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5/03/01 01:03:19
Name   유하
Link #1   https://claude.ai/
Subject   클로드 3.7에게 소설을 맡겨보았다 - 물망초의 기억
며칠 전에 업뎃된 클로드 3.7에게 소설을 쓰게 시켜보았습니다.

처음 제시는 "2040년 서울 시민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줘" 였습니다.

그러자 처음엔 기억보관장치같은 SF스러운 것을 써줬는데, 미래 기술이 가득한 소설을 보니 뭔가 마음에 안들어서 바꿔봤습니다.
- 기술을 강조하지 말아줘. 단순히 시대적 배경일 뿐이야.  문학적 작품성이 높도록 써줘.
- 아예 새로운 내용으로 써줘.

그리고 아래같은 명령으로 스스로 리뷰하고 개선할 수 있게 해봤습니다.
-이 글을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 5명의 관점으로 줄거리 요약, 문학적 장단점, 추가의견을 써줘. 그리고 이 의견을 종합해. 그리고 개선점을 정리해 그리고 이에 맞춰 글을 문학적으로 새롭게 구성해서 다시 써

그러고나서 피드백을 계속 주고받았더니 지금까지의 AI중에서는 가장 괜찮게 써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한 번의 출력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계속 떠서 "계속" 이라고 몇 번 쳐줘야하더라구요....

스스로 리뷰시키면 아직 이상한 지점을 완전히 잡지는 못해서 직접 지적해줘야하는 부분도 있긴 합니다.
그래서 일부는 편집자의 취향이 가미된...? 글이라고 보면 될지도요?
그래도 클로드 3.7은 어떤 글을 쓸 줄 아냐의 예시는 될 것 같아요



# 물망초의 기억

기억은 강물처럼 거꾸로 흐른다. 그렇다, 거꾸로; 어제의 물이 내일을 적시고, 미래의 빛이 과거의 여백을 비추니.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원이다—원—끝과 시작이 만나는 자리. 보랏빛 물망초가 피어나는 그 지점에서, 모든 이야기는 다시 쓰여진다. 다시. 쓰여진다.

## 권(卷) 1: 물망초의 기억

서울, 2020년 가을

비어있는 화분. 이 작은 원형의 공백이 오후의 창가에 놓여 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가을비 소리가 방 안에 울리고—쏴아, 쏴아—그 소리는 서현의 머릿속까지 울려퍼진다. 도시의 불빛이 물잔에 부서져 일렁이고, 시계는 3시 17분을 가리킨다. 연기는 올라가고, 또 올라간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의미. 그런 것이 있을까?

물이 화분으로 흘러들어가고, 그러나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매일 같은 물,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결과. 기다림과 또 기다림. 텅 빈 공간의 지속적인 거부. 거부. 화분은 침묵한다.

시계는 틱, 그리고 톡, 틱, 그리고 또 톡. 액자 속 여자는 미소 짓는다. 미소. 오래된 미소.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미소. 서현은 생각한다—미소는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가? 죽은 이의 미소는 어디에 사는가?

열 권의 노트. 첫 번째 노트는 펼쳐졌다가 닫힌다. 종이의 질감이, 종이가 손가락 끝에 남기는 시간의 무게가 느껴진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만지려 하지만, 결코 진정으로 닿지 못한다—만짐과 만져짐 사이에는 항상 간격이, 넘을 수 없는 공간이 있다.

밤, 침대 위의 수면제 통. 서현의 손가락이 뚜껑을 열었다가 닫는다. 하얀 알약. 먹지 않은 수면. 거부된 망각.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아니, 그것은 서 있다. 아니, 그것은 거꾸로 간다. 셋 모두가 진실이면서 동시에 거짓이다. 서현은 생각한다—어떻게 이 모순을 살아낼 것인가?

꿈에서, 병원 침대. 흰 시트. 그 위에 누운 열아홉 살 소녀. 현실보다 더 진짜 같은 존재감. 비현실 속의 초현실. 달빛이 소녀의 얼굴을 비추고,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비친다.

"너는 나를 기억하니, 아니면 내가 너를 기억하는 걸까?" 소녀의 목소리는 울린다. 전라도 구례의 억양. 들어본 적 없는 친숙함.

소녀의 손바닥 위에 작은 물망초 씨앗 하나. 무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하는 모순의 씨앗. 시간의 무게를 담은 작은 우주.

잠에서 깬 서현의 이마에 땀이 맺히고, 그녀는 화분을 바라본다. 그리고 심장 위에 손을 얹는다. 방의 창문 너머로 어둠이 서현을 응시하고, 서현도 어둠을 응시한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영원한 교환, 끝없는 반사의 놀이.

## 권(卷) -3: 첫 번째 시간

구례, 1983년 8월

빗물. 유리창에 맺힌 무수한 물방울들. 물줄기가 그리는 지도, 안으로도 밖으로도 갈 수 없는 길들의 미로. 창가에 앉은 열아홉 살 소녀, 윤지안. 그녀의 눈동자는 빗방울만큼이나 깊고, 그 눈동자에는 미래가 담겨 있다—아니, 미래는 없다—오직 지금만이 있다—지금—반복되는 지금들.

소녀의 배에 놓인 손. 여기, 작은 우주가 생성 중이다. 외부에서 온 침입자이자 내부에서 자라는 이방인. 지안은 생각한다—내 몸에 또 다른 시간이 자리 잡았다.

그녀의 손에 펜. 공책에는 단 한 문장이 쓰여 있다.
"때로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을 본다."

