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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5/26 15:34:37
Name   王天君
Subject  


기억의 바다는 크고 넓지. 그 앞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밀물과 썰물을 맞이해. 알고 있어. 같은 바다, 같은 물결을 마주하지만 모두가 똑같이 젖진 않는다는 걸. 저 멀리 있는 이에게는 아무리 힘차게 때려도 물방울 하나 닿지 못하지. 그런데 나는 자꾸 그 바다로 걸어 들어가. 밀려오는 물길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한없이 마르고 멀쩡한 나의 육지를 파도가 휩쓸었고 나는 계속 철벅거려. 마를 때쯤이면 다시 나를 적시고, 건조해진 나는 다시 발을 담가봐. 그렇게나 울렁이던 밀물이 조금씩 잦아드는 듯 해. 이제는 좀 마를까. 모래밭 위 나의 발을 다시 사르르 쓸고가. 여태와 다를 것 없이 나는 젖은 채로 걸어. 찰랑거리는 소리가 계속 내 발걸음을 따라와줬으면 좋겠거든.

나는 계속 바닷가를 걸어. 물결이 놓고 간 그 무엇이 나를 바다에서 떠날 수 없게 만들거든. 아무 것도 없이, 그저 그곳에 있었노라고만 전하는 그 딱딱하고 자그만 흔적. 알맹이는 없고 오로지 껍데기 뿐이야. 나는 그 껍데기 안에 무엇이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아무 것도 몰라.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면 발자국이 닿을 앞으로 여기저기 촘촘히 박혀있는 다른 것들이 있어. 뒤를 돌아보면 쓸려나온채 멈춰있는 것들이 있어. 바다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나는 그 옆을 걸어. 또 밀려오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마침 주운 하나를 계속 손에 쥐고서 나는 그냥 걸어. 걷기만 해. 보기만 하지.

바닷속은 어떨까. 얼마나 많은 것들이 뻐끔거리고 거품을 뱉으며 떠다닐까. 그 안에서 부유하던 시절은 고요할까. 바다에서 고개를 떼면 뭍 위를 뛰어다니는 이들이 보여. 물에 젖는 일이 없도록 흙을 밟고, 아스팔트 위를 약동하는구나. 발 달린 이들은 여전히 쿵쾅거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바다를 바라봐. 새파랗고 넘실거리지만 소리를 내진 않네. 그 무음의 세계를 등지고 하나 둘씩 뭍으로 올라오기 시작해. 바다는 이 전처럼 흔들리고만 있어. 보면서 나는 생각해. 말이 없는 세계를 앞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생각밖에 없으니까.

할 말이 없진 않아. 들리지 않는 게 아니야. 그런데, 내가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바다를 등져야 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조용한 바다를 듣지 못하거든. 말을 하다 보면 손에 쥔 걸 잊어버릴지도, 잃어버릴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바다를 봐. 그리고 그 옆을 걸어. 젖으면 젖는대로. 수평선을 따라 걸으며 나는 계속 눌러야해. 말 하고 싶지만, 그러면 안되니까. 말을 누르면 생각이 많아져. 생각을 누르면 마음이 커져. 마음이 커지면 가끔 새기도 해. 더 눌러담지 못하겠으면 나는 다시 바다를 봐. 바다는 너무나 조용해서 내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해. 그러다보면 천천히 풀려. 바다는 나의 생각을 들어줘.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해.

물 속에서 어떻게 생겨났고, 물 속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돌아다녔을까. 물 속에서 무엇을 만나고, 무엇으로부터 숨고, 얼마나 커다란 공깃방울을 만들었을까. 본 적이 없어 녹아버리는 질문들. 물 속의 과거를 헤집고 돌아다니던 생각이 자꾸 멈춰. 내가 손에 쥔 너가, 뭍에 놓여진 그 짧은 순간에서 멈춰. 나의 시선이 닿는 곳, 내 손 안의 흔적을 보며 나는 그 때만을 물어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무엇이 자신을 여기로 끌고 왔는지 알았을까. 궁금해하던 그 시간이 너무 길진 않았을까. 너는 그 때 무슨 생각을 했니? 나는 자꾸 너의 아픈 순간을 잊지 못하고 계속 헤매기만 해. 다른 걸 알지 못해서, 다른 상상을 하지 못해서, 조용하던 시절을 그리지 못해서. 미안해... 묻다보면, 이야기하다보면 서서 걷기가 힘들어질 때도 있어. 떨리는 생각을 부여잡다 보면 다른 곳에 힘이 안들어갈 때도 있어. 발을 구르다 주저앉고, 잠깐동안 두 손을 모래 위로 짚어. 이런 나를 대신해서, 나는 정말이지, 내가 묻지 못하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주었으면 좋겠어....

쨍쨍한 세상 속에서, 물자국은 마르고 힘찬 발걸음은 대지를 박차며 가겠지. 떠내려온 너는 멈추고 마른 채 묻혀있을테고. 계속 지워지던 내 발자국이 조금씩 남기 시작해. 내가 걸어갈 곳은 점점 사그락거려. 물기가 빠져가는 땅 위를 걸으며 나는 파도 쪽으로 일부러 몸을 틀어. 야속한 세상 대신 너가 있던 바다를 눈에 담아. 뭍 위에 올라간 이들이 너무 열심히 털어버리지 않았으면. 젖은 옷을 쥐어짜고, 수건으로 물을 훔치고, 바람에 맡긴 채 말려버리지 않았으면. 어차피 증발할 것들을 그렇게까지 서둘러 지워버리지 않았으면. 그래도 아직 안늦었으니까. 언제라도 늦지 않으니까. 이제라도 바다를 볼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이 정리되었고, 더 이상 어지럽지 않으니까. 나는 그래서 계속 걸을테고 아직 와보지 못한 사람들을 기다려. 그 사람들을 거기서 만나기 위해,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너의 기억을 옮긴 그 곳으로, 나는 계속 바닷가를 따라 걸어가. 그저 듣기만 했고, 멀리서 바라만 봤던 이들이 정말로 너를 만나러 와주면 좋겠어. 그 때 봤던 이들이 다시 너를 만나러 와주면 좋겠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이 되어버리기 전에. 한번이라도. 한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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