인의 정체성은 수많은 모순들의 영역과 이어져있고, 따라서 우리는 정체성의 정치와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얼마 전 유행했던 버니 샌더스가 백인 여성의 '여성'이라 투표하는 것에 일침을 날린 것이 바로 그 정체성의 정치죠.


그럼 우선 여성주의에 대한 자크 데리다의 입장부터 읽는 것으로 시작해 보죠. 페미니스트 철학자 페넬로페 도이치의 하우 투 리드 데리다에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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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상황 속에서의 차이에 민감한 철학자이지만, 사회적 행동주의(여성주의, 인종, 민족, 문화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위 정체성의 정치에 대해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그의 목표는 정체성이라는 이상들을 고정시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들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 적이 있다. "나는 여성운동을 포함하여 모든 곳에서 발전하고 있는, 소수자들의 나르시시즘을 향하는 경향이 있는 이러한 운동에 저항한다."

데리다가 어떤 형태의 여성주의에 대해 양가적 태도를 보이고는 있지만, 그의 저작은 상당 부분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대립을 해체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거의 초기 저작에서부터 데리다는 성, 성적 차이, 혈통, 여성들이 어떻게 철학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지에,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가 "이상하게도 '여성주의적' 목소리"를 갖고 있다고 묘사될 정도로 흥미가 있었다. 어떤 초기 저작에서 차연은 성적 구별과 지연을 위한 그리고 성적 분화의 끊임없는 유희를 위한 용어가 되었는데, 그것은 성적 정체성과 완전히 남성적인 남자들 또는 완전히 여성적인 여자들의 확실성을 의문에 부치고 있었다. 누군가의 남성다움 또는 여성다움은 명확한 것인가? 그것은 생물학, 행동, 성차(sexuality), 혈통 등을 위한 복잡한 의미들의 네트워크의 문제다. 우리는 데리다가 이러한 질문들을 갖고 유희하면서, 자신을 남성이면서 남성처럼 쓰게 하는 그 일관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은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일부가 해체주의적 여성주의에서 상당한 잠재력을 보았던 반면에, 일부는 데리다에게서 나타나는 여성주의적 숙고에 대한 전유를 인식하고서 매우 신랄한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데리다는 두 개의 논쟁적인 출판물에서, 제도화되고 있는 여성주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여성주의는 진보에 대한 확신과 역사가 덜 여성주의적인 과거에서 더 여성주의적인 미래를 향해 순조롭게 움직이고 있다는 가정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제안들은 성 연구와 여성주의적 목표들에 대한 그의 긍정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몇몇 해체주의적 독해를 통해서 남성성과 결합된 권력과 특권 그리고 권위가 '중심적'이거나 '기원적'인 것이 되어왔고, 여성성은 역사적으로 남성성에 대해 열등한 것, 파생물,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는 의미에서, 고전철학의 소위 남근 중심주의를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데리다의 기획은 여성주의적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근 중심적 전통에서 비판하고 있는 이상화와 평가절하로부터 여성주의 또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 데리다의 평가절하와 이상화의 가능한 현존에 대한 조율을 여성주의로까지 확장하는 것을 반여성주의적인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어떤 여성주의도 여성주의를 해체하기 위한 동시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여성주의에 대한 건설적인 기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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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경험해 본 바, 적어도 20대 전후를 휩쓰는 여성주의의 색채는 메갈리안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들은 페미니즘이 단일화 되어있지 않다고 하고, 각자의 방식이 다르다곤 하지만 적어도 우에노 치즈코를 핵심적인 근거의 토대로 사용하고 추상화와 정체성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만들어 나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진보적 입장을 취한다는 여성주의 사람들의 오프라인 토론회 소수를 겪어본 입장에서는 활동 단체가 다를 뿐 메갈리아의 주장에 상당부분 공감합니다. 물론 우리는 메갈리아랑 워마드를 이제 분리할 필요가 있고, 워마드의 활동이 메갈리아와 내적 연결성이 있는지는 제가 조직 외부의 인간이라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메갈리아로 시작했던 여성주의 정체성의 갈등, 확산 그로인한 선명성의 획득과 동일한 정체성 주체들의 해방과 같은 것들이 워마드와는 어느정도 접점이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오프라인 토론회 등에서도 워마드는 거의 언급을 안하거나 약간 선을 긋는 모습을 보이고요. 뭐 이런건 부차적인 이야기구요. 위 이야기와 엮어서 사실 중요하게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면..