지안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를 더듬는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생명의 증거. 그곳에 자리한 작은 우주. 지안은 눈을 감고 그 작은 우주를 상상한다. 그리고 그 우주는 점점 커져서 방 안 전체를 채운다—아니, 세상 전체를—그리고 시간 자체를.

펜이 움직인다. 펜이 움직인다. 펜이 움직인다. 의식처럼, 기도처럼.

*가끔 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딸을 본다*
*그 아이는 창가에서 물망초를 키우고 있지*
*내가 늙기도 전에 어른이 된 그 아이*
*하지만 그 눈빛만은 내 눈과 같구나*

시를 쓴 후, 지안은 자신의 글씨를 천천히 훑어본다. 글자들은 종이 위에서 춤을 춘다. 의미는 도망가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포착한다. 혹은 그렇게 생각한다—의미를 포착한다는 것, 그것은 가능한가? 의미는 매 순간 변하는데?

창문 너머 비에 젖은 마을. 흐릿한 산의 윤곽. 수묵화처럼 번진 풍경. 존재와 부재의 경계에 놓인 세계—말할 수 있는 것들과 말할 수 없는 것들 사이의 경계—그곳에 우리는 산다.

비가 그치는 순간, 창가에 살포시 내려앉은 보랏빛 물망초 한 송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꽃. 우연이라는 필연의 선물. 꽃은 말한다—나는 여기 있다. 오직 그것만을.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안은 물망초를 공책 사이에 끼운다. 미래에서 온 편지를 보관하듯. 씨앗을 심는 행위처럼.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작은 행동이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다—아니,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다—세계는 불변하며, 우리는 그 안에서 무의미하게 움직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임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은가?

## 권(卷) 2: 멈춘 시계

세종, 2020년 가을

삼나무 표면 위를 문지르는 강민우의 손가락. 거친 표면이 손바닥에 남기는 저항감. 나무의 나이테. 시간을 그림으로 표현한 자연의 기록. 민우는 생각한다—나무는 시간을 어떻게 경험할까? 성장의 고리들을 축적하며, 매 순간을 기록하며?

"상처는 자국을 남깁니다. 나무는 자신의 상처를 지우려 하지 않아요. 그저 상처 주변으로 더 단단해질 뿐이죠." 민우가 말한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에 남은 희미한 상처를 바라본다. 상처가 아물며 남긴 선. 손금과 섞인 상처의 지도. 모든 지도는 어디로도 인도하지 않는다—지도는 우리가 이미 어딘가에 있다는 환상을 주기 위한 것이다.

파란색 상자. 서른두 번째 생일. 압구정 레스토랑. 와인 잔에 비친 촛불. "지금은 열지 마. 특별한 순간을 위해 남겨둬." 지수의 목소리는 아직도 그의 귀에 울린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시간의 거리는 환상이다.

우연히 본 휴대폰 화면의 메시지.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가능한 빨리 내원하시길..." 그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섬광처럼 찾아온 인식의 순간. 세계가 갑자기 낯설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동일하게 보이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 순간.

빗길. 미끄러진 핸들. 충돌음. 트럭의 경적. 깨진 유리창.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이 다이아몬드처럼 빛난다. 아름다움은 파괴 속에서도 존재한다—아니, 파괴가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파괴를 관통한다.

복도를 오가는 의사들. 벽시계의 초침.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불행을 담은 하얀 봉투.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제자리에서 맴돈다. 끝없는 반복. 영원한 회귀. 민우는 생각한다—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창문을 스치는 바람소리. 가을의 끝자락. 결심의 무게. 내일, 그는 처음으로 그룹 치료에 참석할 것이다. 오늘이 아닌 내일. 항상 내일.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을 기다린다—의미를 지연시키는 존재로서.

## 권(卷) 0: 빈 의자들

세종, 2020년 늦가을

15층 사무실 건물. 회색 복도. 열린 문. 원형으로 배치된 의자들—의자의 원—기하학적 정확함, 감정의 혼돈을 담기 위한 구조. 가장자리 자리에 앉는 서현. 그녀 옆의 빈 의자. 모든 존재는 부재로 둘러싸여 있다. 서현은 생각한다—비어있음은 채워짐의 약속인가, 아니면 영원한 공허함인가?

시계는 3시를 가리킨다. 세션 시작. 비소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경계는 항상 침투당한다.

문이 열리고 비에 젖은 남자가 들어온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빗물. 반지가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순간. 빛은 어둠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그리고 반대로 어둠은 빛이 있을 때만 인식된다. 상호의존적 반대.

"오늘의 주제는 '상실 후의 언어'입니다." 김박사의 차분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진다. 질문을 던진 후 기다리는 침묵. 말하기와 듣기 사이의 공백. 그 공백이 진정한 대화다—말해지지 않은 것들의 무게가 말해진 것들보다 더 크다.

"남편이 사망한 후,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어요. 이제는 '나'만 있어요." 한 여성의 목소리가 떨린다.

"'미래'라는 단어가 달라졌어요.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후... 미래는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니라 위협처럼 느껴져요." 다른 목소리.

언어는 변한다. 의미는 미끄러진다. 동일한 단어, 다른 울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러나 침묵조차 불가능하다—침묵은 더 큰 소리를 품고 있다.

서현의 빨간 매니큐어 흔적을 바라보는 민우의 시선. 언제 바른 매니큐어인지 기억나지 않는 서현. 모든 기억은 허구다. 우리는 기억하지 않고, 재창조할 뿐—과거는 현재의 필요에 맞게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다시 쓰여진다.

