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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5/22 14:26:37
Name   구밀복검
Subject   동주, 단평 - 이준익 커리어 최고의 영화(스포일러)
* 총체적인 리뷰는 아니며, 명장면 한 장면에 대한 평입니다.

영화 후반부에, 송몽규가 연행되어 끌려가기 직전에 자취방 창문을 통해서 윤동주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씬이 있는데, 이때 윤동주는 2층 창문에서 송몽규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하고, 송몽규는 창문 아래에서 윤동주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하죠. 그러면서 송몽규는 윤동주의 시점에서 하이앵글(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카메라)로 보여주고, 윤동주는 송몽규의 시점에서 로우앵글(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카메라)로 보여줍니다. 위 아래 위위 아래.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동시에 '자화상'이라는 윤동주의 시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화자가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그에 비친 자신의 얼굴(사나이)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죠. 즉 우물 = 거울 같은 효과를 내는 셈. 여기서 시의 화자를 윤동주와 동일시하면 윤동주가 우물이라는 거울로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가 되고요.

이 시가 들려올 때, 마치 우물에 비친 화자의 모습이 화자를 거울처럼 비추듯, 화면에서는 2층에서 윤동주가 송몽규를 내려다보고 1층에서 송몽규가 윤동주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아주 의미심장하지요. 자화상의 화자가 윤동주가 되고 사나이는 송몽규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송몽규와 윤동주는 서로의 거울이자 자화상이라는, 송몽규는 윤동주의 또다른 얼굴이라는 영화 전체의 주제가, 말이 아니라 카메라로 한 장면에서 응집력 있게 시각화 된 것이지요.

이 씬 하나만으로도 이전과 클라스가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1) 시의 내용을 확실히 이해했으며
2) 영화의 내용과 완벽하게 매치되고
3) 이것을 내레이션으로만 때우고 넘어간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 시각화하면서 텍스트 매체인 시의 구도를 시각 매체인 영화의 구도로 적절하게 환원했다는 점
에서 그렇습니다.

영화관에서 저 장면 라이브로 보면서 깜짝 놀랐네요. '아니 이준익이 이런 걸?'


*
제가 패널로 참가하고 있는 팟캐스트 '영화계'에서, 4월에 <동주>에 대해 리뷰한 바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트리비아도 짚어보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분석 및 평가를 해봤습니다.

1부 : 프롤로그 -> http://www.podbbang.com/ch/8720?e=21947281
2부 : 본편 -> http://www.podbbang.com/ch/8720?e=21948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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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캐스트 들어보겠습니다.
    영화얘기 도란도란 해주는 팟캐스 틀어놓고 잠청하면 편안한밤 될거같아 찾고있었는데 잘됬네요
    구밀복검
    ㅋㅋ 이게 영화에 대한 감상을 여과없이 털어놓는 방송인 터라 때로 듣기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재미없게 본 영화는 사정없이 까거든요. 관대히 들어주시길...
    그렇다면 더욱 '호' 입니다
    Darwin4078
    한번 봐볼까 했던 영화인데 순식간에 극장에서 내려가더군요.

    개인적으로 이준익 감독은 좀 과소평가 되는 감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합니다. 천만 관객 영화중에서 왕의 남자가 제일 좋았고, 이후 영화들에서도 다양한 장르에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도 관객들과의 호흡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을 느끼곤 합니다.
    이준익 커리어 최고의 영화라면 구밀복검님은 이 영화를 '왕의 남자' 보다 더 좋게 쳐주신다는 얘기군요.

    왕의 남자를 보면서 꽤나 감탄을 했던지라(오래돼서 뭐에 감탄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납니다만) 그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보고 싶어지네요.
    구밀복검
    개인차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동주 제외하면 왕남이 이준익 최고작이라는 것이 까든 빠든 중론일 텐데, 저는 왕남을 'ㅋ 이준익스러운 감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허용 범위지' 정도로 넘어갔거든요. 왕남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동주보다 왕남이 낫다 싶겠죠.
    구밀복검
    이해를 돕기 위해 이미지를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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