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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5/28 19:44:38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단편] 인필드 플라이Infield Fly(1)




/overrun

 나는 연신 눈만 껌벅였다. 반사적으로 탁자 위를 더듬어 휴대전화를 들었다. 화면을 켰지만 눈
이 아직 초점을 맞추기 버거워했다. 취기는 아직도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
지 않아 금방이라도 풀썩 꺾일 듯 했다. 머릿속은 마냥 혼란스러웠다.

 12월 8일 늦은 아침이었다. 어젯밤 위스키에 진탕 절여진 뒤 스며들 듯 들어선 모텔 방 한 가운
데, 내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한손에 리모콘을 반대편엔 휴대전화를 든 채였고, 은은할 뻔도 하다
가 촌스러움에 머문 간접 조명이 방 안을 밝혔다. 커튼이 굳건한 탓에 날씨는 알 수 없었다. 실은
여기가 정확히 시내 어디 즈음인지도 명확치 않았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5초 정도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벌거벗은 채였고 방 한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
한 욕조도 사라지지 않았다. 간밤에 흘린 체액은 사타구니에 말라붙어 불쾌한 촉감을 자아냈다.
내 발 앞서 늘어져 있는 시체도 그대로였다. 널브러진 유진의 오른손엔 내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약액은 남아있지 않았는데, 그 탓에 그 알몸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일단 경찰에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래저래 계획대로는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숙
취가 깊고 오랠 모양이었다.


/passed ball

 캐주얼 자켓 단추를 잠그고 코트를 걸치는 찰나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경찰 일단이었다. 박력
만 치면 문짝을 부수기라도 할 기세였지만, 실은 내가 겉옷을 걸치기 전에 이미 열어놓은 문을 가
볍게 당겨 열고 들어왔다. 나는 가만히 두 손을 들며 가죽 장갑을 마저 꼈다. 경찰 한 명이 날 붙
잡아 이끄는 동안, 나머지는 사진을 찍고 테이프를 치고 현장을 살피느라 분주했다. 내가 원하는
건 괜한 오해를 사지 않는 것 하나 뿐이었다. 내 옷과 전화를 제외한 기물엔 손도 대지 않았고, 그
건 유진이 뒤진 게 틀림없는 내 가방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명이 켜지지 않은 어둠 속에서 화장실
을 찾다가 유진의 발을 걷어차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물감은 꽤나 생소한
것이었다.

 내 팔을 잡고 이끄는 형사는 남색 파커를 입은 채였다. 소매 부분이 낡아 있었는데 그건 강퍅한
턱 선에 듬성이는 수염과 곧잘 어울렸다. 나는 팔에 잠시 힘을 주고 버텼다. 근육질과는 거리가
먼 몸뚱이였지만 형사의 주의를 끌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나를 돌아보는 형사에게 눈빛을 보내
고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방 안을 훑어보았다. 어제 문을 열고 들어서던 기억이 어렴풋이 스쳤
다. 멈춰 선 내 눈에 유진의 육신이 그야말로 적나라했다. 유진은 날 등진 채 옆으로 누워있었고
고개는 천장을 향해 살짝 돌아있었다. 입구 쪽에선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
등을 보았다. 10년의 시간은 턱선 뿐만 아니라 허리 등지에도 자리를 잡아 눌러 앉은 듯 했다. 이
제 전성기가 지난 여자의 육체는 서서히 무너지는 와중이었고 파리한 피부색이 둔해진 몸의 굴곡
을 강조했다. 팔다리는 기억 속처럼 나긋하지 못했다. 언뜻 보이는 눈꼬리의 화장이 짙었다. 커튼
이 걷혔다. 창은 크지 않았다. 그 사이로 새어든 햇살이 반지에 비쳐 반짝였다. 그러한 색조 화장
은 생경했다. 서글픈 일이다. 지금의 나는 유진이 내 등에 손톱자국을 남기던 어젯밤보다도 분명
히 그 몸뚱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건 여자의 모습이 내 머릿속  ㅡ 기억 속과 현실 사이
에서 괴리하고 있단 걸 의미하는 탓에 서글펐다. 밤과 어둠의 세례도 받지 못하고 젊음의 향기도
어느샌가 빠져 나간 채 숨을 멈춘 이 개체는, 내가 애증했던 동물인 동시에 아니게 된 것이다.

