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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9/16 19:54:53
Name   눈시
Subject   러일전쟁 - 인아거일 vs 아시아주의


영국은 섬입니다. 이게 참 큰 장점이 있었죠. 백년전쟁 후에는 유럽 본토에 영토 욕심을 내지 않았고, 프랑스가 강국인만큼 낼 수도 없었죠. 대신 대항해시대에서 후발주자로 나섰음에도 세계최강이 됩니다. 그걸 선도했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스페인에게 육지에서 먹혔고, 강대국 스페인과 프랑스도 육군에 더 신경쓸 수밖에 없었던 걸 생각하면 섬나라의 장점은 정말 컸죠. 식민지에서 싸울 때야 육군이 필요하겠지만 유럽 국가들끼리는 어차피 소수끼리 붙는 거였고, 강력한 해군으로 조이고 소수정예 육군으로 이기면 되는 거였습니다. 식민지의 저항이야 뭐 굳이 설명할 필요 없겠구요.

그렇다 해도 자신에게 도전할만한 강대국의 출현은 늘 걱정되기 마련입니다. 영국은 유럽에서 패권을 차지할만한 나라, 지도자가 나오면 그 반대편에 붙어서 싸웁니다. 프랑스가 라이벌 수준이었지만, 그게 스페인이든 누구든 강해지면 견제했죠. 그 마지막은 독일에 대항해 프랑스, 러시아와 손을 잡는다는, 정말 놀라운 거였습니다.

나폴레옹을 쓰러뜨린 후, 영국이 다음 목표는 러시아가 됩니다. 어마어마한 영토로 유럽, 아시아, 심지어 아메리카까지 영토를 넓혔죠. 그 대부분이 살기 힘든 동토였지만 영토와 인구, 자원 등에서 엄청난 잠재력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대였죠. 힘을 키운 러시아는 필사적으로 부동항을 노립니다. 얼지 않는 항구였죠. 이게 영토만 큰 러시아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고, 이게 된다면 러시아가 얼마나 클지 걱정이 되는 부분인 거였죠.

러시아가 흑해를 노려 오스만 투르크를 때리자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크림 전쟁에 참전합니다. 중앙아시아에 손을 뻗자 인도를 지키기 위해 싸움에 끼어들었고,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하게 되죠. 전면전은 벌이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계속 견제한 겁니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합니다. (번역명이 딱히 없나 보네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 삼국협상(영-프-러)에 가서야 끝나는, 무려 백년이나 이어진 싸움이었죠. 둘이서 전면전을 벌이진 않았다 해서 냉전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사실 주인공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간 것만 빼면 (이 그레이트 게임에 미국도 일조합니다) 2차대전 후의 냉전과 많이 비슷합니다. 주로 중앙아시아에서의 대립을 다루는 용어지만, 이건 극동, 동아시아에도 이어집니다.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점령해 가면서 청과 한 번 부딪힌 게 네르친스크 조약이죠. 효종의 나선정벌로 유명합니다. 이후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러시아도 슬슬 끼어들기 시작합니다. 뭐 그렇다고 먼 극동까지 가서 열강과 싸우기엔 육군도 해군도 부족했습니다. 시간과 기회가 필요했죠.


1860년, 아편전쟁에서 러시아는 강화를 중재합니다. 그 대가로 연해주를 할양받습니다. 이렇게 우리와도 국경이 맞닿게 되었죠. 이 때 얻은 영토도 크지만, 더 큰 게 있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부동항을 얻은 것이죠. 완전한 부동항은 아니라 합니다만 이게 어딥니까.


이렇게 러시아는 부동항을 노리며 극동을 노리고 있었고, 중국은 물론 조선에도 접근합니다. 영국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죠. 조선과 러시아가 가까워질 기미를 보이자 거문도를 점령합니다. 그들은 포트 해밀턴이라고 불렀죠. 1885년부터 2년간 점령했고, 조선에서 거부하고 자기들도 큰 쓸모가 없다 싶어서 물러납니다. 불법 점거긴 하지만 섬 주민들에게 잘 해줘서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합니다. 조선 정부는 영국에서 말해주고서야 알았는데, 섬의 위치를 보면 그럴만 합니다. -_-a 아무튼 이건 러시아에게도 꽤 크게 다가옵니다. 영국 해군과 붙기엔 너무 약했으니까요.