현재의 여성주의 운동과 과거의 노동자운동이 상당부분 겹쳐보인다는 것입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후 95년 민주노조 설립까지 노동자들은 지속적인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민주정의 시작이었다던 노태우부터 김영삼, 김대중, 심지어 노무현까지 노동자들은 언제나 2등시민으로서 국가에서 가장 먼저 희생시켜야 했던 정체성이었죠. 노동자, 농민이 지나온 90년대와 00년대는 그야말로 혼란과 참혹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국제경기의 불황과 국내경기의 침체가 겹치며 외적 조건이 컸던 부분도 있지만, 내적 조건 역시 악화 일변도를 향했죠. 노동자 탄압과 보수화된 국가주의적/권위주의적 정권(현대 정치사 학자들 중에는 김대중까지 권위주의적 정부로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김영삼-김대중까지가 개인 권위에 의존한 행정부라는 측면에서요)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노동체제의 도입을 시작했고 국가 전반에 걸친 교육 역시 그에 맞춰 이동했습니다. 자유-능력-책임이라는 세 가지 단어가 개인을 파편적으로 만들고 있었고, 더 이상 사람들은 사회적/공동체적 갈등해결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죠. 불황과 혼란은 이것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고 사람들은 적자생존의 논리에 깊게 빠져들었습니다. 더할나위 없는 자본주의적 인간들이 공동체의 구성원을 가득 채우게 된 셈이죠.


노동조합은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노동자'라는 1900년대 초중반의 기호로서 한국 사회에 존재하게 됩니다. 즉, 착취당하는 약자이자 정의를 빼앗긴, 그 기호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이 되고 정체성 자체만으로도 존립할 수 있는 사회적 호명을 지닌 집단이 된 것이죠. 그러나 우리나라의 노동자 대투쟁이후 상황은 서구사회의 노동자 조직 변화처럼 느리지 않았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노동자와 농민은 해체당하기 시작합니다. 정리해고법과 비정규직 보호법이 통과되고, IT와 지식노동자 중심으로 산업의 재편이 이뤄지며 제조/서비스 노동자와 화이트컬러 노동자, 젊고 영민한 지식/IT 노동자들간의 갈등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조합주의와 노동자라는 정체성에 편입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노동유연화된 시장을 적극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이에 매료되었습니다.


물론 노동조합이 이에 저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태동하고, 국제적인 노동조합의 변화들을 따라가거나 배우는 속도보다 국내 환경의 변화는 훨씬 급진적이었죠. 노동자들은 저항하는 것마저 벅찬 상태였고, 게다가 집회와 시위의 변화양태를 따라가고 반성하며 대중과 괴리되는 것을 해소시키는 것조차 버거워했습니다. 이는 IMF전후까지 확산된 노동조합들이 자리를 잡고 역량을 만들 시간조차 없이 노동탄압이 급진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죠. 그게 악의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국내 경제 자체가 위기였던건 사실이니까요. 어쨌든, 이러한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을 감안하며 지나온 지금의 노동조합의 위기는 이러한 외적 부분이 아닌 내적 문제를 당면하고 있습니다. 바로 젊은 신규조합원들의 부재죠.


노동조합은 근본적으로, 회사를 다니는 노동자만이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 대투쟁 이후 9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노동조합의 확대는 00년대 이후로 하향세를 걷기 시작했고, 이제는 핵심 조합원들의 근속연한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중의 노동조합에 대한 혐오감은 여전히 심각하며, 노동자-농민을 대변하는 정당이나 기구를 기대하기도 힘듭니다. 심지어 우리의 상황이 호황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외적 조건'이 불리한 상태임은 말할필요도 없겠죠.


