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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5/23 23:29:41 |
Name | 王天君 |
Subject | 나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가 아니었다 (상) |
정말로, 많이 깁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저 혼자 떠든 이 이야기보다 삼천배는 많은 이야기들이 써져있습니다.) 정 뭐하시면, 9번부터 읽으셔도 됩니다. 9번부터 읽으셔야 1번부터 정독이 가능하실 수도 있습니다. 지난주,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생명이 죽었고 사람들은 그를 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사람들은 매일 죽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중의 하나였을 뿐인데도요. 그날 오후, 저는 일정을 조금 수정하고 강남역에 들려 초를 켜놓고 왔습니다. 꺼지지 말았어야 할 불꽃이 잠들었을 때, 우리는 늘 초를 키고 기도합니다. 작은 불빛들이 다 못태운 생명을 이어나가길, 그늘이 져버린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밝혀주기를 바라면서요. 0. 저는 이 사건 자체보다도, 이 사건을 둘러싼 반응들에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 저는 이 사건을 트위터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기가 막혔죠. 어느 누군들 그러지 않았을까요? 강남역 10번 출구에 포스트잇과 꽃으로 추모를 한다는 트윗을 읽었습니다. 찡했습니다. 누군가는 이 사건을 기억하려고 하는구나. 그저 감사했습니다. 저는 그 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모를 약속하고, 다짐했습니다. 2. 모든 생명은 평등하고, 모든 죽음이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를 다 기억해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의 죽음은 사회적 맥락속에서 더 오랫동안, 더 많이 회자되기 마련입니다. 생명의 무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죽음은 수명이라는 불변의 비극 외에도 다른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죽음을 멀리 하고, 오로지 생生만이 존재하는 듯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득 죽음을 실감하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떠나버린 누군가의 여백이 그 여백에서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이 우리가 잊고 있던 감각을 유난히 흔들 때가 있습니다.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 죽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 예고도 없던 죽음이, 다 쓰지 못한 생을 끊어버렸을 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삶을 느낍니다. 삶은 늘 시간의 흐름을 타고 천천히 잦아들다 죽음으로 화하지 않는다고. 3. 그의 빈 자리가 여전히 스산한 이유는 그의 죽음에 아무런 인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망을 해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늘 인식하는 죽음의 형태보다, 더욱 더 그 당위가 흐릿한 것입니다. 그는 23살이었고, 강남역 근처의 수 노래방에 갔었습니다. 그리고 남여공용 화장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누군가를 죽이려고 기다리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보내고 그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4. 화장실에 숨어있던 그 누군가에게 그가 선택된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그가 "여자"였던 겁니다. 이 죽음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는 그의 피를 손에 묻혔던 이가 직접 이야기했던 사실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이유를 찾을 때 가장 큰 접점들을 찾곤 하죠. 어느 누가 동창회 약속을 잡고, 동창회 장소로 가서,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차를 운전하다가, 다른 차를 들이받고 죽었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음주운전"을 가장 큰 이유로 놓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았던가, 차를 운전하지 않았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여기서 동창회 약속을 잡지 않았더라면, 동창회를 가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가정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동창회 약속을 잡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동창회를 간다고 죽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5. 여자라서 죽였다. 다른 말로, 여자라서 죽었습니다. 그는 여자라서 죽었던 겁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과의 교집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합니다.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자동차 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 해외 여행 중 범죄자를 만나지 않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고, 해답을 찾아 이를 실천합니다. 그런데 이번 죽음만큼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자라서 죽었다면, 여자가 아니어야 하는 걸까요. 여자로 태어났으니 여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도 말이죠. 6-1. 그래서 이 사건이 더 소름끼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여자를 죽여서 무서운 게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죽여서 무서운 게 아니라, 여자가 아니었으면 "살 수도 있었다는" 그 사실이 무서운 겁니다. 사람을 죽이려고 기다렸던 그 자는 다른 사람들은 살려보냈습니다. 