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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0/31 12:26:33
Name   王天君
File #1   movie_image_(2).jpg (939.1 KB), Download : 5
Subject   [스포] 특종: 량첸살인기 보고 왔습니다.


한밤중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던 젊은 남녀가 살해당합니다. 연쇄살인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에 기자들은 벌떼처럼 몰려들어 기사를 채취하려고 분주합니다. 그 속에서 엉기고 성기며 정신없이 기삿거리를 물어 나르던 허무혁은 광고지면을 채워주던 기업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신나게 깨진 뒤 정직을 처분받습니다. 기자정신 좀 발휘했더니 졸지에 실업자로 나앉게 생긴 허무혁은 아쉬운대로 다른 둥지를 찾아보지만 요즘처럼 공급이 넘쳐나는 인력 시장에서 별 거 없는 기자를 반겨줄 곳은 없습니다. 별거 중인 아내에게 징징대보지만 딱히 풀리는 것도 없고, 직장 내 선배는 게임하느라 바쁩니다. 한숨 권하는 이 상황 속에서 허무혁은 어눌한 목소리의 제보 전화를 받고 깅가밍가 하며 제보자를 찾아갑니다. 경찰의 정보와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이 정황에 흥분해 용의자의 집에 몰래 들어간 허무혁은 섬뜩한 메모와 피투성이 물체를 발견하곤 겁에 질려 뛰쳐나옵니다. 공포를 주체 못하고 벌벌 떨던 허무혁의 머릿 속으로 어떤 사실이 스쳐지나갑니다. 그는 지금 막, 모두가 궁금해하던 연쇄살인범의 실체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고, 기자로서 초특급 대박을 손 안에 쥐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특종: 량첸 살인기는 블랙 코메디와 스릴러가 섞여 있습니다. 일단 영화의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블랙 코메디는 언론을 표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허무혁이 속해있는 언론계는 자본에 휘둘리는 곳입니다. 광고주에게는 쩔쩔매고, 시청률과 타 방송사와의 경쟁에만 혈안이 되어있죠. 그 안에서 허무혁은 착각으로 일을 벌리고 이에 고무받은 주변인들은 맹목적으로 허무혁이 물어온 기사를 부풀려 나갑니다. 자신의 실수인 걸 알아차리지만 이를 바로잡지 못하고 허무혁은 오히려 기사를 허위로 써서 들고 갑니다. 그리고 언론은 이 가짜를 보란듯이 낙아채며 특종이라고 계속 내보내고, 경찰들과 혼선을 빚기에 이릅니다. 한 인간의 섣부른 욕심을 그대로 받아먹고 그럴싸하게 토해내는 이 일련의 과정은 타락한 언론의 생리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언론은 진실을 다루는 곳이 아닙니다. 정보의 희소성, 터트리는 타이밍, 협잡과 기만이 판을 치는 곳이죠.

이렇게 진행되는 블랙 코메디는 다소 무거웠던 초반 분위기와 달리 활기가 넘칩니다. 인물들은 마냥 해맑고, 죽을 상을 한 허무혁은 내내 발을 구릅니다. 이렇게 영화는 블랙 코메디로 웃기는데는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 논리적 전개가 썩 매끄럽지 않아요. 이는 블랙 코메디의 핵심인 부조리가 스스로 성장해 동력을 갖추게 되는 과정이 허무혁의 침묵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이 부분을 주변사람, 대한민국 전체가 휘말린 스케일에 대한 허무혁의 죄책감과 부담감으로 메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한 채 무책임하게 입을 다물고 있기에는 허무혁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가 좀 약한 편입니다. 충분히 말 할 수 있고, 말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다소 인위적인 꽁트로 상황이 넘어가곤 하는데 이럴 때에는 적당히 속아 넘어가주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특종이 고프고 주변에 그렇게 떠밀렸더라도, 보통 성인이 자기 일에서 저렇게 손을 놓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관객이 알아서 잘 달래야 하죠. 대한민국 경찰이 무능하게 그려지는 부분 역시도 관객이 적당히 알아서 삼켜야 하는 부분입니다.

