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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6/11 17:29:59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인간에 절망할 때 읽는 글
종종 절망감을 맛볼 때 김훈의 다음 문장들을 읽습니다. 군에서 악폐습 고치려다가 후임들의 반발에 부딪혔을 때 그랬고, 2012년 겨울에도 그랬습니다.

회의주의자이자 환원주의자인 김훈의 관점은 그럴 때 위로가 됩니다. 아래글 하나를 읽다가 문득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씁니다.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초야의 저녁들은 헐거웠다. 내 적막은 아주 못 견딜만 하지는 않았다. 그 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길들은 끊어졌고 인기척이 없었다. 얼어붙은 세상의 빙판 위로 똥차들이 마구 달렸다.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 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 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 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다시, 만경강에 바친다.

ㅡ칼의 노래, 서문




[정의로운 언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아니다. 지금 정의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약육강식의 질서를 완성해가는 이 합리주의의 정글 속에서 정의로운 언어는 쓰레기처럼 넘쳐난다.] ... 오직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날짐승들의 시대에 당대를 향하여 말을 거는 일은 가능한가, 당대를 향하여 할 말이 나에게 있는 것인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언어와 신호는 아직도 소통력이 있는 것인가, 그런 고통스런 질문의 지옥 속에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보편과 객관을 걷어치우고 집단의 정의를 조롱해가면서 나 자신의 편애와 편견을 향하여 만신창이로 나아갈 것이다. 글 쓰는 자의 적은 끝끝내 그 독자들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영원히 '일인 대 만인'의 싸움일 뿐이다.

ㅡ산문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중 '개발자국으로 남은 마을'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하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ㅡ한겨레21(?)과의 인터뷰 중




인간 일반에 실망해도 인간 개인에 대한 희망을 계속 품고 살아가는 건 참 어렵고 고단한 일입니다. 하종강 선생이 존경스러운 지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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