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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3/30 00:23:41
Name   카르스
File #1   20240319_185841.jpg (204.7 KB), Download : 4
Subject   양승훈,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서평.


우선 개인적인 질문에서 시작하자.

지역경제와 인구경제 이슈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울산과 지역소멸 이슈를 접할 때마다 이상함을 느낀다.
울산을 포함한 동남권 제조업 도시들의 몰락과 지역소멸 문제가 심각하다고는 하는데,
데이터를 찾아보면 통념과 다르게 나오거나 의아하게 나올 때가 많다.

먼저 울산의 이상한 점부터 이야기해보자.






1) 첫째, 울산은 비수도권에서 이상할 정도로 GRDP와 소득 수준이 높다. 그렇게 서울로 집중되서 문제라고 하는데, 울산은 GRDP나 소득 기준으로 서울과 비슷하거나 더 높다!
2) 발전한 광역시라 중소도시/군을 포함한 도 지역에 비해 남초 현상이 옅어야 하나 남초 현상이 도 지역 급으로 심각하다. (위의 첫번째 사진) 다른 대도시들은 도에서 여성을 끌어들여 남초 경향이 도에 비해 옅은 편인데, 울산은 예외이다.
3) 발전한 도시임에도, 수도권으로의 인구 유출이 제일 심각한 축이다. (위의 두번째 사진)
4) 분명히 조선업은 위기를 넘겼다던데, 노동시장에서 들려오는 괴담들을 보면 정말 위기를 넘겼나 싶다.

더 나아가서 한국의 지역격차 문제도 사실 이상하다.



지방 소멸이 어떠니 수도권-지방격차가 심각하니 하는데,
한국의 지역격차는 사실 OECD에서 제일 낮은 축이다! GRDP, 소득 어떤 기준으로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왜 사람들은 지역소멸 문제가 생각하다고 보는 것일까.

그러던 나는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알게 되어 서평 신청을 했고, 인상깊게 잘 읽었다.  
고백하자면, 예전부터 이쪽 이슈에 관심이 많았기에 들어본 이야기가 많았지만,
잘 쓰여 있어서 내용을 다시한번 포괄적으로 정리해볼 수 있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울산을 위시한 한국의 동남권 도시들은 제조업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여 한국을 제조업 강국으로 만들고 고도성장을 일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울산은 임금이 꽤 높은 제조업 대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지속가능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투쟁과 불신으로 가득한 노사관계는 탈숙련 자동화에 치중된 산업구조를 만들어서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어렵게 만들었다. 대기업들은 고임금을 주지만, 이들이 사람을 안 뽑는 상황에서 원하청 관계의 악화로 남은 일자리는 저임금 하청 일자리뿐이다. 기업과 대학 간의 연계는 충분하지 못하며, 혁신을 이끌어야 할 과학기술 인력과 연구소는 죄다 수도권과 충청지역에 위치하여 현장 공장과의 괴리가 생겼다. 남초 고임금 제조업에 치중된 산업구조로 여성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는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외벌이 가족이나마 가능케 한 가부장적인 고임금 남성 외벌이 모델은 남성 제조업 일자리의 열화로 수명을 다했다. 그렇게 남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울산을 떠나고 있으며, 이 문제는 구조적이기에 일시적인 위기 극복 정도로 회복할 수 없다. 울산은 이대로라면 구조적인 몰락은 피할 수 없다!


GRDP/소득이 높다는 통계 이면에 숨어있는, 원하청 착취에 기인한 남성 외벌이 고임금 일자리로 겨우 지탱되어온 가부장적 가족 모델. 그 모델이 무너지는데, 여성이 취직할만한 제조업 밖 좋은 일자리는 전무한 상황.
청년들은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고 울산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위에서 언급한 울산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GRDP/소득으로 드러나지 않는 한국 지역격차의 문제를 곱씹어볼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인 의문을 많이 푼 것을 넘어, 전반적으로 기대를 한참 뛰어넘은 명저이다.  
비수도권의 쇠락, 제조업 위기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필독서이다.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첫째로, 울산의 구조적 문제를 매우 포괄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노사관계, 산업구조, 기술과 혁신, 국제정세, 젠더 이슈, 지역경제, 대학과 산업 등등. 뒤에서 상술했듯이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개론서로서 매우 적합하다. 머리속에 큰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도록 쓰였다.

