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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5/12/07 23:47:00 |
| Name | 트린 |
| Subject | 또 다른 2025년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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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진이 정보사 사이버 안보팀원이자 기술 정보 검열관으로 일하면서 목격한 것은 단순한 계엄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전체를 하나의 그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2024년 12월 5일, 수진이 속한 정보사 사이버 안보팀은 서울시 스마트서울 안전망 클라우드 서버에 대한 상위 관리자 권한을 넘겨받았다. 형식적으로는 "계엄 기간 중 테러 및 반란 방지를 위한 한시적 주무부서 변경"이었다. 복잡한 업무 분장 고지가 말해 주듯 사실 군은 이미 국토교통부 주도로 112 경찰, 119 소방, 지자체, 법무부와 함께 스마트시티 플랫폼의 동일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탈영병 추적 등 상식적이고 제한적인 사용에 국한되었다. 보통 군사 첩보 또는 정보를 보여주던 정보사 내 브리핑룸의 수많은 모니터들이 서울과 경기도, 수원, 전라남도, 부산 일부, 제주도의 지도를 비추었던 그날 수진은 처음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게 될지 깨달았다. 팀장인 김기환 소령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우리 팀은 힘들겠지만 기존 업무 외에 가외 업무를 맡았습니다. 임무는 간단합니다. 스마트CCTV 시스템을 활용해 요주의 인물의 동선을 추적하고, 실시간 위치를 파악합니다." 화면에 얼굴 사진들이 떴다. 국회의원, 변호사, 기자, 대학교수. 수진이 텔레비전에서 봐서 아는 얼굴도 몇 명 있었다. "이들은 모두 국가전복 혐의로 수배 중입니다. 발견 즉시 기동조에 위치를 전달하세요." 김기환 소령이 노트북을 조작하자 화면이 바뀌었다. 한 남자의 얼굴 위에 초록색 점들이 찍혀 있었다. 눈꼬리, 눈동자, 콧대, 콧방울, 입꼬리, 턱 끝. 최소 80개는 되어 보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안면 랜드마크 시스템은 얼굴에 468개의 특징점을 추출합니다. 눈 사이 거리, 콧대 각도, 입꼬리 위치. 이 점들 사이의 거리와 각도를 조합하면 512차원 벡터값이 나옵니다. 이게 그 사람만의 얼굴 지문이죠." 김기환 소령이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다. 마스크를 쓴 남자 사진이었다. 역시 얼굴에 점들이 찍혀 있었다. 다만 이번엔 눈과 이마 부분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마스크를 써도 눈·눈썹·이마 비율만으로 식별 가능합니다.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40~60퍼센트 선에서 유지됩니다. 해상도가 낮아도, 각도가 틀어져도, 랜드마크 구조만 있으면 인식됩니다. 즉 CCTV에 얼굴이 찍히면 그 사람을 체포할 수 있습니다." 중위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목표물이 얼굴을 완전히 가리면 어떻게 합니까?" 김기환 소령이 미소 지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화면이 또 바뀌었다. 이번엔 전신 사진이었다. 사람 형상 위에 점들이 찍혀 있었다. 머리, 어깨, 팔꿈치, 손목, 고관절, 무릎, 발목. 마치 해부도처럼 관절마다 점이 박혀 있었다. "포즈 추정 기술입니다. 인체를 33개 관절점으로 분해해서 추적합니다. 여기에 걸음걸이 인식을 결합하면 얼굴 없이도 식별이 가능합니다." 김기환 소령이 영상을 재생했다. 한 남자가 길을 걷고 있었다. 얼굴은 모자와 마스크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 위로 점들이 따라다니며 움직임을 추적했다. "AI는 보폭, 무게 중심 이동, 팔의 흔들림, 어깨 기울기, 발목-무릎-고관절의 각도 패턴을 분석합니다. 