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8/10/02 08:07:53수정됨
Name   문학소녀
Subject   WOW(World Of Warcraft) 해야만 했던 이야기
  저는 게임을 못해요.

  아 잠깐 잠깐, 말에 어폐가 있네요. 다시 말할게요.

  저는 게임도 못해요. 먹는 것만 잘함. 밥 먹는 거랑 욕 먹는 것만 잘함.

  정말 단순한 게임은 그나마 할 수 있어요. 틀린그림 찾기랑 테트리스 같은 거. 틀린그림 찾기는 고딩 때 오락실 가면 백원넣고 끝판까지 다 깨서 이름 새기고 그랬어요. 뭐라구? 자랑이냐구? 응.. 맞아.. 근데 자랑할 게 이런 거 밖에 없어서니까 측은지심을 가져주세요. 테트리스는 위위만 안 마려우면 영원히도 할 수 있어요. 근데 제가 화장실을 굉장히 자주 가는 스타일이라 진짜 영원히 해본 적은 없어요. 제가 하도 소피를 자주 보러 가서 제 별명이 소피 마르소인 건 아무도 모르셨쬬? 그러게.. 여러분들이 이걸 왜 아셔야 하나요. 죄송합니당..

  진짜 진짜 못하는건  MMORPG 같은 게임인데 진짜 진짜 못하는 줄 몰랐다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어요. 지금으로부터 8년전이에요. 남편이 한창 마영전(마비노기 영웅전)을 열심히 할 때에요. 구경하다 보니 운용하는 캐릭터 이름을 제 이름으로 해두었더군요. 여기까지만 들으면 사람들이 어마 너무 달콤하다 그러던데 그게 아니었어요. 남편이 게임을 참 못했어요. 열심히는 하던데 잘 모르는 제 눈으로 봐도 차암 못했어요. 그러니까 게임 채팅창에서 졸지에 욕을 먹는 건 저더군요. 예를 들어 제 이름이 '김땡땡' 이어서 남편 닉네임이 '미소천사 김땡땡' 이었다면 다른 파티원들이 '아 김땡땡님 정신차려여!', '아 김땡땡님 개한심하네!' 라고 하더라고요. 더 심한 말이 많았지만 순화해 봤어요. 내가 한것이 아닌 일로도 찰진 욕을 참 많이 먹던 시절이에요.

  여보.. 화가세요? 이렇게 큰 그림 그리기 있나요?

  근데 이런 그림 그리는 사람이 주변에 한명 더 있어요. 바로 제 시아버님인데요. 시아버님도 게임할 때 캐릭터 닉네임을 꼭 시어머님 이름으로 해놓으세요. 근데 게임 더럽게 못하는 남편 유전자가 어디서 왔겠어요. 어머님도 온라인 상에서 저만큼이나 욕 엄청 먹고 다니셨어요. 그리고 아버님은 더 나쁘신 게, 종족 중에 드워프가 있으면 꼭 드워프를 고르고 어머님 이름으로 닉네임을 지으세요. 왜냐면 어머님이 키가 작고 다소 다부진 체격이시거든요.

  아버님.. 도 화가세요? 광주비엔날레 나가나요?