반지를 돌리는 민우의 손가락. 금속이 피부를 스치는 소리. 작은 소리. 그 소리만이 실재한다—그 순간, 그 장소에서는, 그 소리가 전부다.

복도의 카펫이 발소리를 흡수한다. 존재의 증거를 지워버리는 세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 옆에 서 있는 민우의 존재감. 서현은 생각한다—이 낯선 사람은 어떤 상실을 껴안고 있는가?

"치료받은지 얼마나 되셨어요?" 갑자기 침묵을 깨는 민우의 목소리. 침묵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두 번째요." 짧게 대답하는 서현. 단어 속에 담긴 경계심.

"효과가 있나요?"

"아직 모르겠어요. 당신은요?"

"오늘이 첫날이에요."

열리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우리는 계속해서 들어가고, 나온다. 그러나 결코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다. 목적지는 환상이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민우가 묻는다. 질문 속에 담긴 작은 용기.

"좋아요." 서현의 짧은 수락. 단어 속에 담긴 가능성.

"강민우입니다." 이름을 말하는 행위. 자신을 소리로 정의하는 순간.

"윤서현이에요." 대답하는 서현. 이름은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소리가 세계를 창조한다—이름을 부르는 것은 존재를 인정하는 것. 인정은 관계의 시작이다.

"왜 서울이 아닌 세종에서 치료를 받으세요?" 민우가 묻는다.

"익명성이 필요했어요. 당신은요?" 서현이 자신의 질문으로 답한다.

"이사 왔어요. 세종으로. 과거를 벗어나려고." 민우의 솔직함.

"기억은 장소를 따라오지 않나요?" 서현이 묻는다.

"그렇죠. 하지만 적어도 거리의 모퉁이마다 그녀를 보지는 않아도 돼요." 민우의 목소리에 스며든 슬픔. 서현은 생각한다—우리는 도망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시도한다. 시지프스처럼.

"당신은요? 어떤 상실이 당신을 여기로 데려왔나요?" 민우가 다시 묻는다.

"어머니요. 1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폐색전증으로." 숫자로 표현된 상실의 시간. 1년. 그러나 그 1년은 어떤 날은 10년처럼, 어떤 날은 10분처럼 느껴진다. 시간의 신축성. 감정은 시간을 늘이고 줄인다.

"당신도 자책하고 있군요." 민우의 통찰.

"당신도요?" 서현의 알아챔.

"매일이요. 내가 운전했어요. 내가 전화를 받으려다 사고가 났어요. 내 실수로 지수는..." 이제 민우의 목소리도 갈라진다. 끝맺지 못하는 또 하나의 문장. 모든 문장은 미완성이다. 우리는 말을 시작하지만, 결코 끝내지 못한다. 의미는 항상 연기된다.

저녁 어둠이 카페 창문을 검게 물들인다. 거리의 네온사인들이 빗방울을 통해 분산된다. 작은 무지개. 아름다움은 우연의 산물이다—계획되지 않은 만남들의 축적.

커피잔 바닥에 남은 찌꺼기. 식어버린 커피의 쓴맛. 창밖으로 계속되는 비. 그들의 대화는 그렇게 흘러간다. 두 개의 상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두 개의 미완성된 애도가 교차하는 공간에서. 끝은 있지만, 결론은 없다—끝은 물리적 중단일 뿐, 의미의 완성은 아니다.

## 권(卷) 4: 기억의 고고학

세종, 2020년, 겨울

세 번째 치료 세션 이후. 카페. 창가 자리. 12월의 첫눈.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결정체들. 그들이 땅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는 눈송이들. 태어나자마자 죽는 시간의 파편들. 서현은 생각한다—우리의 삶도 그러한가? 우주의 관점에서는, 우리도 눈송이처럼 순간적인 존재인가?

서현과 민우는 이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조심스럽다. 두 사람 모두 친밀함이라는 위험한 영토에 발을 들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상실의 가능성도 커진다—사랑과 상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서현은 창밖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생각한다.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첫눈은 세상을 다시 쓰는 거야." 기억 속의 목소리는 때로 현실의 소리보다 더 선명하다. 부재는 현존보다 더 강력하다—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크게 울린다.

"이번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 민우가 묻는다.

"왜요?" 서현의 경계.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보려고 해요. '기억의 지도: 장소와 트라우마'라는 전시가 있대요."

"서울에요?" 서현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스며든다.

"네. 제가 조금...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서울로 돌아갈." 민우의 목소리에 담긴 용기.

"같이 가실래요?" 초대하는 민우.

"좋아요." 수락하는 서현. 두 단어 속에 담긴 기대와 두려움의 복합체.

토요일, 두 사람은 국립현대미술관 앞에서 만난다. 미술관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두 사람. 전시장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평일 오전, 관람객이 많지 않은 시간대. 그들은 천천히 작품들을 감상한다. 서현은 생각한다—미술관은 시간을 보관하는 장소인가? 아니면 시간을 망각하는 장소인가?

한 작품 앞에서 민우가 멈춘다. 수백 개의 작은 빨간 실핀들이 서울 지도에 꽂혀 있는 설치미술. 각 핀은 개인적 상실의 장소를 표시한다. 집단적 기억의 지도. 도시는 상실의 집합체다—도시는 무수한 개인적 비극들의 총합이다.

"당신의 핀은 어디에 꽂을 건가요?" 서현이 묻는다.