 생명의 윤기가 바닥에 스며들어 버린 순간부터 단백질은 무너져 변성을 시작한다. 문득 두개
골이 대뇌를 조여 오는 듯 아팠다. 나는 내가 옷을 입는 동안 줄곧 유진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음
을 깨달았다. 입에 담은 것도 없건만 소태라도 문 것처럼 참을 수 없었다.

 ㅡ갑시다.

 형사는 때마침 내 팔을 잡아끌었다. 무너질 것 같은 걸음으로 문지방을 넘는데 내 눈은 삭아가
는 살덩이에 붙박혀 있었다. 그 시선이 벽에 가로 막힌 후에도 그랬다. 복도 꼴은 우스웠다. 경찰
은 탐문하려 했고 그 대상들은 한 시라도 바삐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모텔 주인만 폭격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멍했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이 발소리를 먹었다. 내 구두는 소리 없이 바닥을
핥았다. 엘리베이터는 쉼 없이 오르내렸고 나와 형사는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야 했다. 엘리베이
터 안은 반투명 거울을 둘러 쳐 밝고 화사했는데, 한켠엔 모텔키를 반납하는 아크릴함이 조잡했
다. 바닥은 복도와 마찬가지로 붉은 카펫이었다. 붉은 빛 위로 지나가는 검은 색 물결무늬가 현란
했다. 바라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왈칵 일었다. 나는 그 위에 그대로 구토했다.


/one point relief

 ㅡ그래서 이유진 씨하고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죠.

 질문을 듣고 나는 그 문장을 혼자 조용히 다시 씹어 음미했다. 형사는 나에게 물었지만 나는 다
시 나에게 물어야 비로소 대답이 가능할 듯 했다. 형사과는 몇 번 들러본 적이 있었다. 재작년 승
부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보이는 주변 풍경은 조금 낡은 축에 드는 보통 사무실과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출입구에 전자식
자물쇠가 달린 철창문이 특이할 뿐이다. 일렬로 늘어선 책상의 한쪽은 경찰들을 위한 공간이었
고, 나머지 한쪽은 방문객들을 위한 것이었다. 플라스틱 의자는 기댈 곳도 팔걸이도 없어 불편했
다. 호프집 야외 테이블에 쓸 법한 의자였다. 형사는 모니터와 나를 번갈아 보며 타자를 쳤는데,
편안히 키보드에 손을 올린 형사와 달리 나는 손을 둘 곳이 없었다. 앞으로 기대기에는 책상의 높
이가 애매했다. 엉거주춤한 채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유진과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
는 것인가. 아니, 어떻게 되어 있었던 것인가. 한마디로 대답할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정의
는 매번 실패해온 작업이었다. 새삼스레 돌이켜 보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명확한 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그럼에도 늘 되새겨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간에.

 비도 눈도 아닌 모호한 것이 떨어지던 날이었다. 아무리 들여다보고 있어도 규정집은 머릿속
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실제 눈앞에서는 직관으로 명확한 것들이, 줄글로 옮겨놓은 종이 위에
선 명료하지 못했다. 문장이 말하는 것을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옮겼다가, 그걸 다시 판단하여 문
장으로 엮어내는 건 고단한 작업이었다. 읽어 내려가던 문자열이 한번 튕겨나가자 그 뒤로는 계
속 숨이 가빴다.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산책이나 나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창밖을 보
자 이내 그런 마음은 사그러들었다. 유리창에 맞닿은 수분 중 어떤 것은 창틀에 쌓이고, 어떤 것
은 창문에 치덕치덕 붙고, 어떤 것은 녹은 채 흘러내렸다. 그 기준은 알 수 없었다. 눈이라면 맞
고, 비라면 우산을 받칠 것인데 어느 쪽을 선택하기에도 만족스럽지 않은 날씨였다. 때문에 방 안
에서 해결을 보기로 결정했다. 그 순간 옆방에서 묘한 소음이 들려왔다.