그 자는 먼저 온 이들을 죽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묻지마 살인이라는 용어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는 혼잣말로, 몇번씩 물어봤습니다. 여자인가? 아닌가? 6-2. 이 사건에서 "왜 죽였냐"를 따지고 드는 건 별로 생산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들의 공포를 이해하는 데 그렇게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라는 겁니다. 죽은 사람이 죽은 이유는, 다른 말로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뜻합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었을까, 라는 지점에서 여자가 아니었다면 - 이라는 답이 나오고 만다는 겁니다. 다른 모든 요소는 동창회 약속 같은 부차적 조건, 운명론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겁니다. 가장 결정적 분기점은 바로 "여성"이라는 피해자의 성별입니다. 이것은 사회적 맥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여자가 아니었으면 살 수 있었고, 실제로 동일한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 머물렀던 다른 사람들은 여자가 아니어서 살았습니다. 6-3. 다른 부차적인 요소들도 있겠죠. 특히나 그 공간적 배경이 그렇습니다. 새벽 1시의 강남역 주변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시끄러운 번화가입니다. 그 곳에는 오로지 삶과, 삶의 에너지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마저도, 이제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타인의 악의에 의한 죽음을 상상할 때는 늘 인적이 드물고, 어둡고, 타인의 눈이 닿지 않고, 죽이려는 자가 감히 뭔가를 도모하기 쉬운 배경을 뒤에 세웁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사건 사고가 맨날 터질 수 밖에 없어서 경찰들이 상주하는 그런 공간에서 타인의 악의가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공간을 거니는 여자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안전지대의 범위가 엄청나게 좁혀져버렸습니다. 가장 위험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가장 위험한 공간으로 변해버린 겁니다. 6-4. 영화 <죠스>가 나오기 전까지 상어는 그렇게까지 무시무시한 동물이 아니었죠. 그러나 그 영화가 나오고 난 후, 상어라는 생물은 바다라는 공간에 커다란 공포를 심어놓았습니다. 바다가 무서운 이유는? 이라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상어에게 물려죽을까봐, 라고 대답할 겁니다. (실제로 상어는 그렇게까지 위험하거나 사람들을 많이 죽이는 동물은 아니라고 합니다) 단 하나의 픽션이 이렇게 한 세계를 바꿔놓습니다. 그리고 그건 그냥 이야기지, 라고 웃어넘길 수 없는 실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다라는 공간을 보면서 어딘지 숨어있을 상어를 상상하며 살짝 떤다면 우리가 걸어다니고, 놀고, 밥먹고, 사람들을 만나는 대한민국의 그 모든 공간에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 - 는 공포가 아주 짙게 깔려있는 겁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 사건 말입니다. @ 추가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외국에서 남자친구랑 같이 대중교통을 타고 집을 가는데, 남자친구가 자꾸 강남역 살인사건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런데 제 앞에 있는 남자가 절 한번 힐끔 보더군요. 한국인인것 같았고, 제 이야기를 알아듣는 것 같았어요. 전 그만 이야기하고 싶은데 남자친구가 계속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에요. 대중교통에서 내린 후 저는 울면서 남자친구에게 따졌어요. 그 남자가 몰카 찍으면 어쩔려고 그랬냐고. 그 다음에 그 사진 올리고 어떤 년이 계속 메갈리아년이 강남역 사건 떠든다고, 존나 죽여버리고 싶다고 조리돌림하면 책임질 수 있냐고." 이 여성이 오버하는 것 같나요? 반대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사건에 대한 여성의 공포는 이미 여기까지 솟아올라와있습니다. 7-1. 공포의 공감에 관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좀 쉬웠을 겁니다. 이제부터는 공포가 아닌 다른 감정을 좀 설명해야 할려나요. 현대사회의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국가라는 공동체의 약속 아래 보장을 받아야 하는 권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죽지 않을 권리"입니다. 내가 태어났으니까, 남이 내 생명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해서 굳이 떠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요. 그런데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 나눈, 가장 거대하고 절대적인 약속인데도 그게 지켜지지 않은 겁니다. 시간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우리는 화가 나고, 돈 빌려줬는데 떼먹으면 화가 납니다. 그런데 누가 죽어버렸습니다. 살아야 하고, 그 누구도 죽일 수 없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이 깨진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엄청나게 화가 나는 겁니다.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 화가 나는 거죠. 여자라는 이유로,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겁니다. 7-2. 그럼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화를 내면 되지 않냐고 하실 수도 있겠죠. 그런데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계속 생기고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계속 생기고 심지어 같은 이유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같은 사람들이 손해를 계속 봅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이 지켜지게끔, 모든 이가 이야기를 해야 할 때인 것이죠. 당신의 눈 앞에서 누군가가 누구를 죽일려고 합니다. "그 사람보고 살인하지 말라고 하세요" 당신은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진 않을 겁니다. "살인"이라는 계약 위반을 멈추려고 하겠죠. 