민우는 한강대교 위에 핀을 꽂는다. "여기서 사고가 났어요."

서현은 강남의 한 병원 위치에 핀을 꽂는다. "어머니가 여기서 돌아가셨어요." 핀을 꽂는 행위. 의미를 고정시키려는 헛된 시도.

노인의 인터뷰 영상이 재생된다. "상실 후에는 시간이 두 갈래로 나뉩니다. 그 사건 전과 후.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만약에'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에 그날 비가 오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다른 길로 갔다면..."

서현이 헤드폰을 벗을 때, 그녀는 민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한다. 두 시선의 만남. 인식의 순간.

"시간이 두 갈래로 나뉜다고 하더군요. 사건 전과 후로." 서현이 말한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끊임없는 '만약에'의 질문들."

"들으셨어요?" 서현이 놀란다.

"이전에 왔었어요. 혼자서." 민우의 고백.

"왜 다시 오셨어요?" 서현의 의문.

"함께 보고 싶었어요. 당신과." 민우의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대답. 서현은 생각한다—함께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것? 다른 것을 같게 보는 것?

전시장의 마지막 방은 '치유의 공간'이라 불린다. 서현은 가방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낸다. 어머니의 필체로 쓰인 메모.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그녀가 도쿄에서 돌아왔을 때, 이 메모만이 어머니의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메모는 존재했지만,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았다—존재와 부재의 기이한 공존.

민우도 주머니에서 낡은 영화표를 꺼낸다. "지수와의 첫 데이트에요. 그날 본 영화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녀의 웃음소리는 아직도 선명해요." 기억의 선택성.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 것인가. 우리는 선택하지 않는다. 선택되어질 뿐—기억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자율적 존재다.

여기, 이 테이블 위에 수천 개의 서로 다른 상실이 놓여있다. 개인의 슬픔이 모여 집단적 애도의 풍경을 이룬다. 그러나 각자의 고독은 여전히 절대적이다—고독은 공유될 수 없다—우리는 서로의 고독을 인정할 뿐이다.

"식사하실래요?" 민우가 묻는다.

"좋아요. 근처에 괜찮은 곳 알아요." 서현이 답한다.

저녁 식사 테이블. 붉은 와인 두 잔. 때로는 웃음소리도. 웃음은 슬픔의 다른 형태다—웃음과 슬픔 사이에는 얇은 막만이 존재한다.

"다음 주에도 만날 수 있을까요?" 민우가 묻는다.

"물론이죠. 전시회 말고 다른 걸 해봐요." 서현의 제안. 그녀는 생각한다—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것, 그것이 치유인가?

눈 내리는 플랫폼에서, 서로 다른 방향의 기차를 기다리는 두 사람. 흰 눈이 내리는 밤, 두 개의 별도 궤도가 서서히 하나의 원을 그리기 시작하는 순간. 아니, 환상일 뿐. 모든 궤도는 평행하다. 만남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시도한다—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는 인간의 집요한 욕망.

## 권(卷) 5: 먼지 속의 빛줄기

서울, 2021년 초봄

봄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후. 서현의 아파트 현관문 앞에 서 있는 민우. 초인종을 누르기 전 망설이는 손가락. 세 달. 그들이 처음 만난 지 세 달이 지났다. 만남을 반복하다 보면, 친밀함이라는 환상이 생겨난다—친밀함, 그것은 거리의 환영이다.

문이 열리고 서현이 나타난다. "어서 와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예전의 날카로움은 사라졌다.

서현의 아파트는 민우가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넓은 공간에 가구는 거의 없었다. 미니멀한 인테리어. 필수적인 것만 남겨둔 공간.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만이 공간을 지배했다. 부재를 채우려는 텍스트의 과잉—단어들이 빈 공간을 대체한다.

"생각보다 미니멀하네요." 민우가 말한다.

"필요한 것만 두려고 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물건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져서요." 서현이 설명한다. 물건들의 무게—그것은 물리적 무게가 아니라 감정적 무게다.

민우는 창가에 놓인 화분을 발견한다. 작은 새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연한 초록색의 줄기가 흙을 비집고 나와 있었다. 새로운 것은 없다. 단지 형태가 변할 뿐—생명은 계속해서 자신을 변형시킨다.

"이게 어머니의 화분인가요?" 민우가 물었다.

"네. 마침내 싹이 텄어요." 서현의 목소리에 경이로움이 담긴다.

"어떤 꽃인지 알아요?"

서현은 고개를 젓는다. "아직은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그냥 '네가 필요할 때 피어날 거야'라고만 하셨어요." 예언적 언어—언어가 현실이 되는 순간들.

그들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는다. 빗소리가 창문을 울리고 있었다. 차를 마시는 소리만이 공간에 울려 퍼진다. 침묵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순간.

서현은 낡은 노트를 꺼낸다. "어머니의 시집이에요. 마지막 몇 페이지를 빼고는 다 읽었어요."

"정말 보여주실 건가요?" 민우의 놀라움.

"네. 당신이라면... 이해할 것 같아서요." 서현의 신뢰. 민우는 생각한다—신뢰란 무엇인가? 낯선 이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는 용기인가?