 여느 고시원들이 그렇듯 여기도 방음은 그다지 좋은 편이 못 되었다.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가
괴로울 때면 인이어형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거슬리는 소리의 종류는 다양했다. 크
게 튼 음악이나 드라마부터 시작해서 그 좁은 방에서 술판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침
대가 삐걱거리는 소리 위로 격한 신음이 얹어 오는 때도 있었다. 어떤 것이나 불쾌하기는 마찬가
지였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것은 그리 흔하게 들어보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는 문과 벽을 타고
스멀스멀 기듯이 흘러들어왔다. 처음에는 금속성의 까득대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마 열쇠 구
멍을 후비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소리가 멎었다가, 이번엔 거칠게 문고리를 돌려보는 소리가 들
렸다. 그 또한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었는지 이내 잠잠해졌다. 두 차례 무언가를 문에 부딪히는 소
리가 다시 들렸고, 그 다음은 망치질을 하는 소리였다. 나는 거기까지 듣다 말고 뛰쳐나갔다. 빈
집털이범을 상대할 준비는 나름으로 되어있었다. 한손엔 야구방망이를 들고, 허리춤엔 칼집에
넣은 과도를 든 채였다. 애초에 덩치는 큰 편이었다. 방문을 벌컥 열고 소리가 들려온 옆방 쪽으
로 눈을 부라렸다. 기선제압은 언제나 중요한 법이니까.

 다만 거머쥐고 나간 배트와 과도를 쓸 일은 없었다. 나보다 머리 한 개 반은 작은 여자가 멀뚱
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밖을 뚫고 왔는지 흠뻑 젖은 채였다. 오른손엔 어울리지
않는 망치가 들려있고 복도 바닥엔 동네마트 로고가 박힌 비닐봉지가 늘어져 있었다. 봉지 안으
로 얼핏 김치 봉지와 고기 덩어리가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채로도 여자의 손은 물 흐르듯 움직여
서 방문은 스르르 열렸다.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서있는 사이, 여자는 짐을 주섬주섬 챙겨 방
안으로 사라졌다. 기억컨대 분명 3층은 남성용 층이었다. 옆방 남자는 늘 조용해서 사생활을 알
수 없는 자였다. 나는 혼자 우두커니 남겨져서, 도대체 그 앞뒤를 알 수 없었다.

 나는 5개월 뒤에 그 이상한 여자와 말을 트고, 그로부터 다시 8년 11개월 뒤에는 그 사체의 최
초 발견자가 되는데 이걸 무어라고 해야 하는지는 그날만큼이나 모호한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
와 마주한 형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역시 알 수가 없었다. 습관적으로 자세를 바꾸며 나는
가까스로 말했다.

 ㅡ그러게요. 뭐였을까요.

 형사는 날 마치 썩어가는 고양이 시체 보듯 했다.


/head hunter

 상원은 유난히 인상이 옅은 남자였다. 인상보다는 존재감 자체가 옅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런지도 모른다. 처음 대면하자마자 몇 명의 얼굴이 겹쳐보였는데, 그 중 이름이 기억나는 얼굴은
없었다. 교실 뒷켠에서 조용히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아이들은 반에 한둘 정도 꼭 있었다. 졸업
앨범을 훑다가 그제야 문득 기억나는 그런 류의 인물들. 아니 비단 지금에 이르러서가 아니라, 매
일같이 공간을 공유하던 그 당시에도 종종 이름을 까먹게 되는 이들이었다. 상원은 그런 얼굴들
을 하나로 모아 조물거린 뒤 분칠을 해놓은 듯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자신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그 정도 느낌을 주었으니, 그렇지 않은 자리에서의 공백감이 어느 정도일
지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옅음이 나쁘다거나 온전히 상원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
미는 아니다. 어쩌면 그 남자의 묽음은 주변 인물들의 진함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멱
살이 잡힌 채로 잠시간 해보았다.

 장례식장은 사망 장소에서 가까웠지만, 실상 사체는 부검을 위해 강북을 한 바퀴 돈 뒤에야 다
시 신촌으로 돌아온 셈이 되었다. 유가족 중 나와 이전에 얼굴을 튼 사람은 없었다. 내가 조사를
받고 유가족이 연락을 받고 어쩌고 하는 일련의 수습 과정 동안 서로의 동선은 오묘하게 엇갈렸
다. 그러니 사실 나는 내 입장을 딱히 그렇게 솔직히 밝힐 이유는 없었던 셈이다. 조의금 테이블
에 앉아있던 청년은 방명록에 적는 이름을 유심히 본 뒤 날 바라보는 표정이 변했고, 어느 샌가
유진의 부모와 장모는 달려들어 내 멱살을 잡고 뺨을 때렸다. 금세 주변엔 사람들이 들러붙어 구
경거리를 넘겨다보았다. 상원은 그 너머에서 나를 힐끗거리며 보았다. 상주임을 나타내는 완장
과 행동거지 등을 보고 나는 그가 유진의 남편이었음을 알았다. 유진이 예견했던 대로, 상원은 결
코 울지도 흥분하지도 않은 채 묵묵했던 탓이다.

