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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2/07 01:20:48
Name   王天君
File #1   chinese_ghost_story.jpg (54.0 KB), Download : 13
Subject   [스포] 천녀유혼 보고 왔습니다.


한 서생이 밤을 세우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서생의 눈 앞에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흰 소복의 소맷자락을 휘날리는 자태에 서생은 넋을 잃습니다. 둘은 이내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정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살과 살이 부딪히고, 여자의 발목에 걸려있던 장신구가 딸랑거립니다. 무서운 기세로 무언가가 들이닥치고, 청년의 외마디 단말마가 울려퍼집니다. 그렇게 음산한 밤이 있던 그 곳으로 또 다른 젊은이가 발을 들입니다. 가난한 신참 세관에게는 하룻밤 묵을 곳이 필요할 뿐입니다.

<천녀유혼>을 보면서 전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서로 속한 세계가 다른 젊은이들이, 어르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이야기잖아요. 남자 측의 반대자가 후에 로렌스 목사 역할까지 하는 게 좀 재미있기도 하구요. 산 자와 죽은 자, 낮과 밤, 순수와 타락, 선과 악이라는 각자의 영역에서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려고 다들 고군분투를 이어갑니다. 덕분에 이 이야기는 비극적이면서도 직관적인 오락이 되고, 액션과 어드벤쳐도 그대로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오르페우스 신화 같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로맨스가 이야기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로맨스도 결국은 권선징악의 주제를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죠. <천녀유혼>은 의외로 혼탁한 세상을 그리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세상은 칼부림과 피가 난무하고, 법치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사욕에 취한 이들이 서로 싸움만 일삼는 곳입니다. 장부가 물에 젖어 영채신이 세리 노릇을 못하는 것도 이런 묘사의 일부분이죠. 이 세계 속에서 인물들은 도道와 의義를 직설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영채신은 사랑의 위대함을 떠들고, 연적하는 정의를 좇고 악을 미워하죠. 심지어 귀신의 두목인 나무귀신도 자신의 살생이 떳떳하다고 연적하와 설전을 펼칩니다. 영화 속에서 퇴장하는 이들은 모두 불의한 소인들입니다.

섭소천과 영채신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과정 또한 그렇습니다. 이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첫눈에 반하거나 애정을 갈구하지 않지요. 둘의 관계는 윤리적으로 빚을 지고 이를 갚아나가는 보은이 중첩되며 발전합니다. 영채신은 욕망에 빠지는 대신 약자일 것 같은 섭소천을 염려하고 지키려 합니다. 섭소천은 연적하에게서, 나무귀신에게서 영채신을 구합니다. 이처럼 두 남녀 사이의 사랑 역시도 결국은 덕을 쌓는 과정입니다. 연적하가 오지랖을 떠는 것도 나무귀신과 흑산노야에게서 이들을 지키려는 도의 일종이죠. 이야기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약한 이를 지키려 하는 선善입니다. 때문에 영채신과 섭소천이 맺어지지 못하는 결말은 선을 이룬다는 이치에 들어맞게 됩니다. 사랑, 선善은 이 세계를 이루는 질서이자 순리이고, 이것은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입니다. 이승과 저승은 다시 원래대로 갈라지고, 애절한 마음은 덕을 쌓았으며 억울한 이는 원을 풀었으니까요. 비극이 완성되는 동시에 어지러운 세상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천녀유혼>은 장르적으로도 다채롭습니다. 로맨스라기에는 액션, 호러, 스릴러적 요소들의 비중이 꽤 높은 편입니다. 그 중에서도 호러가 의외로 재미있어요. 영채신은 호러, 섭소천은 에로, 연적하와 하후형은 액션, 이렇게 각 등장인물이 각 장르를 분담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서로 다른 장르가 그 때마다 극을 지배하며 허술한 내러티브를 메꾸는 시도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둡니다. 다만 이런 장르 장치들이 사라지고 인물들의 감정선이 두드러지는 장면에서는 정작 설득력이 떨어지긴 하죠. 그러나 이마저도 배우들이 덮어버립니다. 풋풋한 장국영과 농염한 왕조현의 매력이 최면적으로 작용한다고 할까요.

지금 보면 왕조현은 섭소천이란 캐릭터에 썩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비련의 여인을 맡기에 왕조현은 키도 크고, 이목구비도 지나치게 화려하죠. 연기도 좋은 편은 아니라 캐릭터를 완전히 설득시키지는 못합니다. 대신 에로티시즘을 표현할 때는 이 배우의 미모가 십분 활용됩니다. 어차피 영화 자체가 순간 순간 배우의 매력을 활용하는 데 더 주안점을 두고 있으니 이 정도면 120% 제 몫을 다 한 셈입니다. 왕조현이란 배우를 걷어내면 섭소천이란 캐릭터 자체는 별 재미가 없으니까요. 이 캐릭터 안의 간극은 허용범위를 살짝 벗어나 있습니다. 남자들을 유혹하고 죽게 만들었다가 후에 열심히 변명거리를 끌어와서 희생자를 자처하는 캐릭터는 믿어주기가 어렵죠. 편의대로 요부와 성녀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느낌도 납니다. 차라리 일관되게 남자를 유혹하는 이미지를 밀고 나갔다면 로맨스의 긴장감도 더 커졌을지도 모르죠.

캐릭터의 매력이라면 영채신 쪽이 더 큰 편입니다. 일관되게 로맨티시스트를 밀어붙이는 캐릭터라 호소력이 있어요. 사실 섭소천은 배우의 미모를 전시하는 기능적 존재에 가깝습니다. 반면 영채신은 이야기 속에서 입체적인 캐릭터로 살아있습니다. 순진무구하고, 상냥하고, 겁 많고, 고집 센 모습들은 인간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킵니다. 영채신은 인간 같지 않은 존재들 틈바구니에서 접점을 만드는 중심 역할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어요. 이는 시나리오와 장국영이라는 배우의 합작입니다. 배우의 성실한 연기 자체가 이 캐릭터에 대한 묘한 동정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천녀유혼>은 고전의 위치까지 올라가기는 어려운 작품입니다. 그 때 그 시절을 추억하는 증거자료는 되겠지만 영화 자체로서의 의의는 크지 않은 편이에요. 시대의 한계가 멋이라기보다는 조악함으로 다가오고, 영화 자체가 이런저런 오락들을 짜집기한 경향도 보입니다. 배우를 회상하는 용도라면 그래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개인사 때문에 왕조현보다는 장국영에 대한 향수가 더 크네요. 한 때의 영광을 다 누리고 초라한 삶을 이어가는 이보다, 그 삶조차도 부여잡지 못한 이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 영화속에서 장국영은 옷이 젖어있는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아요. 보면서 괜히 걱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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