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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2/04 07:51:21
Name   뤼야
Subject   인문학, 그리고 라캉 다시 읽기
먼젓번에 올렸다가 삭제한 제 글 [라캉과 들뢰즈를 읽어야할까] https://kongcha.net/?b=3&n=1638는 제 독서에 대한 감상적 글쓰기였습니다. 제 독서는 철저히 쾌락을 위한 것이고, 그를 위해서는 어떤 세속적 가치관의 대입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독서는 철저히 제 개인적인 영역이니까요. 라캉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써먹는 논리는 인지과학의 발달로 라캉의 정신분석은 폐기되어야한다는 이야기들이죠. 그러나 이 논리는 영역구분에 실패한 헛소리이며 너무나 뭉툭해서 별로 끌리지 않습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누군가 이런 말로 세계를 입증하고야 말았다는 결론같은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모두 다르게 세계를 정의하고 자기가 만든 세상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글에 레이드님이 '철학이란 한없이 커지는 학문'이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은  정말 훌륭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글을 삭제하고 나니 아쉬워하시는 분들이 계시고 마르코폴로님 글을 보고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댓글로 부연한 내용을 맥락에 맞겨 조금 고쳐 다시 올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은 어이없지만 그것이 그의 형이상학과 윤리학과 시학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개별 분과이니 무슨 상관이냐 물을 수도 있을텐데 그 모두를 하나의 체계 속에서 보았고 보아야한다고 생각했으며(그리고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골자이며) 이러한 분석-종합에 대한 추동을 서양 지성사에서 가장 먼저 보여줬던 게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었다는 점이-소위 철학사적 의의까지 감안할 때-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죠. 즉, 그의 과학관을 부정한다면 그의 형이상학관에 비추어, 그의 다른 부분도 부정하는 게 온당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요. 문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들을 모두 끌어안는 이들은 없습니다만, 부정할 건 부정하고 변주할 건 변주하면서 잘 써먹고 있습니다. 개별 사상가에 있어서는 그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하고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만큼 후대에 부정당하는 틈바구니 속에 있지요.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통해서 비극은 [1. 이들 감정의] 또는 [2.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성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카타르시스'를 봅시다. 후대 시학을 둘러싼 논쟁은 대부분이 이 카타르시스에 대한 해석 논쟁일 정도로 문학계에 많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만, 정작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카타르시스에 관해 직/간접적으로 기술한 건 위 세 문장에 불과합니다. 이때 해석 논쟁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두 입장이 [1.정화이론][2. 조정이론]인데요. 1에서 이들 감정이란 연민과 공포 각각을 지시합니다. 2에서 이러한 감정이란 연민과 공포를 넘어 적절히 순화되고 조정되지 않을 경우 유해할 수 있는 감정의 전반을 가리키죠. 그리고 이들 간의 논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방에서 전해진 이후부터 면면히 지속되어, 헤겔과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이어집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가 무엇인지 오늘날에 있어선 그리 중요할 거 같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아리스토텔레스 전문 연구가에게나 중요하겠고 그건 온전히 문학/시학/미학의 영역이라고 말하기 어렵겠죠. 그러나 한편 이러한 논쟁은 그만큼 유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입장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비추어) 타당한지만을 밝히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으니까요. 아니, 목적과 그들의 의도가 그러했다고 한들 그 사이사이에서 주어진 부산물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니까요.

카타르시스에 대한 수많은 논쟁의 결과 우리는 극의 클라이막스가 감상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정서가 극 속에서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대해 보다 면밀한 탐구가 가능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시도한 이들도 있지요. 정화이론과 조정이론 양자 모두에 포섭되지 않는, 제 3의 해석 중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문제시되는 구절을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묘사를 통해서 [이러한 사건]의 명징화를 성취한다"로 읽어내는 겁니다. 아주 현대적인 문학관을 경유한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이며, 그런 만큼 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였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아마 저 해석을 지지하는 이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저런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데 그치기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석마저 달리하기 이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기대기 위해서? 중세와 근대 초기라면 몰라도 현대라면 딱히 있을법한 이야기가 아니죠.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만큼 아리스토텔레스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도리어 전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가들과 그들이 상정한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문학관에 대한 비판을 저러한 방식으로 수행했다는 게 맞겠지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의 학자여서, 그의 사상이 중세와 근대를 경유하며 특유한 위상을 누려서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의도적 오독'은 인문학계에 있어 꽤 흔하지요. 대표적으로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관계가 있겠네요. 사르트르의 현존재 개념은 분명히 하이데거에 빚진 것이며 사르트르 자신도 이를 시인합니다만, 사르트르의 현존재 개념은 하이데거의 입장에서는 "사르트르는 내 존재와 시간을 철저히 잘못 읽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끔 왜곡된 것입니다.