*내 딸에게*
*기억은 강물처럼 때로는 거꾸로도 흐른단다*
*옛날이 내일을 만들고 내일이 옛날을 다시 그리지*
*네가 이 글을 읽을 때 나는 이미 물망초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창가에 머물며 너의 숨결을 기다리는*
*작은 꽃잎의 떨림으로*
*슬픔이란 사랑이 그리는 그림자*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
*나를 기억해도 좋아, 하지만 붙들진 말아다오*
*언젠가 네가 엄마가 되면*
*넌 다시 나를 만나게 될 거야*
*내가 너의 눈동자였던 적도 있었고*
*네가 나의 심장이던 때도 있으니*

시가 끝나고 서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울음은 웃음의 다른 형태이다—감정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감정은 하나의 대양이며, 우리는 그 물결의 다양한 높이를 경험할 뿐이다.

"물망초군요." 민우가 마침내 말했다. "화분에 심어진 씨앗이."

"어머니는 처음부터 알고 계셨어요. 모든 것을." 서현은 생각한다—어머니는 어떻게 알았을까? 지식은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가?

"당신 차례예요," 서현이 갑자기 말했다.

"네?" 당황한 민우.

"지수가 남긴 상자요. 열어볼 때가 된 것 같아요."

민우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직면과 회피 사이의 투쟁—우리는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다—진실의 양면성.

"아직은..."

"함께 할게요," 서현이 말했다. "당신이 제게 해준 것처럼요."

"다음 주말에... 제 집에 와주실래요? 세종으로요. 그때 열어볼게요, 같이."

"좋아요. 세종으로 갈게요." 약속. 미래를 향한 작은 걸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서현의 젖은 눈가를 비추었다. 눈물 자국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순간. 서현이 눈물을 닦는 동안 민우는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평화로움이 깃든 것을 보았다. 무언가를 내려놓은 후의 가벼움. 끝을 받아들인 후의 새로운 시작. 아니, 착각이다. 끝은 없다. 단지 다른 형태의 계속일 뿐—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의 가면을 쓰고 있다.

## 권(卷) 6: 봄날의 서리

세종시, 2021년 봄

기차 창문에 비친 서현의 모습. 서울에서 세종으로 향하는 철로 위의 여정.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 내면과 외부 세계의 교차점. 모든 여행은 제자리걸음이다—우리는 어디로 가든 자신을 데리고 간다.

기차 좌석에 놓인 그녀의 가방. 가방 안에는 작은 선물. 민우를 위해 산 손수건. 깔끔한 남색 바탕에 흰 테두리가 있는. 선물의 의미를 고민하는 그녀의 마음.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감의 표현. 선물은 줄 때부터 이미 상실된 것이다—우리는 소유하기 위해 포기한다.

민우의 집은 세종시 외곽의 작은 단독주택이었다. 데크와 화분들. 정돈된 정원. 손이 많이 간 흔적들. 우리는 계속해서 흔적을 남기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지워진다—흔적은 지워지기 위해 존재한다.

내부는 예상과 달리 따뜻했다. 단순하지만 정교한 목재 가구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민우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대부분 제가 만든 거예요. 지수가 세상을 떠난 후, 목공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상실 후의 새로운 시작—우리는 상실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다.

벽면에 걸린 그림들. 풍경화, 추상화, 초상화. 모든 그림은 부재의 재현이다—예술은 부재를 현존으로 변형시키는 마법이다.

"이건 지수가 그린 거예요." 민우가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사진작가였지만, 가끔 그림도 그렸어요."

물감의 층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색채는 현실보다 더 선명했다. 그러나 색채가 밝을수록, 그 이면의 어둠은 더 짙어진다—빛의 강도는 그림자의 깊이를 결정한다.

"아름다운 그림이에요." 서현이 말한다. 아름다움—그것은 정의할 수 없지만 인식할 수 있는 것.

거실로 이동하는 두 사람. 테이블 위에 작은 파란색 상자. 상자는 더러움 하나 없었다. 매일 닦은 흔적.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의식이었다—의식을 통한 기억의 보존.

"이건 지수의 상자예요. 그녀가 3년 전에 준 선물이 담긴 상자."

민우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덮개를 들어올리는 느린 동작. 숨을 멈추는 순간. 안에는 낡은 회중시계가 들어있었다. 골동품처럼 보이는 은색 회중시계. 그리고 작은 편지.

시계의 표면은 반짝인다. 시간을 멈춘 기계의 아이러니. 정지된 시간의 물리적 증거—시간은 멈추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고정시키려 한다.

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열었다. 그리고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민우에게,
이 시계는 내 할아버지의 것이었어.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유일한 물건이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항상 기억하라는 의미로 너에게 주고 싶었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 우리가 함께 있길 바라.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더 이상 곁에 없다면, 슬퍼하는 것은 괜찮아. 하지만 그 슬픔에 갇히지는 마.
나는 너와의 모든 순간이 행복했어. 네가 준 사랑에 감사해.
영원히 사랑하며,
지수"

편지의 마지막 단어가 공기 중에 울렸다. 그 울림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소리의 부재는 더 큰 소리다—침묵은 모든 소리를 포함한다.

"그녀는 알고 있었어요," 민우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병에 대해서...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도."

"그녀는 당신이 다시 행복해지길 원했어요," 서현이 말했다. 단순한 진실—사랑은 상대의 행복을 원한다, 자신이 그 행복의 일부가 아닐 때에도.

민우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 바늘은 7시 2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수가 사망한 시간. 그 순간에 멈춰진 시간의 상징.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우리의 내면 시계는 외부 시간과 다르게 움직인다.

"태엽을 감아보세요," 서현이 말했다. 그 말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은유였다—다시 시작하라는.