극동의 중요성이 크게 올라갔습니다. 러시아의 차르(황제) 알렉산드르 3세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어마어마한 돈과 인력이 필요하지만 완성되면 러시아의 미래를 밝게 해 줄 사업이었죠. 바닷길 대신에 육지로 많은 인력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였습니다. 당시 독일에 맞서 손을 잡기 시작한 프랑스에게서 거액의 차관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고 희생됐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죠. 그 스케일이 엄청났기에, 1891년에 시작하고도 러일전쟁 당시까지 완성이 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1895년,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벌였고, 요동을 뱉어내게 합니다. 당연히 청을 생각해주는 순수한 마음은 아니었죠. 블라디보스토크는 부동항이라 하기엔 불완전했고, 더 남쪽으로 가야 했습니다. 결국 의화단 운동 때 자국민 보호를 핑계로 남하합니다. 목표는 일본이 전에 노렸던 뤼순(여순), 다롄(대련)이었죠. 1897년에 독일이 중국의 칭다오(청도)를 점령한 것도 이유였습니다.

지들이 피로 얻었다 말로 뺏긴 일본은 둘째치고, 영국에게 참 큰 사건이었습니다. 만주에서 꽤 이권을 누리고 있던 미국에게도 마찬가지였죠. 그렇다고 대놓고 충돌하기엔 그들에게도 부담이었습니다. 비문명국으로 가득한 아시아에도 그들과 함께 할 문명국이 있었죠. 일본이었습니다. 그 전에도 은근히 밀어준 게 일본이었지만, 러시아의 남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지원도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1902년의 1차 영일동맹이 그것이었죠. 그렇다고 자기들이 가진 중국에서의 이권을 일본에게 나눠주긴 싫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조선이었죠.

한반도는 대륙 세력에겐 해양으로 진출할 발판이고, 해양 세력에겐 대륙으로 진출할 발판이다... 단군 할아버지의 참으로 적절한 위치선정이라고들 말하죠. 이 때도 조선은 열강들에게 무시할만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게 문제였죠. 조선의 운명은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제국주의를 추구했다 하더라도 중국은 먹기엔 너무나도 큰 존재였습니다. 영국 등은 중국에 대한 영토 욕심은 버리고 이권을 얻는 데 집중했죠. 이홍장이나 공친왕 등은 이런 열강들한테 내줄건 내주면서 얻을 건 얻고, 열강들의 세력다툼을 이용해 중국이 살 길을 모색합니다.

여기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뉩니다. 중국에 대한 영토 욕심을 가진 두 열강에 대해서 말이죠. 하나는 일본, 하나는 러시아였습니다. 이홍장이 주로 경계한 것은 일본, 그 예상은 잘 맞아떨어졌지만, 청일전쟁에서 제대로 대응하진 못 했죠. 반면 조선책략으로 유명한 황준헌(황준센)은 러시아를 경계합니다.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해서 중국, 일본, 미국과 친해야 한다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걸 조선에 조언했었죠. 물론 기본적으로는 두 나라는 물론 모든 열강을 경계했지만, 주적이 누가 될 것이냐로 본다면 이렇게 되는 거죠.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예 외세 자체를 거부하자는 수준이 아니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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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만일 한국과 청나라 양국의 국민이 모두 굳게 뭉쳐서 지난날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을 반대하고 러시아를 도왔다면, 일본이 어찌 큰 승리를 거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국과 청나라 양국의 국민은 일본에 반대하지 않고 도리어 일본 군대를 환영하여, 길을 닦고 짐을 나르며 정보를 알아 내는 등 힘껏 일본을 도와주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할 때, 일본 천황은 이 전쟁이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의 독립을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과 청나라 사람들은 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일본을 도왔던 것이 한 가지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일본과 러시아의 싸움이 황인종과 백인종의 다툼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 원수진 마음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같은 인종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났던 것이다. 통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이래로 앞장서서 못된 짓을 일삼던 백인종의 한 무리를 일본이 단숨에 쳐부수었으니, 이는 참으로 놀랄 일이며 기념할 만한 일이다. 당시 한국과 청나라의 뜻 있는 사람들이 함께 기뻐해 마지않은 것은 일본의 정책이나 일을 처리해 나가는 모양이 세계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시원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동양평화론], 안중근

