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6/19 23:36:12
Name   우너모
Subject   "개 패듯이"
저녁 약속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는데 어린 강아지가 깨갱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허름한 식재료 가게 맞은 편에 조그만 공터가 있는데, 가게 주인이 그 공터에 흰 개를 묶어놓고 키웁니다. 너무 목줄이 짧아 지나갈 때마다 측은하게 봤었습니다. 오늘은 그 개가 맞고 있었습니다. 아직 어미 젖을 뗀지도 얼마 안 됐을 그 어린 것이 뭘 그렇게 잘 못했다고 목줄을 콱 틀어쥐고 아저씨는 주둥이를 쥐어박습니다. 맞는 이유가 궁금해 아저씨의 말을 들어봅니다.

"이놈 왜 오라고 하는데 안 와."

아저씨가 그렇게 목줄을 당기면서 때리면 당연히 안가죠, 라고 말하다가 나도 맞을까봐 그만뒀습니다. 개는 필사적으로 목줄을 당기며 멀어지려 하지만 몸 크기 차이가 갑절은 나니 무의미합니다. 좁은 길 맞은편에 마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미간을 찌푸리고 쳐다만 봅니다. 나도 뭐 아무 말 없이 지나왔으니 누가 잘못했다 말할 처지는 아닙니다.

뒤에서 들리는 개의 비명소리와 사람들의 찌푸린 미간을 생각하다 학창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중학교 시절엔 내 친구들도 저렇게 목줄을 콱 쥐인 채 맞는 일이 많았습니다. 교과서가 없어서, 과제를 안 해와서, 졸아서, 틀려서, 아니면 그냥 까불어서. 그게 맞을 만한 이유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많이들 맞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맞았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건, 엉덩이를 내밀고 엎드린 친구를 바라보는 우리는 웃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았습니다. 뭐가 재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벌이 적당한 수준이면 우리도 적당히 웃었습니다. 왜 웃었는지는 잘은 기억은 안납니다. 아마 사자에게 먹히는 얼룩말을 바라보는, 다른 얼룩말의 심정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아, 나는 안 맞는다. 그러게 맞을 짓을 왜 해.

때로는 웃지 못할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나는 엉덩이를 때려도 코에서 피가 터지기도 한다는 걸 중학교 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그렇게 인체의 신비를 확인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지나고 보면 다 좋은 추억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묻고 싶습니다. 지금도 좋은 추억을 쌓고 있느냐고.

종종 군대 문제를 다룬 유튜브 댓글창에서, 그래도 맞을 놈은 맞아야 고쳐진다라는 글을 읽을 때. 그리고 고등학생들에게 과외를 하는 친구가 숙제를 안 해오면 때린다고 할 때. 선배에게 구십도로 인사하는 OO대 XX과 학생들의 모습을 볼 때. 목줄은 누가 쥐고 있고, 옆에서 쳐다보는 사람은 누구인지 한 번씩 생각해봅니다. 그러다가 피로해지면 또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폭력은 나빠요.



2
  • 공감..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690 도서/문학'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 간단 리뷰 6 개발자 19/09/22 5102 1
5656 정치'한-경-오 적폐' 프레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140 Pully 17/05/17 6651 1
10124 과학/기술'한국어 자연어처리 데이터 수집'에 관련하여 글 남깁니다. 21 홍차드립되나요 19/12/28 6134 3
13648 일상/생각'합리적인' 신앙 8 골든햄스 23/03/19 2290 16
4586 창작'항해' - 병영문학상 입선작 6 SCV 17/01/09 4541 0
4667 게임'헌티드 맨션' 후기 18 별비 17/01/21 5641 31
7090 방송/연예'히라테 유리나'에 빠졌던 일주일 12 hojai 18/02/12 11913 1
945 정치‘메르스갤’로 대표되는 인터넷 여성주의에 대한 몇 가지 고찰 134 삼공파일 15/09/07 6858 7
12262 사회‘비트코인 시장’ 에릭 아담스 뉴욕시장의 이모저모 2 오쇼 라즈니쉬 21/11/10 4067 3
12548 정치‘샤이 이재명’은 얼마나 있을까? 22 meson 22/02/25 3765 1
12482 방송/연예‘설강화’가 보여주려 했던 것, 보여주지 못했던 것 11 meson 22/02/01 4180 5
11772 사회‘원폭만큼 치명적인’ 미군의 부산항 세균실험 -시사인 5 요일3장18절 21/06/10 4034 4
5351 도서/문학‘회사에서 왜 나만 상처받는가’에 대한 저의 실천 방안 4 혼돈의카오스 17/04/02 4972 4
3752 의료/건강"MBC 스페셜 - 지방의 오해" 어떻게들 보셨나요? 20 몽유도원 16/09/22 7182 1
3072 일상/생각"개 패듯이" 3 우너모 16/06/19 3803 2
13248 일상/생각"교수님, 제가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23 골든햄스 22/10/20 4106 50
13941 일상/생각"교황이라! 교황은 탱크 사단을 몇 개나 갖고 있답니까?" - 이오시프 스탈린 12 컴퓨터청년 23/06/03 2479 0
3532 역사"국왕" 대신 "국가와 조국" 위해 싸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7 모모스 16/08/18 5973 3
7398 일상/생각"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5 그럼에도불구하고 18/04/17 4957 3
12261 댓글잠금 정치"김건희, 5개 대학 이력서 허위 기재"...윤석열도 몰랐나? 75 구글 고랭이 21/11/10 6463 1
10959 철학/종교"꽃들도" 가사에 담긴 일본 기독교 사상 분석 3 아침커피 20/09/16 6441 4
9635 기타"남성의 매력 = 친구의 숫자"이다? 20 이그나티우스 19/09/08 5241 0
14636 사회"내가 기억하는 중국은 이렇지 않았다" - 중국의 성장과 이민 2 열한시육분 24/04/30 1707 0
6534 정치"내일은 지옥불? (Morgen Höllenfeuer?)": 독일 언론에서 바라본 현재의 한반도 8 droysen 17/11/05 5372 5
14230 도서/문학"냉정한 이타주의자" 서평 9 dolmusa 23/10/27 1979 1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