현존재가 함의하고 지시하는 특정한 양상 중 일부를 취합하여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그외는 배제한 거지요. 하지만 사르트르는 도리어 이러한 하이데거가 상정한 현존재 개념이 온당치 못하다고 반박합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현존재 개념을 처음으로 철학적 문제로 상정한 게 하이데거 자신인데 그 하이데거에게 대고 개념을 잘못 썼다고 반박하다니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자작자연自作自演을 보고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는 소리입니다. 보다 터무니없는 건 사르트르는 그렇게 [왜곡된 현존재] 개념 위에서 자신의 사상을 태연히 전개해나간다는 겁니다.

"그럴 거면 그냥 아예 자기가 새로운 개념을 만들면 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할 법합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그렇게 하지 않으며, 실제 사르트르에 대한 비판은 그 사상과 철학에 대한 내적 비판이 대부분이지, 하이데거를 잘 읽었네 잘못 읽었네와 같은 부분이 주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르트르 개인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사르트르가 하이데거의 개념을 오염시키든 말든 별 상관 안했다는 것이죠. 이건 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만 하이데거 자신도 사르트르가 자신의 현존재를 오염시키고 말고에 크게 연연했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자신의 현존재 개념을 운운했던 건 사르트르의 맥락에서 현존재를 읽어낼 때 예기될 이율배반을 이미 그 자신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대부라 불리면서도 그 자신은 실존주의자이길 거부했던 게 하이데거였으니까요.). 그리고 사르트르가 하이데거에게서 현존재의 표현을 차용했음에도 그 개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건, 저렇게 자기 꼴리는대로 사용한 건 하이데거에 대한 무시도, 그의 권위에 막연히 기대고자함도 아닙니다. 하이데거가 열어놓은 지평의 일정한 영역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이야기지요.

단지 사르트르가 유독 싸가지 없는 게 아닙니다. 인문학에서 굉장히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헤겔이 칸트를, 맑스가 헤겔을, 루카치가 맑스를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은 단순히 '전의 것이 틀리고 이번 것이 맞다'가 아닙니다. 양자 모두 제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고 그것들은 각각 후대의 '재해석'과 '오독'을 기다리고 있지요. 신칸트주의자들이 때로 맑스와 만나며, 헤겔 우파인 베버가 맑스를 부정하고, 후기 맑스에 초점을 맞췄던 알튀셰와 탈-아리스토텔레스적 서사학을 기치로 내세운 브레히트가 전기 맑스와 호응하며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으로 문학을 종합하려했던 루카치를 그처럼 비판했습니다.

개념의 오용과 타락은 라캉만이 저지른 게 아닙니다. 애초에 인문학 자체가 이처럼 서로간의 개념을 오용하고 타락케하며 재구성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용과 타락임을 서로 지적하고 그 오용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이 오용과 타락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를(오용과 타락이 맞을지언정 그 오용과 타락이 어떠한 맥락에서 유효한지) 밝혀나가는 도상 위에 서 있지요. 이중 완벽하게 정당화가 끝난 사상? 그런 거 없습니다.

다만 그 오용과 타락에 대한 많은 갑론을박을 거느린 사상이 있고 그 와중에 쓸만한 것들이 떨어지는 것이지요. 마치 시학의 카타르시스에 대한 누대에 걸친 쟁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라캉이 그의 저서와 강의록에서 과학/수학의 개념을 자기 임의로 쓴 건 맞고 그게 별달리 엄밀치 못한 수사적 활용에 불과한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 오용이라봐야 라캉이 자신의 입장을 비유적으로 지시하기 위해 쓴 말놀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자의성과 무지의 소산으로 비유가 온당치 못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비유와 비유가 지시하는 개념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지시대상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라캉 개인이 학적으로 엄밀하지 못하고 글러처먹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가 상정한 개념이 인문학적으로, 문학/미학적으로 쓸만한 것이냐와는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왜곡을 수사 놀음에 그치지 않고 아예 자기 사상의 핵심 개념으로 깔고 갔던 사르트르를 생각하면 라캉은 양반이죠.

