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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06/22 15:21:50 |
Name | 빠독이 |
Subject | 간만에 끓여 본 미역국이 대실패로 끝난 이야기. |
오늘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생신입니다. 그저께부터 10여 년 동안 타지에 살면서 못 해드렸던 미역국을 몰래 끓여드리기로 마음먹었었죠. 근데 미역국을 끓여본 지가 오래되어서 감을 잊어버렸다는 것과 될 수 있으면 어머니 몰래 하려는 것이 겹쳐서 혼자 생쇼를 해야 했습니다. 미역국 자체는 정말 간단한 요리인데 막상 하려니 생각하지 못했던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었죠. 우선 재료를 사러 가는 것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저는 평소에 대부분 어머니 근처에 있으므로 들키지 않고 나가기가 힘들더군요. 유일한 기회인 일요일에 나가서 산다고 해도 쇠고기를 냉장고에 넣어둬야 하기 때문에 며칠 동안 들킬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결국, 어제저녁에 방문을 닫고 음악을 약간 크게 틀어둔 뒤 틈을 보아 혼자만 긴박한 탈출극을 펼치고 몰래 나오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도어락을 버튼 눌러서 열면 삐빅- 하는 소리가 나는데 수동으로 돌려서 열면 소리가 안 나서 다행이었습니다. 음....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이때 들키는 게 나았겠네요. 일단 미역이나 간장, 참기름 같은 건 집에 있었고 주된 목표는 쇠고기랑 다시다였습니다. 집에 있는 멸치로 육수 내면 되긴 하는데 안 들키고 요리하려면 과정을 단축하는 게 필요했고 다시다로 하면 적어도 맛에서 실패는 안 했거든요. 근데 제가 사는 곳이 시골이라서 정육점이나 마트나 9시쯤 되면 문을 닫더군요. 하마터면 못 살 뻔 했지만 어찌어찌 사고, 집에 다시 들어올 때도 혼자 생쇼를 했습니다. 또 몰래 물을 받아다 쇠고기 핏물을 빼고 미역도 불리면서 어머니가 주무시길 기다렸다가 안방에 들어가시고 한 시간 뒤에 요리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미역이랑 고기를 볶는 게 더 맛있다고는 하는데 기름 냄새랑 볶는 소리가 어머니를 깨울 것 같아 그냥 물에 넣어서 끓이면서 거품만 걷어냈습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다진 마늘이 없네요? 분명 예전에는 다진 마늘 사서 쓰셨는데 요새는 직접 다져서 쓰시는가 봅니다. 저는 또 제 방에 마늘과 도마와 식칼을 가지고 들어가 방문을 꼭 닫고 음악 볼륨을 높인 뒤 너무 큰 소리가 나지 않게 마늘을 다진....다기보다는 짓이기는 생쇼를 했습니다. 그래도 마늘을 바로 다져서 넣는 게 맛에는 더 좋을 거라고 위안으로 삼으면서 말이죠. 그리고 약한 불로 20분 넘게 끓이면서 어머니가 깨어나지 않으실까 조마조마했지요. 그래도 완성된 미역국은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미역을 너무 많이 불려서 절반 정도를 버려야 했던 것만 제외하면 말이죠. 약간 간이 덜 되긴 했지만 다음날 아침에 간장을 넣고 조금 더 끓이면 딱 알맞을 것 같았습니다. 속으로 자신을 쓰다듬어줄 정도는 되었죠. 이 생쇼 반 요리 반의 과정을 지켜보신 아버지는 계속 얄궂은 웃음을 지으셨지만 저는 만족해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날 일은 생각하지 못한 채.... 다음 날 아침 다섯시 반,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지만 약간 이르게 어머니의 도마 소리에 눈을 뜬 저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동안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분명 어머니께서 미역국을 보셨을 텐데 제가 나오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는 것, 그리고 질리도록 먹어도 질리지 않은 매콤한 냄새가 코에 들어온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죠. 불안함을 애써 억누르며 부엌으로 갔던 저는 어젯밤 미역국을 끓였던 냄비 안에 있어야 할 맑은 국물, 검게 미끈거리는 미역, 소고기가 그 대신에 붉고 탁한 국물, 반투명한 배추김치 잎, 돼지고기로 바뀐 걸 보는 순간 제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요즘 하신 적이 없는 정체불명의 미역국이 가스레인지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잠결에 오래된 거라고만 생각하시고 정성스럽게(어머니께서 정성스럽게 버려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버리신 뒤 그 냄비에 김치찌개를 끓이고 만 것입니다. 저는 그제야 들키지 않고 끓이는 데 성공하자마자 긴장이 풀리고 늦은 시간에 피곤함이 몰려와 생신 축하 멘트와 어머니 간에 맞춰서 간장을 넣고 다시 조금 끓이라는 내용의 쪽지를 남겨두는 것을 깜빡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는 이미 제가 끓인 미역국의 건더기는 음식물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국물은 하수구로 내려간 지 한참이 지난 후였죠. 이렇게 저의 생쇼는 엄청난 허탈감을 남긴 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종일 멍한 상태이지만 어머니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마음만으로도 맛있게 먹었다고 하시지마는.... 괜히 저만 혼자 생쇼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고 있습니다. 허탈함에 글도 엉망이고 마무리도 제대로 못 짓겠네요. 여러분은 뭔가 안 하던 일을 하려면, 특히 몰래 하려면 꼭 마무리를 잘하시길 바랍니다. 덧. 생일 선물은 옷이나 신발이 무난하겠지만 제가 그런 건 잘 못 골라서 어머니께서 평소 불편해하시던 몇 가지를 사드리는데, 그 중 고장 나서 느린 충전기를 대신하기 위해 토요일에 인터넷에서 산 삼성 정품 충전기가 아직도 도착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 전화해보니 판매처에서 가져가시는 분이 분실한 것 같다고.... 올해 어머니 생신에 해드리는 건 하나같이 되는 게 없네요. 덧. 제목은 미역국 실패인데 요리/음식 탭보다는 일상 탭이 더 어울리는 듯.... 아, 요리/음식이라고 하니 미역국 대신 먹은 김치찌개는 정말 억울하리만치 맛있었습니다. 냄비에 미역국이 깃들었다가 김치찌개에 스며들었다고 생각하렵니다. 쥬륵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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