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16/12/13 23:19:48 |
Name | nickyo |
Subject | 정체성의 정치 |
제게 있어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하는 두 화두가 있다면 노동자 중심주의와 여성주의일 것입니다. 물론 제가 남성이다 보니 후자보다 전자에 좀 더 무게감을 두는 (그리고 취준생의 입장에서도) 이기적인 사람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오늘 이야기 해 보고 싶은 것은 '정체성의 정치'입니다. 정체성의 정치란, 내가 가진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발화하고, 드러냄으로서 나의 정체성이 갖는 특질들을 사회적 공론의 장에 놓고 정치적 주장을 하는 과정입니다. '노동자'라는 정체성과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1800년대 마르크스와 1900년대 초기 여성참정권 운동을 필두로 그 스스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하고 규명하며 정치적 개념으로서 확립하기에 이릅니다. 현대의 포스트 주의보다는 모던한 방식의 개념화이며, 여전히 유효한 부분이 상당히 많기에 일선 정치에서 많이 활용됩니다. 가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전 대표,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안철수 후보, 박근혜 대통령 등은 선거에서 '정체성'으로 크게 이득을 보아 온 사람들입니다. 인권/민주투사 출신, 기업가 출신, 여성.. 그러나 정체성은 다양한 이면을 갖고 있고, 그들의 행동과 위치는 중층적 결정들과 여러가지 심급을 동시에 지닌다는 점이 1960~70년대 이후 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강조됩니다. 최종 심급에 있는 어떠한 모순들이 꼭 그 정체성과 일치하여 그대로 내/외면화 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개인의 정체성은 수많은 모순들의 영역과 이어져있고, 따라서 우리는 정체성의 정치와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얼마 전 유행했던 버니 샌더스가 백인 여성의 '여성'이라 투표하는 것에 일침을 날린 것이 바로 그 정체성의 정치죠. 그럼 우선 여성주의에 대한 자크 데리다의 입장부터 읽는 것으로 시작해 보죠. 페미니스트 철학자 페넬로페 도이치의 하우 투 리드 데리다에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 ---------------------------- 데리다는 상황 속에서의 차이에 민감한 철학자이지만, 사회적 행동주의(여성주의, 인종, 민족, 문화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위 정체성의 정치에 대해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그의 목표는 정체성이라는 이상들을 고정시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들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 적이 있다. "나는 여성운동을 포함하여 모든 곳에서 발전하고 있는, 소수자들의 나르시시즘을 향하는 경향이 있는 이러한 운동에 저항한다." 데리다가 어떤 형태의 여성주의에 대해 양가적 태도를 보이고는 있지만, 그의 저작은 상당 부분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대립을 해체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거의 초기 저작에서부터 데리다는 성, 성적 차이, 혈통, 여성들이 어떻게 철학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지에,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가 "이상하게도 '여성주의적' 목소리"를 갖고 있다고 묘사될 정도로 흥미가 있었다. 어떤 초기 저작에서 차연은 성적 구별과 지연을 위한 그리고 성적 분화의 끊임없는 유희를 위한 용어가 되었는데, 그것은 성적 정체성과 완전히 남성적인 남자들 또는 완전히 여성적인 여자들의 확실성을 의문에 부치고 있었다. 누군가의 남성다움 또는 여성다움은 명확한 것인가? 그것은 생물학, 행동, 성차(sexuality), 혈통 등을 위한 복잡한 의미들의 네트워크의 문제다. 우리는 데리다가 이러한 질문들을 갖고 유희하면서, 자신을 남성이면서 남성처럼 쓰게 하는 그 일관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은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일부가 해체주의적 여성주의에서 상당한 잠재력을 보았던 반면에, 일부는 데리다에게서 나타나는 여성주의적 숙고에 대한 전유를 인식하고서 매우 신랄한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데리다는 두 개의 논쟁적인 출판물에서, 제도화되고 있는 여성주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여성주의는 진보에 대한 확신과 역사가 덜 여성주의적인 과거에서 더 여성주의적인 미래를 향해 순조롭게 움직이고 있다는 가정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제안들은 성 연구와 여성주의적 목표들에 대한 그의 긍정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몇몇 해체주의적 독해를 통해서 남성성과 결합된 권력과 특권 그리고 권위가 '중심적'이거나 '기원적'인 것이 되어왔고, 여성성은 역사적으로 남성성에 대해 열등한 것, 파생물,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는 의미에서, 고전철학의 소위 남근 중심주의를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데리다의 기획은 여성주의적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근 중심적 전통에서 비판하고 있는 이상화와 평가절하로부터 여성주의 또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 데리다의 평가절하와 이상화의 가능한 현존에 대한 조율을 여성주의로까지 확장하는 것을 반여성주의적인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어떤 여성주의도 여성주의를 해체하기 위한 동시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여성주의에 대한 건설적인 기여가 될 수 있다. ------------------------------------ 제가 경험해 본 바, 적어도 20대 전후를 휩쓰는 여성주의의 색채는 메갈리안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들은 페미니즘이 단일화 되어있지 않다고 하고, 각자의 방식이 다르다곤 하지만 적어도 우에노 치즈코를 핵심적인 근거의 토대로 사용하고 추상화와 정체성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만들어 나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진보적 입장을 취한다는 여성주의 사람들의 오프라인 토론회 소수를 겪어본 입장에서는 활동 단체가 다를 뿐 메갈리아의 주장에 상당부분 공감합니다. 