그럼 이제 라캉이 어떻게 소설과 영화를 보는데 있어 이야기할 여지가 있는지를 말해야겠지요. 그에 앞서 라캉의 학문적 기반인 프로이트부터 짚고 넘어가야할텐데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개념화하고 정교화하는 과정에서 문학작품에 빚진 바 많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과거 무의식의 발견자라 자신을 칭송하는 이들 앞에서 프로이트는 "나에 앞서 시인과 소설가, 철학가들이 무의식을 발견했다. 내가 발견한 건 그 무의식을 연구하는 과학적 방법"이라고 말했죠. 그리고 그가 말한 과학적 방법은 이후에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과학적 방법의 대상을 제공한 시인, 소설가, 철학가의 저서 역시 도매급으로 폐지 취급되어야할까요? 말도 안 되죠. 프로이트 이전에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었습니다. (프로이트의 겸손을 최대한 받아들이자면)프로이트의 작업은 그들에 대한 인용과 주석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 인용과 주석이 글러먹었다고 원저도 글러먹었다는 건 위아래가 맞지 않는 소리지요. 이건 프로이트의 '과학적 작업'에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의 정신분석이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아니라고 해도, 시/소설/철학에 대한 나름의 비평서인 건 부정할 수 없거든요.

그 비평이 과학에 이르지 못한다고 할지언정 비평이 비평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해당 비평의 가치를 판별하는 건 얼마나 인간의 인지/의식 과정에 있어 과학적으로 엄밀하고 타당하느냐가 아닙니다. 해당 비평이 주목하는 부분의 심미적으로 얼마나 그럴싸하냐가 되는 거지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집필한 아르놀트 하우저는 정신분석을 일종의 낭만주의라고 말합니다. 정확히는 낭만주의 예술/문학에 대한 낭만주의적 접근이라고요. 오늘날의 문학을 파악하는데 있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별로 유효한 틀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잘만 써먹습니다. 같은 입장이 낭만주의, 모더니즘 예술과 프로이트 사이에서라고 성립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내적으로 타당하건 그렇지 않건 이러저러한 맥락에서 쓸 수 있는 개념을 던져주니까요. 정신분석을 문학에 접목할 수 있는 이유? 애초에 정신분석 자체가 문학에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출발했는데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라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19세기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16세기 홀바인의 [대사들]을 볼때 우리가 느끼는 독특하고 이질적인 감흥을 미학에서는 라캉의 응시와 왜상을 경유하여 말합니다. 왜 라캉에 굳이 의존할까요? 그들이 게을러서요? 아뇨. 그게 해당 그림에 대한 해석들 중 가장 타당하다고 느끼니까요. 라캉이 제시한 구조가 작품 외적으로 얼마나 그럴싸하건 말건과 무관하게 (응시와 왜상을 말하려면 당연히 실재계를 말해야하니)그 세계가 해당 작품의 세계를 비교적 온전하게 설명하고 자신들이 느끼는 이질감을 생생히 담아낸다고 느끼기에 그를 인용하는 겁니다.

실제로 라캉 자신이 회화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기 사상을 풀어내지요. 프로이트가 문학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을 통한 자기 사상의 설명"- 이게 바로 비평입니다. 미학 차원에서 라캉의 타당성은 라캉의 정신분석이 얼마나 엄밀하냐에 있지 않습니다. 철저히 한 명의 비평가로서 그가 제기한 [썰]이 작품에 얼마나 부합하냐에 맞춰져있죠. 그리고 해당 작품을 비교적 잘 풀어냈다면? 이러한 툴을 다른 작품에도 써먹어 볼 수 있을까 궁리해보는 건 당연한 노릇이겠지요.

이는 라캉을 떠받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 중 라캉을 떠받드는 이들이 있겠지만, 많은 경우 자신이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차용하며, 일부는 사르트르가 하이데거를 향해 그러했듯 도리어 라캉의 개념을 전복하기도 합니다. 지젝은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 개념의 엄밀성을 기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합니다만, 라캉을 인용하는 학자들 중 정작 그런 작업에 관심있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 문학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처럼요. 또한 정작 지젝의 작업 역시 라캉을 어떤 식으로든 왜곡하는 길일 수밖에 없고요.