"발틱 함대가 완전히 괴멸되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전투였나. 조선 사람으로서 일본의 승리를 반길 이유가 없다. 그러나 황인종의 일원으로서 나는 일본의 위대한 승리가 자랑스럽다. 허풍선이 미국인, 거만한 영국인, 허영심 강한 프랑스인도 이제부터는 황인종은 어떤 위대한 일도 하지 못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을 것이다" - [윤치호 일기], 윤치호

"유럽의 민족이 발전하고 국가가 강대해짐에 따라 그들의 세력은 동양을 침범하여, 우리 아시아의 민족과 국가는 점차 멸망하거나 압제하에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는 일본이 러시아를 이겼습니다. 이것은 최근 수백년 동안 아시아 민족이 유럽 민족을 이긴 최초의 승리였습니다. 이 일본의 승리는 전 아시아에 영향을 미쳤고, 아시아 전 민족은 매우 고무되어 큰 희망을 품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본 민족은 이미 온통 서양 문화의 패도를 택함과 동시에 아시아의 왕도문화의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향후 일본이 세계문화에 대해 서양 패도의 개가 될지, 동양 왕도의 간성(방패와 성)이 될지는 일본 국민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 쑨원, 1924년 일본 고베에서 한 연설에서 아시아주의를 주장하며

개화파, 특히 급진개화파는 일본으로 기웁니다. 애초에 개화파면 일본에 우호적이기도 했구요. 당시 세상을 뒤덮고 있던 건 백인들의 제국주의였고, 이 역시 백인 열강이 동양을 침략하는 것으로 본 거죠. 일본이 미워도 같은 황인, 아시아인이었고 서양 제국주의에 맞설 동양의 유일한 카드였으니까요.

Pan-Asianinsm, 아시아주의, 범아시아주의, 대아시아주의, 흥아론 참 여러가지로 번역되더군요. 간단합니다. 서양 백인에 맞서 동양 황인들이 힘을 합쳐 근대화를 이루고 서양과 맞서 싸워야 된다는 것이죠. 당연히 일본이 선구했고, 중국과 한국, 베트남 등에서도 이를 받아들입니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갈수록 이 이론을 거부하거나 일본을 빼고 얘기하게 되었구요. 일본은 이 아시아주의를 계속 밀고 갔습니다. 만주국의 오족협화(다섯 민족이 다같이 잘 살자)부터 그 끝판인 대동아공영권까지 말이죠.

백인 서양 열강의 침략과 인종차별이 사실인 이상 이게 먹히기는 쉬웠습니다. 쑨원이나 안중근이 그랬듯, 제대로 된 아시아주의를 주장해도 일본의 역할을 뺄 수 없었으니까요. 일본 내에서도 정말 순수하게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게 아시아를 위한 거다, 무력을 쓰는 등의 문제점 정도는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거구요.

고종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자, 이야기를 더 예전으로 돌려봅시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은 더욱 커졌습니다. 고종은 청도 일본도 아니면서 조선에 욕심을 가질만한 3자를 끌어들이려 했죠. 그 해에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던 러시아였죠. 이른바 조러(혹은 한러) 밀약으로 영흥만을 조차해주는 대신 조선군을 훈련시킬 장교들을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합니다. 청일 양쪽 다 놀랐고, 이홍장은 자신이 보냈던 묄렌도르프(조선이름 목인덕)을 소환하고 납치했던 대원군을 돌려보내죠. 이러고도 한번 더 시도했다가 반대하던 민영익이 위안스카이에게 말하면서 또 실패했죠.