물론 우리는 메갈리아랑 워마드를 이제 분리할 필요가 있고, 워마드의 활동이 메갈리아와 내적 연결성이 있는지는 제가 조직 외부의 인간이라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메갈리아로 시작했던 여성주의 정체성의 갈등, 확산 그로인한 선명성의 획득과 동일한 정체성 주체들의 해방과 같은 것들이 워마드와는 어느정도 접점이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오프라인 토론회 등에서도 워마드는 거의 언급을 안하거나 약간 선을 긋는 모습을 보이고요. 뭐 이런건 부차적인 이야기구요. 위 이야기와 엮어서 사실 중요하게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면.. 현재의 여성주의 운동과 과거의 노동자운동이 상당부분 겹쳐보인다는 것입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후 95년 민주노조 설립까지 노동자들은 지속적인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민주정의 시작이었다던 노태우부터 김영삼, 김대중, 심지어 노무현까지 노동자들은 언제나 2등시민으로서 국가에서 가장 먼저 희생시켜야 했던 정체성이었죠. 노동자, 농민이 지나온 90년대와 00년대는 그야말로 혼란과 참혹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국제경기의 불황과 국내경기의 침체가 겹치며 외적 조건이 컸던 부분도 있지만, 내적 조건 역시 악화 일변도를 향했죠. 노동자 탄압과 보수화된 국가주의적/권위주의적 정권(현대 정치사 학자들 중에는 김대중까지 권위주의적 정부로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김영삼-김대중까지가 개인 권위에 의존한 행정부라는 측면에서요)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노동체제의 도입을 시작했고 국가 전반에 걸친 교육 역시 그에 맞춰 이동했습니다. 자유-능력-책임이라는 세 가지 단어가 개인을 파편적으로 만들고 있었고, 더 이상 사람들은 사회적/공동체적 갈등해결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죠. 불황과 혼란은 이것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고 사람들은 적자생존의 논리에 깊게 빠져들었습니다. 더할나위 없는 자본주의적 인간들이 공동체의 구성원을 가득 채우게 된 셈이죠. 노동조합은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노동자'라는 1900년대 초중반의 기호로서 한국 사회에 존재하게 됩니다. 즉, 착취당하는 약자이자 정의를 빼앗긴, 그 기호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이 되고 정체성 자체만으로도 존립할 수 있는 사회적 호명을 지닌 집단이 된 것이죠. 그러나 우리나라의 노동자 대투쟁이후 상황은 서구사회의 노동자 조직 변화처럼 느리지 않았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노동자와 농민은 해체당하기 시작합니다. 정리해고법과 비정규직 보호법이 통과되고, IT와 지식노동자 중심으로 산업의 재편이 이뤄지며 제조/서비스 노동자와 화이트컬러 노동자, 젊고 영민한 지식/IT 노동자들간의 갈등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조합주의와 노동자라는 정체성에 편입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노동유연화된 시장을 적극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이에 매료되었습니다. 물론 노동조합이 이에 저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태동하고, 국제적인 노동조합의 변화들을 따라가거나 배우는 속도보다 국내 환경의 변화는 훨씬 급진적이었죠. 노동자들은 저항하는 것마저 벅찬 상태였고, 게다가 집회와 시위의 변화양태를 따라가고 반성하며 대중과 괴리되는 것을 해소시키는 것조차 버거워했습니다. 이는 IMF전후까지 확산된 노동조합들이 자리를 잡고 역량을 만들 시간조차 없이 노동탄압이 급진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죠. 그게 악의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국내 경제 자체가 위기였던건 사실이니까요. 어쨌든, 이러한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을 감안하며 지나온 지금의 노동조합의 위기는 이러한 외적 부분이 아닌 내적 문제를 당면하고 있습니다. 바로 젊은 신규조합원들의 부재죠. 노동조합은 근본적으로, 회사를 다니는 노동자만이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 대투쟁 이후 9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노동조합의 확대는 00년대 이후로 하향세를 걷기 시작했고, 이제는 핵심 조합원들의 근속연한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중의 노동조합에 대한 혐오감은 여전히 심각하며, 노동자-농민을 대변하는 정당이나 기구를 기대하기도 힘듭니다. 심지어 우리의 상황이 호황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외적 조건'이 불리한 상태임은 말할필요도 없겠죠. 결국 노동자-농민으로 귀결되던 정체성의 정치, 노동자이면 노동조합을. 의 약빨은 수명을 다했습니다. 이미 대중의 의식속에서 노동조합은 대안이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론 노동조합이 갖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대안을 잉태하는 토대'로서의 위치는 언제나 중요하게 사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노동조합이 비판받지 않고, 더 과감하고 힘있는 혁신과 개혁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정말 빠르게 무너져 버릴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바로 이것이 현재 20대들이 페이스북과 오프라인에서 진보와 여성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정확히 일치하는 문제들입니다. '여성'이라는 호명으로, 그것이 정의라는 것으로. 