저는 이 자리에서 미적 유인물을 말함에 라캉을 읽어도 될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정작 제 자신은 라캉에 입각한 여러 평론들이 썩 마음에 드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워낙 정신분석 일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라캉에 대한 반성과 자기 고유의 논리가 없이 단지 끼워맞추는 인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으니까요(실제 영화학회에 실리는 논문들 중에도 라캉 인용해서 황당하게 집필된 논문들 종종 있습니다.). 제 아무리 잘 쳐줘봐야 그렇게 적용이 되는 라캉의 개념이 대단할 뿐, 그 적용한 이의 대단함도, 작품의 대단함도, 라캉의 대단함도 될 수 없는 많은 글들이 있지요. 그리고 보다 많은 작품을 설명함에 있어 라캉보다 타당한 툴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제가 일전에 언급한 영미문학계 웨인 부스의 [내포 저자]개념이 대표적으로 그러할테고요. 허나 라캉의 개념을 굳이 경유할 필요가 없는 만큼, 라캉의 개념을 경유할 때에만 이를 수 있는 어떤 지점 역시 있습니다. 아마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던 여러 평론들 역시 그런 의도에서 쓰여졌을테고요. 이때 그들을 비판하기 위해 굳이 라캉의 학적 엄밀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애초에 그들은 라캉이 딱히 과학적으로 엄밀하고 타당하다고 생각해서 끌어온 게 아니기도 하고요. 그들의 독해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성립되지 않는 지점이 있는지를 보이면 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라캉을 경유해서 특정한 영화를 읽어낸다고 한들, 그 모든 비평이 타당한 게 되지는 않으니까요. 그들 비평의 타당성은 라캉이 담보하지도 않고, 라캉의 개념이 담보하지도 않습니다. 작품과 라캉의 개념을 조응시키는 개별적인 접근에서 비롯하는 것이죠.

서로를 계승하며 부정하는 일련의 작업들, 이를 이르기 위한 가장 좋은 표현을 헤겔의 '지양'일 것입니다. 다만 이때 지양에 함의된 '발전'의 개념을 달리 이해해야겠지요. 무엇이 발전이라고 정답을 특정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정답을 말하기 위한 여러 노력만이 있을 뿐이죠. 그럼에도 굳이 발전을 함의하는 지양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 낱낱한 작업들이 누적되고 쌓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로 하여금 읽고 생각하고 반성하고 부정하고 왜곡하게 만들기 위해서요. 그것이 원 저자의 의도와 달리 쓰일 수 있겠습니다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걸 쓸 경우 어떤 이야기를 얼마나 할 수 있느냐지요.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문학의 개별 영역에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과정입니다.

라캉을 경유한 작품의 독해가 마음에 들지 않을때, 마냥 그들을 배척하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도리어 라캉을 읽고, 그가 어떤 맥락에서 특정 개념을 썼고, 그의 개념을 차용한 이는 어떠한 맥락에서 이를 답습/왜곡하여 작품을 분석했는지를 파악하는 게 모범적인 길이지요. 그런 모범적인 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개별 작품에 대해 다른 평을 내놓으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보다 많은 '부산물'을 낳을 수 있는 논의라면 그러한 입장이 수용될 수 있을 겁니다. 반면 그렇지 않다면, 그저 묻히는 것이고요. 따라서 굳이 라캉을 경유해야만 문학과 영화를 읽을 수 있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저 그렇게 하면 됩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 작품을 읽는 방법은 라캉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제가 읽고 있는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은 라캉을 '모범적으로' 읽습니다. 말이 모범이긴 한데, 꽤 드문 일이지요. 그의 사상에서 서로 이율배반이 되는 부분이 찾고, 그러나 그 안에서 쓸만한 것들을 뽑아내고, 과거에 이와 같은 작업을 했던 다른 학자들을 (같은 방식으로)경유하여 자기 나름대로 쓸만한 부분들을 재구성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재구성 과정을 거치기에 그의 작업은 진정 주관적인 것이되고요. 외적 논리에 의해 누군가를 부정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해당 학자 자신의 논리로 그 자신을 부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며, 그 부정 끝에 이를 재구성한다면 그건 해당 사상을 넘어 자신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사사키 아타루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개인의)혁명'이라고 말하며 자기가 전개하는 인문학의 기치로 삼습니다. 그의 작업 자체가 그의 주장에 대한 사례인 셈이지요.

http://pgr21.com/?b=26&n=56237&c=506031
역시, 저와 방향은 다르지만 '라캉을 거론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 답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첨부합니다. 피지알 질게에서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금요일이네요.   연말이라그런지 기분도 들뜨고 신나게 보낼겁니다. 홍차넷 회원 여려분도 좋은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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