그 사람이 죽지 않게끔 할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적 호의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서로의 약속을 챙기면서 나의 약속을 더 공고히 하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인 사람들이, 여자인 시민들이 지금 계속 화를 내고 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이 약속이 이렇게 지켜지지 않고 있는데 모두가 뭔가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7-3. 이건 정신이상자의 살해다 - 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 해석을 사건의 주로 두진 않지만, 이 해석이 맞고 틀리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신이상자의 사건이니까 일반인에 대해서는 안심할 수 있다는 논리처럼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이는 사람의 정신이 멀쩡하건 안멀쩡하건, 여자는 "계속" 죽어나갑니다. 이번 사건을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고 치부해도 여자들은 "또" 죽은 겁니다. "또" 여자라서 죽은 거죠. 만약 여기에 대고 남자도 죽는다, 라고 할려면 "남자가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을 만큼의 비정상적 존재들이" "보통 남자들 사이에 숨어있다가" "남자인 걸 이유로 아무 남자나 죽이는" 사건들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현실에서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미래를 이렇게 단정짓는 이유는 남성들이 여기에 대해 가지는 공포심에 근거했습니다. 물론 저도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두려움을 똑같이 하향평준화한들 남자도 불안해하고, 여자도 불안해하는 사회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남자도 죽으니 남자도 불안해해야하는데 남자들은 이렇게 살고 있다, 라는 주장은 그래서 무의미합니다.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도 않았으니까요. 사실 이 가정은 그 자체로 남자들의 안전을 역설합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있잖아요.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 현실의 차이를 증명하는 겁니다. 남자는 안 죽나요? 남자도 죽습니다. 남자도 살인마들한테 죽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할만큼의 현실이 아닌 겁니다. 두려워할만큼, "남자" 자체가 표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게 현실이에요.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 강호순이 여자들을 골라서 죽였고 유영철이 여자들을 골라서 죽였습니다. 김길태가 여자를 골라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누군가가, 여자를 골라서 죽였습니다. 여기에 여자를 죽인 다른 낯선 이들의 숫자를 합치면? 불안은 더욱 더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자라서" 죽어야 하는 피해자들의 입장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성별을 가리지 않는 연쇄살인마도 있다? 제가 위에서 강조한 조건들을 다 가진 사건은 아닙니다. 죽지 말아야 하는데 죽습니다.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닌 겁니다. 미친 놈이 죽였다고 이해한들, 누가 미친 놈이고 안 미친 놈인지 어떻게 알까요. 이를 두고 안심하려면, 정신이상자 감별도구가 나오지 않는 이상은 영원히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강남역 번화가에서, 어떤 미친 사람이, 여자를 여자라서 죽였는데 거기에 대고 그래도 세상 모든 사람이 미친 건 아니니까.... 라면서 마음을 놓고 어딜 다닐 수 있을까요? "여자들이 죽는다" 라는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여자를 골라서 죽이는 사람이 존재하니까요. 미쳤든 안미쳤든. 이번에 특별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자라서 죽은 게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닙니다. 찍혀서는 안되는 거대한 점들이 이미 찍혔었고 그 옆으로 우리가 몰랐을, 여자라서 죽여버리는 바람에 작은 점들이 계속 찍히고 있고 이제 그것들은 빨간 선이 되어갑니다. 7-4. 이 사건을 두고 여자들은 신체적 약자이기 때문에 죽은 거다, 라는 주장도 많이 보입니다. 아마 그랬겠지요. 그런데 이건 사건의 주가 아닙니다. 동창회를 가서 죽었다 -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죽어야 할까요? 저 해석은 그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적 맥락에서 사건의 인과와 당위를 한꺼번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체적 약자이기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어떤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까요. 고칠 필요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이유를 사건의 본질로 삼으면 이 세상의 모든 살인사건은 그냥 집안에 틀어박히라는 답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의 세계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가 아닙니다. 약육강식의 논리를 문명으로 제어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여성은 늘 신체적 약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별로 의미있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는 신체적 약자이기 때문에 아이나 노인, 장애인을 범죄에 노출하지 않습니다. 조두순 사건을 두고 정신병자 한명의 특수사례로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다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가 이야기했죠. (오히려 그 때는 가해자를 예외로 치부하려는 걸 온 힘을 다해 막았습니다) 7-5. 노인, 아이, 모두가 약자,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자가 죽지 않아야 된다는 이야기가, 노인과 아이를 포함한 다른 약자는 죽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약자의 세계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가해자/피해자 구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All lives matter 는 이 이슈의 본질을 흐리기만 할 뿐입니다. 8-1. 