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5/07/02 12:47:34수정됨 |
Name | 심해냉장고 |
File #1 | GpCskchaoAAjOap.jpg (264.5 KB), Download : 3 |
Subject | 지구는 호텔이군요 : 아포칼립스 호텔 |
애니메이션 '아포칼립스 호텔'에 대한 스포가 충분합니다만, 전개의 반전으로 보는 애니메이션은 아니니 감상을 하실 계획이 있더라도 감상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근미래, 그러니까 로봇이 일을 하고 인류가 우주 탐사를 시작하는 그런 시대. 지구에, 아니 인류에 치명적인 전염병이 닥쳐오고 인류는 속수무책 멸망을 향해 달려갑니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류는 오염된 지구를 탈출해 우주로 떠나갑니다. 아쉽게도 로봇들은 지구에 남겨집니다. 호텔 '은하루'의 호텔리어 로봇들은 인류가 멸망한 미래에서 언젠가 돌아올 인류를 기다리며 호텔 영업을 지속합니다. 그렇게 한달이 두달이 일년이 십년이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인류도 손님도 아무도 오지 않지만, 호텔 은하루는 영업을 계속합니다. 애니메이션 '아포칼립스 호텔'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에 열광하는 저 같은 사람이라면 안 볼 수가 없는 매력적인 도입부입니다. 보는 수밖에 없겠지요(소소한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나 카페 알파(원제 : 요코하마 장보기 기행)나 최종병기그녀 같은 '차분한 멸망물'을 최고로 치는 제 입장에서는 도저히 피해갈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1화를 봅니다. 주인공은 호텔 은하루의 매니저(의 대행의 대행의 대행), 호텔리어 로봇 야치요 입니다. ヤチヨ. 팔천대 八千代, 그러니까 '영원'의 관념적인 표현입니다. 이미 마음에 합격한 작품이지만, 여기부터 이제 수석 합격입니다. 그래요, 인류가 멸망을 목전에 두고 지구에 남겨두게 될 로봇의 이름에는 '영원'같은 희망적인 표현이 어울릴 겁니다. '천천히 죽어가는 지구의 최후를 조용히 관조하는' 아포칼립스 만화인 '카페 알파'의 주인공 안드로이드 이름은 하츠세노 알파 初瀬野アルファ 였습니다. 시작점의 알파. 그래요. 역시 인류 멸망을 목전에 둔, 최후 시대의 인류라면 시작 내지는 영원 같은 개념에 집착하게 될 겁니다. '터미네이터' 같은 이름을 붙이는 건 너무 짖궂은 일이 될 테니까. 그렇게 회차가 진행됩니다. 수성의 마녀 이후로 매 회를 기다린 첫 작품입니다. 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애초에 애니메이션을 잘 안 보는 편이기에 소소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2화에서 대망의 첫 손님이 등장합니다. 십년 만인지 백년 만인지만에.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외계인입니다. 그는 즐겁게(?) 머물다 가고, 그리고 이제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첫 손님이 우주 호텔 리뷰에 좋은 리뷰를 써 준 덕분입니다. 그렇게 지구에 찾아오는 외계인들이 늘어나고, 호텔은 활기를 띄고, 로봇은 천천히, 천천히 고장납니다. 로봇의 수리 비품 재고도, 샴푸 모자 같은 호텔 비품 재고도 하나하나 사라져가고. 그렇게 지구에서의 죽음과 삶이 연속됩니다. 잔잔한 사건들이 계속됩니다. 외계인 출신의 지구 정착민도 생기고, 외계인 직원도 생깁니다. 외계인 직원들과 함께, 새로운 지구 문명이 만들어집니다. 온천을 새로 만들기도 하고, 위스키 증류소를 지어 호텔 자체 브랜드 위스키를 만들기도 합니다. 우주 시대의 로망, 대우주 궤도 대공포를 설치하기도 합니다. 지구 문명을 침공하려는 외계인도 등장하고, 정착해서 여생을 살다가 지구에 묻힌 외계인도 등장합니다. 우주 범죄자와 우주 탐정의 추격전도 펼쳐집니다. 누군가는 지구에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해 새로운 '지구 탄생인'이 태어나기도 합니다(속지주의적으로는 지구인이겠지요, 속인주의적으로는 복잡한 문제겠지만). 아, 아쉽게도 외계 관광객의 말을 들어보니, 지구를 탈출한 인류는 애저녁에 우주에서도 멸종해버린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제법 괴팍한 유머 센스와 급발진 시리어스 전개로 진행됩니다. 우리들의 문명이 그러해왔듯이. 누군가가 '매 화 매 화 알 수 없이 웃게 되고 알 수 없이 울게 된다'는 리뷰를 남겼는데, 실로 그러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그렇게 좌충우돌 천 년쯤 지나고 대망의 마지막 화, 마침내 지구인이 지구에 방문합니다. 지구인의 문명은 어떻게 겨우 우주를 떠돌며 이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조사원으로 파견된 지구인은 '역사 속 이야기로만 듣던' 지구의 생태를 체험하고, 지구의 상황을 조사합니다. 짜잔, 지구는 회복되었습니다. 