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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8/21 09:40:00
Name   루루얍
Subject   염화미소와 알잘딱깔센의 시대
선종에는 "세존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자 대중이 모두 묵묵히 응답이 없었으나 오직 가섭만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세존께서 ‘나에게 정법을 꿰뚫어 보는 눈과 열반의 원만한 마음과 모든 상에서 벗어난 진실한 상 그리고 미묘한 법문이 있다. 그것을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교설 밖에 별도로 전하여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라고 하셨다." 라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이것이 유명한 염화미소 이야기인데, 뭐 불립문자니 교외별전이니 하는 얘기도 다 여기서 나온 것이죠.

결론적으로 소통을 안 하고도 소통한 것과 같이 할 수 있는 뭐 그런 게 중요하다는 거지요. 이 이야기에서의 마하가섭은 "알잘딱깔센"을 기깔나게 한 것인데요, 이 소통을 넘은 소통, 이런 얘기가 오히려 기술의 시대인 지금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누가 봐도 소통,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만 이 넘쳐나는 커뮤니케이션 안에 사는 사람들은 극도로 소통행위를 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잠깐 유행한 단어지만 이 "알잘딱깔센"은 사실 직접적인 소통은 제발 좀 집어치웠으면 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한 군데에 몰아넣은 단어기도 하지요. 오래 전이지만 SK 브로드밴드의 캐치프레이즈 중에 "See the unseen"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시대를 너무 앞서간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어제 탐라에 옴닉님이 사람들이 구매행위에서 소통을 매우 싫어한다는 글을 쓰셨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꼭 구매행위 뿐만은 아니죠. 요즘 세상의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극도로 소통행위를 멀리하는 데서 온 것들이 많습니다.  요즘엔 소통을 시키는게 아니라 소통을 효율적으로 단절시키는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 같습니다.  보통 "플랫폼"이라고 하는 것들이 다 그런 것을 지원하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플랫폼의 시대가 되었음에도 새로운 플랫폼은 계속 나오고 있고, 사람들은 점점 더 소통을 멀리합니다. 어떤 인간적인 소통 없이 딱딱 넘어가는 것을 상식으로 만들고, 이 선을 넘으면 "진상"으로 정의합니다. 아무 말 없이 서비스를 즐기고 나오는 것과 아무 말 없어도 적정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요. 미용실에 가서 원하는 스타일을 말하지 못해서 머리를 망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습니다. 화장품 가게에는 말걸어주세요와 말걸지마세요 바구니가 각각 있구요. 어떤 다툼이 생겼을 때 서로 좀 협상해서 결론을 내는 것을 선호하지 않고 그냥 사법부로 가져가길 원하죠.

이것은 내적 모순입니다. 인간은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타인에 대한 영향욕구가 상당히 센 편이고 소통을 불식시키려 노력하는 사람들 조차도 자신의 영향력은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과해지면 진짜 진상이나 범죄 행위에까지 몰두하지요. 이런 것에도 소통의 단절만 있을 뿐 소통은 없습니다. 최근의 폭발물 설치 협박으로 잡혀가는 사람들을 보면, 이전과 같은 어떤 요구사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폭발물을 설치했고 너희는 움직여라, 이것이 다지요. 요즘 문제가 되는 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꼬투리가 잡혔으니 날 상전으로 대해라"는 것을 바라지 어떠한 요구사항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내 최소한의 힘으로 너의 최대한의 행동을 기대하는 것이죠.

과연 우리의 소통단절을 위한 노력은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현재 발생하는 이 진상이나 협박 같은 것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넘쳐나는 소통과 소통단절의 모순 아래서, 우리는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행위 자체를 피하면서도 그 결과물은 갈망하게 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나에게 오는 것"은 싫지만 "너에게 가는 것"은 원하는 것입니다. 나는 석가여래가 되고 싶은 것이지 마하가섭이 되고 싶진 않은 것이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생각보다 인류는 자기만족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보긴 어렵다는 것 하나는 알 것 같긴 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갈망합니다. 정확하게는 내가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죠. 어떤 경우에는 "선한"것으로, 어떤 경우에는 "악한" 것으로 말입니다. 이 염화미소의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기대보다 당연히 석가여래와 마하가섭에는 미치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던 것이고,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소통단절의 파도가 한번 몰아치고 나면, 이 다음에는 또 강렬한 소통의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염화미소 지어줬으면 대충 만족하라고 하기엔 우리는 눈으로 타인이 나로 인해 바뀌는 것을 보고싶어 합니다. 소통단절이 지배하는 세상이 오게 되면, 여기에 대해 또 반동이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 말이 맞다면, 결국 맞이하게 될 "소통"은 어떤 모양새를 지니게 될 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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