이 조합이 개인마다 다릅니다. 걸음걸이는 지문만큼 고유하거든요." 화면 하단에 숫자들이 떴다. - 보행 시그니처 매칭률: 87퍼센트 "해상도가 낮아도, 멀리서 찍어도, 뒤돌아 있어도 작동합니다. 옷을 바꿔 입어도 소용없습니다. 몸의 구조와 움직임은 바꿀 수 없으니까요." 수진은 숨이 막혔다. 그녀가 알기로는 과거 대한민국의 CCTV와 관제 시스템은 개인정보보호법과 공공기관 CCTV 설치·운영 가이드라인에 의해 통제되었다. 일단 관제센터 모니터에는 기본적으로 행인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처리(마스킹)되어 보이도록 설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정 범죄 수사 목적이 아니면 이 마스킹을 해제할 권한이 없었다. 또한 경찰관이 영상을 달라 해도 영장이 없으면 공무원은 거절해야 했다. 영상을 가져갈 때도 타인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해서 줘야 했다. 물론 이상적인 원칙이어서 현실에서는 경찰관 중 일부가 영장도 없이 열람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언론이나 국회가 견제했고, 오용 관계자와 기관도 이게 옳지 않은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현재 서울시 CCTV 중 지능형은 약 4만 3천 대입니다. 2026년까지 전면 지능화 예정이었으나, 우리가 개입해 속도를 가속화할 겁니다. 이미 추가로 2만 2천 대가 지능형으로 전환됐고, 연말이면 전환율 57퍼센트를 넘을 겁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운동하고, 맡은 업무가 체질에 맞고, 자신있는 사람 특유의 밝고 평온한 분위기를 가진 김기환 소령은 자신의 팀원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AI 상황판단 정확도는 71퍼센트입니다. 월 오탐지 건수는 53만 건 정도로, 예전보다 많이 줄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여러분이 있는 겁니다. AI가 후보를 추리면, 여러분이 최종 판단을 내리세요." 합법적인 영장 없이, 초법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순간 CCTV 안의 모든 한국인은 벌거벗겨진 상태였다. 사생활이니 뭐니는 이미 사치스러운 소리였다. 이는 주요 대도시에 2억 대의 AI CCTV를 갖춰놓고 톈왕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얼굴과 보행 데이터를 써먹으며, 반체제 행위를 무제한으로 감시하는 중국과 똑같은 꼴이었다. 김기환 소령이 브리핑을 마무리했다. "얼굴 랜드마크 매칭률 85퍼센트 이상, 또는 보행 인식 매칭률 80퍼센트 이상이면 기동조에 넘기면 됩니다. 둘 다 조건을 만족하면 즉시 체포 지시를 내리세요." 수진의 업무는 정확히 절반으로 나뉘었다. 짝수날은 기존의 기술 정보 검열관으로서 정보사에 들어오거나 나가는 모든 물건의 공급망 보안, 즉 디지털 보안성을 검증하였다. 최근 정보전 트렌드는 기계나 물건에 제작 순간부터 스파이 칩을 심거나 프린터, CCTV에 백도어를 심어서 납품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보사 납품 물품들은 사이버 보안 전문가인 수진이 검증된 납품 업체를 선정하고, 물건 샘플을 받고, 받은 물품을 뜯어 철저히 검증하고, 이를 통과시키는 절차를 밟았다. 홀수날 아침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보람차던 어제와 달리, 죄의식으로 지치고, 힘든 하루가 시작되었다. 수진은 워룸으로 내려가 스마트CCTV 통합 관제 시스템에 접속했다. 화면에는 전국 주요 장소의 CCTV 영상이 실시간으로 떴다. 그러다 AI가 "의심 인물"로 분류한 영상이 각 요원에게 배당되어 빨간 테두리로 표시되었다. 수진을 포함한 요원들은 매칭이 높은 데이터를 보고, 최종 점검으로 정보사에 모인 실제 사진과 대조하며 확인을 눌렀다. 수진은 확인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에 떨리는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그래 보였다. 