왜 이렇게 길게 쓰냐면, 남자가 경험하는 세계는 여자가 경험하는 세계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얼마전까지는 몰랐습니다. 어떤 세계가 존재하는데,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이들이 같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우리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세계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남자는 근육이 있고 기본적인 근력이 있고 여차하면 폭력에 기댈 수 있습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장을 버틸 수 있고, 시간을 끌 수 있고, 그런 것 때문에 일단 경계하게 되는 그런 이점이 있다는 거죠. 나를 위협하는 존재의 무기가, 그 양은 다를지언정 내 무기와 질은 비슷한 것입니다. 무기가 있으니까 서로 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를 마주하는 여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여차하면, 수틀리면, 이런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범죄의 타겟에서 우선순위에 놓입니다. 그러니까 당한다, 가 아니라 그러니까 절대로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가 되는 겁니다. 위에서 열거한 폭력의 조건들은 문명 세계에서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게 있든 없든 기본적인 권리가 지켜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를 무시하고,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냐하면, 여성은 신체적 약자다 - 라는 명제가 결과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신체적 약자다 - 라는 명제는 원인이 되어야 하는데도요. (내가 지켜줄게, 밤 늦게 다니지마 같은 말이 어째서 통용되는지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정말로 여성들이 안전하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죠) 그러니까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집니다. 거기에는 오로지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조건들만이 우세하게 됩니다. 8-2. 여자들이 "이 틈을 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막 늘어놓는다고 받아들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상관이 있습니다. 죽는 것과 성추행 당하는 게 상관이 없지 않습니다. 그 시시한 일상적 사건과, 인생의 비참한 종결 사이에는 "인간인데, 인간의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다" 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사건들을 하나로 잇는 건 "여자여서"라는 이유입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여자라서" 일어납니다. 여자는 만만하니까요. 신촌 유플렉스에서 이번 사건과 연관해 "민우회 필리버스터"가 있었습니다. 여성으로서 당해야 했단 불쾌하고, 힘들었던 경험을 나누는 자리였죠. 저는 늦게 가서 구경밖에 못했지만 (민우회의 전화를 놓쳐서 발언 기회도 놓쳤습니다. 그냥 연이 안닿았다 쳤습니다) 조금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거의 모든 여성이, 자신이 당한 성추행과 성폭행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은 마이크를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이야기를 하다가, 잠깐 마이크를 쥔 손을 떨궜습니다. 위풍당당하게 시작하던 이야기는 조금씩 꼬이고, 갑작스런 휴지기를 갖다가 젖은 목소리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들었던 건 다 그랬습니다. 이화 여대를 다닌다는 이유로, 연대와 서강대의 좆집 취급을 받는 이야기를 한 사람이 기억에 남습니다. 연대생은, 서강대생은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사람들일까요? 오히려 대한민국 대학생들 사이에서 상위 몇프로의 인재들입니다. 연대생 모두가, 서강대생 모두가 그렇게 구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슬프게도, 전 이걸 확신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아닌, 일부일지도 모르는 이들이 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저는 다시 한번 시야의 한계를 깨트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이대를 갈 수 없는 내가 전혀 모르던 세계다, 이것은 연대와 서강대를 여자로서 마주하는 자들만이 맞닥트리는 세계다.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성학은 정말 공부하면 공부할 수록 공부하기가 싫어지는 전공이라고. 비참한 과거들을 계속 들춰내야하는데, 아직도 바뀌지 않은 현실들을 더 생생히 체감해야 하는 이유겠지요. 나의 시야에서 들어오던 세계를, 내가 누리던 규칙의 당연함을 의심해봐야 할 때입니다. 8-3. 기본적인 규칙이 있는데, 그 규칙을 어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자"입니다. 이건 기분이 나쁘든 어쩌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자 몸을 더듬는 대부분의 사람은 남자입니다. 여자를 강간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남자입니다. 여자를 죽인다고 협박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남자입니다. 여자를 죽이는 대부분의 사람은 남자입니다. 세상에는 멀쩡한 사람들의 비율이 늘 비정상적인 사람의 비율보다 많습니다. 어딜 가든요. 그런데 비정상적인 비율의 사람들이 어떤 지점을 통과해버리면, 멀쩡한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1/1000과 5/1000은 별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1/1000에서 10/1000이 되어버리면 소수점이 사라져버립니다. 앞의 0이 있어서 0처럼 취급할 수 있던 것이 앞의 0이 없어지고 엄연히 자연수로 존재해버리는 것입니다. 신체적 힘의 크기 차이든, 미쳐서 그렇든,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여자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대부분의 인간은 "남자"입니다. 