묄렌도르프, 조선의 요청으로 이홍장이 파견해 통리아문 협판이 됩니다. 외교와 세무를 맡았다고 하죠.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을 견제한다는 인아거청을 그가 주도했다고 합니다. 그를 고용한 이홍장을 배신하는 거였죠. 이후의 인아거일 정책을 보면 그것보단 고종의 뜻이 더 강했겠지만요. 그런데 그의 조국인 독일에서 러시아의 주의를 극동으로 돌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군요.

밀약이고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다 그런 건 없는 모양입니다. 진짜라면 다른 곳도 아니고 영흥만이라니 참 큰 걸 던져줬네요. 아무튼 고종이 러시아에 접근한 건 확실하고, 영국도 이런 움직임에 거문도를 점령합니다. 결국 이홍장의 중계로 러시아가 조선에 영토 욕심을 갖지 않고 영국은 거문도에서 철수한다로 결론을 냈지만요.

그로부터 10년, 일본과 청의 대결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여기서 다시 러시아가 등장합니다. 일본이 힘으로 빼앗은 요동반도를 그냥 압력만으로 돌려주게 만들었죠. 고종은, 그리고 민비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갑오개혁의 주체는 내각이었습니다. 왕실과 정부가 분리되기 시작했고, 군국기무처는 고종도 건드릴 수 없는 기구였죠. 어찌보면 입헌군주제로 가는 길일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뜻대로 조선을 바꾸려는 게 더 강했죠. 물론 전면에 내세운 건 개화파였고, 이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조선을 근대적으로 바꾸려 하긴 했습니다. 일본의 입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한계는 있지만요.


내각의 중심은 온건개화파인 김홍집이었지만, 얼마 안 가 얼굴마담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를 밀어주었죠. 망명생활 끝에 사면받았지만 기용되지 않던 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2차 갑오개혁의 내각은 김홍집-박영효 연합내각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삼국간섭 이후 서서히 밀려났고, 결국 민비를 죽이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망명합니다. 박영효 자신은 유길준 (같은 개화파지만 박영효에 밀림)과 민비, 심지어 일본 공사 이노우에까지 합세해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주장했다 합니다만. 어느쪽이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이 때문에 을미사변의 배후로 의심되기도 합니다. 태극기를 처음 썼던 그, 이후 친일파가 되죠.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청일전쟁 때 나왔죠)와 함께 조슈 3존으로 불립니다. 셋 다 조선 침략에 큰 역할을 했죠. 이 때 그가 박영효를 안 도운 이유가 그가 쫓겨나는 모습으로 조선이 반일로 가는 걸 보여주기 위한 명분쌓기로 분석하는 모양이더군요

박영효가 쫓겨나면서 김홍집도 쫓겨났고, 박정양이 과도내각을 맡았다가 다시 김홍집이 복귀합니다. 3차 김홍집-박정양 연립내각으로 불립니다. -_-a 이 때 중용된 것이 이른바 정동구락부의 인사들이었습니다. 정동에 있던 외국 외교관들과 조선 개화파간의 사교 모임이었죠. 친미, 친러적인 인물로 민영환, 이상재, 윤치호, 그리고... 이완용 등의 인물이었습니다. 고종의 의중이 드러난 거죠. 갑오개혁의 정책들을 되돌리고 일본이 밀었던 인물들을 갈아치운 겁니다.

일본은 이에 큰 위협을 느꼈고,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릅니다.


미우라 고로. 꽤나 유명한 이름이죠. 간단해요.


을미사변을 일으킨 게 그거든요. 이름이야 그가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군인 출신으로 행동대장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계획은 이노우에가 다 짜 놨고, 미우라가 오고도 보름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미우라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척 하면서 고종의 경계를 풀려고 했구요. 대원군을 끌어들여 명분을 쌓고 해산하기로 한 훈련대도 끌어들여 그들이 주도자인 척 하려 했죠.