 ─괴로웠을까요?

 결국 식장에서 쫓겨난 뒤 장례식 앞 흡연구역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 와중에 자판기에서 뽑아
온 식혜는 달았고, 밤공기와 함께 찼다. 나는 상원이 벤치 뒤로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때문
에 상원이 전조 없이 말을 걸어왔을 때 나는 화들짝 놀랐다. 인상만큼이나 발걸음 소리도 옅은 작
자였다. 상원은 어느 샌가 벤치에 몸을 기대고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내가 벙 쪄 있는 사이에 상원은 혼자 이야기했다. 목소리엔 분노 같은 감정의 찌꺼기조
차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 남자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존재감은 원래부터 감정의 크기와 연계
되어 있는 물건이었던가.

 ─인터넷을 좀 찾아봤는데 잘 모르겠더라구요. 이과 쪽은 영 체질이 아니라.

 말을 고르는 사이에도 상원은 주절댔다.

 ─테스토르? 테토르드? 여튼 그 복어독이라는 얘기는 경찰한테 들었습니다. 찾아봐도 뭐 이게
먹을 때만 문제인 건지 아닐 때도 문제가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어르신들은 장례 절차다 뭐다
따지느라 바쁘고. 경찰 쪽 조사는 뭐 다 끝내고 오신 건가요? 애초에 그걸 어디서 구해다가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요. 공기가 찬데 어디 좀…….

 ─죽는 방법 중 괴롭지 않은 것은 없지요.

 말허리를 끊고 들어가자 상원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쉬운 죽음 같은
건 없었다. 화학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멀쩡히 살아있는 육체를 정지시키는 건 강제력을
띈다. 그 강제력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 감각기관이고, 그 중 맨 앞에 서는 것이 통각이다. 언제나
그렇다. 몸을 던져도, 농약을 마셔도, 목을 매도, 스스로의 배를 갈라도 언제나 고통은 뒤따른다.
숨을 참아 자살하는 건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닌 담에야 불가능하다. 몸뚱이는 그렇게 만들어졌
고,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맥을 이어왔다. 그러니 상원의 우문에 대해 내가 답할 수 있는 말
은 몇 번을 묻더라도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엄청나게 괴로웠을 겁니다. 당연히 괴롭지요. 테트로도톡신은 신경독인데 기본적으로는 몸
을 마비시킵니다. 처음엔 따끔거리고 저리다가 점차 감각이 없어지고 힘이 없어집니다. 의식엔
영향을 그다지 안 주고 호흡곤란을 일으키는데 이로 인해 질식사하거나 부정맥이 오거나 했겠
죠. 그렇게 죽은 겁니다.

 내가 쏘아붙이자 상원은 잠깐 딴청을 피듯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옅은 웃음
을 띠웠다. 그리고 다시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하.

 순간 나에겐 상원의 쌍꺼풀 없는 눈과 그 동공 안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같은 것이 보
였다. 단순한 안구와 그 체액이 아닌 무언가가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
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기에는 비친 시간이 너무 짧았다. 나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눈을 피했고, 상원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럼 누가 그렇게 미웠던 겁니까. 제 집 사람이? 아니면 그 쪽 자신이? 어느 쪽이었죠?


/run down

 정제된 캡슐 같은 것을 구입할 길은 없었다. 진통제 등으로 사용되기는 한다지만 내겐 이런 일
에 가담해줄 의사 지인을 알지 못했다. 알고 지내는 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나 부탁할 만큼
가깝지 않았다. 때문에 어떻게든 직접 구해야 할 형편이었다. 처음에는 알코올 주사를 생각했지
만 치사량이 너무 높았다. 정맥 주사를 한다고 해도 수백 ㎖를 쏟아 넣어야 했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방식이 아니었다. 확실히 죽는다는 보증이 없을뿐더러,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고통을 느끼
지 못하는 채로 끝맺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무미건조함이 원인이라면 수단까지 그래선 안되었
다.