  어쨌든 사람들이 게임 채팅창에서 한글을 그릇된 방법으로 사용하는 와중에 남편 게임 계정이 해킹을 당해서 몽땅 털리는 일이 발생했어요. 이거지! 이거야! 처음엔 너무너무 고소해서 너는 인터넷 세상에서도 호구니 이러면서 놀렸는데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눕는 남편 꼬라지를 보니까 짠하더라고요. 게임 속에서도 맨날천날 죽어서 맨날천날 땅바닥에 드러누워있긴 하던데 그 꼬라지랑 이 꼬라지랑 다르니까요. 그래서 남편이 집에 없을 때 남편 계정에 접속을 했어요. 남편 몰래 열심히 게임해서 레벨업도 해놓고 돈도 많이 벌어 놓고 짜잔 하고 선물로 보여주려 했지요. 하지만 마영전은 많이 어려운 게임이더군요. 그리고 저는 게임을 놀라울 정도로 못하는 사람이었고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자세한 기억은 안나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해킹 당했으니까 미소천사 김땡땡은 옷도 없고 능력도 없는 무일푼이었어요. 그래서 마을 밖에 나가서 잡몹부터 잡으면서 힘도 키우고 푼돈을 모아야 했는데 그 잡몹들이 저에겐 너무 쎘어요. 결코 쎄지 않았는데 내가 너무 못하니까 사방에서 최종보스들만 덤비는 것 같았어요. 솔직히 진짜 무서웠따.. 어엇 하면 맞아죽고 어엇 하면 맞아죽었어요. 나는 아직까지 점마를 한대도 못 갈겨봤는데 내복차림으로 개발리기만 하는 쪼렙 미소천사 김땡땡을 보고 있으려니 참담했어요. 그러던 중에 남편이 집에 돌아왔고 저는 저의 한심한 꼴을 보이고 말았지요. 그때부터 남편이 아무리 게임을 발로 해도 놀리지 않게 되었어요. 저보다는 쪼매 낫더라고요. 더불어 다시는 온라인 게임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하게 되었고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2016년이 되었어요.

  남편 : 여보 여보 나 부탁이 하나 있어.
  나 : 뭔데 이혼해달라는 부탁 아니면 안 들어줄건데.
  남편 : 내가 하스스톤이란 게임을 하잖아. 근데 블리자드에서 이번에 이벤트를 하나 해. 같은 회사 게임 중에, 당신도 들어봤을거야. World Of Warcraft 라고 와우라는 게임이 있어. 진짜 훌륭한 게임이야.
  나 : 서론이 주절주절 긴 걸 보니 쌔해 여보.
  남편 : 그 게임에 새로운 캐릭터 등록해서 20 레벨까지 키우면 하스스톤 성기사 초상화를 바꿔준데. 진짜 특별한 초상화를 준데.
  나 : 와 진짜 하나도 안 특별해보인다. 그래서?
  남편 : 당신이 좀 해줬으면 하고. 당신도 취미 하나 생기면 좋잖아.
  나 : 아 싫어. 그거 마영전 같은거지? 안해안해.
  남편 : 아 제발. 진짜 재밌을거야.
  나 : 당신이 하면 되잖아. 어딜 감히!
  남편 : 나는 바쁘니까.
  나 : 너는 왜 바쁜데?
  남편 : 나는 하스스톤 하느라고.
  나 : 여보.. 너는 진짜 짜증나는 새끼지?

  그렇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와우 속에서 다시 미소천사 김땡땡을 탄생시키고 있었어요. 제가 말 안한 게 있는데요. 남편은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호구에요. 근데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화를 발칵내는 상호구가 누군지 아세요? 네 접니당. 그래서 저는 손을 덜덜 떨며 컨트롤 하기 시작했던거에요.

  이것도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자세한 기억은 안나는데 간단히 말하면 저는 정말 가관이었어요. 몬스터 없이 자꾸 혼자 죽었더랬어요. 깔짝거리면서 산길을 가다가 절벽에서 좀 떨어졌기로서니 죽었어요. 악을 쓰며 호수를 건너다가 숨 좀 못 쉬었기로서니 죽었어요. 너무 민망했어요. 아니 게임을 만들때 이렇게 쉽게 죽게 해놓으면 어떡하죠? 혹시 쉽게 죽게 해놓은게 아닌가요? 나 말고는 아무도 이런 식으로 안 죽는 건 아니겠지요? 그렇담 나에게 알려주지 마세요! 너무 쪽팔리니까! 하하하 느낌왔어. 이미 쪽팔리다! 그런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어요.