결국 노동자-농민으로 귀결되던 정체성의 정치, 노동자이면 노동조합을. 의 약빨은 수명을 다했습니다. 이미 대중의 의식속에서 노동조합은 대안이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론 노동조합이 갖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대안을 잉태하는 토대'로서의 위치는 언제나 중요하게 사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노동조합이 비판받지 않고, 더 과감하고 힘있는 혁신과 개혁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정말 빠르게 무너져 버릴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바로 이것이 현재 20대들이 페이스북과 오프라인에서 진보와 여성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정확히 일치하는 문제들입니다. '여성'이라는 호명으로, 그것이 정의라는 것으로. 그것에 반하는 것은 남성, 혹은 다른 주체들이 알아서 여성주의적으로 활동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 하는것은 노동자가 그저 노동자이기에, 로 활동했던 것들과 일치하기 때문이죠.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유산계급, 또 관리자로 부역하는 계급들에 대해 '실제적이고 과학적으로' 적대적이며 그들이 자신들을 탄압한다는 것으로 강경투쟁의 노선을 가졌던 것이 어떠한 성공과 댓가가 있었는지는 여러 사람이 알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는 그것에 대한 비판 역시 받아들여야 했다는 것이지요.


여전히 사실로서 남성과 남성적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탄압하거나 여성들의 삶의 조건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대해 자기중심적, 혹은 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정체성의 정치를 통해 해방을 느끼고 갈등을 부추겨 선명성을 획득하고 내적 동력을 얻는 과정이 그리 장기적이지 않다는 것 역시 인정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시작인데 왜 이렇게 못살게구냐, 좀 관용적으로 바라보다보면 우리도 자정할거고 다양한 방향들이 있다. 당사자 중심주의 아니냐.'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역시, 동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운동이 이제 더 이상 아날로그가 아니라는 겁니다. 디지털 사회는 곧 박제와 재생산의 사회이며.. 그들이 정체성의 비판을 시작하고 정체성을 해체하는 과정을 동시에 진행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정체성의 정치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악의로서 재생산 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 구조적 상황에서는 예전만큼의 관용조차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소수자 운동은 결국 대중에게 인정받고 대중이 소수자의 위치가 옳음을 납득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PC 역시 하나의 정체성으로서 탄압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 의식이 단순히 '계몽이 덜 된' 하위의식이라고 규정하며 그저 탄압의 재생산으로 바라보는 것은 쁘띠를 공격의 대상으로만 이해했던 고전적 맑스주의자들의 실수를 반복하는 셈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맑스주의 연구자인 윤소영의 주장처럼 현대의 최종심급 중에서 노동자와 여성은 가장 깊은 곳의 모순을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이 대안체제를 잉태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의 이상성과 대안으로의 방향성을 긍정하고 장기적이고 이상적인 비전을 지녀야 한다는 것 역시 동의합니다. 그러나 현재적 시점에서 노동유연화와 신자유주의에 고통받는 노동자들, 이를테면 스펙이 모자라고 빈곤한 가정을 벗어나지 못하며 비정규직을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이나 사양산업 속에서 자영업을 떠돌다 절망을 맛보는 사람들을 노동자들이 정체성의 정치를 벗겨내지 못하고 함께 하기 힘들어 하며 대중과 괴리된 것처럼, (그리고 민주노조가 이 해결을 위해 아주 오랜 시간동안 고역을 치르며 내홍을 겪지만 여전히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처럼) 여성주의 역시 여성적 해방과 주체성의 발현과 동시에 고통받는 여성들의 실제적 순간들을 어떻게 해소하고 그 해소의 과정들이 제도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대중을 납득시킬 수 있을것인지에 대한 비판에 열려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정체성의 정치를 해소하고 해체함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동력을 얻는 방향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여성주의와 노동자에 국한된 이 '정체성의 정치'에 대한 얘기가 앞으로 있을 정세에서도 판단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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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험기간 가외노동은 춫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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