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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1/02 21:46:13
Name   SCV
Subject   [한단설] 점심 산책
여느 때 처럼 점심식사를 하고 산책을 나섰다. 하루 삼십 분 남짓한 이 시간이 내가 온전히 홀로 있는 시간이었다. 요새는 날이 추워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나갔다.

누군가는 담배를 피러 가고, 누군가는 차를 한 잔 마시러 갔다. 낮은 울타리를 따라 걷는 동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다가, 또 숙여서 땅을 보다가, 왼쪽을 보기도 하고, 오른쪽을 보기도 하고 주위를 여기 저기 둘러보려 애를 썼다. 아침 내내 앉아 고정된 자세로 일하기 때문에 지금 제대로 풀어주지 않으면 오후 들어 더욱 어깨가 결리곤 했기에 지금 열심히 풀어주려 애썼다.

그 모양새가 꽤나 우스꽝스러웠는지, 지나가다 본 사람이 한 소리씩 한다. 웃으려면 웃으라지, 나도 그냥 웃고 넘기며 계속 걸었다.

울타리를 따라 걷는 길은 길지도 짧지도 않고 딱 적당했다. 한 바퀴에 15분이니까, 일이 바쁠 때는 한 바퀴만 돌고 일을 하러 가기도 하고, 바쁘지 않을 때는 두 바퀴를 다 채워 돌면 일이 딱 맞았다. 내 자리는 비워 둘 수가 없는 자리여서, 내 점심시간 동안 자리를 봐주는 사람과 시간 맞춰 교대해주지 않으면 민폐다. 시계를 볼 것도 없이 대충 한 10분이 흘렀다. 2/3바퀴를 돌았으므로.

- ‘오늘도 산책이시네요’
- 응. 작업은 잘 되고 있어?
- ‘그럭저럭이네요. 그래도 영식 선배가 와줘서 한결 수월해지고는 있어요.’
- 다행이네. 이따 저녁 때 보자고.
- ‘네. 수고하세요’

산책을 하면서 또 하나의 좋은 점은 평소 내 자리에만 앉아있어서는 볼 수 없는 사람을 만나고 간단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긴 했지만, 대충 지루해질 때 쯤이면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었으면, 하고 바라기 마련이다. 맡은 일이 꽤나 어려워 고생하던 제호가, 최근 들어온 학교 선배인 영식이라는 친구 때문에 일에 속도가 붙어 즐거워 하는 모습이 꽤 기꺼웠다. 일이라는게 그렇다. 같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재미가 붙는 법이다.

바람이 다시 가볍게 불어왔다. 공기가 제법 쌀쌀했지만 코를 타고 넘어 들어오는 청량한 공기는 기분을 한층 더 좋아지게 했다. 이 추운 날에도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었다. 나비라도 한 마리 있었으면 좀 더 기분이 좋아졌을까, 하는 찰나에 무전기의 수신음이 이어폰을 타고 귓전에 맴돈다.

- [‘여기는 호텔 퀘벡, 호텔 퀘벡. 시에라 공하나 시에라 공하나 나와라 오버.’]
- 아 여기는 시에라 공하나. 무슨 일인지?
- [‘시에라 공하나, 산책 중단하고 빠른 복귀 바란다 오버’]
- 시에라 공하나, 복귀하겠다. 그런데 무슨일인가 오버?
- [‘몰려온다. 입감했으면 빨리 뛰어라 오버’]
- 에이 씨.

본부에서 온 호출이었다. 목가적인 시간은 이제 끝났다. 다행히 산책코스가 근무지에 가까워 올 무렵이라 많이 뛰지는 않았다. 자리에 앉아서 새벽에 정성껏 손질한 Cheytac 의 든든한 개머리판을 어깨에 붙였다. 내 파트너인 시에라 공둘이 옆에 와서 앉아 거리 측정기가 달린 망원 스코프를 만지작거렸다.

- 뭐야 무슨일이야?
-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낮에 이렇게 몰려온 적은 별로 없는데.’
- 에이씨. 산책도 못하게. 나갔던 애들은 다 복귀했냐?
- ‘아뇨. 간신히 간신히 오고 있나봐요. 다치는 사람 없어야 할텐데’
- 그러게. 탄은?
- ‘넉넉히 가져다 놨어요. 슬슬 땡기시죠? 늑장부리면 본부 애들 또 목소리 쫙 깔고 시에라 공하나 복귀하기 바란다 어쩌고 할텐데. 쟤네들 막겠다고 뭐 하나 터지면 또 지랄해요’
- 에이씨. 내 탄들은 안비싼가 뭐. 구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제원 불러. 빠알리 끝내자.
- [‘여기는 호텔 퀘벡 여기는 호텔....’]
- 야 안그래도 잡았다 지금. 재촉하지 마라.

몰려드는 좀비들의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하나씩 내 주면서, 내일 점심 먹고 산책 할 때는 무전기를 꺼놔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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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픽션 100% 입니다.

저는 생존주의자라서 (나무위키 참조) 이런저런걸 이럭저럭하게 구비해놓고 이러저러하게 대비책들을 세워가는걸 즐기곤(?) 합니다.
게임도 맨날 This war of mine 같은거나 하고 앉았고 -_-....
회사에서 점심 먹고 홀로 산책하는게 일상인데, 문득 좀비를 피해 bug-in  해서 함께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 나날들이 격정의 시간들을 지나 평온해지고 나면
마치 직장생활처럼 따분 -_- 해지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써봤습니다.

군필이 아니신 분들을 위한 주석
호텔 퀘벡 : 본부를 뜻하는 HQ의 포네틱 코드입니다.
시에라 공하나 : 스나이퍼 (주인공)을 뜻하는 S-01 포네틱 코드입니다. 파트너인 관측수는 S-02
Cheytac : 제가 제일 좋아하는 저격총입니다. 더블타겟이라는 영화에서 잠깐 나온 적이 있는데요, 참 이쁩니다.
포네틱 코드 : 무전기는 통화품질이 개판.. 이라 말을 잘못 알아들을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구분하기 쉽게 포네틱 코드를 씁니다. 전쟁영화같은거 보시면 알파 브라보 찰리 델타.. 어쩌고 하는게 있는데 이게 포네틱 코드입니다. 숫자도 일하고 이하고 전화상으로는 헷갈리는데, 그래서 하나 둘 삼 넷 ~ 으로 시작하는 포네틱 코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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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er Inside
    저는 발음이 나빠서 요즘도 씁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비올 때 '비', 물고기 할 때 '어'. 인사할 때 '인', 사과할 때 '사', 이빨 할 때 '이', 드래곤 할 때 '드'
    갑자기 안좋은 쪽으로 현란한 발음으로 리뷰를 찍어 올리시는 언**** 사이트의 모 카메라 기종 이름 닉네임 님이 생각나네요.
    Beer Inside
    안녕하십니까.... 헤푸취릴칠입니다.
    기아트윈스
    하나둘삼넷오여섯칠팔아홉공 하나둘삼넷오여섯칠팔아홉공. 아아. 감도 어떠십니까.
    상상속에서 주인공이 그냥 세미정장 같은거 입은 오피스워커였다가 갑자기 무전기 부터 ???!?!! 이런 후 SWAT팀 옷으로 갈아입혀졌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밌당!
    앗 ㅎㅎㅎ 글쓴이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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