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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2/02 06:37:06
Name   王天君
File #1   crimson_peak.jpg (81.6 KB), Download : 10
Subject   [스포] 크림슨 피크 보고 왔습니다.


눈 덮인 들판, 한 여자가 과거를 돌이켜봅니다. “유령은 존재한다”. 어린 시절, 이디스는 흑사병으로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는 시커먼 뼈다귀 몸을 이끌고 소녀의 방을 방문합니다. 자신의 딸을 쓰다듬으며 어떤 경고를 남긴 후 유령은 사라집니다. 그렇게도 몸서리 치던 그 날의 기억은 시간 속에서 흐릿해졌습니다. 이제는 소설가를 꿈꾸는 그녀에게 소잿거리가 되었을 뿐이죠. 당돌하게 자라난 이 아가씨의 눈에 어느날 한 남자가 들어옵니다. 키가 크고 창백한 이 남자는 이디스의 원고를 읽으며 흥미를 표하죠. 걸친 옷은 남루하고, 비젼 말고는 별 게 없는 이 남자는 이디스의 머릿속을 떠날 줄 모릅니다. 아버지는 못마땅해하지만 이디스는 그를 변호해주고 싶어요. 혼자 방을 지키던 비오는 밤, 이디스가 어렸을 때 본 그 유령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유령은 크림슨 피크를 조심하라는 경고만을 남기고 모습을 감춥니다. 새하얗게 질려있던 이디스에게 곧바로 손님이 찾아옵니다. 아무 초대도 허락도 없이 불쑥 나타난 그는 이디스가 마음에 두던 그 남자, 토마스입니다. 놀란 가슴을 다독이던 이디스는 이 불청객이 어쩐지 반갑기만 합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이름을 보면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 숨어있는 것들,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생물들, 헤매고 도망치는 소녀, 할퀴려는 손톱, 찢어발기려는 엄니, 마침내 배어나와 빨갛게 적시는 핏자욱… <크림슨 피크> 역시 기예르모 델 토로 월드의 다른 변주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름답고, 잔혹합니다.

영화는 고전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잘 모르는 저도 이 영화가 “고딕”스타일을 표방하고 있다는 건 알겠더군요. 당장 주인공인 이디스부터 “난 제인 오스틴보다는 메리 셜리가 될 거에요.” 라고 자기 입으로 공언하니까요. 이야기 자체만 봐도 영락없는 어셔 가의 몰락입니다. 이디스가 토마스의 집에 도착한 순간 이 인용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오래됐고 허름한 집,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움, 이런 집에서 단 둘이 사는 남매(근친상간), 집주인에게 초대된 이야기의 화자, 집안 곳곳에 도사리는 죽음의 기운, 시체와 원령의 부활 등 아예 샤프 가의 몰락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포우의 원작 속 회백색의 음습한 이미지에 보다 색조를 불어넣었다고 할까요. 시뻘겋고, 피도 많이 튀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영화는 자기파멸의 히스테리가 아니라 생을 도모하는 욕망이 충만합니다.

이 작품에 고전을 부활시키려는 야심 따위는 없습니다. 고전은 어디까지나 재료로서, 테마파크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할 뿐입니다. 사실적인 시대상의 재현보다는 눈요깃거리로서 뽐내는 느낌이 더 강해요. 덕분에 다소 도식적인 이야기 진행에도 영화는 호사스러우며 탐미적인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원색의 옷을 입은 인물들, 낙엽과 핏빛 진흙이 수놓는 건물이 영화의 장면을 채웁니다. CG를 총동원한 유령들 역시도 공포보다는 무드 조성을 위한 장신구로서 더 크게 기능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깜짝쇼에 그치는 수준이에요.

