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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0/15 01:28:21
Name   눈시
Subject   러일전쟁 - 뤼순항, 마카로프


2월 8일 16시, 러시아 포함 카레이츠는 급히 제물포(인천)를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2주 전에 일본군이 전신의 발신선을 끊어서 한국의 상황을 본국에 알릴 수 없는 상태였거든요. (수신선도 개전 하루 전에 끊어버렸답니다) 러시아 공사는 급히 카레이츠를 보내서 일본군의 상륙 등 개전 징후를 알리려 한 거죠. 헌데 나가다가 일본 해군 2분함대와 마주쳐 버립니다. 바로 공격을 당했지만 다행히 별 피해 없이 돌아올 수 있었죠.

+) 저거 발음을 꼬레이츠 등 여러가지로 하는데 정식이 어떤건지는 모르겠네요. 저는 카레이스키란 말이 낯익으니 그냥 저렇게 표기하겠습니다.

제물포 내항, 지금의 인천항에는 순양함 바랴크 외에는 싸울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일본군 3천여명의 상륙을 허용해야 했고, 자기들도 공격받게 되었죠. 혼자라면 빠져나갈수도 있겠지만 다른 러시아인들과 배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남았죠. 하나 더 믿을 구석도 있었습니다. 내항은 중립지대로 타국 군함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러일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죠. 이 중 계급, 나이에서 높았던 영국측에서 일본군에 중립지대니 공격하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일본군은 러시아측에 9일 정오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했죠. 영-프-이탈리아 삼국의 함장들이 국제법을 내세워 이에 항의했지만, 반대로 탈출할테니 호위해 달라는 러시아측의 요청도 역시 거부합니다.


순양한 바랴크 함장 프세볼로트 루드네프
"항복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고 피 한 방울까지 싸워서 순양함도 우리 자신도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중략) 진격을 앞두고 신의 은총을 빌며 신의 축복을 굳게 믿으며 우리 정교, 황제 그리고 조국을 위하여 용감하게 전투를 치르자. 만세!"

남은 러시아군은 결사항전을 결심합니다. 어차피 이길 싸움은 아니었지만 항복할 생각도 없었죠. 탈출하든가 죽더라도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자는 거였죠. 일본은 경고한 시각에 공격을 시작했고, 타국 군함에서 항의했지만 그들이 포탄을 맞아도 어쩔 수 없다면서 강행합니다. 일본측은 순양함만 6척, 상대가 될 수 없었죠.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군은 하함 후 자폭을 선택합니다. 카레이츠함이 먼저 자폭했고, 바랴크함은 자침을, 상선 숭가리호는 자폭을 선택합니다. 일본은 상륙하고 구조한 이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하다가 러시아와 협상해 돌려보냈고, 러시아에서는 항복하지 않은 그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순양한 바랴크는 이후 일본군이 인양해서 쓰다가 러시아에 돌려줍니다. 현재 모스크바급(소련시절 슬라바급) 순양함 3번함이 이름을 물려받았죠. 이 함에 루드네프의 초상화와 해전의 기록화가 걸려있다고 합니다.

이런 결사적인 저항에 일본군의 피해도 커서 30여명이 전사하고 200여명이 부상당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순양함 아사마함이 예인선이 끌어서 사세보로 가야 할 정도로 손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러시아군은 바랴크가 자침할 때 이미 저 정도의 피해라 하니 일본보다야 크겠지만 큰 차이는 나지 않을 것입니다. 충분한 피해를 주고 배도 넘겨주지 않은 것이죠.

이것이 제물포 해전입니다. 아무래도 뤼순 해전에 비해서 중요하지 않죠.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부분은 더 있습니다. 일단 러일전쟁에서 처음 공격받은 게 하필 카레이츠, 한국이라는 뜻을 가진 함이라는 게 참 신기하죠. 그리고 일본의 요청으로 월미도에서 러시아군 등 외국 함선들의 동태를 살펴보던 군함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양무, 낡은 석탄 운반선을 일본에게서 바가지 쓰고 (110만원으로 정부 예산의 10% -_-;) 사서 군함으로 개조한 배였죠. 가성비가 워낙에 안 좋고 일본이 준다던 운항기술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서 제대로 쓰지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에게야 비쌌지 그냥 무장상선 수준이었죠.