민우는 조심스레 시계의 태엽을 감았다. 오래된 기계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틱, 톡. 틱, 톡. 시간은 계속된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시간은 우리가 허락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길 원했어요," 서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민우는 고개를 들어 서현을 바라보았다. 슬픔과 희망이 공존하는 표정. 끝과 시작이 맞닿은 순간. 모든 끝은 다른 시작의 환영이다—우리는 순환 속에 살고 있다.

"오늘부터... 지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게요," 그가 말했다.

민우의 손이 서현의 손에 닿았다. 작은 접촉. 그것은 환상이었다. 모든 접촉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시도한다—접촉의 불가능성이 접촉의 욕망을 만든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민우. 요리의 소리와 냄새가 공간을 채운다. 식탁을 세팅하는 서현. 함께하는 일상의 작은 의식들. 의식이 의미를 만든다. 의미는 환상이다—그러나 그 환상 없이는 살 수 없다.

"요리를 잘하시네요," 서현이 말했다.

"지수가 가르쳐줬어요. 그녀는 요리에 재능이 있었죠." 자연스럽게 지수를 언급하는 민우.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 말함으로써 존재하게 하는 마법—언어는 부재를 현존으로 변환한다.

저녁 식사 후, 그들은 집 뒤뜰로 나왔다. 봄밤의 차가운 공기. 별이 빛나는 하늘. 별빛은 죽은 별의 흔적일 뿐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것들이다—현재는 과거의 환영이다.

감나무 아래 앉은 두 사람. 나무에는 벌써 작은 꽃봉오리가 맺히고 있었다. 계절을 앞서가는 나무의 생명력. 계절조차 환상이다—자연은 우리의 범주화를 조롱한다.

"이 나무는 계절을 무시해요," 민우가 말했다. "계획에 없던 유일한 것이었죠, 이 집에. 베려고 했지만, 어쩐지 그럴 수 없더라고요."

"나무는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어요," 서현이 말했다. "어머니가 그랬어요. 식물은 우리의 시계를 따르지 않는다고."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서로 다른 리듬, 서로 다른 흐름, 그러나 동일한 우주 속에 존재한다.

바람이 불었다. 흰 꽃잎이 서현의 머리카락 위로 떨어졌다. 민우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함께 그것을 바라보았다. 떨어진 꽃잎. 일시적인 아름다움. 모든 아름다움은 죽음의 예고다—아름다움은 덧없음을 전제로 한다.

아침, 부엌에서 커피를 준비하는 민우.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 식탁 위에 놓인 간단한 아침 식사. 식탁에 앉은 서현. 일상의 반복. 무의미의 축적—그러나 반복 속에서 의미가 생성된다.

"돌아가기 전에 근처 호수공원에 갈까요?"

"좋아요."

호수공원의 산책로. 나란히 걷는 두 사람.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의 표면. 벚꽃이 피기 시작한 나무들. 아름다움은 시간 속에서 부패한다—그러나 부패도 아름다움의 일부다.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 있어요?"

"이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세종에서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서현의 미완성된 문장—완성은 불가능하다.

"당신은요? 구례에 가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어머니의 고향이니까요. 언젠가 가봐야겠죠."

"함께 가면 어떨까요? 다음 달에 휴가를 내서..."

서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소지었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계획—미래를 향한 작은 약속—아직 도착하지 않은 순간을 상상하는 용기.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 민우는 서현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만질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만지는 체한다—모든 접촉은 환상이지만, 그 환상이 우리를 지탱한다.

"전화할게요," 서현이 말했다.

"기다릴게요," 민우가 대답했다.

기차가 플랫폼에 도착하는 소리. 열리는 문. 탑승하는 서현. 창가에 서서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 플랫폼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민우.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차. 멀어지는 두 사람의 거리. 모든 만남은 이별을 향해 달려간다. 모든 시작은 끝을 잉태한다—이것이 삶의 리듬이다.

## 권(卷) -2: 꿈의 역행

서울, 2025년, 겨울

병원 복도의 밝은 조명. 살균제 냄새가 가득한 공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 삶은 죽음의 다른 형태다—죽음은 삶의 다른 형태다—모든 것은 변형이다.

병원 침대. 하얀 시트 위에 누운 서현. 진통제 때문에 정신이 몽롱했다. 민우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완전히 잡을 수 없다—접촉은 항상 부분적이다.

병실로 들어오는 간호사. 그녀의 팔에 안겨 있는 작은 생명체.

"여자아이에요," 간호사가 말했다. 이름 없는 존재의 첫 명명—성별이라는 범주화—아직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존재에 첫 경계를 그리는 순간.

서현은 아기를 안고 내려다보았다. 작은 얼굴, 꼭 감은 눈,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 방금 세상에 나온 존재의 취약함. 우리는 취약함으로 시작해서 취약함으로 끝난다—취약함은 우리의 본질이다.

아이에게서는 이상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우리는 모든 얼굴을 이미 본 적이 있다. 모든 얼굴은 같다—모든 인간의 얼굴 속에는 전체 인류가 담겨 있다.

"이름은 뭐라고 지을 거예요?" 민우가 물었다.

"미래," 서현이 말했다.

단어이자 이름. 시간이자 정체성. 미래는 이미 과거다—과거가 미래를 품고, 미래가 과거를 재창조한다.

아이가 눈을 떴다. 세상을 처음 보는 눈. 그 눈동자는 검고 깊었다. 우주의 깊이를 담은 듯한 눈동자. 서현은 그 눈에서 어머니의 눈을 보았다. 모든 눈은 같은 빛을 담고 있다—보는 행위의 영원한 연속성.