어찌어찌 찝찝한 승승장구를 이어가던 허무혁의 기사에 이상한 댓글이 하나 달립니다. 거짓말쟁이라고 자신을 비웃는 댓글을 추적한 허무혁은 연쇄살인의 진범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평이한 블랙 코메디로 구색을 갖추던 영화는 스릴러로 변모합니다. 태연하게 다가와 자신의 정체를 까발리는 범인 앞에서 관객은 진실의 공포와 무력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눈 앞에 서 있는 살인범은 진실을 농락한 허무혁의 앞에 있는 진짜이자, 사건의 표피에 머무르던 허무혁을 그 안으로 끌어들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허무혁의 공포는 살인마를 앞에 두고 있다는 상황 자체에서 단순히 멈추는 게 않습니다. 진실을 손에 쥔 처단자 앞에 선 거짓말쟁이로서 이 둘은 윤리적 위계가 뒤집힙니다. 누가 봐도 살인마가 나쁜 놈이지만 허무혁은 살인마의 분노를 살만한 짓을 했고 죽어도 싼 놈이 되지요. 또한 허무혁은 진실을 알려서 세상을 바꾼다는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진실에 도달했을 때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칼자루는 살인마의 손에 있고 허무혁은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현실적 비약에도 이 설정이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것은 살인마 역을 맡은 김대명씨의 공이 큽니다. 싸이코패스라는 설정은 흔하지만 먹잇감을 앞에 두고도 이상할 정도의 여유와 침착함을 보이는 연기는 기존의 전형적 싸이코패스와는 차별점이 있습니다.

이 둘의 조우는 진실과 거짓의 역설을 더 심화시킵니다. 허무혁은 사건의 보도자나 목격자로 그치지 않습니다. 사건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일으키는 일종의 공범이 되지요. 왜냐하면 살인범이 소설 량첸살인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 허무혁의 거짓 보도대로 범인은 정말 그 소설에 감화되었고, 그에 맞춰 살인 계획을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은 가공된 허구에 흡수됩니다. 허무혁이 날조했던 증언들은 살인범이 끼워맞춘 사건들에 의해 현실이 되고, 경찰과 언론 역시 진짜가 된 가짜에 휘둘립니다. 조작된 사실과 그 사실에 맞춰 조작되는 또 다른 사실 속에서 사람들은 동분서주합니다. 허무혁은 양심고백으로는 더 이상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지만 계속해서 상황은 살인범의 계획대로 혼란에 빠집니다. 이 전까지 진실은 있는 그대로의 보존된 무균질의 상태라는 믿음에 따라 영화 속 사건을 판단할 수 있었다면, 허무혁과 살인범이 만난 이후부터는 무엇을 진짜로 봐야하고 이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영화는 재미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결국 가짜의 자살로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던 살인범은 아내를 구하려는 허무혁과의 몸싸움 끝에 죽게 됩니다. 허무혁을 살인범으로 오해한 생존자는 엇갈린 진술을 하면서 살인사건의 진실을 더 흐리고, 허무혁은 자신의 보도실수를 고백하지만 국장은 이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경찰은 살인범이 의도한 대로 수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허무혁의 아내 미나는 임신 사실을 알리며 허무혁의 친자일 거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대중들은 아마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처럼 진실과 거짓이 점점 섞이는 세계의 묘사는 좋습니다. 원래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쪽을 더 쉽게 판단하고 그래서 블랙코메디가 존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이 영화의 엔딩은 여러모로 애매합니다. 왜곡된 디테일이야 픽션을 즐기는 관객으로 타협할 수 있었지만 허무혁이 웃으며 끝나는 엔딩 장면은 영화 전체의 주제를 이도저도 아니게 만든다고 할까요.