  나 : 여보 나 이 게임 그만하면 안될까?
  남편 : 아 왜! 벌써 레벨 5까지 왔네! 당신 진짜 잘 하는거야.
  나 : 안 속아.. 너한테는 더 이상 안 속는다고.. 내가 니까짓거한테 속아서 이 이억만리 타국에서 지금!
  남편 : 아니야 당신 재능있어. 계속 해봐.
  나 : 그게 아니고 나 기분이 너무 나뻐. 몬스터 보면 내가 나도 모르게 아 이 애부터 죽이고 그 담에 널 죽여줄겡 차례차례용 그러는데 너무 놀랐다고. 그리고 또 이게 손맛이 있다? 죽일 때 손맛이 있단 말이야! 그게 너무 싫어.. 손맛은 니 귓방맹이 때리는 걸로 족한데..
  남편 : 여보 그러지말고 조금만 더해봐. 이게 재미가 확 붙는 순간이 와. 내 말 믿고 좀 더 해봐.
  나 : 여보.. 너는 진짜 짜증나는 새끼더라?

  하지만 제가 상호구라고 이미 얘기드렸지요. 그리고 재미가 확 붙는 순간이 온다는 말에도 솔직히 혹했어요. 나 같은 것에게도, 우리 미소천사 김땡땡이에게도 재미가 찾아온다구? 이러면서요. 그래서 저는 꾸역꾸역 레벨 6을 달성하고 7을 달성하고 자꾸 자꾸 성장해 나갔지요. 그런데 찾아오라는 재미는 안 찾아오고 다른 것이 저를 찾아왔어요.
  
  제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 두가지가 있어요. 저한테는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건데요. 음.. 아니다. 호환 마마보다 무섭지는 않겠다. 너무 오바했네. 어쨌든 증상의 첫번째는 심한 편두통이고요. 두번째는 다리에 나는 쥐인데 특히 이 증상이 참말 두려운 것이 다리 뒤쪽, 그러니까 종아리에 쥐가 나는 것이 아니고 다리 앞쪽, 그러니까 촛대뼈 위로 쥐가 나요. 진짜 끔찍하고 무서워요. 마법사의 아들 코리에 나오는 쥐마왕보다 더요. 그런데 요것들이 몽땅 저를 찾아왔어요. 몇 날 며칠 너무 긴장한 상태로 게임을 했더니 레벨 9에 올랐을 때, 게임을 시작한지 나흘이 지났을 때 (잠깐 이거 시간을 쓰다보니 섬짓한데 레벨 9가 될 때까지 나흘 걸린 게 우스운 건 아니겠징?) 저는 극심한 편두통에 눈을 못 뜨는 지경이 되어 바닥을 굴러댕기고 있었어요. 간밤에는 당연히 쥐가 나서 이미 한번 난리난리 친 상태였고요.
  
  이쯤되자 남편이 하스스톤 하던 태블릿을 내려놓고 데스크톱 앞에 앉았어요. 이제부터는 자기가 하겠데요. 그동안 너무 고마웠고 제가 최고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고마운 건 말로 말고 돈으로 줬으면.. 그리고 몇 시간 후 남편이 다했다, 이제 초상화 바꿀 수 있겠다 라며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나더라고요.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저는 귀를 의심했어요. 레벨 20을 달성했다구? 고작 몇 시간만에? 나는 그 고생을 해가며 꾸역꾸역 레벨 9까지 오느라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너는 벌써 뚝딱했다구? 이리 쉽게 이리 빨리 할 수 있었으면서 나를 이렇게 뺑이 치게 한거라구? 아아?

  그때 깨달았어요. 신종 수법이었구나. 고도로 멕이는거였구나. 하하하. 개같네. 하하하하.