창가에는 보랏빛 물망초가 만개해 있었다. 계절을 무시하고 피어난 꽃. 생명은 규칙을 무시한다. 그러나 결국 모두 같은 끝을 맞이한다—모든 규칙 위반에는 대가가 따른다.

민우는 창가의 물망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경이로움이 가득했다. 경이로움도 환상이다—그러나 필요한 환상.

병실의 창문으로 보이는 겨울 하늘. 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첫눈. 모든 것을 새롭게 덮는 하얀 눈. 그러나 덮은 것들은 여전히 그 아래 있다. 숨겨진 것일 뿐, 사라진 것이 아니다—잊혀짐은 없다, 단지 보이지 않게 됨만이 있다.

## 권(卷) 7: 물망초의 기억

서울, 2029년 봄

북촌의 한옥. 서울 도심 속 전통의 섬.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공간. 모든 공존은 일시적이다—우리는 항상 과도기에 살고 있다.

창틀을 넘어온 오후의 햇살이 마루에 사각형의 그림자를 그렸다. 빛과 그림자의 기하학. 그림자의 가장자리가 시간에 따라 미세하게 움직였다.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그 흔적은 남긴다—우리는 시간을 직접 볼 수 없지만, 그 효과를 본다.

서현의 손가락이 물망초 꽃잎을 스쳤다. 살아있는 것들 사이의 교감. 생명과 생명 사이의 미묘한 진동. 만짐과 만져짐 사이의 모호한 경계—우리는 만지면서 만져진다.

마당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미래. 여덟 살 소녀의 집중력. 책의 세계에 잠긴 아이. 책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우리는 허구를 통해 진실에 도달한다.

민우는 부엌에서 돌아왔다. 손에는 두 잔의 차. 그의 손등에 흐르는 푸른 혈관은 시간의 강을 닮았다. 우리의 몸은 시간을 기록한다. 우리는 시간의 기록이다—살아있는 시계.

미래가 물망초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다. 꽃잎을 조심스럽게 만지는 작은 손가락. 아이의 호기심.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갈증—지식에 대한 근원적 욕망.

"이 꽃은 원래 어디 사는 거야?"

"유럽이야. 원래는 이방인이지." 서현이 대답했다.

"왜 여기로 왔어?"

"누군가 데려왔겠지. 식물에게는 국경이 없으니까." 서현이 말한다. 그녀는 식물과 인간의 여정을 비교한다—이동과 정착, 뿌리내림과 적응, 생존을 위한 변화.

서현은 오늘이 어머니가 떠난 지 9년째 되는 날임을 떠올렸다. 특별한 날. 기억의 날. 어제 밤 그녀는 또다시 그 꿈을 꾸었다—병원 복도를 끝없이 달리는 꿈. 우리는 계속 달리지만, 결코 도착하지 못한다—모든 여정은 과정일 뿐, 목적지는 환상이다.

서현은 창가에 앉아 물망초를 바라본다. 그 작은 꽃을 통해 어머니와 연결되는 느낌. 환상적 연결. 죽은 자와의 대화—부재자와의 대화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다.

민우는 창가에 앉아 있는 서현의 등 뒤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댔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게 하는 접촉. 모든 접촉은 환상이다—그러나 필요한 환상.

"오늘 뭐 하고 싶어?" 그가 물었다.

"자장면 먹으러 갈까?" 서현이 말했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 평범한 음식을 통한 추모. 먹음으로써 기억하기. 맛의 기억, 육체의 기억. 기억은 망각의 다른 이름이다—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재구성된 과거다.

갑자기 미래가 물망초를 가리키며 외쳤다. "엄마, 꽃이 말해요!"

아이다운 상상력의 표현.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아이들은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

"뭐라고 말하는데?"

"기억하래요. 하지만 슬퍼하지는 말래요."

서현과 민우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의 공유. 그들은 결코 어머니의 마지막 시를 미래에게 읽어준 적이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더 많다. 빈 공간이 가득 차 있다—모든 공허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충만으로 가득 차 있다.

"누가 그렇게 말했어, 미래야?" 서현이 물었다.

"여기 있는 할머니요." 미래가 대답했다. 그녀는 빈 공간을 가리켰다—빈 공간은 없다, 단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공간만이 있다.

그날 오후, 그들은 어머니가 좋아했던 자장면을 먹으러 갔다. 평범한 중국집. 테이블 위에 놓인 세 그릇의 자장면. 미래의 얼굴에 묻은 검은 소스. 웃음이 가득한 식사 시간. 이것이 그들의 추모 방식이었다. 슬픔 대신 기쁨으로, 부재 대신 존재로 기억하는 방식. 기억은 망각의 반대가 아니라 다른 형태의 망각이다—우리는 기억하면서 변형한다.

시간은 때로 수수께끼처럼 움직인다. 직선이 아닌 원으로. 시작과 끝이 맞닿은 형태로. 기억은 강물처럼 흐르지만, 때로는 거꾸로 흐르기도 한다.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만들어간다. 어머니 윤지안은 열아홉 살에 태어나지 않은 딸을 보았다. 그 딸은 이제 자신의 딸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어머니를 본다. 시간의 나선. 하지만 나선은 착각이다. 우리는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혹은 그렇게 느낀다, 전진하면서도.