두번째로, 전반적인 경향성을 강조하면서도 경향 내부에 숨은 이질성을 놓지지 않는다. 이는 저자의 깊은 식견과 공정한 견해를 드러낸다. 세 가지 예시만 들자면
1) 울산의 일자리와 가족 형성 문제를 남성과 여성 모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2) 울산의 대학을 단순히 지방대로 싸잡지 않으며, 과학기술 중심의 UNIST와 종합대학교인 울산대의 차이를 분명히 한다. UNIST가 성과만 보면 국내 탑 티어급 대학인데, 왜 지역에서 비판을 들으며 지역경제 혁신을 뒷받치는 데 한계가 있는지를 잘 알게 만들었다.  
3) 울산을 제조업도시로 유명한 동남권의 포항/창원시와 비교하며 울산의 특수성을 부각시킨다. 그리하여 울산을 한국 제조업 도시들을 대변하는 예로 쓰면서도, 울산 특유의 분위기를 놓치지 않는다.

세번째로, 울산 더 나아가 동남권 산업도시들의 분명한 위기를 이야기하면서도, 한국 제조업의 몇몇 성취와 잠재력을 인정하여 위기 극복의 대안으로 삼으려는 멋진 태도를 보인다. 보통 이런 주제의 사회이슈 고발 책은 명료한 비판을 위해 한국을 과도하게 깎아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러한 경향의 예외이다. 한국의 눈부신 성취를 인정하며, 다음 시대를 위한 어젠다를 자신있게 내세운 책 『추월의 시대』 공저자의 후속작답다.


물론 책에 아쉬운 면모도 여럿 있었다.

첫째, 서구 선진국과 한국을 비교하면서, 경제 발전 시점의 차이에 덜 집중하였다. 이 책은 왜 한국 제조업 벨트가 유럽 도시들에 비해 숙련성이 약하며 자동화에 집중하였는지를 노사관계와 원하청 관계, 미국의 트렌드에 치중하여  서술하였다. 비록 포괄적인 분석이긴 하나, 한국은 신흥국이며 유럽은 기성 선진국이었다는 구도를 간과한 듯 하다. 유럽은 기술 수준이 낮던 시기에 산업을 발전시켰고 신흥국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한국은 기술 수준이 고도화된 뒤늦은 시기에 산업을 발전시켰고 유럽을 앞서야 했던 상황이다. 저자는 유럽의 고숙련 저자동화 경로를 따라할 수는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살짝 동경하는 듯 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유럽의 경로대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이 요소를 감안하지 않으면, 한국 입장에서 과도하게 가혹한 평가가 될 소지가 있다고 본다.

둘째, 베이비붐 세대(광의의 관점에서 1955-1974년생)의 은퇴가 울산 산업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언급이 부족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인구 문제는 매우 심각하고, 지역의 흥망성쇠와도 깊게 관련된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곧 들이닥칠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산업에 미칠 영향에 대한 언급이 부족한 건 아쉽다.  물론 이 문제에 저자가 어떤 식으로 답할지는 예상되긴 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새로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기는 커녕, 저임금 하청일자리와 자동화된 공장만 남긴다고 하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 부분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 건 아쉽다. 홍춘욱은 『인구와 투자의 미래 확장판』 신간에서, 호봉제 체제를 통해 과도한 고임금을 받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가져다줄 산업 발전과 일자리 창출의 기회를 강조한다. 이 낙관론에 개인적으로는 100% 동의하지 않지만, 검토해볼 만한 주장은 된다고 본다. 인구 문제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셋째, 울산의 삶의 질과 인프라에 대한 언급이 부족했다. 물론 울산시의 몰락을 제조업에 집중하여 분석한 책이기에, 교통, 문화산업 등에 대한 언급이 적은 건 불가피하다. 하지만 울산 위기의 중심에 놓인, 울산 여성들이 일할 괜찮은 일자리(특히 고임금 서비스업)가 부재하다는 문제를 인프라와 무관하게 놓을 수 있을까? 많은 한국의 비수도권 거주자들은 수도권에 비해서 일자리 뿐만 아니라 인프라나 삶의 질 수준이 낮다고 불평한다. 만약에 보건, 문화 인프라가 울산에 더 지어진다면, 그 인프라는 특히 여성들을 위한 좋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개연성이 높다. 철도 등 교통 인프라를 더 지을 경우(당장 올해부터 태화강역을 지나는 중앙고속선과, 강원도 영동과 부산을 잇는 동해선이 지어질 예정이다) 동남권 벨트의 시너지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났다고 결론짓는 메가시티 담론에 살짝 언급된 후 더 나아가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울산은 돈을 많이 버는 도시인데 삶의 질은 그만큼 높은지 고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구 100만을 넘었음에도 제대로 된 도시철도 하나 없는 도시가 울산이다. 그리하여 차를 끌게 반강제하는 도시 문화는 청년, 특히 여성에게 매력을 낮출 개연성이 높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훌륭한 저서이다.
이 책이 영양가 있고 포괄적인 지역경제 논의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제조업 몰락과 지역 소멸 문제는 그 자체로 사회문제이지만, 사회문제를 넘어 한국이라는 운명공동체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안이기에.



12
  • 갓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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