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3/06/29 16:16:14
Name   nothing
Subject   비둘기야 미안하다
저희 집은 바로 오늘까지 비둘기 가족과 동거아닌 동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에어컨 실외기 자리에 비둘기들이 드나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둥지를 트고 알을 까고 있었습니다. 냄새가 안으로 들어오는 자리도 아니고 드나들며 자주 눈에 보이는 자리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어제 아내로부터 집에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에러 코드를 보니 실외기 쪽이었는데 아마도 비둘기가 뭔가 배선이나 호스를 건드려서 생기는 문제로 보였습니다. 그 말들 들은 저는 짧았던 비둘기들와의 동거를 끝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에어컨 없이 이 불볕 더위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쿠팡으로 실외기 공간의 청소를 위한 30m 짜리 수도 호스를 샀습니다.

오늘 아침,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낸 후 본격적으로 실외기 공간 청소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실외기 공간을 막고 있던 창문을 여니 상당한 악취가 밀려옵니다. 언뜻 둘러보니 비둘기의 분변이 꽤나 쌓여있습니다. 과연 수압 만으로 이걸 다 청소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오랜만에 서랍 속 마스크를 꺼내 써보지만 악취는 여전히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지경이었습니다.

어미 비둘기는 제가 창문을 여는 동시에 날개를 퍼덕이며 멀리 날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기 비둘기들은 구석에 움크린 채로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한 발 더 다가가자 아기 비둘기 들도 날개를 퍼덕이지만 외부가 아닌 구석 방향으로 더욱 파고들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고무 장갑을 낀채로 아기 비둘기를 잡아들었습니다. 구석에서 벗어나 실외기 위 쪽에 올려두었더니 금새 어미처럼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으로 날아갑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청소를 시작합니다. 바닥에 퇴적된 분변들을 쓰레기 봉투에 모아들고는 수압을 한껏 높여서 물을 한참이나 뿌렸습니다. 한 한시간 여를 씨름하다보니 어느덧 청소의 끝이 보입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 테스트 삼아 에어컨을 작동시켜 봅니다. 잘 됩니다. 기십만원을 들여 에어컨 기사를 부르지 않아도 되니 한숨 돌렸습니다.

실외기가 잘 돌아가고 있나 싶어서 실외기 공간으로 갔는데 난간에 어느새 어미 비둘기가 보입니다.

어미 비둘기는 자신의 둥지가 있던 곳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제 실수를 깨닫았습니다.

어미 비둘기 입장에서는 자신의 둥지에 낯선 인간이 처들어오니 잠깐 도망갔다가 돌아왔는데 그 사이에 집과 아기들을 모두 잃어버린 셈이었습니다.

죄책감이 밀려듭니다. 아무리 우리 집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동물이라지만 부모씩이나 되서 비둘기 가족을 갈라놓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입니다.

혹시나 어미와 아기 비둘기들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까 싶어 일을 하면서도 자꾸 실외기 공간을 한 번씩 확인하게 됩니다. 비어버린 둥지를 바라보던 어미 비둘기의 눈빛이 자꾸 생각이 나 마음이 괴롭습니다.



7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016 게임스테퍼 케이스 - 한국 인디게임의 저력 당근매니아 23/07/03 1886 5
    14015 영화상반기 극장관람 영화 한줄 감상평 3 소다맛체리 23/07/03 2201 2
    14014 일상/생각귀 파주는 와이프 16 큐리스 23/07/03 2726 12
    14012 일상/생각매직 아이를 기억하시나요? 8 큐리스 23/07/02 2650 5
    14011 일상/생각3대째 쓰는 만년필 ^^ 7 삶의지혜 23/07/01 2227 1
    14010 오프모임다음주 토요일 회 드시러 가시죵[마감] 29 소맥왕승키 23/07/01 2268 11
    14009 일상/생각비둘기야 미안하다 13 nothing 23/06/29 2420 7
    14008 정치전제주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진단해본 윤석열 (+문재인-이재명과 비교) 4 카르스 23/06/28 2430 10
    14007 일상/생각이웃집 정상병자 후속 상황 보고 12 당근매니아 23/06/27 3005 0
    14006 과학/기술유고시 대처능력은 어떻게 평가가 될까? - 위험 대응성 지표들 18 서포트벡터 23/06/26 2779 31
    14005 일상/생각명품가방과 와인에 대한 민낯 9 풀잎 23/06/26 2840 9
    14004 정치정부의 노동조합 회계 공개요구와 ILO 기본협약 제87호 간 충돌 4 당근매니아 23/06/26 1853 9
    14003 일상/생각어제의 설악산-한계령, 대청봉, 공룡능선. 2 산타는옴닉 23/06/25 2563 11
    14002 일상/생각한 시기를 보내며 든 생각들 2 골든햄스 23/06/25 1983 30
    14001 일상/생각저는 사이시옷 '법칙'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14 별길 23/06/25 2353 10
    14000 일상/생각 팝니다: 아기 신발. 사용한 적 없음. 6 큐리스 23/06/24 2287 5
    13999 방송/연예켠왕, 그리고 허강조류TV 1 당근매니아 23/06/24 1900 1
    13998 일상/생각똑같이 대하면 기분 나빠 하는 사람들의 심리? 8 ISTJ 23/06/23 2419 0
    13997 일상/생각출근전 와이프와의 소소한 대화가 너무 좋습니다. 13 큐리스 23/06/23 2464 11
    13996 영화스파이더맨 평론 모음입니다 4 다함께세차차 23/06/22 1897 0
    13995 방송/연예디즈니플러스에서 신작 드라마 나오네요 4 다함께세차차 23/06/21 2269 1
    13994 일상/생각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 최종 입니다 17 이웃집또털어 23/06/20 3646 30
    13993 꿀팁/강좌제초제 열전 (산소편) 5 바이엘 23/06/20 2699 8
    13992 오프모임6.21(수) 부산역 나단쿤의 생일 파티에 초대합니다 41 무더니 23/06/19 2517 9
    13991 오프모임6월22일 학동역 세종한우 7시 17 소맥왕승키 23/06/19 2257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