  그래도 그 후로는 남편이 이런 게임을 하지 않아서 미소천사 김땡땡이 더 이상 욕을 먹지 않는데 한국의 소식을 슬쩍 들어보니 아버님은 아직까지도 가끔씩 게임을 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아아 어머님. ㅠㅠ


* Toby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10-17 10:51)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76
  • 아버님 스웩 무엇
  • 지금까지 홍차넷에서 읽었던 글 중에 가장 감동적인 글입니다. 바깥은 꽤나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가슴이 훈훈해지네요.
  • ㅊㅊ
  • 사랑꾼...
  • 선생님 필력 부럽읍니다
  • 과연 문학소녀의 필력은 남다르군요!
  • 춫천
  • 어쩜 글을 이리 재미나게 쓰시나요...
  • 닉값추 문학력 ㅎㄷㄷ
  • 추게에 박제로
  • 행복이 묻어나는 글이네요 ㅎㅎ 더더 써주세요
  • 뒤늦게 발견해서 읽고 눈물이 눈앞을 가려 차마 끝까지 한 번에 읽지 못하였습니다
  • 이 명문을 왜 지금 읽었지
  • 어매이징 스토리
  • 남편분이 부럽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23 일상/생각딸아이는 자스입니다. 13 세상의빛 22/07/15 7515 152
920 일상/생각아들놈이 대학병원에서 ADHD 판정을 받았습니다 70 아나키 20/02/06 8216 146
917 일상/생각엄마 덴마크가 나 놀렸어요 ㅜㅠ 69 구밀복검 20/01/29 12849 122
771 요리/음식영국 음식이 맛이 없는 과학적인 이유 119 문학소녀 19/02/22 11673 106
699 창작고백합니다 44 파란아게하 18/09/09 8966 96
841 일상/생각[단상] 결혼을 수선하다. 35 다람쥐 19/08/08 6633 93
1221 일상/생각아이스크림 마이따 아이스크림 (50개월, 말문이 터지다) 72 쉬군 22/07/05 4890 90
858 일상/생각[펌] 자영업자의 시선으로 본 가난요인 43 멍청똑똑이 19/09/13 11096 89
695 정치/사회강제추행으로 법정구속되었다는 판결문 감상 - 랴 리건.... 30 烏鳳 18/09/07 50993 85
1102 일상/생각귀여운 봉남씨가 없는 세상 36 문학소녀 21/07/09 5354 83
1001 일상/생각타임라인에서 공부한 의료파업에 대한 생각정리 43 거소 20/08/25 8807 82
769 정치/사회북한은 어떻게 될까 - 어느 영국인의 관점 85 기아트윈스 19/02/12 9235 79
1231 일상/생각자폐 스펙트럼과 일반인의 경계에서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 14 카르스 22/08/21 5321 78
803 일상/생각끝나지 않은 투병기 25 Chere 19/05/16 6352 76
710 게임WOW(World Of Warcraft) 해야만 했던 이야기 76 문학소녀 18/10/02 8893 76
4 게임[히어로즈] 이것만 알면 원숭이도 1인분은 한다 64 Azurespace 15/05/30 13576 76
1256 기타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의 세계관 최강자가 68 문학소녀 22/12/09 5100 74
810 의료/건강저희는 언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요.. 20 Zel 19/05/30 7582 73
1059 일상/생각나도 누군가에겐 금수저였구나 15 私律 21/02/06 6930 72
910 경제홍차넷 50000플 업적달성 전기 79 파란아게하 20/01/17 6602 72
1154 일상/생각구박이는 2021년에 무엇을 어떻게 먹었나 62 구박이 21/12/23 5205 71
1177 정치/사회홍차넷의 정치적 분열은 어떻게 변해 왔는가? - 뉴스게시판 정치글 '좋아요'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72 소요 22/03/13 6634 70
1005 일상/생각어른들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착한 사람 되지 마세요. 27 Schweigen 20/09/07 7669 70
1362 기타자폐아이의 부모로 살아간다는건... 11 쉬군 24/02/01 3297 69
1303 일상/생각난임로그 part1 49 요미 23/05/21 4244 6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