수진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만큼 다른 동료들도 가면을 잘 쓴 것일 수 있었다. 하여간 이곳에서는 이제 아무도 속마음을 터놓지 않았다. 수진이 떨리는 손으로 "확인" 버튼을 누른 사람들은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 체포 소식도, 재판 소식도 없었다. 항상 실종자란 이름으로 그저 조용히 사라졌다. 수진은 참다 참다 못 이기고 팀 동료에게 물었다. "우리가 위치 넘긴 사람들, 어떻게 되는 거예요?" 누가 봐도 군인 같지는 않은, 딱 봐도 몸 관리 안 하는 프로그래머처럼 보이는 안경 낀 중위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요. 우리 일은 찾는 것까지죠. 그 다음은 위에서 알아서 하겠죠, 뭐." 하지만 수진은 알고 싶었다. 어느 날 밤, 수진은 야근을 핑계로 사무실에 남았다. 동료들이 모두 퇴근한 후 수진은 자신이 접근할 수 없는 모니터 속 폴더를 바라보았다. 폴더 이름은 B-1 수용 현황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B-1은 수방사 벙커로서 전쟁시 수방사 지휘부가 방어전을 수행하는 곳이라고 했다. 수도권, 넓은 공간, 보안 유지가 편한 군 사령부 내 지하, 이미 숙직 시설과 의료 시설과 예비 보급 물자가 모인 구조 등 다수의 사람들을 납치해 가둘 만한 온갖 합리적인 이유가 겹치는 곳이었다. '여기밖에 없어. 이곳의 정보를 수집해야 해.' 하지만 이 폴더에 직접적으로 접근한다면 수진은 바로 국군 교도소행이었다. 기술 정보 검열관이 벙커 기록을 직접적으로 들어가 기웃거릴 필요는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해킹이니 무슨 백도어니를 만들어 침입할 만한 실력은 없고, 머리 위에는 24시간 녹화되는 CCTV, 컴퓨터는 당연히 접속부터 접속 종료까지 모든 게 로그가 남는 내부 프로그램, 승인되지 않은 USB나 웹하드 접속도 불가한 상태. 그야말로 난제요 첩첩산중이었다. 수진의 방법은 의외로 정공법, 보안 점검이었다. 기술 정보 검열관으로서 수진은 정보사에 납품되는 모든 물품의 보안성을 검증할 권한이 있었다. 그리고 그 물품들의 최종 도착지 목록도 볼 수 있었다. 정보사 본부, 각 지역 파견대, 그리고 B-1 벙커. 수진은 본인 책상에 살짝 쌓인, 매주 받는 납품 승인 서류철을 펼쳤다. 엑셀 파일로 있지만 팀장 서명을 받기 위해 만들어놓은 서류철이었다. 보통은 보안만 통과되면 물건에는 관심이 없어 대충 훑어보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는 한 장 한 장 넘기며 "배송지: B-1"이라고 적힌 항목만 골라냈다. 처음엔 평범했다. 보안 서버 3대, 네트워크 라우터 12대, 암호화 통신 장비 5세트. 다 자신이 검증한 장비였다. 철제 캐비닛 20개, 철문 보강재 8개. 이것도 기억났다. 벙커 쪽에서 신청하길래 부사관에게 업무 지시해서 현장에서 용접할 때 입회 아래 도청 장치가 삽입되지는 않았는지 보도록 만들어 납품받은 것이었다. 보안 등급을 특급으로 올려달라길래 무결성을 보장하려는 조치였다. 하지만 다음 페이지부터 벙커가 요청한 이상한 품목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예비 물품이라고 생각하고 메이커만 보고 그대로 넘긴 물건들이었다. 의료용 산소통 30개, 1회용 주사기 500개, 링거 거치대 15개, 소독약(과산화수소) 20L, 의료용 테이프 50롤. 메트포르민(당뇨병 치료제) 500정, 리피토(고지혈증 치료제) 300정, 노바스크(고혈압 치료제) 400정, 신티로이드(갑상선 기능 저하증 치료제) 200정. '이거야.' 수진은 머리가 어지러운 동시에 짜릿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들은 모두 처방전이 필요한 약들이었다. 만성질환자들이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들. 젊고 건강한 군인들에게 당뇨약이나 고지혈증 약이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할까? 수진은 계속 서류를 넘겼다. 그리고 한 페이지에서 완전히 멈췄다. 