 테트로도톡신을 분리정제해내는 건 고급기술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불순물이 섞여있
든 아니든 치사량 이상만 투입된다면 인간은 죽는다. 수산물 시장 중매인에게 따로 부탁하자 구
하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직접 구입한 뒤 복 요릿집에 가져가 조리를 부탁하면 약간의 품
을 들이는 대신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탓에, 부탁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고 했다. 그걸 가져와 배
를 가르고, 정상적인 조리법에서는 버려야 하는 부분만을 취할 생각이었다. 캡슐 형태 따위로 파
는 정제물과 비교하면 어이 없을 정도로 싼 가격이었다.

 그 사이에 난 리스트를 정리했다. 우선 내가 지금까지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을 써내려갔다. 아
버지의 일 이후로 소원해진 가족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직장에서 같이 일한 동료들까지. 나는 전
화번호부나 이런저런 친구목록을 잘 지우지 않는 편이었다. 그 기록들과 졸업 앨범 따위가 이래
저래 도움이 되었다. 죄다 적고 나니 참 많기도 많았다. 한나절을 꼬박 들여 적고 나니, 수백 명을
헤아리는 목록이 거기 있었다. 서른다섯 번째 생일 한 달 전 즈음인 어느 날의 일과였다.

 그 다음 날부터는 목록을 프린트해 그 중 내가 다시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을 골랐
다. 정확히는 만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붉은 펜으로 한 명 한 명 목을 치
듯 그었다. 가장 먼저 심판협회와 연관해 떠오르는 이름들을 지웠다. 그 중 만날 마음이 드는 인
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괜히 그 이름들과 마주해 역한 기억들만 살아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름을 보고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들도 지웠다. 그 두 가지 필터만으로도 목록은 절반 이하로 줄
어들었다. 기백 명의 이름을 훑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점심은 전날 밤 미리 만
들어 식은 카레를 전자렌지로 덥힌 밥에 얹어 먹었다. 카레와 밥이 닿는 면에서는 오묘한 열의 재
배치가 이어졌다. 나는 그런 애매한 온도차를 좋아했다. 그리고 잠시 집 근처를 걸었다. 식사 자
체가 늦었던 지라 이미 해는 최고점을 지나친 상태였다. 겨울 해는 오늘도 고도가 낮았다.

 거리의 공기는 평소와 조금 다른 듯 했다. 평시와의 괴리는 동네의 공업고등학교 앞을 지날 적
에 훅하고 와 닿았다. 폰으로 찾아보니 오늘이 수능 당일이었다. 교문 앞에 사람들이 잔뜩 붙어
있는 꼴이 무엇인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내가 보았던 수능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날을 지나온 지가 너무 오래된 것인지 다른 기억과 계속 섞여 분간이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
까지, 삶은 오로지 시험을 치기 위해 시작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험은 끝도 없이 있었다. 매년, 매학기, 매분기, 매주 크고 작은 시험들은 끝도 없이 몰려들었고,
아무리 해치워도 끝은 나지 않았다. 반으로 예리하게 잘라낸 시험은 증식이라도 하듯 다시 살아
나 다른 이름으로 달려들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시험의 행렬은 5년 전에야 끝이 났
는데, 그건 다시 말해 내가 태어난 지 3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마지막 것은 일종의 취직 시험
이었는데, 그게 끝나자 시험이라고 이름 붙은 시험은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었다. 다만 그
후로는 매일의 삶이 시험장이었다. 시험지는 선택지의 개수도 알 수 없는 형태로 날아들었고, 정
답은 늘 그 문제 밖에 있는 듯 했다. 나는 그걸 풀어내는 데에 늘 실패하곤 했다.