그것에 반하는 것은 남성, 혹은 다른 주체들이 알아서 여성주의적으로 활동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 하는것은 노동자가 그저 노동자이기에, 로 활동했던 것들과 일치하기 때문이죠.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유산계급, 또 관리자로 부역하는 계급들에 대해 '실제적이고 과학적으로' 적대적이며 그들이 자신들을 탄압한다는 것으로 강경투쟁의 노선을 가졌던 것이 어떠한 성공과 댓가가 있었는지는 여러 사람이 알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는 그것에 대한 비판 역시 받아들여야 했다는 것이지요. 여전히 사실로서 남성과 남성적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탄압하거나 여성들의 삶의 조건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대해 자기중심적, 혹은 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정체성의 정치를 통해 해방을 느끼고 갈등을 부추겨 선명성을 획득하고 내적 동력을 얻는 과정이 그리 장기적이지 않다는 것 역시 인정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시작인데 왜 이렇게 못살게구냐, 좀 관용적으로 바라보다보면 우리도 자정할거고 다양한 방향들이 있다. 당사자 중심주의 아니냐.'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역시, 동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운동이 이제 더 이상 아날로그가 아니라는 겁니다. 디지털 사회는 곧 박제와 재생산의 사회이며.. 그들이 정체성의 비판을 시작하고 정체성을 해체하는 과정을 동시에 진행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정체성의 정치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악의로서 재생산 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 구조적 상황에서는 예전만큼의 관용조차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소수자 운동은 결국 대중에게 인정받고 대중이 소수자의 위치가 옳음을 납득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PC 역시 하나의 정체성으로서 탄압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 의식이 단순히 '계몽이 덜 된' 하위의식이라고 규정하며 그저 탄압의 재생산으로 바라보는 것은 쁘띠를 공격의 대상으로만 이해했던 고전적 맑스주의자들의 실수를 반복하는 셈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맑스주의 연구자인 윤소영의 주장처럼 현대의 최종심급 중에서 노동자와 여성은 가장 깊은 곳의 모순을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이 대안체제를 잉태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의 이상성과 대안으로의 방향성을 긍정하고 장기적이고 이상적인 비전을 지녀야 한다는 것 역시 동의합니다. 그러나 현재적 시점에서 노동유연화와 신자유주의에 고통받는 노동자들, 이를테면 스펙이 모자라고 빈곤한 가정을 벗어나지 못하며 비정규직을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이나 사양산업 속에서 자영업을 떠돌다 절망을 맛보는 사람들을 노동자들이 정체성의 정치를 벗겨내지 못하고 함께 하기 힘들어 하며 대중과 괴리된 것처럼, (그리고 민주노조가 이 해결을 위해 아주 오랜 시간동안 고역을 치르며 내홍을 겪지만 여전히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처럼) 여성주의 역시 여성적 해방과 주체성의 발현과 동시에 고통받는 여성들의 실제적 순간들을 어떻게 해소하고 그 해소의 과정들이 제도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대중을 납득시킬 수 있을것인지에 대한 비판에 열려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정체성의 정치를 해소하고 해체함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동력을 얻는 방향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여성주의와 노동자에 국한된 이 '정체성의 정치'에 대한 얘기가 앞으로 있을 정세에서도 판단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 봅니다. 5
이 게시판에 등록된 nickyo님의 최근 게시물
|
오... 저도 얼마 전에 이 책 읽었었는데 신기하네요.
개략적인 이해를 덧붙이자면 데리다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것은 곧 소수자적인 것입니다. 데리다가 경고를 보내는 정체성의 정치란 소수자적인 것을 주장함으로서 소수사적인 것을 잃을 수 밖에 없는 모순을 갖고 있지요. 데리다와 실천적 페미니스트 간의 갈등이라는 약간의 협소한 마찰을 이해하려면 레비나스를 좀 알아야 합니다. 데리다 초기 철학은 레비나스를 독해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거든요.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기본 개념 중에 하나가 타자이고 그것을 대면하는 걸 얼굴이라고 지칭했는데 ... 더 보기
개략적인 이해를 덧붙이자면 데리다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것은 곧 소수자적인 것입니다. 데리다가 경고를 보내는 정체성의 정치란 소수자적인 것을 주장함으로서 소수사적인 것을 잃을 수 밖에 없는 모순을 갖고 있지요. 데리다와 실천적 페미니스트 간의 갈등이라는 약간의 협소한 마찰을 이해하려면 레비나스를 좀 알아야 합니다. 데리다 초기 철학은 레비나스를 독해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거든요.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기본 개념 중에 하나가 타자이고 그것을 대면하는 걸 얼굴이라고 지칭했는데 ... 더 보기
오... 저도 얼마 전에 이 책 읽었었는데 신기하네요.