이 때 양무함은 일본의 요청으로 소월미도에서 정탐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대한제국의 현실을 알려주는 사실이죠. 인천사람들도 이 해전을 구경하러 왔고, 얼마 안 가 정부도 알게 됐을 겁니다. 아직은 몰랐겠죠. 이렇게 시작된 전쟁이 자신들의, 한국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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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본판으로 가 봅시다. 2월 9일 밤, 수뢰정을 중심으로 한 야습이 시작됩니다. 목표는 일본군의 상륙이 예정된 다롄과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있는 뤼순이었죠. 당시 뤼순 외항에는 전함 7척과 순양함 9척 등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뤼순을 공격한 일본 해군 1함대는 전함 6척과 순양함 6척 등이 있었죠. 총톤수야 일본 쪽이 컸지만, 만만치 않았죠. 이걸 위해 수뢰정을 먼저 동원한 겁니다.

+) 같은 순양함이라도 방어력에 따라 장갑순양함과 방호순양함으로 나뉩니다. 1등순양함, 2등순양함으로 나누기도 하구요. 어려운 부분이고 책마다 그 구체적인 수도 다르니 -_-; 중요한 부분 아니면 그냥 전함/순양함 정도만 나누겠습니다.


슈바르츠코프 어뢰. 러일 등 여러 나라에서 도입했다 합니다.

배가 잠기는 선, 흘수선 아래를 폭탄으로 공격한다면 그 파괴력은 위를 때릴 때보다 훨씬 강하죠. 옛부터 이런 시도는 있었고, 19세기에 현대적인 수뢰, 혹은 기뢰가 탄생합니다. 이후 지금까지도 기뢰를 깔아놓으면 큰 배도 쉽게 침몰시킬 수 있고, 아예 항구를 봉쇄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뢰에 발이 달린다면?
이전에는 배 앞에 달아서 적함에 갖다 박는 자살공격이나 다름없는 방식을 썼습니다. 활대기뢰라 했죠. 1866년에 드디어 추진이 가능한 기뢰가 발명되니 어魚형수뢰, 어뢰라 부르게 됩니다. 이런 어뢰와 기뢰를 탑재한 배를 수뢰정이라 불렀구요. 작은 배로 큰 배를 잡을 수 있다는 큰 이점 덕분에 러일 양국 다 많이 썼습니다. 이걸 쫓아내기(구축) 위해 태어난 게 구축함이죠. 현재도 이런 어뢰정이 남아있지만 이런 역할은 미사일 고속정으로 옮겨갔죠.

극동총독 알렉세예프는 단교를 듣고도 언론에 알리지도, 함대에 주의를 주지도 않았습니다. 이전편에 썼듯 함대사령관 스타르크는 파티를 열고 있었구요. 경계는 허술해 수뢰정이 침투하기 쉬웠고, 각 배들이 켠 탐조등은 좋은 목표가 되어줬습니다. 수뢰정들은 이들에 가까이 접근, 16발의 어뢰를 발사합니다. 이 중 3발이 명중,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이 피격당합니다. 침몰하진 않았지만 큰 피해를 입고 몇달간 참전하지 못 하게 되었죠. 나쁘진 않았지만, 기대했던 것보다는 작은 성과였습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죠. 계획대로 아침에 주력함대가 뤼순으로 향합니다.

러시아군 역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기대와는 다르게 나왔죠. 열받은 함대가 원해로 나와주길 빌었지만, 이런 유인책에 넘어가지 않은 겁니다. 일본군은 러시아 함대는 물론 해안포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일본군은 기함 미카사도 피해를 입는 등 만만치 않은 반격을 받고 물러나야 했죠. 다음 날에 수뢰정으로 재차 공격했지만 이젠 러시아군도 방비하고 있었습니다.

+) 해안포는 고정시켜서 쓰는만큼 야포와 다르게 큰 걸 쓸 수 있었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쏘는 함포에 비해 명중률도 더 좋았고, 방어력도 더 좋았습니다. 때문에 잘 방어된 항구는 함대만으로 떨어뜨리기 힘들었죠.