 나는 걸으며, 승부조작 사건 때의 일을 돌이켰다. 누가 중간에서 흘렸는지 동기인 정욱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자신을 찔렀음을 알았다. 정욱은 다른 관련된 이들과 입을 맞추고 내가 자신들과
원래 한패였다가 튕겨 나간 것으로 주장해댔다. 어디선가 내 신상과 행선을 여기저기서 캐오고
그걸로 한편의 이야기를 꾸며냈는데, 실제와 허구를 교묘히 섞어놓은 그 정교함은 이루 말할 수
가 없었다. 나는 그 서사를 따라가며 반박하는 것조차도 벅찼다. 이왕 인생 조지게 생긴 것, 내게
해코지라도 해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협회는 그 의심 자체를 꼬투
리 삼아 날 쫓아냈다. 정욱은 단순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 아니었고, 이런 밑밥을 깔 깜
냥이 안 되었다. 사실 내가 지금 가장 만나보고 싶은 자라고 하면 그 판을 짠 작자였다. 대체 어떤
인간이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만나서 무얼 하고 싶은지도 스스로도 명확치 않았다. 그 앞에
서면 주먹다짐을 하게 될까 아니면 저주의 말이나 퍼붓고 말게 될까. 그때가 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겠지만, 나는 그 상대가 누구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삼 일에 한번 하던 산책을 끝내고 나자 해는 기울어 넘어가는 중이었다. 점심에 하던 작업을
마저 해야 할 참이었다. 계속 이렇게 느긋이 굴다가는 제 시간에 맞추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이 들었다. 집에 오는 길에 다시 지나친 공고 앞은 표정이 많고 다채로웠다. 절망과 후련함과 슬
픔과 환희가 몽쳐 복잡했다. 나는 그 앞을 표정 없이 걸었다.

 집에 와서 어디 상처가 나지 않았는지,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곤 다시 자
리에 앉아 가족 친지들의 이름을 하나씩 지워나갔고, 어설픈 거리의 학교 친구와 선후배도 차례
로 그었다. 빨간 줄의 행렬이 이어졌고, 아직 남아있는 이름들이 눈에 띄지 않기 시작했다. 다시
목록을 정리하고 출력했다. 하루는 쉽게 흘러갔다.


/壘의 空過

 형사가 나와 유진의 관계를 어떤 것으로 적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형사과 사무실 천장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결국 알아서 쓰라고 말했다. 조사를 마치고 나올 때 형사는 자신이 작성한
서류의 내용을 프린트해 내게 내밀고, 틀림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했지만 난 곧장 맨 뒷장으로 넘
겨 지장을 찍었다. 형사는 수사 진행 상황에 따라 추가로 소환 조사가 있을 수 있고, 정황을 보아
살인 용의자 혐의를 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자살방조죄로 기소될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주소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나는 조사 받으며 떠올렸던 그
인과들을 쉼 없이 머릿속으로 반복할 뿐이었다. 유진과 다시 연락이 닿고, 만나고 지금에 이르기
까지의 기억들 말이다. 곱씹을수록 기억이 비어있는 부분들만 더욱 궁금해졌고, 순간순간 내가
내뱉은 말들의 어미들만 거듭 거슬렸다.

 리스트에 최종적으로 남은 건 다섯 명이었다. 3주에 걸쳐 리스트에서 골라낸 인물들을 하나하
나 만났다. 우습게도 볼 마음 없는 이들을 전부 쳐내자, 남는 건 살면서 부대꼈던 여자들뿐이었
다. 내 인생의 요약본을 내려다보며 스스로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섯 명을 주욱 이
었을 때 내가 살아온 인생 곡선이 대강 그려진다는 건 재미있는 동시에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그건 초등학교 때 흔히 하던 식의, 점을 이어 그래프를 그리는 작업을 연상케 했다. 그래프에서
방정식을 유도해 내는 걸 나는 늘 어려워했다.

 차근차근 연락을 돌렸다. 처음엔 쉽게 통화 버튼을 누르기 어려웠다. 번호는 다 찍어놓고 30분
을 고민하다가 비로소 눌렀는데, 모르는 사람이 그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멈춰있다고 해서
다른 이들까지 그 자리에 가만 서 있는 건 아니었다. 세 번째 즈음이 되어서야 거리낌이 없었다.
오랜만에 연락한 그 어색한 간극도 결국은 으레 하는 적당한 말들로 메꿀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렇게 리스트를 마저 하나씩 지워나갔다.

 물론 다섯 명 모두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 중 대부분은 만날 수 없었다. 3년 전을 마
지막으로 스쳐갔던 사람은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집 앞 공중전화로 걸었을 때야
비로소 받은 걸 보면, 아마 아직까지도 내 번호를 차단해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통화가 연
결될 때 이미 반응을 각오했다. 덕분에 내 신원을 밝힌 뒤 이미 수화기를 귀에서 떨어뜨려 놓았는
데, 의외로 전화기 건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1년 3개월 전에 결혼해 잘 살고 있다고 담담히 말
했다. 통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조용하지만 단호하
게 고했다.