사람들이 풍자를 즐길 수 있는 까닭은 풍자 속에 나타나는 세계와 인물들이 얼마나 비뚤어져있건 간에 “저래서는 안돼” 라는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이를 감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도덕적 기준을 주인공이나 인물들에 투영하며 작품을 감상하죠. 풍자극은 인물의 성장이나 실패를 통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윤리적 성찰을 유도합니다. 마지막에 오면 허무혁은 친자 확인서류를 불태우고 이를 신경쓰지 않기로 합니다. 영화 종국에 주인공이 다다르는 선택지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무의미함”인 거지요. 살인사건에 대한 보도는 “진실이 가려져야 할 일, 진실을 올바르게 전달해야 할 일”입니다. 미나가 임신한 아이가 허무혁의 친자인지는 “진실이 무의미한 일”이지요. 이 둘은 윤리적 판단을 상징하는 등가대상으로 병렬될 수 없습니다. 전자의 조건이 성립할 때 우리는 쓴웃음도 짓고 소름도 돋는 풍자극으로 성립할 수 있는데 영화는 후자의 조건을 가져다 놓고 전자에 대한 윤리적 판단까지도 흐려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화는 “진실 거짓 그런게 뭐가 중요하겠냐 아무튼 적당히 속이면서 살면 되지 뭐.” 라며 중심인물을 통해 초반에 비윤리적인 세상을 적당히 체념하고 이야기를 마무리해 버립니다.

이 영화를 정의롭던 주인공 역시 타락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로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허무혁은 작품 내내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어떤 파국을 일으켰는지 이를 뼈저리게 후회하고 책임을 통감합니다. 이 작품을 풍자극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무기력한 인물을 통해 그를 둘러싼 세계가 불완전한 윤리와 견고한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작품이 인물의 성찰보다 세계 자체를 그려내려고 했다면 그 세계에 의해 타락되는 인물의 고뇌와 변화를 점층적으로 그리거나 인물의 가치관을 고정시켰어야 하죠. 그러나 허무혁의 마지막 행동들은 딜레마가 강요한 선택이 아닙니다. 이는 그가 경험 끝에 이뤄낸 각성의 지점이죠. 내내 괴로워하던 주인공이 부조리에 편승하는 선택을 하고 영화는 이를 경쾌하게 그려낸다? 이렇게 “좋은 게 좋은” 식의 두리뭉실한 결론을 낼 거라면 처음부터 그 부조리에 속한 사람들을 어리석은 욕망 덩어리로 그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과연, 허무혁의 오보와 그 때문에 죽어 나간 사람들 그리고 이로 인한 진실 자체의 왜곡은 그렇게 웃어넘기고 모른 척 할 수 있는 과오인 걸까요?

마지막에 가서 뭉툭해지는 주제의식 때문에 영화의 전체적인 예리함이 많이 깎여나갑니다. 이 결과를 제한다면 과정 자체는 충분히 즐길 수 있어요. 타락한 세상을 차갑게 파고드는 시선도 좋고, 교활한 살인마와 어리석은 기자가 합작으로 위조하는 진실의 역설도 흥미롭습니다. 대한민국 경찰과 국과수가 멍청해지는 고질적인 반칙이 나오긴 하지만 코메디나 스릴러로서 즐기기에는 모자라지 않습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코엔 형제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요.

@ 김작가로 나오는 백현진씨의 찌질이 연기가 정말 좋네요.

@ 량첸살인기라는 책은 허구의 책입니다. 그리고 어떤 언론사들은 이 책이 진짜인 것처럼 “의도적인 오보”로 이 영화를 홍보했지요. 이 영화의 주제와 겹쳐서 생각해봄직 합니다.

@ 전 이하나씨 연기나 캐릭터가 별로 나쁘지 않았어요. 민폐를 끼치는 상황도 그리 부자연스럽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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