이야기가 치밀하지는 않습니다. 미스테리라기에는 대놓고 인물들의 꿍꿍이가 드러납니다. 스릴러라기에는 인물들의 신경전이 치열한 편도 아닙니다. 애초에 현실적으로 이야기를 보면 이 영화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부잣집 따님이 천장은 휑하니 뚫리고 바닥은 진흙이 배어나오는 폐가에서 그렇게 살겠어요. 시누이는 표독스럽게 굴고 집은 을씨년스러워서 정신이 돌 것 같은데. 이 영화의 목적을 보면 인물들 역시도 움직이는 마네킹에 가깝습니다. 여자들을 해치우며 살아가야 하는 남자, 그런 남자를 조종하며 집착하는 누나, 하필 이들에게 잘못 걸린 불우한 여자. 비극적 운명을 짜맞추기 위한 설정으로 이들은 존재합니다. 괴기한 집을 헤매며 관객들에게 집사 노릇을 해야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배우들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매끄럽지 않은 이야기와 고정된 역할 속에서, 이미지와 연기만으로 분위기를 완성시켜야 하니까요.

배우들의 호연은 클라이막스부터 빛을 발합니다. 이 전까지는 집 자체가 인간을 지배하는 공간으로 주인공 노릇을 하고 있었죠. 비밀이 밝혀진 이후부터는 집을 무대로 인간들이 본격적으로 충돌합니다. 욕망, 질투, 양심, 절망이 부딪히며 두 남자는 퇴장합니다. 이 둘은 의사와 발명가로서 과학적 진실을 추구하는 논리적 캐릭터였죠. 이들이 죽으면서 크림슨 피크의 세계는 보다 신비의 영역에 가까워집니다. 자기 손으로 연인이자 유일한 혈육을 죽이면서 루실의 울부은 신화적인 성격을 띄게 되구요. 결국 이야기는 가장 고독한 두 여자의 추격전으로 좁혀집니다. 이 때 루실이 말했던 나방과 나비의 싸움이 고스란히 재현됩니다. 어두운 옷자락을 펄럭이며 이디스를 뒤쫓는 제시카 차스테인의 루실은 압도적입니다.그 어떤 귀신보다도 더 섬뜩한 귀기를 뿜어내요. 흥미롭게도, 이디스는 마냥 사냥감으로 남아있지만은 않습니다. 달아나며서도 무기를 챙기고 역습을 노립니다. 수동적 캐릭터로 머물러있던 인물이 비로서 주인공으로 각성하면서 영화는 묘한 박진감을 갖게 됩니다. 이야기의 족쇄에서 자유로워진 캐릭터들이 작심하고 날뛰는거죠.

영화는 뒤쫓는 자의 불운이나 어리석음으로 끝맺음을 하지 않습니다. 건물이 무너지거나, 오작동한 기계에 몸이 찌부러지는 극적인 결말을 일부러 피해가죠.루실은 토마스의 원혼에 정신을 뺏기고, 그 틈을 노려 이디스는 삽으로 후려칩니다. 끝내 루실은 이디스에게 살해당합니다. 이 죽음은 이디스에게는 복수이자 루실에게는 속죄로 작용합니다. 그 결과 영화는 토마스를 포함한 모든 인물의 한을 다 해소하게 되지요.필연적 비극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능동적 인간들의 현대적 결말로 끝이 납니다. 마지막까지 고전을 흉내내는 건 고리타분하다는 듯이요.

애초에 모든 대중을 노리고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감독 특유의 탐미주의를 그럴싸한 설정과 배우들로 풀어낸 작업에 더 가까울 거에요. 이디스의 나레이션이 완성하는 수미상관 구조는 아마 그런 게 아닐까요. 이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잘 감상하라는, 감독의 대리인 역할 말이죠. 엔딩 크레딧에서 책장이 넘어가는 표현을 보면 더 그렇군요. 하기사 델 토로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고딕 소설을 보여주겠습니까. 음산한 고궁 속에서, 잠옷차림의 소녀가, 마침내 유령을 목도하는 이야기 자체가 그림이죠 뭐. 스크린에 가득한 삽화들을 잘 구경하면 될 일입니다.

@ 대놓고 샤이닝의 오마쥬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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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놓고 샤이닝 오마주 크크크 꼭 봐야지~
  • 좋은 리뷰 보고가요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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