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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10/09 13:02:28수정됨
Name   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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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 #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1/2019030101747.html
Subject   민족주의의 퇴장에 대한 상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후략) - 대한민국헌법 전문


 지난 주는 개천절이었습니다. 오늘은 한글날이고요. 지난 개천절, 다들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저는 개천절날 아파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프지 않았어도 크게 의미를 부여하거나, 기뻐하거나, 경건한 태도로 그 날을 맞이했을 것 같진 않습니다.
 개천절. 가장 종교적이면서 가장 민족적인, 그리고 가장 한국적인 기념일입니다. '우리민족'의 시조 단군왕검이 하늘을 열고 역사를 시작한 날이니까요. 하지만 상징성만 있을 뿐, 사람들에게 와닿진 않고 있습니다. 저같이 젊은~어린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고요.

 어제 학교 수업에서, '살면서 애국심으로 마음이 울컥해본 사람'이 있는지 교수님이 물었습니다. 강의실을 채운 학생 중 단 한명도 손을 들지 않더군요. 저는 그런 적이 있었지만, 왠지 모를 분위기의 압박 때문에 손을 들지 못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께 가서 여쭤봤죠. 그런 질문을 했을 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학생들이 줄어들었냐고요. 그런 경향은 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 민족주의적 사고는 확실히 줄어들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머리에 계속 남아 글을 써보게 되었습니다.


正義擁護 : 정의옹호는 민족지로서 민족의 정의를 으뜸가는 가치로서 정치적 정의, 경제적 정의, 사회적 정의를 옹호하겠다는 신념의 피력이며, 아울러 이러한 정의를 존중하는 여론기구로 자임함을 천명한 것입니다. - 조선일보 사시(社是)


 링크는 2019년 3월에 주간조선에 실렸던 기사입니다.
 7개월 전에 이 글을 읽을때, 전체적인 내용과 주제보다도 문장 몇 개에 제 마음이 멈췄습니다.

 왜, 반드시 통일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없다. ‘분단되었으니까’ ‘같은 민족이니까’…. 피상적인 문제의식 아래 초등학생 수백 명이 머리를 맞대고 통일을 염원하는 글을 써야 했다.

 이 내용이 저에겐 충격이었습니다. (자칭) '민족정론지'의 기자도 기존의 민족주의적 인식이나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같은 민족이니까' 하나로 통일의 당위성이 100%를 넘어 140%를 찍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전제는 이제 논박으로 반박되는 부정의 대상조차 아니게 되었습니다. 아예 논박의 가치도 없는 무시의 대상이죠.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흥망성쇠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사는 것이다. 김구, 나의 소원 


 저는 민족주의자는 아닙니다. 오히려 탈민족주의에 가깝죠. 그러나 민족주의에 우호적이고 동정적입니다.
 기본적으로 한국사회 자체가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적어도 젊은 세대에겐 퇴조할지언정) 아직까지는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 베이스일겁니다. 거기에 제가 보수적인 경상도에서 성장했다는 점도 있을 것이고, 친구가 뚜렷한 민족주의자인 덕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2가지 있습니다.


노예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노예가 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식민지의 경험은 한 민족의 넋에 드리운 그림자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다. -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경성, 쇼우와 62년'

내 종교는 민족이고 그 교리는 민주주의다. - 허정, '회고록:내일을 위한 증언'


 하나는 '취미'입니다. 글의 첫번째 이미지는 제 취미 중 하나인 ORPG에 사용했던 캐릭터입니다. ORPG는 단순히 말하면 온라인 역할극(Online Role Playing Game)입니다. 연극을 위해 배우들이 캐릭터를 탐구하고 조사하듯, '애국심과 열정에 불타는 한국인'을 연기하기 위해 이것저것 민족주의 텍스트를 읽다보니 민족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이미지는 '메르시아의 별'이라는 한국산 ORPG인데, 이건 아예 식민지의 독립투쟁이 주 테마입니다.
 또다른 취미인 역사공부도 영향을 줬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인물들이 입체적이며 그 삶도 역동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 인물을 관통하는 주제는 '민족주의'입니다. 그 시대의 이야기,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 그 시대 사람들의 대립과 시대정신을 보면 민족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제 동년배^^들의 사고와 정말 잘 비교되니 마음이 싱숭생숭할 수 밖에요.


 한통이 주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송 태조가 추증하였고, 문천상이 송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원 세조가 또한 추증하였습니다. 정몽주가 고려를 위하여 죽었는데, 오늘에 홀로 추증할 수 없겠습니까. - 권근, 치도 6조목(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1월 14일 갑술 3번째기사)

저 육신(六臣)이 어찌 천명과 인심이 거스를 수 없는 것인 줄 몰랐겠는가마는, 그 마음이 섬기는 바에는 죽어도 뉘우침이 없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사람이 능히 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그 충절이 수백 년 뒤에도 늠름하여 방효유·경청과 견주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 당세에는 난신이나 후세에는 충신이라는 분부에 성의가 있었으니, 오늘의 이 일은 실로 세조의 유의를 잇고 세조의 성덕을 빛내는 것이다. - 숙종, 사육신을 복권하며(숙종실록 23권, 숙종 17년 12월 6일 병술 2번째기사)


 두번째는 '여유'입니다. 만약 제1공화국 시대처럼 민족주의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거나, 또는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가 팽팽하게 겨루고 있는 상황이였다면 저는 강경한 탈민족주의 입장을 취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하루가 다르게 퇴조하고 있고, 별다른 변수나 사건이 없다면 퇴조가 쭉 계속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를 역전시킬 변수가 있다면 남북통일, 저출산으로 인한 대규모 이민 수용, 중국 이상 국력의 강대국의 위협 정도일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저는 어쩌면 '주제넘게' 민족주의에 대해 동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서 조로아스터교 신도를 위한 의회 의석을 배정하는 것이나, 조선이 확고히 자리잡자 탄압했던 고려 왕족을 대우해준 것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으니 상대방에 대해 관용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거죠.


雪月前朝色(설월전조색) 눈 쌓인 달밤은 고려의 빛깔 그대로요
寒鍾故國聲(한종고국성)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의 신음인가
南樓愁獨立(남루수독립) 남루에 홀로 서서 향수에 젖노라니
殘郭暮烟生(잔곽모연생) 흔적뿐인 성터에도 저녁연기 오른다 - 권담, 송도회고


 저는 민족주의의 극적인 부활을 바라지도 않지만, 완전한 퇴장을 바라지도 않는 회색지대에 있습니다. 많은 폐단을 남겼지만 공적 또한 남겼던 한 시대의 거인이 서서히 쓰러지는 광경을 무력히 지켜보는 느낌. 참 뭐라 말하기 힘든 씁쓸함과 상념을 적어봤습니다.


 여러분에게 민족주의란 무엇인가요? 그리고 민족주의의 조용한 퇴장에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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