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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8/24 01:54:21
Name   호라타래
Subject   10년전 4개월 간의 한국 유랑기 #1
중학교 3학년 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방학 때 걸어서 지리산까지 걸어갔다 오겠노라 어머니께 이야기를 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정신 나간 아이야'라고 따뜻하게 답해주셨다. 그리고는 모든 어머니들이 꺼내드는 전가의 보도 '대학가면 마음대로'를 휘두르셨다.

그 뒤 까맣게 잊어버렸던 여행 계획을 상기한 것은 대학교 1학기 말미였다. 사회학 개론 수업의 후반부 강의는 노마디즘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정확하게는 이해를 못한다. 다만 정주/유목이라는 삶의 방식이 개인의 세계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인상 깊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중학교 때의 계획이 문득 떠올랐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생겨났다가, 답을 찾지 못한 채 사라지는 물음들이었다. 목소리도, 말투도, 행동거지도 특이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내가 묻는 질문들을 더 이상하게 여기고는 했다. '그래 너는 진지한 아이구나'라며 미소짓는 너머에 깃든 피로함과 조소를 미약하게나마 인지는 했지만, 별다른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으레 그러듯이 스무살 적에는 삐죽한 데가 많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참 이상하다는 시선들은 의아했다. 나는 나보고 이상하다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나의 무엇을 보고 이상하다고만 하는 것일까.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나'는 무엇일까가 우선 궁금했다. 목소리, 행동거지, 말투, 던지는 질문들, 고민하는 내용들이 나인가? 여행을 떠올리며, 여행을 통해 '나'를 보다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살아왔던 곳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에 놓이면 그 때 내가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갑작스럽게 결정한 여행이었다.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준비하던 야학교 활동은 문제였다. 나는 멍청했고,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6개월 간의 교육을 마치고 정식 교사로서 인준을 받는 순간에서야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여행을 결정하자마자 이야기를 꺼냈으면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선배들은 심각했다. 잠시 간의 회의 끝에, 내년에 다시 동아리에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뭐, 그럼 내년에 다시 들어가면 되지'. 그렇게 기계적으로 생각했다. 당시 동기들은 슬퍼했다. 한 친구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놀랐다. 내 갑작스러운 결정 때문에 혼란이 빚어졌지만, 퇴출되었으니 나름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후련하던 차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눈물흘리는 모습을 정면에서 마주하는 것은 죄책감이 많이 들었다. 내 사고방식이 무언가 어긋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결사 반대했다. 이 정신나간 새끼가 정말로 떠나겠다고 할 줄은 생각 못하셨을 것이다. 한참을 다투다가 '니 마음대로 하라'는 짜증섞인 말을 듣자마자 옳다구나 휴학 신청을 했다. 어머니의 다음 전략은 시기를 늦추는 것이었다. 추석 차례는 지내고 가라 했다. 그건 맞다고 생각해서 추석까지 집에서 뒹굴거렸다. 겸사겸사 동네 친구들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랑에 쓸 비상금을 마련했다. 결정적으로 출발 날짜를 잡은 계기는 어머니의 빡침이었다. 뒹굴거리는 나를 보며 떠나기는 하는거냐고 면박을 듣자마자, 주말 이틀을 보내고 출발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배낭 하나에 침낭을 묶고 길을 나섰다.

그래도 나름 합리적인 생각을 할 정신은 되었는지 순차적으로 걷는 거리를 늘렸다. 첫 날은 2시간, 다음 날은 3시간, 다다음 날은 4시간 하는 순이었다. 식사는 대학교 학생 식당에서 얻어먹고, 식당 청소를 자원하는 식으로 때웠다. 구내식당에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하면서 식사를 내주었다. 잠은 학교 내에서 침낭을 펴고 잤다. 때문에 하루 걸음을 끝내는 지점은 각 대학교였다. 항공대에서 홍대로, 홍대에서 한성대, 한성대에서 장안대로 그날 그날 생각나는 대로 걸었다. 서울 인근에는 대학이 많았던지라 어디든지 발길을 뻗치기에는 걱정이 없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중간에 대학교 선배의 집에서 자기도 했다. 선배의 집에 갔을 때 나는 놀랐다. 무의식 중에 모든 가족은 우리 가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겠거니 생각했었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대화 패턴, 집안에 배치되어 있는 클래식 CD, 그 외 하나부터 열까지. 그 생경한 느낌에 잠시도록 아득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머리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해도 막상 눈으로 마주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너무나도 의아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말로 명확하게 정리하기는 힘들다. 아비투스의 차이라면 지나치게 먹물 같은 냄새가 난다. 그냥 내 주변에서는 볼 수 없는 가족의 형태였다고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선배의 어머니는 걸어오느라 고생 많았다며 고기를 구워주셨다. 가을의 마루는 서늘했고, 끌어안고 잤던 죽부인은 시원했다.

다음 날부터는 학교가 있는 인천으로 이동했다. 다리를 건너 한참을 걸었다. 그 때쯤부터 오늘 몇 시간을 걸었는지는 희미해졌다. 중간에 카톨릭대에서 잤다. 저녁까지는 잘 얻어먹었다. 그러나 다른 대학교와는 다르게 짱 박혀 잘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강의실 창문을 열고 몰래 기어들어갔다. 책상 밑에 숨어서 누웠다. 대학교 경비원은 순찰을 열심히 돌았다. 밤새 들킬까봐 긴장하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인하대에 도착했을 때는 꽤나 저녁이었다. 동기의 자취방에 도착해서 곯아떨어졌다. 하루를 꼬박 잤다. 동기가 나를 깨웠다. 죽은 듯이 잠만 자길래 깨울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다. 야학교 동아리 친구들과 잠깐 만난 후, 저녁에는 학교 내 숲에 펼쳐진 동기들의 술자리에 갔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동기들 사이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렴 어쩌랴,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내용이다.

그보다는 밤에 술에 취해서 한 동기와 떠들어 대던 내용이 기억이 난다. 서로 사전 약속도 없었던데 같은 철학 수업에서 만났다. 수업에서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백묵을 휘날리는 강의 앞에서 졸고 있는 서로를 깨워줬을 뿐이다. 그 동기는 술에 취해 사르트르와 까뮈에 대해 말했다. 기투(project)라 하던가. 의지 없이 세상에 던져질 뿐인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허랑하게 떠들었다. 나는 더 많은 것들을 포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너의 태도를 부정하는 것까지 포용할 수 있냐고 이죽거리며 물었다. 앵똘레랑스를 똘레랑스할 수 있는가. 어설픈 말장난으로 넘어가면 후들겨 패겠다는 얘기를 했다. 뭐, 아직까지 답은 찾지 못하겠지만, 두들겨 맞지는 않았다. 기억을 못하는건지. 아니면 그저 술자리의 치기였던 것 뿐인지.

그 후로도 주안에서 부천으로, 부천에서 광명으로, 광명에서 안양으로, 안양에서 수원으로, 수원에서 병점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당시의 기록들은 일기에 차곡차곡 기록되어 있다. 누군가의 선의에 감사하고, 선을 긋는 누군가에 어쩔 수 없다며 돌아섰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좋았던 것은 누군가에게 감사할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수원까지가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그 이후로는 이전처럼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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