 이전부터 해외를 전전하던 한 명은 이름도 잘 모르는 남미 작은 나라로 아예 이민을 떠났다고
대학 동아리 동기가 전해주었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지옥은 어디에나
있는 법 아니겠는가. 중학교 때의 첫 사랑은 봉쇄수도원에 들어간 지 8년이 되었다고 했다. 경상
도 어디엔가 있다고 했는데 당연히 내외로 출입이나 면회는 불가능했다. 봉쇄수도원 수녀들이
보통 10년에 한번 외출을 나오는 걸 생각하면, 2년은 지나야 했고, 그 시간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연유로 거길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른 한 명은 마지막으로 본 게 9년 전인 여자였다. 나보다 네 살 많았는데 순진한 사람이었다.
오르골 같은 소품들을 좋아하고 수집했는데,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이라면 사진을 뽑아 방에 붙
여놓았었다. 사진 앞에는 해당하는 물건이 들어갈 공간을 비워놓았고, 혹여 나중에 가지게 되면
전시할 공간을 확보해놓는 것이라 했다. 세 다리를 건너 만나 소개를 받은 사이였던 데다가 생활
반경이 겹치지도 않았다. 때문에 헤어지고 난 뒤 연락하거나 우연히 마주칠 일은 없었다. 다만 술
에 취했거나 외로움이 칼이 되어 근육과 뼈 사이를 도려내려고 할 때, 지우지 않은 그 번호로 메
시지를 보낸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전화를 걸 용기는 없었다. 서로 등 돌린 날로부터 나흘 뒤,
택시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죽었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뒷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전화번호는 아
직 살아있었고, 다만 자동으로 여동생 번호로 걸리게 되어 있었다. 동생은 나에게 언니와의 관계
를 물었다. 나는 지인이라고 어물쩍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그 오르골 사진 등이 지금은 어느 쓰레
기들 사이에서 부대끼고 있을지 문득 상상했다.

 마포 경찰서 본관을 빠져나와 정문을 빠져나오자 대로변은 바람이 찼다. 조사는 열 시간 넘게
걸렸고, 나는 같은 이야기를 십수 번이나 반복해 지쳐있었다. 12월이었지만 경찰서 건너편엔 바
로 검찰청과 서부지방법원이 자리 잡았던 탓에 연말 분위기는 그다지 풍기지 않았다. 조금 걸어
공덕이나 신촌 쪽을 향한다면 다르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당장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신
촌을 다시 들를 생각은 들 리가 없고, 공덕은 며칠 전 거기서 혼자 술 한 잔하며 장소에 이미 작별
을 고했었다. 서로 간에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뒤, 동선이 겹쳐 다시 마주하는 건 언제나 어
색한 법이다. 폰 배터리도 다 떨어졌고 가방엔 책도 없어 읽을거리가 애매했다. 버스를 기다리면
서 시간을 때울 것이 없자, 뇌는 멋대로 요 며칠 간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새삼스레
깨달았다.

 내 서른다섯 번째 생일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나는 장례식장을 향했다. 본래대로라면 내가
이미 거기 누워있었어야 했다.


/eephus

 ─그다지 관심도 없으신 거 같은데요, 뭘.

 나는 상원을 바라보며 말했고, 상원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그 작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지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캔에 남은 식혜를 마저 들이키는데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처
음에 흔하고 옅다고 생각했던 상원의 얼굴은 이제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피식자의 보호
색인가 의심했던 무존재감은 오히려 포식자의 의태에 가까웠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잠깐 앉죠.

 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상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병원 벤치 한쪽 구석에 걸
터앉아 있었던 지라 상원은 반대편 구석에 앉아도 충분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원은 굳이 마주
보는 위치에 있는 벤치로 가서 그리 자리 잡았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2.5미터 거리를
두고 서로 정면을 마주 보는 상황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상원이 본 내 표정이 어땠을지는 감
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상 무탈하게 치르십쇼.

 ─나 당신 압니다.

 ─예?

 나는 이 작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상원은 어느 샌가 담배를 한 대 물고 불을 붙
이고 있었다. 대가 가는 담배였다.

