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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12/02 01:29:06 |
Name | 제주감귤 |
Subject | 오래된 인형 (시) |
볏짚으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벌어 주지 않아도 그럭저럭 먹고 사는 것 같아서 한동안은 오래 알던 친구인 것처럼 잊고 살았는데 어느 날 그 친구를 서랍에서 꺼내봤을 때 눈코입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눈과 코와 입도 없는데 숨은 어떻게 쉬는 건지 숨을 쉬지 못하는데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볏짚으로 만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내가 왜 눈코입이 없는 사람을 만들었는지도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친구는 볏짚으로 만든 사람 같았습니다. 사랑은 하니 안부를 걱정해주거나 나의 말에 맞장구 쳐주는 일에는 서툰 것 같았지만 남에게는 아주 조용한 관심을 나눠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그가 어느 날 서랍에 놓아둔 가벼운 인형처럼 우연히 발견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인형처럼 불에 잘 탈 수 있다는 사실마저도 어째서 나는 눈코입이 없는 나의 오래된 인형을 앞에 두고 눈코입이 달린 또 다른 인연을 생각하게 되는 걸까 왜 아주 오래된 인연마저도 눈코입이라는 가면을 쓰고 다시 떠오르고 마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하나뿐인 인형에 이 이상한 가면을 씌워주고 싶어졌습니다 간밤의 안부가 궁금한 나의 인형에 눈 덩어리같이 거추장스러운 보풀같이 그의 생전에는 오직 하나뿐일 눈과 코와 입을 붙여보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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