개략적인 이해를 덧붙이자면 데리다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것은 곧 소수자적인 것입니다. 데리다가 경고를 보내는 정체성의 정치란 소수자적인 것을 주장함으로서 소수사적인 것을 잃을 수 밖에 없는 모순을 갖고 있지요. 데리다와 실천적 페미니스트 간의 갈등이라는 약간의 협소한 마찰을 이해하려면 레비나스를 좀 알아야 합니다. 데리다 초기 철학은 레비나스를 독해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거든요.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기본 개념 중에 하나가 타자이고 그것을 대면하는 걸 얼굴이라고 지칭했는데 이 얼굴을 레비나스는 "여성적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레비나스가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을 받는데요. 당연히 레비나스는 그 공격을 몰이해로부터 나온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죠. 데리다는 레비나스에 엄청난 비판을 가하면서 동시에 레비나스를 위대한 철학자 반열에 올렸다는데 어떻게 그랬는지는 모르겠고(ㅋㅋ) 여튼 여기에 아마 그 책에 앞부분에 보면 나올 플라톤에 대한 독해가 있을텐데 거기서 이어지는 것이죠. 순수성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이죠. 정체성에 대한 비판과 당연히 연계되어 있고 이 해체주의 위에서 전향적이고 통합적인 요즘의 페미니스트 이론이 나올 겁니다. 대충 용어라도 좀 이해하려면 후설이랑 하이데거를 좀 알아야 데리다까지는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마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좀 했지요. 아시다시피 마르스크주의에 대해 관심이 많은 국내 성향상 그라마톨로지 말고 제대로 변역된 책이 거의 없는데도 데리다가 쓴 마르크스의 유령인가 하는 책은 번역돼서 대형 서점에 있더라고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여성주의와 비슷하게 착안해서 노동자란 정체성으로 맥락을 이어서 생각하신 것 같은데 데리다는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와 관련해서는 노동자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대신 유령이라는 개념에 집착해서 비판적 견해를 내놓았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유령이자 유령을 쫓는 철학이다 뭐 그런 얘기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유령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마르크스주의는 유령처럼 죽지 않을 것이다. 무슨 얘길까요...? 대충 느낌은 오는데 더이상은 네버...
개략적인 이해를 덧붙이자면 데리다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것은 곧 소수자적인 것입니다. 데리다가 경고를 보내는 정체성의 정치란 소수자적인 것을 주장함으로서 소수사적인 것을 잃을 수 밖에 없는 모순을 갖고 있지요. 데리다와 실천적 페미니스트 간의 갈등이라는 약간의 협소한 마찰을 이해하려면 레비나스를 좀 알아야 합니다. 데리다 초기 철학은 레비나스를 독해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거든요.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기본 개념 중에 하나가 타자이고 그것을 대면하는 걸 얼굴이라고 지칭했는데 이 얼굴을 레비나스는 "여성적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레비나스가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을 받는데요. 당연히 레비나스는 그 공격을 몰이해로부터 나온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죠. 데리다는 레비나스에 엄청난 비판을 가하면서 동시에 레비나스를 위대한 철학자 반열에 올렸다는데 어떻게 그랬는지는 모르겠고(ㅋㅋ) 여튼 여기에 아마 그 책에 앞부분에 보면 나올 플라톤에 대한 독해가 있을텐데 거기서 이어지는 것이죠. 순수성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이죠. 정체성에 대한 비판과 당연히 연계되어 있고 이 해체주의 위에서 전향적이고 통합적인 요즘의 페미니스트 이론이 나올 겁니다. 대충 용어라도 좀 이해하려면 후설이랑 하이데거를 좀 알아야 데리다까지는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마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좀 했지요. 아시다시피 마르스크주의에 대해 관심이 많은 국내 성향상 그라마톨로지 말고 제대로 변역된 책이 거의 없는데도 데리다가 쓴 마르크스의 유령인가 하는 책은 번역돼서 대형 서점에 있더라고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여성주의와 비슷하게 착안해서 노동자란 정체성으로 맥락을 이어서 생각하신 것 같은데 데리다는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와 관련해서는 노동자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대신 유령이라는 개념에 집착해서 비판적 견해를 내놓았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유령이자 유령을 쫓는 철학이다 뭐 그런 얘기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유령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마르크스주의는 유령처럼 죽지 않을 것이다. 무슨 얘길까요...? 대충 느낌은 오는데 더이상은 네버...
재가입하기 전에 이 책 읽다가 메모한 게 몇 개 있는데 여기다가 써야겠군요.
//
http://redtea.kr/pb/view.php?id=timeline&no=10415
이준석과 박근혜의 만남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 모델에 대한 페미니즘적 해설을 짤막하게 한 글인데... 현실적으로 이준석과 박근혜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지만 일면 타당한 생각이다.
그런데 타당한 생각이 되기 위해 전제해야 하는 것, ... 더 보기
//
http://redtea.kr/pb/view.php?id=timeline&no=10415
이준석과 박근혜의 만남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 모델에 대한 페미니즘적 해설을 짤막하게 한 글인데... 현실적으로 이준석과 박근혜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지만 일면 타당한 생각이다.
그런데 타당한 생각이 되기 위해 전제해야 하는 것, ... 더 보기
재가입하기 전에 이 책 읽다가 메모한 게 몇 개 있는데 여기다가 써야겠군요.
//
http://redtea.kr/pb/view.php?id=timeline&no=10415
이준석과 박근혜의 만남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 모델에 대한 페미니즘적 해설을 짤막하게 한 글인데... 현실적으로 이준석과 박근혜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지만 일면 타당한 생각이다.
그런데 타당한 생각이 되기 위해 전제해야 하는 것, 그러니까 이준석의 말, 그리고 이준석의 말 안에 있는 박근혜의 말, 이 말들을 우리가 "독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리다의 "말은 글이다"가 생각난다.