민비를 싫어하는 편이긴 합니다만, 이 사건이 정말 치욕적인 사건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민비가 고종의 통치에 깊게 관여했고 큰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도 말이죠. 일본이 반드시 죽여야 할 정도로 말이죠. 물론 그렇다고 고종이 허수아비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둘은 함께 움직였고, 공도 과도 거의 같이 나눠야 하죠. 일본은 고종을 직접 해칠 순 없으니 그의 가장 큰 동반자를 없앤 겁니다.

궁궐을 습격하고, 왕을 협박하고 세자의 머리채를 잡았으며 세자빈은 배를 얻어맞았습니다. 그리고, 한 나라의 왕비, 조선의 국모가 당했습니다. 이게 그 때 조선의 현실이었죠.

일본이 무리수를 둘 정도로 상황을 급하다고 판단했을수도 있겠고, 조선에서 뭔 짓을 해도 된다는 자신감의 표현일수도 있겠네요. 뭐 둘 다겠죠. 대원군이 늦게 도착한 덕분에 한밤중에 빠르게는 되지 않았고, 외국인들도 그 모습을 보면서 나름대로 국제적으로 문제가 됐습니다. 일본에서는 관련자들을 소환했고, 미우라의 개인적 일탈로 간단히 결론을 내 버립니다.


유길준. 서유견문으로 유명합니다. 친일적인 행보를 보였고 을미사변에 가담했다는 의혹도 있는데, 정작 한일합방을 반대했고, 자신이 받은 작위도 거부합니다

자 이제 다시 일본의 뜻대로 달릴 차례죠. 내각은 다시 바뀝니다. 4차 김홍집 내각입니다. 이 개혁을 3차 갑오개혁, 혹은 을미개혁이라 하죠. 이를 주도한 것이 유길준입니다. 태양력을 이 때부터 썼고(그래서 연호도 건양이죠) 그 문제가 된 단발령도 이 때 나왔죠. 구한말 3대 의병 중 하나인 을미의병이 이 때문에 나왔습니다. 시해된 왕비와 단발령 때문에 말이죠.

파트너도 잃었고, 일본이 정말 어떤 짓도 할 수 있을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고종은 연금상태였고, 자신의 목숨도 걱정해야 했죠. 이 때 외교관 등 외국인들이 도움이 되었다 합니다. 독살이 걱정돼 먹는 것도 이들이 준 걸 먹었다고 할 정도로요.

정동구락부 인물들, 이른바 정동파는 계획을 짜 냅니다. 외교관들과 선교사와 짜고 고종을 탈출시킨다는 것이죠. 충성도 충성이겠고, 내각의 반대파라서 그러기도 했겠습니다. 친위대 병력을 끌어들였고 춘생문 쪽으로 담을 넘어 탈출하려 했지만... 친위대 장교 중 하나가 배신하면서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알렸고, 어윤중이 병력을 이끌고 와서 막습니다. 이른바 춘생문 사건입니다.

일본은 이걸 핑계로 다른나라 외교관들도 내정에 개입하고 있다면서 미우라 등 을미사변 관련자들을 모두 석방합니다. -_-;

하지만 고종도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아니었죠. 곧바로 다음 계획을 짭니다.

카를 베베르는 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때부터 조선에 왔고, 고종과 친해집니다. 94년에 잠시 떠났다가 곧 다시 왔고 삼국간섭을 이끕니다. 러시아에서도 일본의 불만도 식힐겸 지나치게 친조선적인 그를 멕시코로 보내고 알렉시스 스페예르를 후임으로 보내려 했습니다. 고종은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임기를 연장시켜달라고 했고, 베베르에게도 조선 내에 막대한 재산을 주었다고 합니다. 조선에 대한 정이었는지, 고종에 대한 개인적인 정인지, 재산 때문이었는지 자신의 방침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가 참 큰 역할을 하죠.

96년 1월에 후임이 왔지만 본국에서 그를 유임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때 그들은 정동파와 손잡고 일을 벌이죠. 2월에 벌어진 아관파천입니다.