서현은 이제 이해한다. 상실은 끝이 아니라 변형이라는 것을. 사랑했던 이들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우리 안에, 우리 주변에 남는다는 것을. 때로는 꿈속에서, 때로는 아이의 눈동자에서, 때로는 물망초의 꽃잎에서. 모든 변형은 환상이다. 사라짐만이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의미를 찾는다. 끝없이, 무의미하게, 아름답게—의미 없음의 의미, 그것이 우리의 위안이다.

## 권(卷) -1: 미래로부터의 편지

서울, 2045년, 겨울

스무 살 미래의 방. 벽에 걸린 사진들. 책장에 꽂힌 다양한 책들. 물려받은 시간의 균열—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기억의 파편들.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송이. 겨울의 정적. 미래는 창가에 앉아 편지를 접는다. 오래된 편지지에 정성스럽게 쓴 글씨. 그 순간, 오래된 시계가 한 번 맑게 울렸다. 지수 할머니의 회중시계. 시간은 흐르지만, 우리의 기계는 그것을 분절하여 거짓된 질서를 만든다—인간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 다르다.

창가에 앉은 스무 살 미래. 그녀의 나이는 조모가 서현을 임신했을 때의 나이와 같다. 시간의 순환. 반복되는 나이, 반복되는 순간. 무한한 변주 속의 동일한 주제—인생은 변주곡이다.

물망초가 창가에 피어 있다. 겨울이지만, 이 꽃은 계절을 무시한다. 세대를 이어 돌봐온 식물. 생명의 집요함. 무의미한 지속—지속 자체가 의미다.

미래의 손에는 낡은 시집이 들려 있다. 「시간의 접힘」, 할머니의 시집. 표지가 닳도록 읽은 책. 그녀는 이 책을 수백 번 읽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작나무로 만든 작은 상자—상자 속의 상자, 이야기 속의 이야기.

미래는 창밖을 바라본다.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보인다. 2045년의 변화된 도시 풍경. 그녀의 머릿속에는 동시에 여러 시간대가 겹쳐 보인다—1983년의 구례, 2020년의 서울,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 시간은 선형적이지 않다. 모든 때가 지금이다. 과거와 미래는 환상이다. 오직 지금만이 실재한다—현재라는 좁은 문을 통해 영원에 접근한다.

그녀는 새 공책을 펼친다. 첫 페이지에 날짜를 적는다. 2045년 12월 21일, 동지(冬至). 가장 긴 밤. 가장 짧은 낮. 어둠이 극에 달한 후 다시 빛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전환점. 그리고 그녀는 쓰기 시작한다—쓰기는 시간을 거스르는 행위다.

*나의 할머니에게,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어머니에게*
*내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당신은 아직 열아홉 살*
*창가에 앉아 비를 바라보고 있겠지요*
*그리고 곧 첫 시를 쓰게 될 거예요*
*태어나지 않은 딸에 대한 시*
*나는 그 시의 여백을 채우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

미래는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본다. 창 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하얀색으로 덮인다. 모든 흔적이 지워지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준비가 된다—눈은 지우개이면서 동시에 새 캔버스다.

미래는 창문을 열고 손을 뻗어 눈송이를 잡는다. 차가운 결정체. 그것은 그녀의 따뜻한 손바닥 위에서 녹아 물이 된다. 눈에서 물로, 물에서 증기로—모든 것은 변화한다, 형태를 바꾼다, 그러나 본질은 남는다.

미래는 창문을 닫고 코트를 입는다. 오늘 저녁, 그녀는 부모님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동지를 기념하는 가족 모임. 해마다 이어온 전통. 반복은 의미의 환상을 만든다—의식은 시간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자작나무 상자를 집어 가방에 넣는다. 어머니에게 보여주기 위해. 무언가를 담은 상자. 상자 속의 상자. 무한히 이어지는 상자들. 우리 모두는 열리기를 기다리는 상자다—열리면 다른 상자가 나타나는.

그리고 그녀는 알고 있다. 이 상자는 언젠가 다시 과거로 여행할 것이며, 1983년의 어느 비 오는 날, 한 젊은 임산부의 손에 들려있을 것이라는 것을. 시간의 역설. 모든 것은 이미 일어났고, 동시에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모든 순간은 이미 존재하며, 우리는 단지 그 순간들을 지나갈 뿐이다.

거실에 놓인 가족사진. 서현과 민우, 그리고 어린 미래. 벽난로 위에 놓인 회중시계. 책장에 꽂힌 「시간의 접힘」. 창가에 피어있는 물망초.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흐른다. 때로는 앞으로, 때로는 뒤로.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물결 위에서 춤을 춘다. 여백의 시간 속에서. 무의미한 춤. 아름답고 절망적인 춤—삶이라 부르는 움직임.

미래는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물체를 꺼낸다. 물망초 씨앗 한 알. 그녀는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그것은 언젠가 어딘가에 심어질 것이다. 어쩌면 1983년 구례의 어느 창가에.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에. 혹은 그 이전의 어느 시점에. 시작은 없다. 끝도 없다. 오직 중간만이 있다—우리는 항상 중간에 있다.

그녀는 아파트 문을 열고 나간다. 눈 내리는 거리로. 그녀의 발자국은 곧 새로운 눈으로 덮일 것이다. 우리가 남긴 모든 흔적은 지워진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시간을 가로지르는 기억의 씨앗으로. 무한히 쓰여지고, 무한히 지워지는 이야기. 보랏빛 물망초가 피어나고 시들듯이—피어남과 시듦 사이의 모든 순간들이 의미다.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채. 그러나 우리는 움직인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만이 전부다—움직임 자체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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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 이렇게 한 분야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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