완벽한 기습이었음에도 큰 피해를 주지 못했습니다. 끌어내어서 치자니 러시아군은 내항으로 숨었고, 그 좁은 곳으로 들어가서 공격하는 건 불가능했죠. 그렇다고 24시간 내내 뤼순항 앞에서 죽치고 있을수도 없었구요. 이후에도 수뢰정과 구축함들을 보내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작전을 바꿉니다. 없앨 수 없다면 아예 뤼순항에 가둬버린다는 거였죠.


뤼순항, 러일전쟁의 중심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수심 문제로 내항의 전함과 순양함이 나오려면 하루 두 번 있는 만조 때만 가능했습니다. 이 때도 수심이 깊은 부분으로 나왔죠. 여길 막아버리는 겁니다. 배를 자침시켜서 말이죠. 일본에서는 이걸 폐색작전이라 했는데, 한국에선 그대로 쓰거나 폐쇄, 봉쇄로 씁니다.

24일, 상선 5척을 동원한 1차 시도가 있었지만 러시아군은 일찌감치 대비하고 있었고 실패합니다. 골아프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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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은 주력 함대를 보존하는 길을 택합니다. 내항에서 나오지 않게 한 거죠. 작전은 수뢰정 위주로 하며 기뢰를 깔아서 일본군을 상대하려 한 겁니다. 이런 것 때문에 일본군이 고생을 많이 했지만, 해군의 역할인 제해권 장악을 완전히 포기한 건 전쟁을 더 어렵게 만들었죠.

러시아 해군의 문제도 시작하자마자 드러납니다. 11일 기뢰를 부설하던 수뢰정 예니세리가 기뢰 밟고 침몰했고, 순양함 보야린이 기뢰 위치를 모르고 진상 파악을 위해 나왔다가 역시 침몰합니다. -_-; 여기에 25일 수뢰정 두 척이 정찰 나왔다가 일본군에 걸려 격침됐죠.

"지금 국민의 마음 속에 잠재해 있는 혁명 기분을 일소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작은 규모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전쟁에서 이겨서 제정(帝政)의 위신을 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 내무상 플뢰베가 니콜라이 2세에게. 실제로는 정반대의 결과가 일어났죠.


이전 상황이 어떻든 공격받은 이상 응징을 해줘야죠. 니콜라이는 전쟁을 결심했고, 10일 양국이 서로에게 선전포고합니다. 일단 중요한 건 해군이었죠. 기습을 당한 죄로 스타르크를 해임했고, 대신 보낼 사람을 찾았죠. 후보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Remember. No Japanese"

블라디미르 스테판 마카로프였죠.

마카로프는 러시아의 명장이자 해군전략에 관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에서도 인정받는 군사학자였습니다. 황족, 귀족들의 인맥으로 무능하고 부패했던 장교진에서 그의 존재는 독보적이었죠.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적의 첫 야간공격에서 우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며, 그 후에야 본인의 제안을 실행에 옮기게 될 것입니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있었던 그는 이미 외항에 정박하는 것의 문제를 파악하고 내항으로 옮겨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됐죠.

로제스트벤스키는 미친 개라는 별명을 가진 맹장으로 역시 해군 내에서 평민 출신으로 능력 있고 깨끗한 것으로 인정받는 이였습니다. 당시 그는 해군 총참모부장으로 마카로프의 주장에 반대했었죠. 다만 그 이유가 현지의 장교들의 결정을 마카로프의 주장대로 바꿔버리면 권위를 해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 ... 그리고 난봉꾼이었는데 심지어 상관이던 마카로프의 아내와도 불륜을 저질렀다 합니다. 이름이 어려우니 얼굴만 기억해둡시다. 나중에 다시 나옵니다.