박근혜라는 인물은 지금이나 그 때나 매우 입체적이다. 이 입체성은 어디서 왔는가? 박근혜의 말은 화자의 것이었는가, 독자의 것이었는가? 데리다는 이처럼 언어는 언제나 전유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전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현실로 드러난 오늘날의 파탄은 박근혜의 말을 오독하였기 때문인가? 오독으로 인해서 박근혜 개인의 특질을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인가? 민주주의는 이러한 위기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 장점도 단점도 아닌 민주주의 그 자체라고 데리다는 말했다.
재밌지만 여기서 그만.
//
[How to read 데리다]를 읽다가 내 생각의 깊이가 얼마나 얕은가 절망했다. 나는 박근혜 정권의 지배 양식, 조금 더 나아가 한국 현대 민주주의의 작동을 언어의 사적 지배라고 생각했다. 저항하는 방식이 권력의 작동 방식과 일치한다는 관찰 때문에 내린 속단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기민한 판단이 아니라 우둔한 오만이었다. 식민지적 언어에 대한 편견과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편견과 환상을 이어나가려는 이유는 하나 뿐이다. 데리다적인 정치-환상적인 과정을 스스로 구축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다는 자기 만족을 취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폭력과 교활함을 가하고 내 자신을 타자화시키려 했다. 가장 무서운 점은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확신에 가득차 속임수를 이어나갔다.
//
http://redtea.kr/pb/view.php?id=timeline&no=10415
이준석과 박근혜의 만남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 모델에 대한 페미니즘적 해설을 짤막하게 한 글인데... 현실적으로 이준석과 박근혜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지만 일면 타당한 생각이다.
그런데 타당한 생각이 되기 위해 전제해야 하는 것, 그러니까 이준석의 말, 그리고 이준석의 말 안에 있는 박근혜의 말, 이 말들을 우리가 "독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리다의 "말은 글이다"가 생각난다.
박근혜라는 인물은 지금이나 그 때나 매우 입체적이다. 이 입체성은 어디서 왔는가? 박근혜의 말은 화자의 것이었는가, 독자의 것이었는가? 데리다는 이처럼 언어는 언제나 전유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전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현실로 드러난 오늘날의 파탄은 박근혜의 말을 오독하였기 때문인가? 오독으로 인해서 박근혜 개인의 특질을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인가? 민주주의는 이러한 위기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 장점도 단점도 아닌 민주주의 그 자체라고 데리다는 말했다.
재밌지만 여기서 그만.
//
[How to read 데리다]를 읽다가 내 생각의 깊이가 얼마나 얕은가 절망했다. 나는 박근혜 정권의 지배 양식, 조금 더 나아가 한국 현대 민주주의의 작동을 언어의 사적 지배라고 생각했다. 저항하는 방식이 권력의 작동 방식과 일치한다는 관찰 때문에 내린 속단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기민한 판단이 아니라 우둔한 오만이었다. 식민지적 언어에 대한 편견과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편견과 환상을 이어나가려는 이유는 하나 뿐이다. 데리다적인 정치-환상적인 과정을 스스로 구축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다는 자기 만족을 취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폭력과 교활함을 가하고 내 자신을 타자화시키려 했다. 가장 무서운 점은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확신에 가득차 속임수를 이어나갔다.
저는 이걸 알튀세르 읽으면서 처음 안건데요. 변증법은 결국 모순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사회변혁적 과정이잖아요, 근데 이러한 갈등을 내재한 모순들도 깊이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가장 원론적이고 깊은 곳에 있는 모순이 '경제'였던게 기존의 맑스주의라면(그래서 노동자가 그 모순의 호명으로 유효했다면) 알튀세르가 보기에는 가장 깊은 곳(최종적 결정을 내리는 심=최종심급)에 있는 모순이 이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 모순까지의 다양한 영향들이 중층적으로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했던걸로 저는 독해했어요. 그래서 최종심급이라는 단어는 어떤 모순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깊은 곳에 있다는 의미로 쓰고 있어요. 물론 이걸로만 결정되는건 아니다 라고 얘기했던가 알튀세르였다고 생각하구요.
ㅇㅇ
한국 학계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 학계에 밀려요. 양으로나 질로나. 제 전공분야가 중국이라 더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경우 한자 숙달 수준에서부터 스노우볼링이 진행되는 걸로 보여요. 일단 독해력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니까요.
일본인과 한국인이 주어진 텍스트를 놓고 얼마나 더 빠르고 정확하게, 그러니까,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해하느냐에서 일본인이 10%정도 앞서있다는 게 OECD의 조사결과인데, 두 사람이 똑같은 과제를 놓고 경쟁하면서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10% 버프 받고 빠르고 정확하게 독해를 해낸다면 게임이 될래야 될 수가 없지요.
한국 학계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 학계에 밀려요. 양으로나 질로나. 제 전공분야가 중국이라 더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경우 한자 숙달 수준에서부터 스노우볼링이 진행되는 걸로 보여요. 일단 독해력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니까요.