기쁨에 겨워 헬멧을 벗고 지구의 대기를 들이키던 지구인 조사원은, 이내 안색이 변해 쓰러집니다. 지구는 예전 수준으로 회복되었습니다만, 인류도 우주에 적응해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버린 탓입니다. 그렇게 더이상 지구는 지구인의 별이 아니게 된 겁니다. 지구인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이 별에서 살 수 없겠지요.' 이제는 지구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영원의 야치요는 말합니다. '살아가는 건 안 되겠지만, 숙박은 가능합니다.' 지구인은 답합니다. '지구는, 호텔이군요.' 그리고 지구인은 떠나갑니다. 다음에 또 머물러 올게요. 라고 하며. 지구인을 배웅하던 야치요는 뛰어가며 외칩니다. 그렇게 또 떠나가는 거냐고. 언제 올 거라고 이야기라도 하고 가라고. 또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냐고. 그렇게 작품은 막을 내립니다. - 우주사적인 차원에서, 지구는 호텔일 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지구가 멸망하거나, 인류 문명이 멸망하거나 하겠지요. 영원 같은 건 없을테고, 우리는 지구라는 호텔에 잠시 머물다 가는 숙박객일 겁니다. 이 테마를 '매일이 이어지는 시끌벅적한 호텔의 일상 이야기'에 녹여낸 건 역시 우주적으로 훌륭했다는 생각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겠지요. 소풍이 되었건 체류가 되었건 여행이 되었건 숙박이 되었건, 우리는 잠시 이곳에 떠들썩하게 머물다 가는 사람들입니다. 허무하자면 허무하고 아름답자면 아름답고 평이하다면 평이한 그런 이야기.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는 그런 이야기의 힘이 있지요. 애니메이션을 원체 안보는 편이라(만화는 그래도 누구에게 지지 않고 봐왔다고 생각합니다), 인생 애니메이션의 첫자리에 두어도 좋지 않나 싶은 명작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딱히 인생 애니랄 만한 건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아포칼립스물'을 기준으로 해도 카페 알파와 함께 첫자리에 둘 수 있는 작품이지 싶습니다. 지구인이 멸망한 이후의 지구 이야기가 주는 산뜻함에 높은 점수를. 그리고 그 이야기가 '호텔'과 '새로운 지구 문명 건설'이라는 핵심 테마와 잘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무척 높은 점수를. 아쉽게도 아직 한국내 정발이 되지 않았지만, 평가가 상당히 좋은 좋은 상반기 애니메이션이었기에 정식 릴리즈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아, OST도 명작입니다. 모 유명 음악평론가가 OST의 화성학에 대하여 엄청나게 복잡한 글을 써서 잠시 화제가 되었는데 제가 화성학을 모르니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노래가 좋습니다. OST 오프닝 씬은 나름 애니메이션 역사상 역대급이라는 찬사를 받는 모양입니다. - 어쩌면 이 작품은 기다란, 그리고 엇나간 사랑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구와 지구인은 어떤 사고와 비틀림(정체불명의 바이러스)으로 헤어지게 됩니다. 뭐 그렇다고 쓸쓸히 외롭게 죽을 수는 없으니 살아가며 각자의 삶을 꾸립니다. 지구는 외계 우주인들을 받아들이고, 지구인들은 우주를 표류하고 하면서 새로운 인연들도 만나고. 그렇게 서로를 그리워하며, 언제가 될 지 모르는 재회의 날을 기다리다가, 짜잔, 영겁의 시간을 넘어 재회의 날이 왔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헤어지게 했떤 문제는 이제 해결되었으니, 이제는 서로 다시 만날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하, 근데 안 되네요. 그래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헤어짐이 그렇듯, 인연을 다시 잇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 또한 지구의 잘못도, 지구인의 잘못도 아닐 겁니다. 그냥 그렇게 된 것 뿐입니다. 애니메이션의 대사 '이제 우리는 이 별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는 OP의 가사 '당신은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이 아니랍니다'와 조응합니다. 뭐 그것이 우습고 슬픈 인생의, 우주의, 사랑의 이야기겠지요. https://youtu.be/oHs-XfeUjIU?si=zJS3Q8ihnebRdeU9 TVアニメ「アポカリプスホテル」ノンクレジットオープニング| aiko「skirt」 8
이 게시판에 등록된 심해냉장고님의 최근 게시물
|
저는 에반게리온을 보지도 않았으며 오케스트라도 가지도 않았지만 적지 않은 제작비용을 낸 일이 있습니다(모바일게임 유저의 과금 정도를 과금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