을미의병이 일어난 큰 이유는 고종의 밀사였습니다. 그리고 아관파천이 끝나자 고종이 직접 의병을 해산시키죠. 일본의 주의를 지방으로 끌어내기 위한 시도(+ 친일 관리들도 잡는)였습니다. 의병 토벌을 위해 군이 움직이면서 궁궐에 대한 경비가 소홀해졌고, 이 틈을 타 제물포에 있던 러시아군 120명이 상륙합니다. 고종과 순종은 몰래 가마에 타서 궁을 탈출했고, 러시아군의 호위를 받으며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갑오개혁을 무효화하고, 내각의 대신들을 체포합니다.


"일국의 총리로서 백성에게 죽는 건 천명이요.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 싶지는 않소!"

김홍집, 온건개화파의 거두로 실권은 적었지만 언제나 빠지지 않았죠. 이 때도 체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종을 찾아가려다 체포되었고, 정병하와 함께 분노한 백성들에게 맞아죽습니다. 개혁의 얼굴이고 왕비를 폐서인한다는 결정도 그를 통해 나온만큼 조선에서 살 길은 없었습니다. 도망치라고 하며 그를 보호하려 했던 일본군에게 저렇게 말했다고 하죠.
친일내각을 맡아서 친일파로 욕먹기도 하고 그 때도 백성들의 분노를 한몸에 받았지만, 오히려 재평가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강압이라 해도 그걸 이용해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이로 말이죠. 직접적인 친일도 없었고, 부패도 없었으며, 능력도 최고였습니다.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 법인 거겠죠. 그는 이 길이 자신이 죽을 길이란 걸 알면서도 묵묵히 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피하지 않았죠.

한편 어윤중은 고향으로 도망쳤다가 죽습니다. 그의 평가도 김홍집과 비슷한 편입니다. 유길준은 일본으로 도망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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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은 고종이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일본으로서는 민비를 죽이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고종을 제어하려 했다가 오히려 가진 것도 뺏기게 된 상황이었죠.

아 뭐 그래도 굴욕은 굴욕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가 무섭다고 궁궐에서 도망쳐서 다른 나라의 땅으로 도망친 거니까요. 하지만 그 효과는 컸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일본은 당연히 고종의 환궁을 요구했고, 러시아 공사관 앞에 일본군을 보내서 요구하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러시아의 힘은 컸으니까요. 그렇다고 러시아도 만주가 중요했지 일본을 조선에서 몰아낼 정도의 생각까지는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양측의 협정이 시작됩니다.

1896년 5월의 1차 러일협정은 베베르-고무라 각서입니다. 경성의정서라고도 불리죠. 고종의 환궁은 그의 재량에 맡기되 안전하다고 러일이 인정할 경우 함께 환궁을 권고한다는 게 골자였습니다. 여기에 일본 상인들의 단속을 완벽하게 할 것을 보장한다는 거였죠. 돌려서 말해서 그렇지 일본이 고종에게 무력을 쓰지 않겠다는 것, 러시아는 그것을 감시할 것이라는 것이겠죠. 한편으로 일본인 거류민과 전신선 보호를 명분으로 일본군 배치는 인정하되 수(800명)를 제한했고, 러시아군도 같은 수를 배치하는 걸 인정받으며 상황이 안정되면 철수하겠다는 거였습니다.

6월에는 서로 공격받으면 협력하고, 이를 위해 길림과 흑룡강성의 철도부설권을 러시아에 주는 이홍장-로바노프 협정이 이뤄집니다. 이른바 러청 비밀협정입니다. 그 직후 모스크바에서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가 체결되구요. 모스크바 의정서라고도 불리는데 조선의 재정문제에 대한 양국의 조언 가능, 양국 합의하에 차관 제공 가능을 규정했습니다. 거기에 조선이 (여건이 된다면) 타국의 도움 없이 군경 창설이 가능하고, 일본이 전신을 깐만큼 러시아도 조선 내에 전신을 깔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역시 조선이 능력이 되면 이것을 살 수 있다는 조건이야 있었죠) 그 외에 비밀 조항이 있었으니 조선에서 문제가 생기면 러일이 다 추가 병력을 보낼 수 있고, 양군의 충돌 방지를 위해 중립 지대를 설정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조선군이 조직되기 전까지 러시아 공사관의 고종 호위는 러시아군이 맡는다는 거였죠.