일본인과 한국인이 주어진 텍스트를 놓고 얼마나 더 빠르고 정확하게, 그러니까,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해하느냐에서 일본인이 10%정도 앞서있다는 게 OECD의 조사결과인데, 두 사람이 똑같은 과제를 놓고 경쟁하면서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10% 버프 받고 빠르고 정확하게 독해를 해낸다면 게임이 될래야 될 수가 없지요.
아 제가 애매하게 썼네요.. 제가 염두에 둔 건 일반적인 인터넷 커뮤니티 여론은 아니었고요. 제가 알고 있는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 경험자들, 좌파 내지 리버럴 좌측에 걸쳐 있는 사람들의 경향성이었어요. 세대적으로는 최소한 30대 이상, 가장 눈에 띄기로는 진보언론 기자들이 그래요. 물론 대부분의 (남초) 커뮤니티는 반성적 초토화 상태이고, 그들과 일부 언론 사이에 거의 세대전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갈등이 잠재해 있는 듯해요. 지금 신화적인 투사가 되어 있는 손석희 사장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주적 중 하나였지요.
... 더 보기
... 더 보기
아 제가 애매하게 썼네요.. 제가 염두에 둔 건 일반적인 인터넷 커뮤니티 여론은 아니었고요. 제가 알고 있는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 경험자들, 좌파 내지 리버럴 좌측에 걸쳐 있는 사람들의 경향성이었어요. 세대적으로는 최소한 30대 이상, 가장 눈에 띄기로는 진보언론 기자들이 그래요. 물론 대부분의 (남초) 커뮤니티는 반성적 초토화 상태이고, 그들과 일부 언론 사이에 거의 세대전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갈등이 잠재해 있는 듯해요. 지금 신화적인 투사가 되어 있는 손석희 사장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주적 중 하나였지요.
한겨레 경향 시사인이 사회운동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확실히, 어떤 부분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는 느낌이 있어요. 혹은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거시적으로 본다'는 느낌? 여성운동뿐만 아니고 모든 운동에 대해 그렇긴 하지만요. 그렇게 운동의 약한 부분을 '덮고 가던' 관례들이 심각한 파국을 불러온 것을 보아온 독자들은 좀더 가차없는 직필을 원하게 되지요.
제 지인인 어느 학생운동 출신의 학원강사는 아주 인기 있는 사회논술 선생님이었어요. 그는 학생들에게 한국 사회에 주사파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주사파니 종북이니 떠드는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어요. 그 뒤에 경기동부 사태가 터졌죠. 저는 그에게 배웠던 학생 하나가 그의 페이스북에 격한 댓글을 달아 선생님 왜 그때 거짓말을 했나요, 주사파는 이제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장면을 보았어요. 선생에게는 정말로 낯뜨거운 상황이지요.
그때 저는 상황을 너무 크게 보거나 너무 작게 보면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개인적인 교훈을 얻었지요. 여성운동에 대한 관점도 마찬가지일 거 같아요.
한겨레 경향 시사인이 사회운동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확실히, 어떤 부분에 대해선 말을 아낀다,는 느낌이 있어요. 혹은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거시적으로 본다'는 느낌? 여성운동뿐만 아니고 모든 운동에 대해 그렇긴 하지만요. 그렇게 운동의 약한 부분을 '덮고 가던' 관례들이 심각한 파국을 불러온 것을 보아온 독자들은 좀더 가차없는 직필을 원하게 되지요.
제 지인인 어느 학생운동 출신의 학원강사는 아주 인기 있는 사회논술 선생님이었어요. 그는 학생들에게 한국 사회에 주사파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주사파니 종북이니 떠드는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어요. 그 뒤에 경기동부 사태가 터졌죠. 저는 그에게 배웠던 학생 하나가 그의 페이스북에 격한 댓글을 달아 선생님 왜 그때 거짓말을 했나요, 주사파는 이제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장면을 보았어요. 선생에게는 정말로 낯뜨거운 상황이지요.
그때 저는 상황을 너무 크게 보거나 너무 작게 보면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개인적인 교훈을 얻었지요. 여성운동에 대한 관점도 마찬가지일 거 같아요.