니콜라이의 측근으로 자기가 가길 밀었지만 마카로프같은 명장을 썩일 순 없었죠. 마카로프가 결정됩니다. 그는 곧바로 특별위원회를 소집해 필요한 것들을 논의합니다. 당장 필요한 거야 군함의 증원이었지만 어려웠죠. 대신에 정찰을 위해 빠른 수뢰정을 요구합니다. 바다로는 못 가니 철도로 말이죠. 해군성에서는 이를 탐탁치 않아 했고, 3척을 주면서 파손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배 깨질 걱정을 하는 답답한 상황이었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다른 요구도 합니다. 자신의 책을 출판하고 그 중 500부를 극동으로 보내달라는 거였죠. 역시 거부당하자 안 해주면 안 할 거라고 나왔고, 겨우 받아들여집니다.

극동까지는 3주, 3월 7일에 알렉세예프를 만나 회의를 한 후 뤼순에 갔고, 드디어 태평양 함대를 지휘하게 되었죠. 상황은 마카로프의 예상보다 더 안 좋았습니다. 그가 기대를 건 수뢰정 24척 중 멀쩡한 건 8척이었거든요. 하지만 당장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고, 여기 있는 함대로 싸워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요동에 상륙한다는 일본군의 목표가 보였고, 이걸 막아야 했으니까요. 불리하지만, 나가야 했죠.

"모든 불완전성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중략) 본인은 아군이 모험을 걸 수 있으며, 제해권 장악을 시도해 볼 만하다고 봅니다. "

그는 각 함들을 둘러보고 장교와 사병들을 만나며 러시아군의 상황을 파악합니다. 반발을 무릅쓰고 무능력한 함장 등 장교진을 갈아치웠고 강도 높은 훈련을 계속합니다. 그의 계획에 따라 해안포를 배치하면서 방비를 강화했고, 수뢰정을 계속 보내 정찰을 지속했죠. 이렇게 러시아군의 분위기는 바뀌어 갑니다.

그동안 일본군은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수뢰정은 적에게 들키면 쉽게 무력화됐고 함대가 가까이 접근하면 해안포가 환영해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군의 모습이 갑자기 달라진 것이죠. 10일, 정찰 후 귀환하던 수뢰정 스체레구쉬가 위기에 처하자 직접 기함을 타고 달려가 일본군을 쫓아냅니다. 스체레구쉬는 이미 침몰했지만, 사령관이 직접 구하러 갔다는 것만으로도 수병들을 감동시켰죠.

일본군의 공격에 대한 대응도 갈수록 좋아집니다. 해안포가 없는 곳에서 내항으로 간접포격을 하자 역시 가접포격으로 맞섰고, 육지에서 관측할 수 있는 러시아군이 유리했습니다. 다시 시도하는 틈을 노려 빠르게 출항해서 쫓아버리기도 했구요. 이렇게 계속된 출격으로 일본군의 피해가 늘어갑니다.

위기를 느낀 일본군은 3월 27일 다시 폐쇄작전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마카로프는 배를 먼저 가라앉히고 기뢰를 깔아 일본군의 항로를 유도했고, 공격합니다. 역시 작전 실패였죠.


이 때 전사한 히로세 다케오 소좌(전사 후 특진해서 중좌)는 후에 군신으로 대접받습니다. 작전 실패 후 부하들과 함께 후퇴하려다 한 명이 없어서 그를 찾으러 갔고, 포기하고 돌아오려다 전사했죠. 러시아군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하고 정중히 묻어주었다 합니다. 공격하다 죽은 게 아니라 실패한 작전에서 부하를 구하다 죽은 걸 띄워준 게 의외군요. 영웅적인 죽음이긴 합니다만. 히로세 중좌라는 군가도 있습니다.

마카로프는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마카로프는 만조 한 번에 전 함대를 빠르게 출항하는 걸 시도합니다. 기존에는 8시간이나 걸린 것이었고, 반대가 뒤따랐지만 훈련을 지속했고, 성공했죠.

이제 해볼만해졌습니다. 일본군을 계속 흔들고 흔들면 랴오둥 상륙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러시아군의 방침은 장기전이고 육군이 오는만큼 해군의 증원도 올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제해권을 어떻게든 되찾으려 했죠. 일본군이라고 이걸 그냥 둘 수 없어서 지속적으로 함대를 보냅니다. 대규모 해전이야 벌어지지 않았지만 이대로면 제해권을 건 해전이 본격적으로 일어날 판이었죠.