 ─나 당신 안다구요. 어디보자. 나이는 서른넷? 이제 다섯인가. 강원도 간산 출신에 프로야구
심판 2군에서 하다가 관뒀고. 유진이하고는 1년 반 정도 사귄 다음에 3년 전에 헤어졌고. 그 즈음
엔 충정로 살았었죠. 차는 계속 그 아반떼 몰아요? 차 관리 좀 엉망으로 하시던데 아직 굴러다니
나 모르겠네.

 ─당신 뭐야.

 반 즈음 일어서다 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는 되물었다. 정식으로 사귄 적 없다는 무의미한 말
은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상원은 오른손으로 담배를 들고 왼손은 뒤로 뻗어 몸을 지탱하며 앉
은 채 기지개를 펴보였다. 아까 잠깐 느꼈던 것이 다시 느껴졌다. 상원의 동공 안에서 숨 쉬는 무
언가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이물을 담고 있는 상원은 나른한 인상 위에 어설프게 사람 좋은
양 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거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그냥 사람 찾고 쫓고 기억하고 하는 게 일이라서 그런
거니까. 얘기나 좀 하자는 겁니다. 한 대, 필래요?

 그러면서 담배를 내밀었고, 나는 손을 흔들어 거절했다. 알러지 때문에 담배는 피운 경력이 애
초에 없었다. 몸은 어느 새 마른 행주가 싱크대에서 미끄러지는 마냥 다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상원을 노려보았고, 상원은 담배를 깊이 피웠다. 깊이 들이쉬고 조용히 내쉬
었다.

 ─다들 자기가 관심 있는 것들을 싹 훑고 공부하고 외우고 그러잖아요, 타자나 투수 기록 같은
거.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이 사람한테 관심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게 취미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다 보면 자기 아내랑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질 수도 있
을 것이고, 취미가 직업이 되어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리도 줄줄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멍하니 듣다가, 찬 공기가 옷깃과 피부 사이로 파고들어 목
덜미와 등줄기를 내리 핥았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고 어제 유진과 나눈 대화의 편린들이
슬쩍 되살아났다. 변호사라던 남편이 요새 무얼 하는지 유진은 말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그 남편
이 얼마나 무색무취한 인간인지에 대해 말했고, 상원이 종종 두려워질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 말
했을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었다. 늘 그랬듯이 알코
올은 쓸데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뇌의 속도를 한껏 늦춰주었고, 어느 순간 그 늦춤이 지나쳐 나는
흘러가는 말들에 추월당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 하소연의 내용은 파편화되어 지금
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와중에 상원은 계속 이야기를 얹었다.

 ─말이야 말이지. 여기 올 상황 아닌 거 스스로가 더 잘 알지 않아요? 뭐 저야 이런 인간이니
별 상관없다지만 아까 봤잖아요. 난장 치는 거. 멱살에 따귀에 뭐 그냥 있는 건 죄다 퍼부으시던
데 좀 화통한 양반들이셔야지. 보기만 해도 얼얼하던데 뭐 괜찮으신가 모르겠네.

 생각건대 상원이 내 신상을 읊어댔던 것이 내게 생각보다 큰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상원
이 주절대는 중에 나는 그 자가 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몇 가닥 아는 것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떠들어댔을 뿐임을 알았다. 이 자는 딱히 나를 의심해서 하는 대화가 아닐
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가 맑아지고 사고는 명징해졌다. 상원이 대체 무얼 바
라고 이 대화를 끌어가는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그다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짝 찡그리며 상원을 바라보았다. 상원은 이제 뭐 숨기는 것 없이
뱀의 혀를 나불대고 있었다. 나는 그 말허리를 끊었다.

 ─뭐 못 올 것도 없지요. 장례식장에서 큰 소리 나는 거야 드문 일도 아니고. 상주신데 이렇게
오래 자리 비우고 계셔도 되나요. 조문 온 분들 기다리시겠는데요.

 상원은 눈을 바로 떠 나를 바라보았고, 감정 없이 공허해 보였던 그 망막 안까지 서로의 시야가
닿았다. 완전한 무색이라고 생각했던 그 안에서 나는 무언가 찾아낸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눈을 이전에 본 기억이 있음을 떠올렸다.

 ─이 쪽이 더 재밌잖습니까.

 그건 불순물 없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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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량 문제로 나눠 올립니다.



3
  • 대작의 냄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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