네..그랬으면 하는데 한국 2~30대 남성(적어도 인터넷 유저)에게는 페미니즘은 "악'이자 차별을 조장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있어 논의 자체가 진전이 잘 안될걸요. 같은 나이대의 여성이 이미 제도적으로 평등한 상태에서 꿀빨고 편하게 사는데 걔네들이 어머니 세대도 아니고 무슨 차별을 겪었느냐 차별을 당해도 윗세대 책임 or 그건 사소한 일이다 라는 입장이 대다수라..어쩌면 사회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와중에 여성들이 어떤 상황과 입장에 처해져 있는지 알기 싫은 건 그들에게 있어서 당연하겠지요. nickyo님 말대로 이데올로기 해체랑 개인 성애의 기호 영역 해체?랑 구분이 잘 안가는 것도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운동전략적으로) 지금 20대가 성적 대상화나 소위 말하는 여혐에 주목하는거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지점이 사실 이론적으로도 제대로 구별되지 않은 지점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20대 여성이 가장 주목해야 하는건 졸업 후 노동시장에서의 성차인데 이건 공격할만한 데이터도 충분하고 이론적 근거도 빠방하거든요. 저는 그래서 소련이 여성노동권을 확장했던 사례를 통해서 사고했을때, 이미 국가가 여성에대해 가부장적 모성모델을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고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상황에서 여성의 경력단절, 임금차별,... 더 보기
저는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운동전략적으로) 지금 20대가 성적 대상화나 소위 말하는 여혐에 주목하는거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지점이 사실 이론적으로도 제대로 구별되지 않은 지점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20대 여성이 가장 주목해야 하는건 졸업 후 노동시장에서의 성차인데 이건 공격할만한 데이터도 충분하고 이론적 근거도 빠방하거든요. 저는 그래서 소련이 여성노동권을 확장했던 사례를 통해서 사고했을때, 이미 국가가 여성에대해 가부장적 모성모델을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고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상황에서 여성의 경력단절, 임금차별, 부차적 노동으로의 취급, 가사노동의 사회화. 네 가지 문제에 집중해서 싸우고 이걸 제도적 평등까지 이끌어나간다면 20대 초에 일어나는 대상화의 문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실질적 경제력을 통한 힘 두 가지를 얻는 시점에서 '자발적이고 힘에의해' 깨질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물리적 범죄나 힘의 폭력 같은 문제는 남아있겠지만, 여성들이 지금보다 사회진출이 보장되고 더 강한 경제적 힘을 얻는다면 그 힘 자체가 다른 차별을 하나씩 깨나갈거에요.
그런면에서 이런 제도적 변화를 이끄는건 가뜩이나 불황+기술발달에 의한 일자리감소가 전망되는 상황에서 두 가지 힘을 필요로 하는데 하나는 이게 올바르다는 당위성의 위치이고 또 하나는 사람들이 이것에 동의하고 싶어야 한다는거에요. 물론 여성주의 세력에서 80년대 90년대 지나서도 우리가 남자 눈치보면서 허락하는 운동해야되냐는 심정적 빡침에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렇게 안 하면 힘있는 사람들에게서 뺏어올 힘 자체가 없어서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못바꾸게 되요. 지금 내 빡침이 중요한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차별의 철폐가 중요한지는 각자의 ... 더 보기
그런면에서 이런 제도적 변화를 이끄는건 가뜩이나 불황+기술발달에 의한 일자리감소가 전망되는 상황에서 두 가지 힘을 필요로 하는데 하나는 이게 올바르다는 당위성의 위치이고 또 하나는 사람들이 이것에 동의하고 싶어야 한다는거에요. 물론 여성주의 세력에서 80년대 90년대 지나서도 우리가 남자 눈치보면서 허락하는 운동해야되냐는 심정적 빡침에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렇게 안 하면 힘있는 사람들에게서 뺏어올 힘 자체가 없어서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못바꾸게 되요. 지금 내 빡침이 중요한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차별의 철폐가 중요한지는 각자의 선택이겠죠. 문제는 지금 젊은 이들 사이에서 말씀하신대로 여성주의가 가진 위치가 근 몇년사이에 '성평등 해야지'->'말도 꺼내지마'로 움직였다는 거에요. 이 비난이 어느정도 부당한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회를 변혁하는 대중운동이라는게 결국 대중이 바라는 것에 이끌려 갈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고려한다면 지금 형성된 이러한 편견이 나중에 진짜로 끊어내야 할 성차를 못 끊게 할 장애물이 될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는 20대 30대 젊은 여성의 평등보다 30대 이후 경력단절/모성/기회박탈/노년빈곤 네가지 측면에서 여성의 노동권 탄압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다보니 이런 생각을 하는거겠죠. 제가 성적 대상화와 젠더언어폭력에 노출되어있는 20대 젊은 여성이었다면 이런식으로 느긋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어요.
사실 저도 nickyo님이 말씀하신 여성주의 세력에서 여성 노동문제에 포커스를 더 집중해야 했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겪어보니 젠더와 노동문제는 따로 놀 수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억눌려 있는 여성과의 연대에 꼭 필요하다고 보고요. 여혐과 성적 대상화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의식을 바꿔야지 단번에 바뀌는 게 아니거든요. 저쪽에서 너희 여자들도 우리 남자들을 대상화하면서 라는 양비론을 들고 나오면 할말이 없어져요.
그리고 임금차별 해결도 쉽지 않은게 이게 말이 많아요. 직종마다 받는 임금이 다르기 때문이지... 더 보기
그리고 임금차별 해결도 쉽지 않은게 이게 말이 많아요. 직종마다 받는 임금이 다르기 때문이지... 더 보기
사실 저도 nickyo님이 말씀하신 여성주의 세력에서 여성 노동문제에 포커스를 더 집중해야 했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겪어보니 젠더와 노동문제는 따로 놀 수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억눌려 있는 여성과의 연대에 꼭 필요하다고 보고요. 여혐과 성적 대상화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의식을 바꿔야지 단번에 바뀌는 게 아니거든요. 저쪽에서 너희 여자들도 우리 남자들을 대상화하면서 라는 양비론을 들고 나오면 할말이 없어져요.
