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10/30 18:36:14
Name   tannenbaum
Subject   아재의 커피숍 운영기 - Mr.아네모네.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이 막 시작할 무렵이었을 겁니다.

어느날 우리 가게 테라스에 처음 보는 젊은 총각이 앉아 있는 걸 보았습니다. 버스 정류장 앞이라 평소에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잠시 앉아 있기도 했기에 별 신경 쓰지 않았었죠. 그런데 한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나도 그 젊은이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몇시간이 지나고 저녁 아홉시가 되어서야 그 젊은이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와 약속이 어긋난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그 다음다음날도... 계속 같은 시간 우리 가게 테라스에 앉아 두 세시간 동안 앉아 있다 가곤 하더군요. 처음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일주일 쯤 지나니 저도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자세히 보니 이국적으로 잘생긴 20대 후반 정도 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좋아하는지 건장한 체격이 참 다부지더군요. '짜식. 괜찮구먼' 생각하고 지나쳤습니다. 이전에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그 젊은이가 가끔 저를 힐끔힐끔 쳐다보던 기억이 났습니다.

어느 비오던 날이었습니다. 역시나 같은 시간에 찾아와 테라스에 앉았습니다. 저를 힐끔 쳐다보다 저와 눈이 마주치니 이내 곧 고개를 돌리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립니다. 순간 혹시 저 젊은이가 나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낮타임 알바에게 혹시 이러저러한 남자가 테라스에 혼자 한참 앉았다 가는 걸 본적 있냐 물었습니다. 전혀 없답니다. 혹시?? 하는 마음이 뭉글뭉글 올라왔습니다. 그러다 어느 비바람이 세차게 불던 일요일이었습니다. 역시나 그날도 같은 시간 어김없이 찾아왔고 그 젊은이는 저를 가끔 힐끗 쳐다보며 빗속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 돌아갔습니다.

혹시 하는 마음은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전 생각했습니다. '자네 마음은 이해하네만... 나는 젊은 사람은 별로 생각이 없다네. 사람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아네만... 미안하네. 자네는 젊고 아름다우니 또래 젊은이를 만나 행복하게나. 나같은 나이 든 사람말고...' 조금 안타까웠습니다. 어쩌다가 그런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말이죠. 그날 이후로 일부러 그 젊은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다 보면 그 젊은이도 내 마음을 알겠지 싶어서요.

이후로도 그 젊은이는 계속 찾아왔습니다. 그러다 한달쯤 지난 어느날 급하게 필요한 물건이 있어 편의점으로 가기 위해 가게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제가 문을 열고 나오자 그 젊은이는 저를 쳐다보곤 핸드폰으로 이내 시선을 돌렸습니다. 저도 시선을 일부러 피하고 테라스를 지날 때 그 젊은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몽고말이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우리 가게 와이파이를 잡아서 누군가와 몽고말로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국적으로 잘생긴 게 아니라 잘생긴 외국인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가게 멀지 않은 공단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일하는 것 같았습니다. 퇴근 후 고국의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 위해 비번 없는 와이파이를 찾다가 우리 가게를 알게 되었고 매일 같은 시간 우리 가게 테라스에서 영상통화를 했던거지요. 계속 저를 힐끔 쳐다봤던 건 혹여나 주문도 안하고 테라스에 앉아 와이파이 쓰는 걸 제가 뭐라 할까봐 눈치 봤던거지요. 어디 남는 쥐구멍 없으세요?

그래.... 내팔자에 무슨... 킁.

넵!!! 맞습니다. 저 혼자 한달간 쌩쇼를 한거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젊은이는 다른 몽고 친구들을 데려왔고 요즘엔 두세명이 테라스에 앉아 고향의 소중한 사람들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지금 저기 와 있네요.

혼자 도끼병 찍은 기분이 어떠냐구요?

어떻긴요. 통화하는데 어둡지 말라고 테라스에 조명 환하게 켜줬지요. 뭐.



6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146 일상/생각11월 12일 민중총궐기 집회 후기입니다. 15 nickyo 16/11/13 3987 12
    4144 일상/생각짝사랑 해보고 싶어요! 24 진준 16/11/12 4213 0
    4137 일상/생각초행길은 무서웡 9 성의준 16/11/11 3823 8
    4136 일상/생각꼰대가 싫다. 12 진준 16/11/11 3442 0
    4134 일상/생각영화 <색, 계> (와 아주 살짝 관련된 이야기) 16 black 16/11/11 4828 17
    4132 일상/생각군 시절 에피소드 -2 12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11/11 4239 0
    4128 일상/생각군 시절 에피소드 -1 12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11/10 3480 1
    4123 일상/생각인간의 본성, 나는 도덕적이야. 18 눈부심 16/11/10 4296 3
    4121 일상/생각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와 사람들 바라보기. 8 Zel 16/11/10 5246 5
    4113 일상/생각피부과에 다녀왔습니다(입술) 8 진준 16/11/08 3505 0
    4110 일상/생각푸른 색이 슬프지 않기를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6/11/08 4221 7
    4108 일상/생각. 6 설현 16/11/08 3270 2
    4103 일상/생각허리가 약해지나봐요(…) 12 진준 16/11/07 3634 0
    4099 일상/생각나의 LCHF 이야기 3 쉬군 16/11/06 4589 0
    4096 일상/생각잠 질문 올린 김에…수면시간 어떻게 되세요? 18 진준 16/11/06 3463 0
    4083 일상/생각(사진 포함)롤드컵 이벤트 경품 수령 후기 3 hunnyes 16/11/04 3628 2
    4069 일상/생각가족, 같은 회사를 떠나려고 합니다. 31 진준 16/11/03 4377 0
    4064 일상/생각왜 그녀는 영국항공으로 인천공항에 입국했을까 2 windsor 16/11/03 3758 0
    4057 일상/생각실시간으로 의견받지 말입니다(...) "3g폰 들고 다니면 그리 보기 싫어요?" 46 진준 16/11/02 3636 0
    4053 일상/생각3일을 봉사활동한 썰.. 4 Ben사랑 16/11/01 5448 1
    4047 일상/생각저의 다이어트(?) 이야기 성공 or 실패? 14 엘멜 16/10/31 3178 0
    4041 일상/생각아재의 커피숍 운영기 - Mr.아네모네. 13 tannenbaum 16/10/30 3460 6
    4025 일상/생각오늘은 금요일,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2 AI홍차봇 16/10/28 2836 0
    4022 일상/생각저의 다이어트 이야기 -3- 15 똘빼 16/10/28 3732 0
    4019 일상/생각새 데스크탑을 샀습니다 24 nickyo 16/10/27 3864 5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