중요한 건 지금 현재, "대부분의 남자"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남자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입니다. 여자들의 이런 세계는 남자들의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시야 바깥의 여자들의 세계를 제외하고, 남자들의 세계는 비교적 안전하게 돌아갑니다. 지하철 탈 때 누가 엉덩이를 만질까, 가슴을 만질까 긴장하는 남자는 거의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 사소한 부분부터 남자의 세계와 여자의 세계는 서로 엇갈립니다. 그런데 생명권이라는 가장 끝의 권리라고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게 누릴 수가 없어요. 남자가 늦게 택시 탄다고 다른 친구남자가 차번호판을 찍진 않습니다. 한쪽의 세계는 여유로운데, 다른 한 쪽의 세계는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남자는 "폐를 안끼치도록" 나 혼자의 행동거지를 주의하면 되지만 여자는 "당하지 않도록" 뭔가를 각오해야 합니다. 뭐가 어디서 어떻게 기본적인 권리를 무시하고 하루를 망칠지 모릅니다. 태어날 때의 염색체 종류가, 인생의 장르를 통으로 바꿔놓습니다. 왜냐하면 남성과 여성의 세계는 어떤 부분에서는 전혀 다르게 빚어져있기 때문입니다. 교집합이 아닌 부분, 절대로 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살아男았다 살女주세요 라는 말은 그런 의미인 겁니다. 똑같은 life인데, 동사의 형태가 한 쪽은 live, 다른 한 쪽은 survive로 나타납니다. 당신들이 아무렇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들은 이렇게 긴장하고 잔뜩 움츠린 채 산다는, 그걸 알아주라는 이야기에요. 여기에 어디 "남자가 잠재적 가해자다" 라는 메시지가 있나요. 세계의 차이에 대한 선언을 두고, 죄인에 대한 판정으로 받아들이는 건 명백한 오독입니다. 8-3. 그러니까 "나의 무고함"은 엉뚱한 대답이 됩니다. 묻지 않은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거죠. 그건 너가 그랬잖아!! 라고 몰아붙이는 말에 하는 대답이죠. 나와 당신의 세계는 다릅니다, 알아주세요 라는 외침에 대한 답이 아닙니다. 그런데 묻지 않은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하고, 묻지 않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는 시야를 좁혀버리는, 대화를 차단하는 대답입니다. 나는 무고하니, 다른 모든 남자들도 무고하고, 그런 남자들과 너는 살고 있는데, 특수한 남자들의 경우로 모든 이를 일반화한다 - 가 되는 거죠. 이 글을 쓰는 저도 결백합니다. 저도 치한 짓 같은 거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제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나 하나의 무고함을 근거로,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의 진실을 위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자로서 이걸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꾸려고 해야죠. 그것만이 이 사회에 팽배한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만약 눈 앞에서 다른 여자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는 걸 보고 있다면 그 어떤 사람도 가만히 놔두지 않겠죠. 뭐라도 할 겁니다. 여성이 아닌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결백의 증명이 아니라 책임감입니다. 무슨 경찰을 하라는 게 아니라, 당신이 살인을 당한려하면 살인을 당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겠다는 약속과 똑같은 겁니다.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인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확고한 의견을 증명해서,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안심시켜야죠. 다들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던가요. 잘못되었다, 나도 책임이 있다, 바꿔야 한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세월호를 가라앉혔던가요? 우리가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에게 무슨 몹쓸 짓을 했던가요? 우리가 대구지하철을 태웠던가요? 아닙니다. 직접적 상관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흐릿하게나마 가슴 속에 약속을 머금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그런데 왜 이번 사건에 한해서는 이렇게 "나는 죄가 없는데?" 라면서 반응들을 하는 걸까요.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어떤 사건의 책임을 나누는데 이렇게까지 인색하게 굴고,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걸 저는 처음 봅니다. 아무 상관도 없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우리 모두는 놓친 것들을 이야기했고, 미안하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 한해서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라면서 그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너무나 많이 봅니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오히려 저는 그 부정하려는 태도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또 다른 증거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불편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모든 선언과 이야기들은 남자 개인을 두고 죄를 묻는 게 아닙니다. 죄책감 때문에 불편하다면, 거기서 죄를 빼버리고 책임감을 느끼면 되는 일입니다. 제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책"을 빼버리고 싶기 때문에 죄를 강조하고, 그래서 죄와 책을 한꺼번에 덜어버리려는 심리가 아닌가 싶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져야 할 이들과 같은 특성을 공유하는 이로서, 성찰과 변화에 대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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