그러던 4월 13일, 러시아의 수뢰정 스트라쉬니가 회항 중 일본군 분함대에게 공격받습니다. 보고를 들은 마카로프는 자신이 전 함대를 출격시킵니다. 러시아 주력함대가 나타나자 일본군은 자기네 주력함대로 돌아갔고, 결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던 마카로프도 후퇴합니다. 그런데... 09시 43분 그가 탄 기함 페트로파블로프크스에서 대폭발이 일어납니다. 하필 어뢰저장고 밑에서 폭발했고, 어뢰와 포탄, 보일러까지 연쇄폭발로 이어져버렸죠. 단 2분만에 침몰했고 650여명이 전사합니다. 구조된 건 80명 뿐이었죠. 그리고 이 전사자에 마카로프가 포함되었습니다.



비교하자면 이순신이 사천해전 때 맞은 총알로 전사한 것 정도일까요. 물론 그가 살아있었어도 결과가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야 얼마든지 있죠. 하지만 분위기를 이렇게 순식간에 바꿔버린 걸 보면 그보다 더 많은 걸 바꿨을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상륙작전과 해상 보급은 실제보다 더 방해했을 것이고, 황해 해전은 결과는 몰라도 전개가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빠르고 뜬금없이 전사하면서 모든 가능성은 사라졌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더욱 소극적이 됐고 말이죠.

이렇게 러시아 해군의 명장은 아쉽게 삶을 마감합니다. 러시아의 충격이야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일본에서도 유명한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구가 추모시를 지었다 합니다.

http://nhistoria.egloos.com/1216280
http://nhistoria.egloos.com/1218797

마카로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여길 참조해주시구요 '-'a 정말 운이라는 것도 크긴 큰거 같아요.

아주 우연은 아닙니다. 반격에 맞서 일본군이 기뢰를 깐 거였으니까요. 마카로프가 주로 쓰는 항로를 연구했고, 작전이 성공한 거였습니다. 이렇게 제대로 걸릴 줄은 몰랐겠지만요. 해전 역사에서 이보다 더한 마인대박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불발율도 높고, 폭풍이 치면 유실율도 높았지만 이렇게 큰 성과를 낼 수 있으니 기뢰를 쓴 거죠.


"전사한 함대장은 전황에 집착하는, 충동적 성격의 보유자로서 그의 그러한 점이 적의 작전수행에 도움을 주었다."

이후 극동총독 알렉세예프가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됩니다. 아주 소극적인 명령을 내렸구요. 마카로프를 철저하게 까면서 자신의 소극적인 모습을 변호했죠. 이후 뤼순이 포위될 것 같자 5월 5일에 비트게프트에게 자리를 넘겼구요. 이렇게 제해권은 일본이 다시 잡게 되었죠. 공격해도 러시아 함대는 다시 출항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륙을 위해선 러시아의 함대를 확실히 잡아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았습니다. 5월 2일 또 폐쇄작전을 시도했지만 또 실패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공격을 계속하다 기뢰 피해도 계속 나왔구요. 5월 15일에만 구축함 2척에 순양함 요시노가 기뢰에 당합니다. 배마다 수백명의 피해가 났구요. 피해가 매번 나오니 무리해서 압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게 있었으니... 러시아군의 증원이었습니다. 발트 함대를 제 2 태평양 함대로 바꿔서 보내기로 한 것이었죠.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이 1 태평양 함대와 힘을 합친다면, 작은 우세는 큰 열세로 바뀌게 됩니다.

해군으로 뤼순을 잡을 수 없다는 건 명백했습니다. 육군이 나서야 했죠. 육해군간의 합의가 이뤄졌고, 3군이 만들어져 뤼순으로 향합니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은 이미 뤼순을 쉽게 점령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리 어려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죠. 지휘관도 그 때 연대장으로 뤼순을 점령한 자에게 맡깁니다. 하지만, 10년 사이에 뤼순은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죠.

자, 이제 육군으로 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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