이 때 일본은 한반도의 분할점령까지 고려했습니다. 명분은 위에 나온 충돌 방지를 위한 중립지대였습니다. 38도선, 39도선설이 있고, 당시 전권대사로 갔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러시아의 외무대신 로바노프 사이에 말이 나온 것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일본 학계는 39도선설 (혹은 대동강-원산선)을, 러시아나 미국 학계에서는 38도선을 정설로 본다는군요. 하지만 러시아는 거부했고 정확한 분할선 대신 중립지대를 둔다는 조항 정도만 남겼습니다. 이정도로 일본이 다급했다는 걸 알 수 있죠. 혼자 먹으려는 걸 나눠먹자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일본의 입지는 크게 줄었습니다. 왕은 러시아의 품안에 있었으니까요. 궁궐까지 범하는 미친 짓도 하던 것에서 러시아의 동의를 받아야 함께 내정간섭을 할 수 있는 정도 (...) 로 바뀌게 되었죠. 하지만 러시아도 편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고종을 계속 데리고 있기엔 일본과 다른 열강의 눈치가 보이니까요. 열강들과 한판 할 것을 각오하고 조선을 아예 먹자고 덤볐다면 몰라도 지금 그러기에는 만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조선 내부의 반대도 심했구요. 대표적인 것이 독립협회였죠.

이후 만주를 먹기 위해 남하했을 때 러시아는 심한 견제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서 양쪽의 상황이 정반대가 돼 버렸죠. 일본은 조선을 어떻게든 지키려고(=먹으려고) 했고, 러시아의 남하를 더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러시아에 밀려서 그렇지 만주에 대한 욕심도 여전히 가지고 있었구요. 그리고 그 뒤를 영국과 미국이 봐 주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는 만주라도 제대로 먹기 위해 더 물러나지만, 일본은 오히려 더 달려들었죠. 미쳐서 뭣도 모르고 그런 건 또 아니었습니다. 맨 앞에서 얘기한,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진행되고 있었으니까요. 철도가 완성되지 않고 영미가 지원해주는 상황, 싸우려면 지금 싸워야 된다는 거였죠.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고종은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 덕분에 왕이 되었지만, 그 아버지 때문에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제껏 어느 왕들도 겪지 못한 시대의 변화를 겪게 되었죠. 어떻게든 그 파도를 타 보려고 했지만, 나라 안에서 일어난 재해에 계속 당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쫓아내려 했고, 구식 군인들, 급진개화파, 동학, 청과 일본... 정말 온갖 일들을 당했습니다. 늘 함께 했고 능력도 대단했던 아내는 참혹한 화를 입었구요.

러시아의 힘을 빌려서 겨우 나라와 자신이 제대로 살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전제군주제를 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이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기회를 얻은 겁니다. 이것을 비판하고 그 정책을 비판할 순 있어도, 당시 고종의 입장에서 다른 길을 말할 순 없겠습니다.

전제군주가 아니더라도 제국 선포 자체에 대해서도 그렇죠. 청에게서 독립을 했고, 조선 주변의 나라들이 다 제국을 외치는 이상, 동급의 모습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내실이 많이 부족하지만, 그 내실을 쌓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하지만 모든 것은 늦었고, 마지막 기대마저 무너집니다. 이렇기에 식민지가 되기 직전의 제국 선포는 더 슬프게 다가오게 되었죠. 아니 더 웃기게 다가오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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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상황과 국내의 상황, 한 쪽만 얘기할수도 없고 양쪽 다 얘기하니 길어지고 하네요. 다음 편과 이번편을 합쳐서 한편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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