납품 업체: 대한철강공업 품목: 밀폐 가능형 강철 캐니스터 규격: 길이 200cm, 직경 60cm, 두께 8mm 중량: 250kg 수량: 30개 용도: 영현 예비 물품 수진은 그 줄을 다시 읽었다. 250킬로그램짜리 강철 캐니스터. 길이 200센티미터.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수진의 손이 떨리자 서류가 바스락거렸다. '이게... 설마...' 승인 당시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던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벙커에 사람이 갇혀서 고문당하고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다른 뜻이 생겼다. 수진은 다른 페이지를 넘겼다. 첫 주문 뒤 한 달 간격으로 15개, 10개, 30개 신청하여 총 55개가 만들어졌다. 수진은 컴퓨터를 켜 정보사 내부 의료정보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로그가 남는 행위였지만 이건 B-1 벙커 건과 달리 특급 비밀도 아니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계엄 이후 정보사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서버에 대한 접근 권한을 받았다. 명분은 "수배자 추적을 위한 병원 방문 기록 확인"이었다. 수진은 체포당한 수배자 명단을 불러왔다. 이름, 나이, 직업, 그리고 의료 정보들이 줄줄이 나왔다. 변호사 박모(57세) - 당뇨병, 고혈압 기자 이모(63세) - 갑상선 기능 저하증, 고지혈증 국회의원 정모(61세) - 협심증, 당뇨병 대학교수 최모(59세) - 고혈압, 전립선 비대증 수진은 이들의 데이터를 가지고 엑셀 파일을 하나 새로 만들었다. "supply_audit_2025.xlsx"라는 이름의 평범한 감사 파일처럼 보이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첫 번째 시트 이름을 "의약품_추이"로 정하고는 이번엔 내부 납품 기록 시스템에 접속해 B-1 벙커로 간 의약품 데이터 3개월치를 불러왔다. 모든 약은 천천히 감소하는 추세였다. 벙커 안에서 소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니면 신청해서 주문해서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아니면 벙커 안의 젊은 군인들이 심심풀이 땅콩처럼 먹거나.' 그녀는 자신이 만든 농담에 짧게 웃었다. 막 재밌지는 않았다. 수진은 두 번째 시트를 "캐니스터_납품"이란 제목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세 번째 시트는 "수배자_상태"란 이름이었다. 그녀는 확인 과정을 거쳐 체포되어 실종된 수배자 명단을 날짜별로 정리했다. 이들은 지금까지 총 46명이었다. 수진은 두 시트를 비교해 실종된 수배자는 벙커에서 필요한 약품을 받다가 결국 약품이 필요해지지 않는 순간이 온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수진은 혀를 찼다. '부족해.' 보안 위반으로 체포당할 각오를 하고 만든 데이터였지만 이건 순전히 정황 증거로, 아무래도 강력하지는 않았다. 캐니스터도 그랬다. 분명히 시체를 담는 통 같은데 어떻게 쓰는지 왜 저렇게 무겁게 만들었는지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벙커 근처 땅에 파묻나? 근데 250이야. 저걸 묻으려면 중장비가 필요하잖아. 공병대에서 증인도 나오고 골치 아파져. 그럼 입이 무거운 소수의 인원이 필요하겠지. 공병대 장교들을 구워삶나? 무게는... 뭐 동물이 먹지 말라고 무겁게 만든 걸까? 암매장하면 그런댔어. 지반 변화나 산사태, 홍수로 시체가 튀어나와서 들킨다고. 그걸 막으려고 관을 무거운 걸 쓰나?' 온갖 상념이 물음표가 붙어 튀어나왔지만 아직도 정보는 부족했다. 피, 고문, 선명한 벙커 내부의 그림 같은 게 절실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본인의 한계를 인정해야 했다. 겁쟁이 치고는, 국민을 지키겠다는 맹서를 저버린 군인 치고는 그나마 잘한 행동이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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