그리고 임금차별 해결도 쉽지 않은게 이게 말이 많아요. 직종마다 받는 임금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직종마다 집중된 성별도 나뉘어져 있고 같은 직종 내에서도 세부적으로 갈리고요.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동일노동에서의 임금차별을 말도 안된다. 여성들이 이공계 나 현장직보다는 쉬운 서비스, 사무직으로 일을 하고 있고 같은 사무직 내에서도 힘든 일(정수기 물통갈기, 짐 나르기, 야근, 출장 등등)을 자발적으로 안하고 편한 것만 찾는데 적게 받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직종이 다르다면 받아들이겠지만 같은 직종에서의 기준은? 부당한 면이 곳곳에 보이는데도 설명하기가 힘들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연구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임금차별 해결도 쉽지 않은게 이게 말이 많아요. 직종마다 받는 임금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직종마다 집중된 성별도 나뉘어져 있고 같은 직종 내에서도 세부적으로 갈리고요.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동일노동에서의 임금차별을 말도 안된다. 여성들이 이공계 나 현장직보다는 쉬운 서비스, 사무직으로 일을 하고 있고 같은 사무직 내에서도 힘든 일(정수기 물통갈기, 짐 나르기, 야근, 출장 등등)을 자발적으로 안하고 편한 것만 찾는데 적게 받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직종이 다르다면 받아들이겠지만 같은 직종에서의 기준은? 부당한 면이 곳곳에 보이는데도 설명하기가 힘들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연구와 설명이 필요합니다.
마자영ㅇㅇ 저도 닠요님의 의견에 일정부분 공감해요. 진짜 평등이 되려면 그런 제도적인 측면과 법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것들이 개선되야 여성의 지위가 보장받을 수있겠죠 근데 문제는... 그런 큰 것들이 실제로 젊은 여성들한테는 잘 와닿지 않는다는거에요 아직 청소년이나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들이요..그래서 일상적으로 쉽게 정말 매일매일당하는 그런 성적대상화는 언어폭력에 대한 분노로 시작되는게 많죠.. 자기 삶에서 너무 많이 경험하는 일상적인부분이니까요.. 그런 분노가 님이 말한 그 문제의 근간에 대한 분노까지 이어져서 개선되길 바라네요..... 더 보기
마자영ㅇㅇ 저도 닠요님의 의견에 일정부분 공감해요. 진짜 평등이 되려면 그런 제도적인 측면과 법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것들이 개선되야 여성의 지위가 보장받을 수있겠죠 근데 문제는... 그런 큰 것들이 실제로 젊은 여성들한테는 잘 와닿지 않는다는거에요 아직 청소년이나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들이요..그래서 일상적으로 쉽게 정말 매일매일당하는 그런 성적대상화는 언어폭력에 대한 분노로 시작되는게 많죠.. 자기 삶에서 너무 많이 경험하는 일상적인부분이니까요.. 그런 분노가 님이 말한 그 문제의 근간에 대한 분노까지 이어져서 개선되길 바라네요..ㅎㅎ그래도 일상적으로 느끼는 사소한 것에 대한 분노가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의식개선을 만들어낸것 같아욤 그래서 님이 말한 문제에 대한 생각에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엄청 적극적이진 않지만요ㅎㅎ남성들이 느끼는 쟤네 왜 이런거에까지 여혐이라 그래? 라는 반응이 당연한거져..ㅋㅋ진짜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에서부터 그런 미소지니가 잇으니까욤.. 이런 현재 방향이 독이 될지 아니면 정말 큰 변화로까지 이어갈지는 두고봐야하는 문제 같네요!
성정체성은 태어나면서 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전 여성운동을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과 종종 비교하곤 했어요. 강남역 사건에선 Black lives matter 구호가 바로 떠오르기도 했고요. 글 읽고나니 한국에선 노동 운동과 비교가 더 유의미한 것 같네요. 저는 기술의 진보로 인한 디지털 시대의 도래가 꼭 소수자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로워요. 악의적인 박제와 재생산은 결국 소수자의 자기검열로 이어지고, 정체성 드러내는 것을 위축시킬 것 같아서요. 악의를 가진 이들에게도 공정한 비판이 가해졌으면 하는 심정...하지만 시대적 흐름이라 어찌할 수 없는 부분 같기도 하고요.
어느 운동이든 비판에 열려있지 않으면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체성 정치의 해체는 철알못이라 감이 잘 안오네용. 어떤 모습일지..
어느 운동이든 비판에 열려있지 않으면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체성 정치의 해체는 철알못이라 감이 잘 안오네용. 어떤 모습일지..
이 글을 읽기 위해서 나머지 읽어야할 논문과 공부거리들이 엄청 많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ㅋㅋ 월도 한계를 넘어선...
영어로 읽는 것이 한자로 쓰여있는 것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것도 ...
최종심급이 뭔가 한참 생각해보았다가 아무래도 Last Instance 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맞는지...
http://publishing.cdlib.org/ucpressebooks/view?docId=ft3n39n8x3&chunk.id=d0e683&toc.depth=100&brand=ucpress
점점 재밌는 읽을 것이 쌓여가네요. :)
영어로 읽는 것이 한자로 쓰여있는 것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것도 ...
최종심급이 뭔가 한참 생각해보았다가 아무래도 Last Instance 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맞는지...
http://publishing.cdlib.org/ucpressebooks/view?docId=ft3n39n8x3&chunk.id=d0e683&toc.depth=100&brand=ucpress
점점 재밌는 읽을 것이 쌓여가네요. :)
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